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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화. 빈칸

상자는 여전히 열려 있었다. 도현이 손가락으로 빈칸 하나를 가리켰다. “오늘은 여기에 들어갈 말을 당신이 정합니다.” “제가요?” “네.” “뭘 쓰는데요?” 도현이 종이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문장 하나만 적혀 있었다. «오늘 내가 원하는 것은 ______.» 나는 그 빈칸을 한참 바라봤다. “이게 플레이예요?” “오늘은.” “좀 싱거운데.” 도현이 낮게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직접 채워보세요.” “말로 해도 돼요?” “오히려 말로 해야 합니다.” 나는 종이를 내려놓았다. 도현은 가까이 오지 않았다. 손도 대지 않았다. 그게 더 신경 쓰였다. “말 안 하면요?”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진짜?” “네.” “키스도?” “당신이 원한다고 말하기 전에는.” 나는 그를 노려봤다. “일부러 그러는 거죠?” “맞습니다.” “왜?” 도현의 눈빛이 천천히 깊어졌다. “당신이 원하는 걸 내가 먼저 알아내는 방식은 너무 오래 했으니까.” 그가 한 걸음 가까워졌다. “오늘은 당신이 먼저 인정했으면 합니다.” “뭘요?” “원하는 걸.” 나는 잠깐 입술을 깨물었다. 도현은 기다렸다. 재촉하지 않았다. 결국 내가 먼저 말했다. “키스.” “문장이 아닙니다.” “진짜 까다롭네.” “빈칸을 채우세요.” 나는 숨을 내쉬었다. “오늘 내가 원하는 것은.”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 “도현 씨가 저한테 키스하는 것.” 도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런데도 움직이지 않았다. “왜 안 해요?” “끝이 아닙니다.” “뭐가 또 있어요?” 그가 두 번째 종이를 보여줬다. «오늘 내가 허락하고 싶은 것은 ______.» 심장이 조금 빨라졌다. “이것도요?” “네.” 나는 이번에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허리 잡는 거.” “어느 정도?” “조금 세게.” “또?” “목에 키스하는 거.” 도현이 조용히 물었다. “흔적은?” “가려지는 곳이면 괜찮아요.” “또?” 나는 잠깐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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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화. 직함을 벗는 시간

다음 날 오후.유럽 총괄 주간회의가 끝난 뒤에도 화면 하나만 꺼지지 않았다.서울.차도현.회사에서는 세림홀딩스 대표.집에서는 남편.그리고 어떤 밤에는 내가 주도권을 맡기는 사람.“한 총괄.”“네, 대표님.”“파리 쪽 수정안 확인했습니다.”“문제 있나요?”“없습니다.”“그럼 오늘은 일찍 끝나겠네요.”도현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집에 몇 시쯤 옵니까?”“일곱 시 전에는요.”“좋습니다.”나는 괜히 웃었다.“왜요?”“그냥.”“대표님이 그냥이라고 말하는 날도 있네요.”“사람은 변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300화에서 내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는 바람에 웃음이 났다.“맞네요.”회의 화면을 끄려는데 도현이 불렀다.“한서윤.”직함이 사라졌다.그 짧은 변화만으로 공기가 조금 달라졌다.“왜요?”“집에 오면.”그가 잠깐 말을 멈췄다.“회사에서 쓰던 호칭은 전부 금지입니다.”나는 눈썹을 올렸다.“대표님도?”“특히 그거.”“왜요?”“오늘은 회사에서 이어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그 말이 조금 의외였다.도현은 늘 회사와 사생활의 경계를 명확히 했지만, 결국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지우지는 못했다.그런데 오늘은 달랐다.“그럼 뭐라고 불러요?”“집에 와서 정하세요.”“또 제가 정해요?”“이번에는 시작만.”그의 입가에 아주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그다음은 내가 할 테니까.”화면이 꺼졌다.나는 한동안 검어진 모니터를 바라봤다.301화의 빈칸과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어제는 내가 원하는 걸 문장으로 채웠다.오늘은 반대로—회사에서 쓰던 것을 하나씩 벗겨내는 날 같았다.---집에 도착했을 때 도현은 이미 와 있었다.현관에 익숙한 구두가 놓여 있었다.거실 조명은 평소보다 조금 어두웠지만, 일부러 꾸민 흔적은 없었다.상자도 없고.카드도 없고.종이도 없었다.도현은 주방에서 물을 마시고 있었다.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고, 넥타이는 이미 풀어둔 상태였다.“왔어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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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 {번외편. 먼저 다가오지 마}

빈칸은 그대로 두기로 했다.상자 안에도.회사 일정에도.우리 사이에도.301화에서 그렇게 말하고 잠든 다음 날.퇴근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도현은 평소와 다름없었다.셔츠 소매를 걷고 식탁 위에 놓인 서류를 보고 있었다.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물었다.“오늘 늦어요?”“아닙니다.”“일 끝났어요?”“거의.”“그럼 오늘은.”도현의 시선이 내게 왔다.나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먼저 다가오지 마요.”그의 손이 멈췄다.“무슨 뜻입니까?”“그대로.”“제가 당신에게?”“네.”도현은 한동안 나를 바라봤다.“오늘 원하는 방식입니까?”“응.”“어디까지?”예상했던 질문이었다.“내가 먼저 닿기 전까지.”“네.”“안는 것도.”“네.”“키스도.”“네.”“손 잡는 것도.”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질문은 해도 돼요.”“알겠습니다.”그렇게 끝이었다.그런데 막상 말을 하고 나니 내가 더 신경 쓰였다.도현은 정말 다가오지 않았다.저녁을 먹을 때도 맞은편.소파에서도 반대쪽 끝.내가 물을 마시러 주방에 갔을 때도 따라오지 않았다.처음에는 편했다.십 분쯤 지나니 이상했다.이십 분쯤 지나자 괜히 그를 쳐다보게 됐다.도현은 책을 보고 있었다.“진짜 안 와요?”내가 묻자 책에서 눈도 들지 않고 말했다.“오지 말라고 했습니다.”“그건 맞는데.”“바꿀 겁니까?”“아니.”“그럼 기다리겠습니다.”너무 담담했다.내가 괜히 소파에 몸을 돌렸다.“안 답답해요?”이번에는 책을 덮었다.“답답합니다.”“근데?”“당신이 정한 범위니까.”“평소에는 도현 씨가 기다리게 하잖아요.”“그렇습니다.”“오늘 반대네.”“역할이 바뀐 건 아닙니다.”그는 정확하게 선을 그었다.“당신이 저를 지배하는 것도 아니고.”“응.”“오늘 당신이 먼저 접근하고 싶다고 정한 겁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그 차이가 좋았다.내가 주도권을 가져간 게 아니었다.도현은 여전히 내가 원하면 그다음부터 이 관계를 이끌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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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화. 손끝 하나

다음 날은 반대였다.도현이 먼저 말했다.“오늘은 제가 하나 정하겠습니다.”“또 새로운 거?”“어제 당신이 정했으니까.”“복수?”그의 눈썹이 올라갔다.“그런 식으로 말하면 하지 않겠습니다.”나는 웃었다.“농담.”도현은 내 앞에 서지 않았다.소파 맞은편에 앉은 채 말했다.“오늘은 손끝 하나만 허용하겠습니다.”“뭐?”“제가 먼저 당신에게 닿는 범위.”나는 내 몸을 내려다봤다.“손가락 하나로 뭘 하는데요?”“그건 제가 정합니다.”눈빛이 달라졌다.나는 바로 알아챘다.어제와 연결되지만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힘으로 잡는 게 아니었다.제한을 작게 만들어 집중시키는 것.“싫으면?”“하지 않습니다.”“그럼 해볼래요.”“색깔.”“초록.”도현이 일어났다.내 앞까지 왔다.그런데 정말.검지 끝 하나만 내 손등에 닿았다.아주 천천히.손등에서 손목 가까이.그 이상은 가지 않았다.나는 이상해서 웃었다.“간지러워.”손가락이 바로 멈췄다.“싫습니까?”“아니.”“계속?”“응.”다시 움직였다.놀라울 정도로 별것 아닌 접촉이었다.그런데 평소 두 손으로 잡힐 때보다 더 신경 쓰였다.어디로 움직일지 모르니까.도현은 손가락 끝으로만 내 손목의 선을 따라갔다.팔 안쪽.팔꿈치 가까이.그리고 다시 내려왔다.“도현 씨.”“네.”“이게 명령이에요?”“아닙니다.”“그럼?”“제한입니다.”“누구한테?”“저에게.”나는 그제야 이해했다.나를 제한한 게 아니었다.자기가 할 수 있는 걸 한 손가락으로 제한한 것.“왜요?”“제가 적게 해도 당신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었습니다.”“관찰?”“원하지 않으면 그 표현은 쓰지 않겠습니다.”“아니.”나는 웃었다.“괜찮아요.”그는 손가락을 멈췄다.“그럼 하나 묻겠습니다.”“네.”“더 많은 접촉이 필요합니까?”나는 잠시 생각했다.이상하게.아직은 아니었다.“아니요.”“좋습니다.”그는 다시 손끝만 움직였다.평소보다 느렸다.내가 기다리게 되는 방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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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4화. 말하지 않는 허락

며칠 뒤.나는 도현에게 먼저 제안했다.“오늘은 질문 줄여볼까요?”그의 표정이 바로 진지해졌다.“동의 확인을 줄이자는 뜻입니까?”“아니.”“그럼?”“말로만 안 하고.”나는 손을 들어 보였다.“신호.”도현은 한동안 생각했다.“구체적으로.”역시.나는 설명했다.손바닥을 펴면 계속.손가락 두 개면 천천히.주먹을 쥐면 멈춤.말은 언제든 가능.빨강이라는 말도 그대로 유효.“말할 수 있는 권한은 절대 없애지 않는 거예요.”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해볼래요?”“네.”그날은 소리가 적었다.도현이 손목을 잡기 전.내 눈을 봤다.나는 손바닥을 폈다.계속.손이 닿았다.조금 강해졌다.나는 그대로.조금 더.손가락 두 개.즉시 힘이 줄었다.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다만 확인하듯 내 눈을 바라봤다.나는 다시 손바닥을 폈다.그렇게 진행됐다.평소라면.괜찮습니까.색깔.계속합니까.수없이 오가던 문장이 없었다.대신 서로 얼굴을 더 많이 봤다.손을 봤다.호흡을 봤다.말이 적어지니 오히려 더 집중됐다.그러다 한 번.도현이 멈췄다.내가 아무 신호도 하지 않았는데.“왜요?”그가 그제야 말했다.“표정이 달라졌습니다.”“나 아무것도 안 했는데.”“그래서 멈췄습니다.”나는 잠시 놀랐다.“싫어 보였어요?”“확신이 없었습니다.”“그래서?”“모르면 멈추고 물어보는 편이 낫습니다.”나는 웃었다.“정답.”“지금은?”나는 다시 손바닥을 폈다.“계속.”그날 우리가 배운 건 신호가 아니었다.신호가 있어도.상대의 이상함을 느끼면 멈출 수 있다는 것.합의된 표시가 모든 책임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것.도현은 마지막에 말했다.“다음에는 다시 말로 묻겠습니다.”“왜?”“오늘은 재미있었지만.”그가 내 손바닥을 펴 보였다.“말이 더 정확한 순간도 있습니다.”“그러면 오늘만?”“오늘은 오늘 방식.”나는 웃었다.“좋아요.”새로운 규칙을 만든 게 아니었다.하루 동안 다른 언어를 써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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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화. 열 분의 거리

어느 금요일.퇴근 후 도현이 말했다.“열 분만 저와 떨어져 있으십시오.”나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그를 봤다.“왜?”“오늘은 그게 해보고 싶습니다.”“같은 집에서?”“네.”“어디까지 떨어져 있어요?”“이 방 안.”“접촉만 금지?”“네.”나는 웃었다.“도현 씨가 참는 플레이 좋아졌네.”“좋아진 게 아닙니다.”“그럼?”“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 겁니다.”열 분.별거 아니었다.그런데 타이머를 켜는 순간 갑자기 길어졌다.도현은 소파에.나는 창가에.서로 볼 수 있었다.말도 할 수 있었다.다만 닿지 않았다.처음 삼 분은 웃겼다.오 분째.괜히 가까이 가고 싶었다.칠 분째.도현이 물었다.“힘듭니까?”“조금.”“그만할까요?”“아니.”“확실합니까?”“네.”여덟 분.나는 일부러 그의 앞까지 갔다.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도현이 나를 올려다봤다.“시험하지 마십시오.”“왜?”“어렵습니다.”“주인님이 정했잖아요.”“그래서 지키는 중입니다.”나는 웃었다.아홉 분.도현의 손은 무릎 위에 그대로였다.마지막 십 초.내가 숫자를 셌다.“십.”“아홉.”도현이 말했다.“세지 마십시오.”“왜요?”“더 느리게 갑니다.”나는 더 웃었다.타이머가 울렸다.그 순간에도 도현은 움직이지 않았다.나는 눈썹을 올렸다.“끝났는데?”“당신에게 묻겠습니다.”“뭘?”“지금 안아도 됩니까?”나는 대답 대신 팔을 벌렸다.도현이 바로 일어났다.품에 들어오는 순간.열 분 전과 같은 안김인데도 전혀 달랐다.“별거 아닌데.”내가 말했다.“네.”“왜 이렇게 좋지.”도현이 낮게 대답했다.“없었던 시간이 있었으니까.”그 말이 상자와도 비슷했다.빈칸이 있어야.채워지는 순간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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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화. 창문을 연 밤

그날은 비가 왔다.집 안이 답답해서 내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도현이 말했다.“춥습니다.”“나는 좋아요.”“닫을까요?”“싫어요.”예전이라면 그가 닫았을지도 몰랐다.감기 든다며.춥다며.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며.지금은 담요를 하나 가져왔다.자기 무릎에 덮었다.나는 웃었다.“도현 씨 추워요?”“네.”“근데 안 닫아요?”“당신은 열고 싶으니까.”“그럼 도현 씨는?”“담요를 덮으면 됩니다.”너무 단순했다.그런데 우리가 그 단순한 방법을 배우는 데 오래 걸렸다.같은 방에 있다고 같은 온도를 원할 필요는 없었다.나는 창문 가까이에 앉았고.도현은 담요를 덮고 소파에 있었다.한참 뒤 내가 먼저 그의 옆으로 갔다.“춥다.”도현이 나를 봤다.“닫습니까?”“아니.”“그럼?”나는 담요 한쪽을 들었다.“같이 덮어.”그가 웃었다.우리는 열린 창문을 그대로 두고 같은 담요 안에 들어갔다.바람은 차갑고.몸은 따뜻했다.“이상하네.”내가 말했다.“무엇이?”“둘 중 하나를 고를 필요가 없었네.”“창문과 담요?”“응.”도현이 내 어깨에 담요를 더 올려줬다.“많은 일이 그런 것 같습니다.”“뭐가?”“당신이 독립적인 것과 저를 원하는 것.”나는 조용해졌다.“제가 질투하는 것과 당신을 통제하지 않는 것.”“응.”“서로 떨어져 있는 것과 결혼을 유지하는 것.”“응.”“둘 중 하나가 아니었습니다.”나는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비 냄새가 들어왔다.그날은 아무 명령도 없었다.그런데도 이상하게 관계 이야기 같았다.창문을 닫지 않아도.담요를 버릴 필요도 없었다.우리는 둘 다 선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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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7화. 주인님의 질문

어느 날 밤.도현이 물었다.“제가 무엇을 원한다고 생각합니까?”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나는 침대에 기대어 그를 봤다.“지금?”“네.”나는 생각했다.“손목.”도현이 고개를 저었다.“아닙니다.”“키스.”“그것도 아닙니다.”“그럼 안아달라고?”“아닙니다.”“모르겠는데.”도현이 아주 조금 웃었다.“좋습니다.”“뭐가 좋아요?”“모르겠다고 했으니까.”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시험이었어요?”“일부는.”“치사해.”그가 내 앞에 앉았다.“다시 묻겠습니다.”“네.”“지금 제가 원하는 걸 맞히려고 하지 마십시오.”“그럼?”“물어보십시오.”나는 잠시 멈췄다.그리고 정말 단순하게 물었다.“뭘 원해요?”도현의 대답도 단순했다.“당신이 제 옆에 와줬으면 합니다.”나는 한동안 그를 봤다.“그게 다?”“네.”“명령 아니고?”“부탁입니다.”나는 그의 옆으로 갔다.“이렇게?”“네.”도현이 아무것도 하지 않자 내가 물었다.“안 안아요?”“그건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그럼 내가 물어봐야 해요?”“원하면.”나는 웃었다.“안고 싶어요?”“네.”“그럼 안아도 돼요.”그제야 팔이 왔다.나는 품에 기대며 중얼거렸다.“우리가 서로 마음 읽으려고 너무 오래 했네.”“그랬습니다.”“맞히면 사랑이고.”“못 맞히면 서운하고.”“응.”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그러다 말했다.“요즘은 묻는 게 더 좋습니다.”“왜?”“틀린 답을 만들지 않아도 되니까.”그날의 명령은 이상했다.무언가를 하라는 명령이 아니라.추측하지 말라는 것.상대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지 말 것.모르면 물을 것.그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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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8화. 선택한 침묵

토요일 밤.우리는 둘 다 말이 많지 않았다.싸운 건 아니었다.그냥 피곤했다.나는 소파에 누워 있었고.도현은 맞은편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한 시간이 지나도 대화가 없었다.예전 같으면 내가 먼저 물었을 것이다.화났어요?뭐 있어요?왜 말 안 해요?도현도 비슷했을 것이다.그런데 오늘은.그냥 조용했다.한참 뒤 내가 물었다.“우리 지금 괜찮은 거 맞죠?”도현이 책에서 눈을 들었다.“네.”“왜 이렇게 조용해요?”“말하고 싶은 게 없어서.”너무 솔직해서 웃음이 났다.“나랑 말하기 싫다는 거?”“아닙니다.”“그럼?”“당신과 같이 조용히 있고 싶습니다.”나는 잠시 생각했다.“그것도 같이 있는 거예요?”“네.”그 말이 좋았다.우리는 다시 각자 하던 걸 했다.도현은 책.나는 휴대폰.잠시 뒤 나는 휴대폰도 내려놓았다.그냥 천장을 봤다.도현이 물었다.“졸립니까?”“아니.”“그럼?”“조용히 있는 중.”그가 아주 작게 웃었다.한 시간 뒤.나는 일어나 도현 옆에 앉았다.아무 말 없이 어깨에 기대었다.그도 아무 말 없이 팔을 내어줬다.그날은 한 문장 시간도 하지 않았다.내가 물었다.“오늘은 안 해?”도현이 말했다.“꼭 매일 해야 합니까?”나는 멈췄다.“아.”또 습관이 규칙이 되고 있었다.“안 해도 되네.”“네.”“오늘은 그냥 자요.”“좋습니다.”그날 우리는 아무 문장도 남기지 않았다.그런데 아무것도 빠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말하지 않는 것도.선택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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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9화. 일요일의 셔츠

일요일 아침.도현은 낡은 흰 셔츠를 입고 있었다.회사에서 절대 입지 않는 옷.목 부분이 조금 늘어나 있었고.소매 끝도 닳아 있었다.나는 빵을 먹다 물었다.“그 셔츠 뭐예요?”도현이 자기 옷을 내려다봤다.“셔츠입니다.”“그건 알아.”“왜요?”“도현 씨한테 이런 옷도 있었어요?”“오래됐습니다.”“얼마나?”“대학 때부터.”나는 입을 벌렸다.“그걸 아직 입어요?”“집에서만.”“안 버렸어요?”“편해서.”차도현이 옷을 ‘편해서’ 입는다는 말이 이상하게 웃겼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셔츠 소매를 잡았다.“진짜 낡았네.”도현이 내 손을 봤다.“싫습니까?”“아니.”“그럼?”“좀 사람 같아서.”그의 표정이 굳었다.“평소에는 사람이 아닙니까?”“의장님 같지.”“집에서도?”“가끔.”나는 웃었다.도현은 한숨을 쉬었다.오후에 우리는 옷장을 정리했다.도현이 버릴 옷을 몇 개 꺼냈다.그런데 흰 셔츠는 다시 걸었다.“그건 안 버려요?”“네.”“왜?”“좋아하니까.”“누가 줬어요?”질문하고 내가 먼저 멈췄다.도현이 나를 봤다.나는 웃었다.“나도 질투 질문하려 했네.”“궁금해서일 수도 있습니다.”“그래도 지금 이유가 조금 이상했어.”“그럼 묻지 않아도 됩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잠시 뒤 도현이 먼저 말했다.“제가 샀습니다.”“왜 말해줘요?”“말하고 싶어서.”우리는 동시에 웃었다.그날 상자에 셔츠는 넣지 않았다.도현은 말했다.“아직 입을 거니까.”그 말이 좋았다.상자에는 끝난 물건만 들어가는 게 아니었지만.굳이 모든 기억을 보관할 필요도 없었다.어떤 건 그냥 계속 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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