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371 - Chapter 380

420 Chapters

370화. 손끝으로 정한 속도

퇴근하고 집에 들어온 시간이 평소보다 조금 늦었다.현관문을 닫자마자 휴대폰이 한 번 울렸다.업무 메신저였다.나는 화면을 확인하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거실에 있던 도현이 그걸 보고 말했다.“끝났습니까.”“응.”“회사?”“응.”나는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오늘은 진짜 끝.”도현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나는 소파에 앉았다.몸이 조금 무거웠다.일이 특별히 많았던 건 아닌데.하루 종일 사람 말을 듣고 판단한 탓인지 머리가 지쳤다.도현이 물었다.“저녁은.”“먹었어요.”“어디서.”“회의 끝나고 예린이랑.”“알겠습니다.”그는 더 묻지 않았다.나는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잠시 뒤.옆자리가 내려앉았다.도현이었다.그가 바로 손을 대지는 않았다.그냥 가까이 앉아 있었다.나는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왜 이렇게 조용해요.”“당신이 피곤해 보여서.”“오늘은 그냥 잘까요?”“원하면.”나는 잠깐 생각했다.그리고 고개를 저었다.“아니.”“그럼?”나는 눈을 뜨고 그를 봤다.“조금 하고 싶어요.”도현의 시선이 바로 달라졌다.“강하게?”“모르겠어요.”“그럼.”그가 몸을 조금 돌렸다.“오늘은 제가 정합니다.”나는 작게 웃었다.“또?”“싫습니까.”“아니.”“좋습니다.”그는 아주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그런데 손목도.허리도 아니었다.내 손끝.정확히는 검지 끝을 잡았다.나는 눈썹을 올렸다.“이건 뭐예요?”“오늘은.”도현이 내 손가락 끝을 자기 손가락 사이에 끼웠다.“이걸로 시작합니다.”“손가락?”“네.”“왜.”“잡아당기면 오십시오.”나는 그를 봤다.“얼마나?”“제가 당기는 만큼.”“놓으면?”“멈추십시오.”단순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도현은 손가락 끝을 아주 조금 당겼다.정말 미세하게.나는 몸을 몇 센티미터 옮겼다.그가 놓았다.멈춤.다시.이번에는 조금 더.나는 또 따라갔다.한 번에 가까이 가지 않았다.손가락 하나로.조금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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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1화. 소리 없이 무너지는 밤

도현이 먼저 침실로 들어갔다.나는 욕실에서 머리를 말리다 말고 문 쪽을 봤다.오늘은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퇴근하고 저녁을 먹을 때도.설거지를 끝낸 뒤에도.도현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그렇다고 기분이 나빠 보이는 건 아니었다.오히려.가끔 나를 보는 시선이 이상할 만큼 오래 머물렀다.나는 결국 드라이어를 끄고 침실로 들어갔다.“오늘 왜 그래요?”도현은 침대 옆에 서 있었다.“무엇이.”“말도 별로 안 하고.”“할 말이 없었습니다.”“진짜?”“네.”“그럼 왜 자꾸 봐요.”그는 이번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몇 초.그리고.“오늘은 당신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습니다.”나는 그대로 멈췄다.도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그런데 말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무너지는 거?”“네.”“어떻게.”그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끝까지 멀쩡한 척하지 못하게.”심장이 바로 반응했다.나는 웃으려 했지만.도현이 먼저 말했다.“웃지 마십시오.”웃음이 멈췄다.“주인님.”“네.”“오늘 세게 하려고요?”“조금.”“어느 정도.”“당신이 정신없이 따라올 정도.”그는 잠시 나를 살폈다.“하지만 통증을 높이진 않습니다.”“결박?”“없습니다.”“안대도?”“없고.”“도구는?”도현은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필요 없습니다.”나는 그를 봤다.“그럼 뭘로.”도현이 내 허리에 손을 올렸다.“이걸로.”손.그리고.“목소리.”숨이 조금 가빠졌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확실합니까?”“네.”“색깔.”“초록.”도현의 눈빛이 완전히 달라졌다.“좋아.”*처음부터 거칠지는 않았다.오히려 느렸다.도현은 내 허리를 잡은 채.한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나는 기다렸다.“왜 안 해요.”“무엇을.”“아까 무너뜨린다며.”“벌써 기다리지 못합니까.”나는 입을 다물었다.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좋습니다.”손이 허리에서 등으로 올라갔다.아주 천천히.나는 그 움직임을 따라 몸을 조금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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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2화. 처음 만난 사람처럼

도현에게서 메시지가 온 건 오후 여섯 시 십 분이었다.[오늘 먼저 들어갑니다.]나는 회의실에서 나오며 답장을 보냈다.[나도 한 시간 안에 갈 것 같아요.]평소라면 거기서 끝났을 대화였다.그런데 몇 초 뒤.메시지가 하나 더 왔다.[집에 들어오면 바로 침실로 오지 마십시오.]나는 걸음을 멈췄다.[왜요?]답장은 금방 왔다.[오늘 해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그 문장을 보는 순간.피곤하던 머리가 조금 맑아졌다.[새 도구?]이번에는 답장이 늦었다.[도구는 없습니다.][그럼 뭔데.][와서 보십시오.]나는 휴대폰을 내려다보다 웃었다.정말.요즘은 일부러 말을 안 해준다.*집에 들어갔을 때 거실은 평소와 똑같았다.재킷도 걸려 있었고.테이블 위에는 도현이 마시다 남긴 물도 있었다.그런데 도현이 없었다.“도현 씨?”대답이 없었다.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그때 서재 문이 열렸다.도현이 나왔다.검은 셔츠.소매는 손목까지 내려와 있었고.안경까지 쓰고 있었다.나는 순간 멈췄다.“뭐야.”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그냥 나를 봤다.표정이 낯설었다.정확히는.너무 무표정했다.“왜 그렇게 봐요?”그가 천천히 내 앞까지 왔다.그리고 말했다.“실례지만.”나는 눈을 깜빡였다.“…네?”“처음 뵙겠습니다.”몇 초.나는 그대로 그를 쳐다봤다.“뭐라고요?”도현의 표정은 그대로였다.“오늘은.”목소리가 조금 낮아졌다.“저를 처음 만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시오.”그제야 이해했다.나는 웃음을 터뜨렸다.“주인님.”“그 호칭도 아직 아닙니다.”웃음이 뚝 멈췄다.“진짜 역할극?”“싫습니까?”나는 그를 다시 봤다.검은 셔츠.안경.딱딱한 말투.남편이라는 걸 너무 잘 아는데.모르는 사람처럼 보라고 한다.이상하게.조금 긴장됐다.“아니.”“그럼.”도현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처음부터.”나는 입술을 한번 눌렀다.“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아무것도.”“아무것도?”“제가 먼저 말 겁니다.”그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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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화. 박자 밖으로 나가지 마십시오

도현이 침실 협탁 위에 올려둔 건 작은 기계 하나였다.나는 머리를 묶다가 손을 멈췄다.“저게 뭐예요?”도현이 버튼을 눌렀다.딱.딱.딱.일정한 간격으로 소리가 났다.“메트로놈.”“그건 아는데.”나는 기계를 내려다봤다.“왜 침실에 메트로놈이 있어요?”“오늘 써보려고.”“설마 음악 할 것도 아니면서?”도현은 대답하지 않고 속도를 조금 낮췄다.딱.…딱.…딱.간격이 벌어졌다.그제야 나도 눈치챘다.“박자 맞추라고?”“네.”“뭘?”도현이 나를 봤다.“움직이는 속도.”심장이 묘하게 한 번 뛰었다.“내가?”“처음에는.”“주인님은?”“저는 필요할 때 깨겠습니다.”“반칙인데.”“제가 주도하니까.”너무 당연하게 말해서 더 할 말이 없었다.나는 팔짱을 꼈다.“어떻게 하는 건데요?”도현은 메트로놈을 멈췄다.그리고 침대 앞까지 와서 섰다.“오늘은 결박 없습니다.”“응.”“안대도 없고.”“도구는 저거 하나?”“네.”“통증 플레이도?”“없습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강도는?”“처음에는 낮게.”도현이 잠깐 말을 멈췄다.“뒤는 제가 보고 올립니다.”“나는 중간보다 조금 높게까지 괜찮아요.”“피곤한 곳.”“없어요.”“불편한 데.”“없고.”“색깔.”“초록.”도현이 다시 메트로놈을 켰다.딱.딱.딱.이번에는 조금 빠른 박자였다.“좋습니다.”그 목소리까지.이상하게 박자 사이에 끼어들었다.*“이쪽으로 오십시오.”나는 바로 걸으려 했다.“아니.”멈췄다.도현이 메트로놈을 가리켰다.“한 박자에 한 걸음.”나는 어이없어 웃었다.“진짜?”“네.”딱.한 걸음.딱.두 걸음.딱.세 걸음.도현은 침대 앞에 서서 나를 기다렸다.평소 같으면 세 걸음이면 금방 갔을 거리인데.박자에 맞추니까 이상하게 멀었다.네 번째.다섯 번째.마지막 한 걸음.이제 바로 앞.나는 그를 올려다봤다.“됐죠?”“아직.”“뭐가.”“손.”도현이 자기 셔츠를 가리켰다.“잡으십시오.”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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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4화. 숨이 먼저 흐트러졌다

불을 끈 뒤에도 바로 잠들지는 못했다.도현의 팔은 여전히 내 허리 위에 있었고.방 안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메트로놈도 꺼져 있었다.그런데 이상하게.아까 들었던 일정한 박자가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딱.딱.딱.나는 눈을 감은 채 작게 말했다.“도현 씨.”“네.”“안 자죠.”“네.”“나도.”그의 팔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왜 못 잡니까.”“아까 거 때문에.”“메트로놈?”“응.”“신경 쓰입니까.”“조금.”나는 몸을 돌려 그를 봤다.어두워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그래도 가까운 건 알았다.“주인님.”“네.”“나 아직 좀 흥분한 것 같아.”몇 초.도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왜 대답 안 해요.”“보고 있습니다.”“어두운데.”“그래도 보입니다.”“뭐가.”그의 손이 허리에서 천천히 등을 쓸었다.“방금 말하고 나서.”목소리가 낮아졌다.“당신 숨 달라진 거.”나는 괜히 입술을 다물었다.“아닌데.”“거짓말.”도현이 몸을 조금 가까이했다.나는 자연스럽게 그의 셔츠 앞을 잡았다.그러자.“아.”짧은 숨이 새어 나왔다.내가 낸 소리였다.생각보다 선명해서.나도 순간 멈췄다.도현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서윤.”“응.”“방금.”“말하지 마.”“왜.”“민망하니까.”그의 손이 허리에 조금 더 힘을 줬다.“저는 좋았습니다.”“주인님.”“네.”“그런 걸 왜 말해.”“좋으니까.”너무 바로 대답해서.오히려 더 얼굴이 뜨거워졌다.나는 그의 가슴 쪽에 이마를 기대었다.“안 봐.”“왜.”“몰라.”도현이 아주 낮게 웃었다.“그럼 그렇게 계십시오.”손바닥이 등을 천천히 움직였다.아까처럼 박자를 맞추는 것도 아니었고.일정하지도 않았다.그냥.자기가 원하는 순간.원하는 만큼.조금씩.나는 그 움직임에 집중했다.그리고.어느 순간.손이 허리를 더 가까이 당겼다.“읏.”이번에는 참으려다가.더 이상하게 소리가 났다.도현의 손이 바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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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화. 목소리만으로 움직이십시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도현은 이미 깨어 있었다.나는 이불 속에서 몸을 조금 움직이다가 목을 가다듬었다.“으음.”바로 옆에서 웃음이 들렸다.“목 아픕니까.”나는 눈도 뜨지 않은 채 대답했다.“조금 잠긴 것뿐이에요.”“물 드십시오.”협탁 위에 잔이 있었다.나는 몸을 일으켜 물을 마셨다.도현이 내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오늘 회의 많습니까.”“오전 두 개. 오후 하나.”“말 많이 해야겠군요.”“괜찮아.”나는 물잔을 내려놓고 그를 봤다.“주인님은요?”“왜 갑자기 그 호칭입니까.”“어제 생각나서.”도현의 눈이 아주 잠깐 가늘어졌다.“아침부터?”“응.”“출근해야 합니다.”“알아요.”나는 웃으며 다시 누웠다.도현은 시계를 확인하고 침대에서 내려갔다.그런데 욕실로 들어가기 직전.문 앞에서 한번 돌아봤다.“서윤.”“응?”“어제.”“응.”“당신이 제 목소리에 반응하는 게 생각보다 선명했습니다.”나는 그대로 그를 쳐다봤다.“갑자기 그걸 왜 말해.”“생각나서.”“아침부터 그러면.”“왜.”나는 베개를 끌어당겼다.“또 신경 쓰이잖아.”도현은 아주 조금 웃었다.“그럼 저녁까지 생각하고 계십시오.”욕실 문이 닫혔다.나는 한동안 문만 봤다.“…진짜.”그 한마디 때문에.정말 하루 종일 생각났다.*회사에서는 일부러 평소처럼 행동했다.오전 회의.점심.파리와 화상 연결.한예린이 가져온 분기 자료.문제는 없었다.그런데 오후 네 시쯤.휴대폰 화면에 메시지 하나가 떴다.[오늘 저녁은 말로만 시작합니다.]나는 화면을 한참 봤다.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없어서.오히려 더 신경 쓰였다.[말로만?][네.][뭘.]답장은 금방 왔다.[당신은 움직이기만 하십시오.]나는 입술을 한번 눌렀다.[손 안 대고?]이번에는 답장이 조금 늦었다.[제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까지는.]그 뒤로.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대신 휴대폰을 뒤집어 놓았다.한예린이 바로 눈썹을 올렸다.“왜.”“뭐가.”“방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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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화. 뜨거운 건 닿기 전에 알 수 없었다

도현이 침실 문을 닫은 뒤.나는 침대 위에 놓인 물건부터 봤다.처음 보는 게 두 개였다.하나는 길고 가느다란 검은 손잡이 끝에 달린 부드러운 깃털.다른 하나는 작은 유리 용기에 담긴 캔들이었다.그런데 평소 쓰던 향초와는 모양이 조금 달랐다.나는 가까이 다가가 유리 용기를 들여다봤다.“이건 뭐예요?”도현이 재킷을 벗으며 대답했다.“마사지 캔들입니다.”“마사지?”“일반 양초보다 낮은 온도에서 녹는 제품.”나는 바로 그를 봤다.“설마 오늘 이거 떨어뜨리려고?”“피부에 직접 붓지는 않습니다.”도현은 태연하게 말했다.“먼저 제 손으로 온도를 확인하고, 손끝이나 도구에 소량 묻혀서 씁니다.”“뜨거운 거 같이쓰는건 처음인데 혼자는 많이 해봤는데요 .”“그래서 더 조심해서.”그는 캔들을 바로 켜지 않았다.먼저 깃털을 집었다.“그리고 처음은 이것부터.”나는 웃었다.“주인님 취향 되게 넓어졌네.”“싫습니까?”“아니.”나는 깃털 끝을 손가락으로 한번 건드렸다.정말 가벼웠다.“이게 뭐가 그렇게 자극적이에요?”도현이 내 손에서 깃털을 가져갔다.“그건.”그가 내 손등 위를 아주 짧게 스쳤다.사락.“읏.”손이 저절로 움찔했다.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방금.”“간지러워서.”“한 번밖에 안 했습니다.”“그러니까.”그가 이번에는 손목 안쪽을 스쳤다.사락.“아….”이번에는 짧은 숨까지 같이 나왔다.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빼려다 멈췄다.“이거 생각보다 간지러운데.”“좋은 쪽입니까.”나는 잠깐 생각했다.“아직은.”“색깔.”“초록.”“좋습니다.”도현은 깃털을 침대 위에 내려놨다.“오늘 강도.”“조금 높게 해도 돼요.”“통증은.”“낮게.”“결박.”“손목 정도는 가능.”도현은 고개를 저었다.“오늘은 묶지 않습니다.”“왜.”“움직이려는 걸 제가 직접 잡고 싶어서.”심장이 바로 한 번 뛰었다.“직접?”“네.”“주인님이?”“제가.”도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오늘은 도구에 맡기지 않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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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7화. 굴러가는 감각

다음 날 저녁.침실에 들어가자 도현은 이미 서랍 하나를 열어놓고 있었다.나는 바로 멈췄다.“또 새 거 있어요?”도현이 나를 돌아봤다.“네.”“어제 두 개나 처음 썼는데.”“오늘은 하나입니다.”그가 꺼낸 건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 물건이었다.짧은 손잡이 끝에 둥근 바퀴가 달려 있었고.바퀴 가장자리에는 아주 작고 둥근 돌기들이 일정하게 나 있었다.나는 가까이 가서 봤다.“이게 뭐예요?”“실리콘 마사지 휠.”“굴리는 거?”“네.”나는 손을 내밀었다.“줘봐요.”도현은 바로 주지 않았다.“제가 먼저.”“또 본인한테 해보려고?”“네.”그는 소매를 걷고.자기 팔 위에 바퀴를 천천히 굴렸다.사각.아주 작은 마찰음.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아파요?”“아닙니다.”이번에는 조금 힘을 줘 굴렸다.“압박감만 조금 있습니다.”“나도.”도현이 내 손등을 내밀게 했다.“여기부터.”바퀴가 손등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또르륵.“아.”나는 바로 눈을 깜빡였다.아프지는 않았다.그런데 작은 돌기들이 한꺼번에 지나가면서.손끝과도.깃털과도 전혀 다른 느낌이 남았다.“이상해.”“싫습니까.”“아니.”도현이 한 번 더.이번에는 손목 가까이까지 굴렸다.“으….”조금 더 선명했다.도현의 시선이 바로 올라왔다.“여기?”“응.”“색깔.”“초록.”“좋습니다.”그는 마사지 휠을 내려놓지 않았다.“오늘은 이것을 오래 쓸 생각입니다.”나는 눈썹을 올렸다.“어제처럼 중간에 치우는 거 아니고?”“마음 바뀌면 치울 수도 있습니다.”“역시.”도현이 아주 작게 웃었다.“하지만 지금은.”그의 눈빛이 천천히 달라졌다.“당신이 어디에서 가장 크게 반응하는지 전부 보고 싶습니다.”심장이 바로 빨라졌다.*“서십시오.”나는 침대 앞에 섰다.“손은?”“자유입니다.”“오늘도 안 묶어요?”“네.”“왜.”도현은 마사지 휠을 손가락 사이에서 한번 돌렸다.“움직여도 됩니다.”“진짜?”“네.”“그럼 피하면?”“제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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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화. 물이 닿은 자리를 따라

욕실 문이 열린 건 내가 잠옷을 꺼내고 있을 때였다.도현은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린 채 문 앞에 서 있었다.“서윤.”“응?”“오늘은 침실 말고.”나는 손에 들고 있던 옷을 내려다봤다.“욕실?”“네.”“씻었는데.”“다시 씻으라는 뜻 아닙니다.”그 말투에 바로 알아챘다.나는 잠옷을 다시 내려놨다.“뭐 준비했어요?”“하나.”“또 새 도구?”“오늘은 도구라고 하기도 애매합니다.”도현이 먼저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나는 따라갔다.세면대 옆에 처음 보는 물건이 놓여 있었다.손바닥만 한 둥근 실리콘 브러시.아주 촘촘하고 부드러운 돌기가 한쪽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나는 집어 들었다.“목욕 브러시?”“네.”“이걸로 뭘 하려고.”“오늘 써보고 싶었습니다.”나는 실리콘 돌기를 손가락으로 눌러봤다.푹 휘었다.아플 정도로 단단하지 않았다.“진짜 별걸 다 찾아오네.”도현이 내 손에서 브러시를 가져갔다.“싫습니까?”“아니.”“그럼 먼저.”그가 자기 팔 안쪽에 브러시를 천천히 굴리듯 문질렀다.사각.아주 작은 마찰음.어제 마사지 휠과는 달랐다.점들이 따로 지나가는 느낌이 아니라.넓게 피부를 쓸어가는 모양.“어때요?”“자극은 약합니다.”“그럼 왜 샀어.”도현은 브러시를 물에 한번 적셨다.“마르면 별것 아닌데.”그리고 다시 자기 팔을 쓸었다.사락.소리가 달라졌다.나도 눈썹을 올렸다.“젖으니까 다르네.”“네.”그가 나를 봤다.“당신에게도 먼저 손등으로 확인합니다.”나는 손을 내밀었다.젖은 실리콘 브러시가 손등 위를 천천히 지나갔다.“아….”생각보다 느낌이 선명했다.물기가 먼저 닿고.그 뒤에 아주 부드러운 돌기들이 따라왔다.“어떻습니까.”“안 아파.”“좋은 쪽?”“응.”다시 한 번.이번에는 손목까지.사락.“으… 이거 이상해.”도현의 시선이 바로 올라왔다.“어디가.”“물 때문에.”“물이 먼저?”“응. 그리고 바로 뒤에 이게 오니까.”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저도 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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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화. 떨림이 멈춘 뒤에도

도현이 꺼낸 건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검은 물건이었다. 나는 침대에 기대앉아 그걸 한참 바라봤다. “그건 또 뭐예요?” “진동 마사지 볼.” “마사지?” “네.” 도현이 버튼을 한번 눌렀다. 우웅. 낮은 진동음이 방 안에 퍼졌다. 나는 바로 눈썹을 올렸다. “이걸 플레이에 쓴다고?” “오늘은.” “어디에?” “처음에는 손.” 그는 먼저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렸다. 약한 단계. 우웅. 몇 초. 조금 더 강한 단계. 진동이 눈으로도 아주 미세하게 보였다. 도현은 다시 약하게 낮췄다. “아프지는 않습니다.” “간지러워?” “조금.” “나도 해봐요.” 나는 손을 내밀었다. 도현이 바로 기기를 주지 않았다. 대신. 내 손바닥을 위로 펼치게 했다. “제가 합니다.” “또 직접?” “네.” 기기가 손바닥 중앙에 닿았다. 우웅. “아….” 생각보다 바로 반응이 나왔다. 아픈 건 전혀 아닌데. 손바닥 전체가 간질거리듯 울렸다. 나는 손가락을 접으려 했다. “펴십시오.” “간지러워.” “싫습니까.” “아니.” “그럼 조금.” 나는 다시 손을 폈다. 도현은 같은 자리에 오래 두지 않았다. 손바닥에서. 손가락 아래쪽. 다시 손목 가까이. “으….” 진동이 위치를 바꿀 때마다 느낌도 달랐다. 도현은 내 얼굴만 보고 있었다. “여기가 더 큽니까.” “손목 쪽.” “왜.” “몰라… 그냥 더 이상해.” 도현이 기기를 잠깐 뗐다. 나는 바로 손을 흔들었다. “와.” “저립니까?” “아니. 남아 있는 느낌.” “진동이?” “응.” 그가 아주 작게 웃었다. “저도 그게 궁금했습니다.” “뭐가.” “떼고 난 다음.” 도현이 기기를 침대 위에 놓았다. 그리고. 방금 진동이 닿았던 손목을 맨손으로 잡았다. 순간. “하….” 내가 숨을 내쉬었다. 도현의 시선이 바로 달라졌다. “이게 더 좋습니까.” “응.” “기계보다?” “기계 쓰고 나서 손 닿는 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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