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의 모든 챕터: 챕터 381 - 챕터 390

420 챕터

380화. 읽지 못한 글자

도현이 침실로 들어왔을 때. 손에 들린 건 검은 상자도. 기계도 아니었다. 길쭉한 붓 하나였다. 나는 침대에 기대앉은 채 그대로 쳐다봤다. “설마 그림 그리려고요?” 도현이 붓을 손가락 사이에서 한번 돌렸다. “아닙니다.” “그럼 왜 붓을 들고 와.” “오늘 써보려고.” 나는 바로 몸을 일으켰다. “나한테?” “네.” 도현이 협탁 위에 작은 유리병 하나까지 올려놨다. 투명한 마사지 오일이었다. “이건 또 뭐예요.” “붓이 마른 상태보다 조금 다르게 느껴지는지 보려고.” “주인님 진짜 별걸 다 생각한다.” “싫습니까.” “아니.” 나는 붓끝을 손가락으로 한번 건드렸다. 털이 생각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이걸로 뭘 하는데요?” 도현은 바로 설명하지 않았다. 대신 자기 손목에 붓을 한번 그었다. 사악. 마른 붓이 지나가는 작은 소리. 이번에는 오일을 손등에 아주 조금 덜어. 붓끝에 묻혔다. 다시. 스윽. 소리도. 촉감도 확실히 달랐다. “어때요?” “마른 건 가볍고.” 도현이 자기 손목을 내려다봤다. “젖으면 조금 더 선명합니다.” “나도.” 나는 손을 내밀었다. 도현은 내 손바닥을 위로 돌렸다. “먼저 마른 것부터.” 사악. 붓끝이 손바닥 가운데를 지나갔다. “으….” 나는 손가락을 바로 접었다. 도현의 시선이 올라왔다. “간지럽습니까.” “조금.” “싫습니까.” “아니.” “손 펴십시오.” 다시 폈다. 이번에는 손바닥 한가운데가 아니라. 손가락 아래를 아주 천천히 스쳤다. “하….” 나도 모르게 숨이 길어졌다. “여기가 더?” “응.” 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알겠습니다.” “또 기억해두려고?” “네.” “무서워.” “표정은 전혀 아닙니다.” 나는 웃었다. “그건 맞아.” 도현이 오일을 아주 조금 붓끝에 묻혔다. “이번에는.” 젖은 붓이 손목 안쪽에 닿았다. 스윽. “아….” 마른 붓보다. 확실히 흔적이 오래 남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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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1화. 숨기지 말라고 했으니까

도현이 붓을 씻고 돌아왔을 때. 나는 아직도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팔 안쪽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일도 닦였고. 붓으로 지나간 흔적도 사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 무슨 글자를 썼는지는 계속 신경 쓰였다. “진짜 안 알려줄 거예요?” 도현이 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말했다. “네.” “왜.” “다음에 다시 쓰려고.” “그때도 안 알려주면?” “그건 그때.”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주인님 진짜.” 도현은 대답 대신. 씻은 붓을 완전히 말릴 수 있게 세워두고 침실로 들어왔다. “이제 자십시오.” “아직 안 졸린데.” “저는 조금 피곤합니다.” “그럼 자요.” 도현이 침대에 눕자. 나도 옆으로 돌아누웠다. 몇 분 정도. 정말 조용했다. 그런데.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도현 씨.” “네.” “안 자죠.” “아직.” “아까.” “무엇이.” 나는 잠시 망설였다. “숨기지 않겠다고 했잖아요.” 도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무엇을.” “소리.” 잠깐. 도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나는 괜히 이불 끝을 만졌다. “그냥.” “네.” “그 말이 계속 생각나서.” 도현이 몸을 옆으로 돌렸다. 나를 보는 자세. “왜.” “좋았어요.” “무엇이.” 나는 그를 봤다. “주인님도 흥분한 게 티 나는 거.” 도현의 눈빛이 아주 조금 달라졌다. “그게 그렇게 좋습니까.” “응.” “제가 평소엔 많이 숨겼습니까.” “조금.”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호흡도.” 나는 손가락으로 그의 셔츠 앞을 아주 가볍게 잡았다. “표정도.” “그리고?” “소리도.” 도현이 몇 초 나를 가만히 봤다. “그럼.” “응.” “오늘부터 매번 일부러 보여달라는 뜻입니까.”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참지만 말라는 거.” 그의 시선이 내 손으로 내려갔다. 셔츠를 잡은 손. “참지 말라.” “응.” “제가 하고 싶어서 나오는 건.”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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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화. 가장자리가 지나간 자리

도현이 오늘 꺼내온 건 처음엔 플레이 도구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흰색에 가까운 매끈한 도자기 조각. 손바닥보다 조금 작고. 한쪽은 둥글게. 다른 쪽은 완만하게 굴곡져 있었다. 나는 침대 위에 놓인 물건을 집어 들었다. “이거 괄사 아니에요?” “맞습니다.” “얼굴 마사지하는 거?” “이건 바디용.” 나는 바로 그를 봤다. “주인님 이제 마사지샵까지 차리려고?” 도현은 내 손에서 괄사를 가져갔다. “오늘 써보고 판단하겠습니다.” “뭘 판단해.” “당신이 좋아하는지.” “본인이 쓰고 싶어서 샀으면서.” “그것도 맞습니다.” 대답이 빨랐다. 나는 웃었다. 요즘 도현은 이런 걸 굳이 숨기지 않았다. 내가 원할 것 같아서. 좋아할 것 같아서. 그런 이유보다. 자기가 해보고 싶다는 말을 먼저 할 때가 늘었다. 도현은 괄사의 넓은 면을 자기 팔 위에 댔다. 천천히. 쓸어 올렸다. 스윽. “아파요?” “아닙니다.” 이번에는 가장자리 쪽. 압력은 훨씬 약하게. 짧게 지나갔다. “느낌이 달라요?” “네.” “나도.” 나는 손을 내밀었다. 도현이 손목 안쪽에 넓은 면을 먼저 댔다.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매끈한 표면. 그리고. 천천히. 스윽. “아….” 생각보다 숨이 먼저 나왔다. 도현의 시선이 바로 올라왔다. “벌써?” “생각보다 느낌 있어.” “아픕니까.” “아니.” “그럼.” 이번에는 손목에서 팔 중간까지. 조금 더 길게. “하….” 나도 모르게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손 펴십시오.” 나는 다시 폈다. “간지러운 건 아니고?” “응.” “어떻게 느껴집니까.” 나는 잠깐 생각했다. “눌리면서 지나가는 느낌.” “좋습니까.” “응.” “색깔.” “초록.” 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좋아.” 오늘은 침대에 눕히지 않았다. 도현은 나를 침대 앞에 세워두고. 자기는 뒤로 갔다. “등 돌린 채로?” “네.” “또 얼굴 주인님만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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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3화.향이 먼저 기억한 밤

도현의 손은 아직 내 허리에 있었다. 나는 그의 허리를 잡은 채 조금 더 가까이 붙었다. “주인님.” “네.” “아직도 끝난 것 같지 않은데.” 도현이 나를 내려다봤다. “무엇이.” “표정.” “제 표정이 왜.” 나는 그의 허리를 한 번 더 당겼다. “계속 뭔가 생각하는 얼굴.” 몇 초. 도현이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손을 천천히 풀었다. “맞습니다.” “뭐 생각했어요?” “새로 해보고 싶은 것.” 나는 바로 눈썹을 올렸다. “지금?” “오늘은 아닙니다.” “그럼 언제.” 도현이 잠깐 생각했다. “내일.” 다음 날 저녁. 침실에는 평소와 다른 향이 아주 희미하게 나고 있었다. 강한 향수 냄새는 아니었다. 깨끗한 나무 냄새에. 조금 달고 따뜻한 향. 나는 문 앞에서 바로 멈췄다. “뭐 뿌렸어요?” 도현은 침대 옆에 서 있었다. “알아챘습니까.” “응.” “싫습니까.” “아니. 근데 평소 향 아니잖아.” 도현이 협탁 위 작은 병을 들었다. 피부에 직접 뿌리는 향수가 아니라. 패브릭용 향이었다. 그 옆에는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남색의 긴 새틴 리본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바로 그걸 봤다. “오늘은 리본?” “네.” “묶으려고?” “아닙니다.” “그럼?” 도현이 리본을 집어 들었다. “오늘은 향을 입혔습니다.” 나는 웃었다. “리본에 향을?” “네.” 그가 리본 끝을 아주 가볍게 흔들었다. 향이 조금 더 가까워졌다. “왜.” “당신이 눈으로 보기 전에.” 도현이 내 앞으로 왔다. “향부터 기억하는지 궁금해서.” 나는 잠깐 그를 봤다. “오늘은 후각?” “그것만은 아닙니다.” “또 뭐 있어.” “촉감.” 도현이 리본 끝으로 내 손등을 아주 가볍게 쓸었다. 사락. “아….” 얇고 미끄러운 천이 피부를 지나갔다. 붓이나 깃털과도 달랐다. 부드럽긴 한데. 완전히 가볍지는 않았다.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느낌 있어.” “간지럽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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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4화. 차가운 선이 따뜻해질 때

도현은 서랍을 열지 않았다. 대신. 협탁 위 작은 천 주머니 하나를 올려놨다. 나는 침대 끝에 앉은 채 그걸 바라봤다. “오늘은 뭐예요?” “꺼내보십시오.” “내가?” “네.” 주머니를 열었다. 손끝에 먼저 닿은 건. 차갑고 매끄러운 금속이었다. 나는 안에 든 걸 천천히 꺼냈다. 얇은 스테인리스 체인. 목에 거는 액세서리도 아니었고. 잠금장치도 없었다. 그냥 길게 이어진. 매끈한 금속선이었다. “이걸 어디에 써요?” 도현이 내 손에서 체인을 받아 들었다. 찰랑. 작은 금속음. “묶는 데는 쓰지 않습니다.” “그럼?” “피부 위를 지나가게.” 나는 눈썹을 올렸다. “차갑겠다.” “그래서 골랐습니다.” 도현이 먼저 자기 손목 위에 체인을 올렸다. 금속이 피부에 닿으며 작게 움직였다. 찰락. “차갑습니까?” “처음에는.” 그는 손목 위에서 천천히 끌어내렸다. “하지만 오래 잡고 있으면 금방 따뜻해집니다.” “그 차이를 보려고?” “네.” 나는 웃었다. “주인님 진짜 이제 감각 차이 수집하는 사람 같다.” 도현이 나를 봤다. “싫습니까.” “아니.” “그럼 손.” 나는 오른손을 내밀었다. 도현이 체인을 손등 위에 올렸다. 순간. “아….” 생각보다 차가웠다. 손가락이 자동으로 움찔했다. 도현이 바로 물었다. “괜찮습니까.” “응.” “차가운 정도.” “놀란 정도?” “싫지는 않고.” “초록?” “네.” “좋습니다.” 그가 체인 끝을 잡고. 손등 위를 아주 천천히 움직였다. 찰랑. 차가운 점들이 연속해서 지나갔다. “하….” 이번에는 숨이 조금 길게 나왔다. 도현의 시선이 바로 얼굴로 올라왔다. “벌써.” “뭐가.” “숨.” “차가워서.” “정말?” 나는 그를 보다가 웃었다. “반쯤.” “나머지는.” “주인님이 보고 있으니까.” 도현의 눈빛이 아주 조금 짙어졌다. “그렇군요.” “일어나십시오.” 나는 침대에서 내려왔다. 도현은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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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5화. 부드러운 쪽이 더 위험했다

도현이 꺼낸 걸 보고.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게 오늘 도구예요?” “네.” “진짜?” 도현의 손바닥 위에는 둥근 벨벳 퍼프가 올라가 있었다. 화장할 때 쓸 법한. 보송하고 부드러운 천. 나는 받아서 손가락으로 눌러봤다. 폭신했다. 단단한 부분도. 날카로운 가장자리도 없었다. “이걸로 뭘 해요.” “닿게 합니다.” “그게 끝?” “해보고 말하십시오.” 도현은 내 손에서 퍼프를 다시 가져갔다. 나는 웃었다. “주인님 이제 진짜 아무거나 가져오는 것 같은데.” “아무거나 고른 건 아닙니다.” “왜 이건데.” 도현이 자기 손목 위에 퍼프를 눌렀다. 살짝. 그리고 천천히 끌어내렸다. 사각. 거의 들리지 않는 소리. “지난 며칠 동안.” 그가 말했다. “차갑고 단단한 것도 써봤고.” 체인. 괄사. “굴러가는 것도.” 마사지 휠. “젖은 것도.” 브러시. “진동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늘은 반대로.” 그가 퍼프를 들었다. “아무 위협도 없어 보이는 걸 써보고 싶었습니다.” 나는 웃었다. “위협?” “보기에는.” 그가 내 손을 내밀게 했다. “이것만큼 순한 게 없으니까.” 퍼프가 손바닥 중앙에 닿았다. 꾹 누르지 않았다. 그저. 포근하게 덮였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건 진짜 별거 없는데.” “그렇습니까.” “응.” 도현이 퍼프를 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손목 안쪽. 천천히. 사락. “아….” 소리가 바로 달라졌다. 나는 스스로도 놀라 손목을 봤다. 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방금.” “위치가 다르잖아.” “그래서?” “여기는 좀….” “민감하고?”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좋습니다.” “그 표정 뭐야.” “아무것도 아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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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6화. 어떤 천인지 맞히지 마십시오

도현이 침실에 들어오면서 손에 들고 있던 건 작은 상자였다. 나는 침대에 앉아 있다가 바로 그쪽을 봤다. “또 뭐예요?” “오늘은 여러 개입니다.” “여러 개?” 상자가 열렸다. 안에는 길게 잘린 천 조각이 세 장 들어 있었다. 하나는 매끄러운 새틴. 하나는 보송한 벨벳. 마지막 하나는 아주 얇고 부드러운 면직물이었다. 나는 순간 웃었다. “원단 샘플?” “비슷합니다.” “이걸 플레이에 쓰려고 샀어요?” “네.” “주인님 요즘 진짜 범위 넓다.” 도현은 새틴부터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다. 스르륵. “오늘은 맞히는 놀이 아닙니다.” “그럼?” “어떤 게 닿는지 알려고 하지 마십시오.” 나는 눈썹을 올렸다. “눈 뜨고 있는데 어떻게 몰라.” “제가 뒤에서 합니다.” “아.” “그리고.” 도현이 나를 바라봤다. “오늘은 반응이 나오면 그걸 숨기지 마십시오.” 심장이 바로 조금 빨라졌다. “소리도?” “네.” “또 주인님 취향.” “싫습니까.” “아니.” 나는 솔직하게 웃었다. “요즘은 나도 그게 더 좋아.” 도현의 시선이 잠깐 깊어졌다. “좋습니다.” 그는 천 세 장을 침대 위에 나란히 놓았다. “강도는 중간에서 시작합니다.” “통증은?” “없습니다.” “결박?” “없고.” “그럼 손 자유?” “처음에는.” 나는 바로 웃었다. “처음에는?” “제가 바꾸고 싶으면 바꿉니다.” “주인님 마음대로?” “네.” 대답이 너무 빨랐다. “좋아요.” “색깔.” “초록.” “좋아.” “등 돌리십시오.” 나는 침대 앞에 서서 등을 돌렸다. 도현이 뒤에 있는 건 알았지만. 무엇을 집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손은 편하게.” “네.” 잠깐.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괜히 귀를 세웠다. 천이 움직이는 아주 작은 소리. 그리고. 손목. 스르륵. “하….” 첫 번째부터 숨이 새었다. 매끄러웠다. 아마 새틴. 나는 바로 말했다. “이거 새틴.” 뒤에서 도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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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화. 당기지 말라고 했는데

도현이 꺼내온 건 처음 보는 긴 밴드였다. 고무처럼 얇은 운동용 밴드가 아니라. 폭이 넓고 부드러운 천으로 감싸진 탄성 밴드. 나는 침대 위에 놓인 걸 집어 들었다. “이건 진짜 운동하는 거 아니에요?” “원래는 그렇습니다.” “근데 오늘은 아니고?” “네.” 도현이 내 손에서 밴드를 가져갔다. 양쪽 끝을 잡고 천천히 당겼다. 천이 팽팽해졌다가. 손의 힘을 풀자 다시 원래 길이로 돌아왔다. “오늘은 이걸로 힘을 느껴보고 싶습니다.” “무슨 힘.” “당기는 힘.” 나는 눈썹을 올렸다. “내가 당기는 거?” “처음에는.” “주인님은?” “제가 반대쪽을 잡습니다.” 도현은 밴드 한쪽을 내게 내밀었다. “당겨보십시오.” 나는 끝부분을 잡았다. 도현이 반대편을 잡았다. “얼마나.” “편한 만큼.” 살짝 힘을 줬다. 천이 팽팽해졌다. 도현의 손도 아주 조금 내 쪽으로 움직였다. 나는 바로 웃었다. “이거 아까 리본이랑 비슷한데.” “다릅니다.” “뭐가.” 도현이 자기 쪽으로 조금 힘을 줬다. 순간. 밴드가 팽팽해지면서 내 팔까지 따라 움직였다. “아.” “리본은 당기면 따라왔고.” 다시. 힘이 풀렸다. “이건 반대편에서 버틸 수 있습니다.” 나는 밴드를 다시 당겼다. 이번에는 도현도 같은 힘으로 버텼다. 둘 사이 가운데에 팽팽한 선 하나가 생겼다. “오.” “어떻습니까.” “생각보다 힘 들어가.” “아픕니까.” “아니.” “손목은.” “괜찮고.” “좋습니다.” 나는 조금 더 당겨봤다. 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 “벌써 세게 합니까.” “어디까지 버티나 보려고.” “제가 오늘 그걸 하려고 했는데.” 나는 웃었다. “내가 먼저.” 도현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럼.”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순간.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끌려갔다. “읏….” 밴드가 느슨해졌다. 도현이 바로 손을 멈췄다. “괜찮습니까.” “응.” “색깔.” “초록.” “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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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8화. 당기지 않아도 남는 감각

도현이 오늘 꺼내온 건 처음 봤을 때 도무지 플레이 도구처럼 보이지 않았다. 작고 투명한 실리콘 컵 세 개. 크기도 조금씩 달랐다. 나는 침대 위에 놓인 걸 하나 집어 들었다. 말랑했다. 손가락으로 누르자 금방 찌그러졌다가 다시 원래 모양으로 돌아왔다. “이건 뭐예요?” “실리콘 마사지 컵.” “부항 같은 거?” “비슷하게 보이지만 오늘은 아주 약하게만 씁니다.” 나는 바로 눈썹을 올렸다. “붙이는 거예요?” “네.” “아파요?” “세게 흡착시키지 않으면 거의 없습니다.” 도현은 말하면서 가장 작은 컵을 자기 팔 바깥쪽에 먼저 댔다. 가운데를 살짝 누르고. 피부에 붙인 뒤 손을 뗐다. 톡. 컵이 그대로 붙었다. 나는 웃었다. “뭔가 귀여운데.” 도현이 나를 봤다. “플레이 시작하고도 그렇게 말하는지 보겠습니다.” “왜. 안 귀여워져?” “모르겠습니다.” 몇 초 뒤. 그가 컵 가장자리를 살짝 들어 공기를 넣었다. 툭. 바로 떨어졌다. 피부에는 아주 옅은 자국만 남았다. “어때요?” “당기는 느낌 정도.” “통증은?” “없습니다.” 도현은 이번에는 자기 손등에 붙여보고. 다시 떼었다. 그 과정을 전부 확인한 뒤에야 나를 봤다. “손 내미십시오.” 나는 오른팔을 내밀었다. “여기부터?” “네.” 도현이 가장 작은 컵을 내 팔 바깥쪽에 댔다. 살짝 누르고. 톡. “아.” 나도 모르게 짧은 소리가 났다. 아프진 않았다. 그런데. 피부 한 점을 가볍게 잡아당긴 채 놓지 않는 느낌이 낯설었다. “어떻습니까.” “이상해.” “싫습니까.” “아니.” “당김?” “응. 약하게 잡혀 있는 것 같아.” 도현이 컵을 손끝으로 아주 살짝 건드렸다. 흔들. “읏….” 이번에는 바로 팔에 힘이 들어갔다. 도현의 시선이 올라왔다. “이게 더 큽니까.” “건드리니까.” “아프고?” “아니. 그냥 붙어 있는 게 움직여서.” “색깔.” “초록.” “좋습니다.” 그는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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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화. 준비하지 않은 밤

서윤이 현관문을 닫자마자 말했다. “오늘 진짜 아무것도 하기 싫어.” 도현은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보고 있었다. 시선만 들었다. “회의 길었습니까.” “세 시간.” 서윤은 가방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파리 쪽은 자기들 보고서가 급하다고 하고, 뮌헨은 다음 분기 예산 먼저 확정해달라고 하고, 프라하는 둘 다 기다리면 된다고 하고.” “카렐은?” “퇴근했어요.” “잘했군요.” “나도 알아.” 서윤은 구두를 벗었다. “그래서 나도 그냥 퇴근했어. 해결 안 된 거 그대로 두고.” 도현이 노트북을 닫았다. “잘했습니다.” 서윤은 그를 빤히 봤다. “오늘은 잔소리 안 하네.” “제가 왜 합니까.” “예전이면 업무가 머릿속에 남아 있냐고 물어봤을 것 같은데.” “남아 있습니까.” “엄청.” “그렇군요.” 끝이었다. 도현은 더 캐묻지 않았다. 서윤은 오히려 그게 이상해 거실로 들어왔다. “끝?” “무엇이.” “질문.” “더 듣고 싶으면 말하십시오.” “아니.” 도현은 다시 노트북을 들려다가 멈췄다. 서윤이 여전히 앞에 서 있었다. “왜.” “그냥.” “그냥?” “오늘 주인님 되게 얌전해서.” 도현의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얌전하다.” “응.” “집에 들어온 지 삼 분 됐습니다.” “그래서?” 도현은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벌써 판단합니까.” 서윤이 웃었다. “그럼 아닌가 봐.” “모르겠습니다.” 도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셔츠 소매를 한 번 접었다. 그리고 한 번 더. 서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의 팔로 내려갔다. 도현이 바로 알아챘다. “왜 봅니까.” “그냥.” “거짓말.” “팔 봤어.” “왜.” “소매 걷으니까.” 도현이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좋습니까.” “응.” “많이?” 서윤이 웃었다. “왜 갑자기 캐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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