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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화. 퇴근 후 삼십 분

회사에서 새 제도를 만든 것은 아니었다.우리 둘만의 실험이었다.퇴근 후 삼십 분.회사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것.그런데 중요한 차이가 있었다.규칙으로 고정하지 않았다.오늘 하루만 해보기로 했다.현관문을 열자 도현이 먼저 말했다.“시작합니까?”나는 시계를 봤다.“지금부터.”“좋습니다.”첫 오 분은 쉬웠다.신발을 벗고.옷을 갈아입고.물을 마셨다.십 분째.내가 무심코 말했다.“오늘 카렐이—”도현이 나를 봤다.나는 입을 닫았다.“아.”“십 분도 못 갔습니다.”“습관이야.”“저도 비슷합니다.”십오 분째.도현이 휴대폰을 들었다.화면에 회사 메일 알림이 떴다.그는 읽지 않고 내려놨다.“급한 거 아니에요?”“긴급 표시 없습니다.”“궁금하지?”“많이.”“봐도 돼요.”“아닙니다.”“왜?”“오늘은 제가 안 보고 싶습니다.”그 차이가 중요했다.내가 못 보게 한 게 아니었다.도현이 안 보겠다고 선택했다.이십 분째.우리는 냉장고를 열었다.“저녁 뭐 먹어요?”“모르겠습니다.”“또?”“정말 모릅니다.”“배달?”“가능합니다.”“요리?”“당신이 원하면.”나는 냉장고 안을 한참 봤다.“그냥 라면.”도현의 표정이 묘해졌다.“결혼기념일 때도 그렇게 평범하게 보내더니 이제 라면입니까?”“오늘 아무 날도 아니잖아요.”“그렇군요.”우리는 라면을 끓였다.스물여덟 분.식탁에 앉았다.나는 괜히 시계를 봤다.“두 분 남았다.”도현이 말했다.“끝나면 회사 얘기 할 겁니까?”“해야죠.”“왜?”“오늘 보고해야 할 거 있어.”“그럼 이 삼십 분은 무슨 의미입니까?”나는 잠시 생각했다.“회사 이야기 안 하는 우리가 있다는 거 확인?”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 정도면 충분하군요.”삼십 분이 됐다.휴대폰 타이머가 울렸다.나는 바로 말했다.“오늘 카렐이 진짜 웃긴 게—”도현이 웃었다.“기다렸습니까?”“응.”“말하십시오.”나는 그날 있었던 일을 쏟아냈다.회사 이야기를 하지 말자는 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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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1화. 한쪽 이어폰

퇴근 후 삼십 분을 정하지 않은 날이었다.현관문을 열자마자 나는 회사 이야기를 시작했다.“오늘 카렐이 회의에서 또—”도현이 재킷을 벗다가 웃었다.“오늘은 삼십 분 없습니까?”“없어요.”“어제는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어제는 어제고.”“그렇군요.”이제 이런 변화에 도현도 익숙해졌다.한 번 효과가 있었다고 매일 해야 하는 건 아니었다.우리는 저녁을 먹고 각자 할 일을 했다.나는 거실에서 노트북을 보고 있었고 도현은 맞은편 소파에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그런데 한참 뒤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작은 드럼 소리.기타.나는 고개를 들었다.도현 귀에 이어폰 한쪽이 꽂혀 있었다.“뭐 들어요?”그가 이어폰을 뺐다.“음악.”“그건 알아요.”“왜요?”“옛날 록?”“네.”차도현이라는 사람을 알아가던 밤에 들었던 이야기.대학 시절 좋아했다던 오래된 록 음악.나는 손을 내밀었다.“나도.”도현이 나를 봤다.“무엇을?”“들어볼래요.”“당신 취향 아닐 겁니다.”“그건 내가 결정하지.”그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맞습니다.”한쪽 이어폰을 내게 건넸다.나는 도현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이어폰 하나씩.같은 음악.처음에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니었다.기타 소리는 거칠었고.도현이 좋아할 것 같지 않은 곡이었다.나는 그의 옆얼굴을 봤다.“진짜 이런 거 좋아했어요?”“네.”“의외다.”“무슨 음악을 들을 것 같았습니까?”“클래식.”도현이 나를 봤다.“왜요?”“차도현이니까.”“그건 설명이 아닙니다.”나는 웃었다.곡이 바뀌었다.이번에는 조금 느렸다.도현이 아무 말 없이 리듬을 손가락으로 두드리고 있었다.평소 회사에서는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좋아요?”내가 물었다.“네.”“아직도?”“네.”“그럼 왜 평소에는 안 들어요?”도현은 잠시 생각했다.“잊고 있었습니다.”“좋아하는 걸?”“회사 다니면서.”그가 짧게 말했다.“필요 없는 걸 많이 없앴으니까.”나는 그 말을 듣다가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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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화. 회의실 밖의 반대

카렐의 결혼 휴가가 끝난 첫날.그는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평소와 다름없이 반대부터 했다.“안 됩니다.”나는 자료에서 눈을 들었다.“신혼여행 다녀오자마자 첫 말이 그거예요?”“업무와 신혼여행은 관계없습니다.”“낭만 없다.”한예린이 옆에서 웃었다.카렐은 아무렇지도 않았다.“총괄님이 일정 단축안을 내셨고 저는 반대합니다.”“이유.”“파리 쪽 현장 준비 기간이 부족합니다.”나는 숫자를 다시 봤다.이번에는 카렐이 맞지 않았다.“아니.”내가 말했다.“이번엔 내가 맞아요.”카렐이 눈썹을 올렸다.“근거가 있습니까?”나는 기다렸다는 듯 자료를 넘겼다.“이거.”현장 측에서 이미 일주일 전 사전 준비를 시작한 기록.카렐이 확인했다.한참 뒤.“제가 놓쳤습니다.”나는 웃었다.“오.”“왜요?”“카렐도 틀리네.”“당연히 틀립니다.”“사직서 가져올 거예요?”카렐의 표정이 아주 잠깐 굳었다.한예린이 웃음을 터뜨렸다.“그 얘기 아직도 해?”“기억에 남잖아.”카렐은 담담하게 말했다.“같은 종류의 실수를 두 번 하면 생각해 보겠습니다.”“하지 마요.”“왜요?”“이제 그 사직서 놀이 지겨워.”이번에는 카렐도 웃었다.회의는 예정대로 진행됐다.예전과 달라진 건 누가 틀렸는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었다.나일 수도.카렐일 수도.한예린일 수도 있었다.문제는 틀린 뒤였다.고치면 됐다.그날 오후 도현이 회사에 왔다.기술 관련 별도 회의가 있어 잠깐 들른 것이었다.복도에서 카렐과 마주친 도현이 먼저 말했다.“결혼 축하합니다.”카렐이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휴가는 충분했습니까?”“네.”나는 옆에서 둘을 보다가 웃었다.도현이 나를 봤다.“왜요?”“이제 카렐 봐도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카렐의 시선이 우리 사이를 오갔다.도현이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업무 중입니다.”“업무 아닐 때는?”잠깐 침묵.카렐이 눈치를 챈 듯 먼저 말했다.“저는 가보겠습니다.”그가 멀어지자 도현이 낮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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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3화. 문이 잠기지 않은 밤

그날 밤.도현이 침실 문을 닫지 않았다.나는 옷을 갈아입다가 물었다.“문 왜 열어놨어요?”“닫을까요?”“아니.”“그럼 그대로 두겠습니다.”조금 이상했다.우리는 둘뿐인 집에서 문을 굳이 잠그지도 않았지만.강한 분위기가 필요한 밤에는 자연스럽게 문부터 닫곤 했다.오늘은 아니었다.도현은 침실과 거실 사이 문을 반쯤 열린 상태로 두었다.“오늘 뭐 할 건데요?”“먼저 당신이 원하는 걸 듣겠습니다.”나는 침대 끝에 앉았다.“오늘은.”잠시 생각했다.“좀 세게.”도현의 눈빛이 천천히 변했다.“범위.”“손목은 오늘 싫어요.”“네.”“안대도 싫고.”“네.”“리드도.”“사용하지 않습니다.”기존에 자주 쓰던 것들은 모두 빼고 싶었다.도현이 기다렸다.“그럼 무엇을 원합니까?”나는 그를 봤다.“목소리.”“네.”“거리.”그의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거리?”“내가 가까이 오고 싶게.”도현은 잠시 생각했다.“제가 닿지 않고?”“처음에는.”“그리고?”“내가 먼저 오면.”나는 천천히 말했다.“그때는 주인님이 정해요.”도현의 눈빛이 짙어졌다.“좋습니다.”“색깔.”이번에는 내가 먼저 말했다.“초록.”도현은 내 앞에 오지 않았다.오히려 방 반대편 벽에 기대 섰다.“일어나십시오.”목소리가 달라졌다.나는 천천히 일어났다.“거기.”한 걸음 움직이려 하자 바로 멈추게 했다.“아직 오지 마십시오.”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그 한 문장만으로 몸이 먼저 반응했다.나는 그대로 섰다.도현은 나를 보면서도 오지 않았다.“보고 싶었다고 했죠.”“언제?”“제주에서 돌아온 뒤.”“네.”“지금도?”“네.”“그럼 왜 가만히 있습니까?”나는 웃었다.“오라고 안 했잖아요.”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잘하고 있습니다.”그 말이 이상하게 더 자극적이었다.칭찬.하지만 부드럽지 않았다.낮고 단단한 목소리.“한 걸음.”나는 움직였다.“멈춰.”즉시 멈췄다.거리는 여전히 멀었다.“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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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화. 하루 동안 직함 금지

유럽 본부에서 서울로 사람이 많이 들어온 주간이었다.회의만 여섯 개.저녁 식사 두 번.언론 인터뷰 하나.금요일 밤이 되자 나는 완전히 지쳤다.집에 들어오자마자 말했다.“총괄 듣기 싫어요.”도현이 재킷을 받아 들려다 멈췄다.“그럼 뭐라고 부릅니까?”“서윤.”“좋습니다.”“의장님도 금지.”“그럼?”“도현.”그가 잠시 나를 봤다.“도현 씨도 아니고?”“응.”“왜?”“오늘 하루만.”도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나는 소파에 누웠다.“도현.”그가 즉시 봤다.이상했다.평소보다 이름 하나가 더 직접적으로 느껴졌다.“물.”그가 눈썹을 올렸다.“지금 명령한 겁니까?”나는 바로 웃었다.“아니. 부탁.”“정확하게.”“물 가져다줘요.”“그건 가능합니다.”도현은 물을 가져왔다.나는 받아 마셨다.“이름만 부르니까 좀 이상하네.”“당신이 하자고 했습니다.”“도현.”“네.”“또.”“무엇을?”“그냥 대답해봐요.”그는 어이없다는 얼굴이었다.그래도 대답했다.“네.”나는 웃었다.“재밌어.”“저는 잘 모르겠습니다.”“왜?”“당신이 제 이름을 부를 때마다.”그가 잠시 멈췄다.“조금 긴장됩니다.”“왜?”“평소와 달라서.”나는 몸을 일으켰다.“주인님보다?”도현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오늘은 그 호칭도 금지입니까?”나는 생각했다.“아니.”“왜 직함은 안 되고 그건 됩니까?”“그건 회사 직함 아니잖아요.”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군요.”“근데 오늘은 아직 안 부를래.”“당신 마음대로 하십시오.”“서운해요?”“조금.”나는 웃었다.그날 저녁 우리는 서로 이름만 불렀다.“도현.”“서윤.”처음에는 장난 같았다.그런데 점점 이상하게 가까워졌다.직함이 없는 이름.누구의 상사도.누구의 배우자라는 설명도 붙지 않는 이름.잠들기 직전.내가 불렀다.“도현.”“네.”“오늘 어땠어요?”그는 잠시 생각했다.“좋았습니다.”“왜?”“이름만 남는 게.”나는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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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5화. 대답하지 않을 권리

차명희가 어느 저녁 우리를 불렀다.이유는 별것 아니었다.새로 그린 그림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그림은 이번에는 바다가 아니었다.작은 창문.그 너머의 정원.나는 한참 봤다.“이것도 좋아요.”차명희가 물었다.“뭐가?”“전보다 색이 밝아졌어요.”도현도 그림을 보고 있었다.그러다 내가 무심코 물었다.“준호 씨는 이거 봤어요?”차명희가 나를 봤다.도현도 동시에 나를 봤다.나는 바로 웃었다.“왜 둘 다.”차명희는 한 박자 늦게 말했다.“봤어.”도현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었다.나는 알아챘다.“또 궁금하죠?”“조금.”차명희가 아들을 봤다.“뭐가.”도현이 잠시 입을 열었다가 멈췄다.“아닙니다.”“물어봐.”“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차명희의 눈썹이 올라갔다.“그럼 해봐.”도현이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요즘 자주 만나십니까?”차명희는 잠시 그를 봤다.그리고 말했다.“그건 말 안 할래.”도현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나는 옆에서 참았다.차명희가 덧붙였다.“싫어서가 아니라.”“네.”“내가 아직 말하고 싶지 않아서.”도현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리고.“알겠습니다.”그걸로 끝냈다.차로 돌아오는 길.내가 먼저 물었다.“안 궁금해요?”“많이.”“근데?”“어머니가 대답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서운해요?”“조금.”“화는?”도현은 생각했다.“아닙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우리도 할까요?”“무엇을?”“대답하지 않을 권리.”도현이 나를 봤다.“원래 있었습니다.”“있었는데 잘 안 썼잖아요.”맞는 말이었다.우리는 질문을 하면 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절이 길었다.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부부니까.연인이니까.서로 숨기면 안 된다고.그런데 모든 질문에 즉시 답해야 친밀한 건 아니었다.집에 돌아와 내가 시험 삼아 물었다.“도현 씨.”“네.”“대학교 때 연애 몇 번 했어요?”그가 나를 봤다.“왜 갑자기?”“대답하기 싫으면 안 해도 된다고.”도현은 잠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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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6화. 아무 계획 없는 토요일

토요일 아침.우리는 정말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그게 오히려 계획이었다.하지만 이번에는 ‘아무 계획 없음’조차 규칙으로 만들지 않기로 했다.눈을 뜬 시간이 열 시가 넘었다.나는 옆을 봤다.도현도 깨어 있었다.“뭐 해요?”“누워 있습니다.”“오늘 뭐 해요?”“모르겠습니다.”“진짜?”“네.”나는 웃었다.“그럼 점심?”“모릅니다.”“나가요?”“모릅니다.”“집에 있어요?”“그것도.”“도현 씨 요즘 모른다는 말 너무 편하게 써.”“명령 아닙니까?”“내가 괜히 만들었나.”우리는 결국 점심때까지 침대에 있었다.뭔가 특별한 일을 한 것도 아니었다.각자 휴대폰을 보고.가끔 대화하고.잠깐 다시 자고.정오쯤 내가 말했다.“배고파.”“저도.”“나갈래요?”“당신은?”“나가고 싶어요.”“그럼 나갑시다.”우리는 옷을 대충 입고 집 근처를 걸었다.예약 없이 들어간 식당.메뉴를 고르고.밥을 먹었다.그다음 계획도 없었다.“어디 갈까요?”도현이 물었다.“모르겠는데.”“그럼 걸읍시다.”“어디까지?”“가고 싶은 데까지.”그게 생각보다 오래 갔다.한 시간.두 시간.중간에 서점에 들어갔다.도현은 건축 책 앞에서 오래 서 있었다.나는 그를 멀리서 봤다.“또 보고 싶어요?”“무엇을?”“건축.”그가 책 표지를 손끝으로 만졌다.“가끔.”“지금 시작해도 되잖아요.”“직업으로?”“꼭 직업이어야 해요?”도현이 멈췄다.나는 웃었다.“그냥 좋아하면 보면 되지.”그는 책 하나를 샀다.집에 돌아온 뒤.상자에 넣지 않았다.책장에 꽂았다.“이건 안 넣어요?”내가 물었다.도현이 말했다.“읽을 겁니다.”그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기억으로 보관하는 것보다.지금 계속 쓰는 것.그게 더 잘 어울리는 물건도 있었다.그날 밤.도현은 침대에서 건축 책을 읽었다.나는 옆에서 노트를 썼다.우리 사이에는 별 대화가 없었다.그래도 좋았다.아무 계획도 없던 토요일은.결국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이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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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7화. 목소리만 남긴 밤

며칠 뒤.내가 먼저 말했다.“오늘은 눈 감을게요.”도현의 표정이 바로 달라졌다.“안대는 싫다고 하지 않았습니까?”“안대 말고.”나는 침대에 기대어 앉았다.“내가 그냥 눈 감는 거.”그는 잠시 나를 봤다.“언제든 뜰 수 있고?”“네.”“좋습니다.”“그리고.”“네.”“오늘은 최대한 손 안 써요.”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그럼 무엇을 원합니까?”나는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그거.”잠깐 정적.“목소리.”도현의 눈빛이 짙어졌다.“확실합니까?”“네.”“색깔.”“초록.”나는 정말 눈을 감았다.안대가 없으니 아무것도 막혀 있지 않았다.원하면 바로 뜰 수 있었다.그 차이가 컸다.도현이 가까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하지만 닿지 않았다.“일어나십시오.”나는 일어났다.“한 걸음 앞으로.”움직였다.“멈춰.”내가 멈췄다.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지만.정확한 거리는 몰랐다.“눈 뜨고 싶습니까?”“아니요.”“좋습니다.”낮은 목소리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손을 뒤로.”나는 잠시 멈췄다.도현이 바로 덧붙였다.“잡지 않습니다.”그제야 손을 뒤로 모았다.아무것도 묶이지 않았다.도현도 손대지 않았다.그런데 내가 스스로 취한 자세 때문에 긴장감은 더 선명했다.“괜찮습니까?”“네.”“목소리 더 강하게?”나는 숨을 한번 들이마셨다.“네.”그다음부터는 말이 더 짧아졌다.“고개 들어.”“멈춰.”“그대로.”“한 걸음.”나는 하나씩 따랐다.몸에 닿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그런데도 심장이 빨라졌다.한참 뒤.도현의 목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눈 뜨십시오.”나는 천천히 떴다.정말 가까이 있었다.하지만 손은 몸 옆에 내려가 있었다.“어때요?”내가 물었다.“무엇이?”“안 만지고 하는 거.”도현이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상당히 어렵습니다.”나는 웃었다.“왜?”“만지고 싶으니까.”얼굴이 뜨거워졌다.도현은 계속 말했다.“그래도 오늘은 당신이 요청한 방식입니다.”“이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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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8화. 사무실의 빈 책상

총괄실에서 책상 하나가 사라졌다.누가 퇴사한 건 아니었다.내 비서가 회의실 옆으로 자리를 옮긴 것뿐이었다.그런데 빈 공간이 생기자 이상하게 방이 커 보였다.카렐이 들어오자마자 말했다.“여기 뭘 놓으실 겁니까?”나는 즉시 대답했다.“아무것도.”그가 나를 봤다.“소파?”“안 놔요.”“테이블?”“안 놔.”“식물?”“카렐.”“네.”“빈 데는 그냥 비워둘 거예요.”카렐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너무 쉽게 끝나서 내가 오히려 물었다.“반대 안 해요?”“빈 공간에 반대할 근거가 없습니다.”“기대했는데.”“제가 모든 것에 반대하는 사람은 아닙니다.”“거의.”“아닙니다.”그날 오후 한예린도 방에 들어와 똑같이 물었다.“여기 뭐 둘 거야?”“아무것도.”“아깝지 않아?”“안 아까워.”“총괄실 평수 비싼데.”“그래도.”나는 빈 자리를 봤다.일부러 비워둔 공간.예전 같으면 활용 방안을 찾았을 것이다.책장.보조 모니터.회의 테이블.뭔가.하지만 이번에는 그냥 비어 있는 게 좋았다.며칠 뒤.사람들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빈 책상 자리는 그냥 빈 공간이 됐다.어느 날 도현이 총괄실에 들렀다가 그 자리를 봤다.“무엇이 있었습니까?”“책상.”“왜 없어졌습니까?”설명했다.도현이 물었다.“새로 안 놓습니까?”“응.”“좋군요.”나는 웃었다.“도현 씨가 그런 말도 하네.”“왜요?”“예전엔 공간 보면 활용부터 했잖아.”그는 잠시 빈 곳을 봤다.“요즘은.”“응.”“빈 곳이 있어야 사람도 조금 덜 꽉 차는 것 같습니다.”나는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그날 이후.총괄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은.아무것도 없는 그 한쪽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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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9화. 한 번만 부르는 이름

도현은 평소 집에서 나를 여러 방식으로 불렀다.서윤.한서윤.가끔은 아주 낮게.자기 방식대로.그날은 내가 먼저 제안했다.“오늘 이름 한 번만 불러요.”도현이 나를 봤다.“왜?”“그냥.”“무슨 의미입니까?”“없어요.”“없는데 왜 한 번만?”나는 웃었다.“한 번이면 더 신경 쓰일 것 같아서.”도현의 눈빛이 묘해졌다.“실험입니까?”“조금.”“좋습니다.”그날 저녁.도현은 정말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물 마시겠습니까?”“네.”“저녁은?”“아무거나.”“씻고 오십시오.”“왜요?”“제가 먼저 씻을지 물으려던 겁니다.”이름이 없으니 문장이 묘하게 달라졌다.나는 일부러 물었다.“언제 부를 거예요?”“모르겠습니다.”“아직 안 정했어요?”“네.”“끝까지 안 부르면?”“그것도 가능하겠죠.”괜히 신경 쓰였다.침실에 들어와서도.도현은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나는 먼저 침대에 누웠다.“도현 씨.”“네.”“내 이름.”“왜요?”“아직 한 번 남았잖아요.”그가 나를 바라봤다.“원합니까?”“조금.”“그럼 기다리십시오.”목소리가 낮아졌다.나는 바로 알아챘다.평범했던 분위기가 달라졌다.도현은 내 앞까지 왔다.“색깔.”“초록.”“가까이 와도 됩니까?”“네.”그가 몸을 숙였다.그리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말했다.“서윤.”이름 두 글자.그뿐인데.하루 종일 듣지 않았기 때문에 이상하게 크게 들렸다.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셔츠를 잡았다.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왜요?”“몰라.”“모른다는 명령.”“지금은 진짜 몰라.”“좋습니다.”그날은 이름 한 번이 어떤 도구보다 강했다.자주 쓰는 말도.없던 시간이 생기면 다시 다른 의미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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