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열두 번째 명령이 끝나면: Chapter 431 - Chapter 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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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0화. 그가 보고 싶은 나

일요일 오후.서윤은 세탁물을 정리하다가 도현의 흰 셔츠 한 장을 꺼냈다.어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제 셔츠면 좋겠습니다.서윤은 셔츠를 든 채 잠시 서 있었다.그러다 침실 쪽을 확인했다.도현은 서재에 있었다.서윤은 옷걸이에 셔츠를 걸었다가 다시 내렸다.“한번 입어보는 건 괜찮잖아.”혼잣말을 하고는 결국 옷을 갈아입었다.자신이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고 도현의 셔츠를 걸쳤다.역시 컸다.소매는 손등을 덮었고 품도 넉넉했다.단추를 아래에서부터 몇 개 잠그다가 손이 멈췄다.어제 자신이 한 말까지 떠올랐다.단추를 몇 개 잠글지는 내가 정할게요.서윤은 거울을 바라봤다.두 개를 더 잠갔다.다시 하나를 풀었다.“이건 너무 노렸나.”다시 잠갔다.그런데 이번에는 답답해 보였다.결국 또 풀었다.혼자 몇 번이나 단추를 만지던 순간이었다.“뭘 그렇게 고민합니까.”서윤이 화들짝 돌아봤다.문 앞에 도현이 서 있었다.“언제 왔어요?”“방금.”“노크는?”“침실 들어오는데 노크해야 합니까.”“오늘부터 해요.”도현은 대답하지 않았다.시선이 이미 서윤에게 향해 있었다.정확히는 자신이 입던 흰 셔츠를 입고 있는 서윤에게.서윤은 괜히 소매를 당겼다.“왜 그렇게 봐요.”“입어봤습니까.”“사이즈 확인.”“《사이》도 아직 완성 안 됐는데?”“미리 확인하는 거죠.”도현이 천천히 가까이 왔다.서윤은 거울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어때요?”“좋습니다.”“그게 끝?”“생각했던 것보다.”도현이 말을 멈췄다.서윤이 눈썹을 올렸다.“보다?”“좋습니다.”서윤이 웃었다.“구체적으로 말해봐요.”“소매가 긴 것도.”도현이 손을 들어 서윤의 손등을 덮은 소매 끝을 만졌다.“당신 옷이 아니라는 게 확실히 보이는 것도.”손끝이 셔츠 깃으로 올라왔다.“그리고.”도현의 시선이 열려 있는 단추 근처에서 잠깐 멈췄다.“여기까지.”서윤은 그의 시선을 따라 내려다봤다.“이거 일부러 이렇게 한 거 아니에요.”“아무 말 안 했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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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화. 그리지 못한 얼굴

월요일 밤.서윤은 도현의 스케치북을 펼쳐보다가 마지막 장에서 손을 멈췄다.흰 셔츠. 풀어진 머리. 웃기 직전의 얼굴.그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림도,선을 잡아둔 흔적도 없었다.서윤은 주방에 있는 도현을 불렀다.“도현 씨.”“네.”“이거 뭐예요?”도현이 물컵을 들고 들어왔다.서윤이 스케치북을 들어 보였다.“봤습니까.”“보라고 둔 거 아니었어요?”“숨기지는 않았습니다.”서윤은 다시 글씨를 내려다봤다.“근데 왜 그림은 없어요?”“못 그렸습니다.”뜻밖의 대답이었다.“왜요?”도현이 옆에 앉았다.“기억이 안 나서.”서윤의 눈썹이 올라갔다.“나를 그렇게 오래 봐놓고?”“셔츠도 기억나고, 머리도 기억납니다.”“그럼?”도현은 잠시 서윤의 얼굴을 바라봤다.“표정이 기억이 안 납니다.”“내 표정?”“네.”“왜?”“계속 바뀌어서.”서윤이 웃었다.“그걸 못 그리는 거예요?”“하나를 고를 수가 없습니다.”처음 거울을 보던 얼굴.자신이 흰 셔츠를 좋아한다고 하자 조금 민망해하던 얼굴.장난치던 얼굴.자신의 손을 잡아끌던 얼굴.그리고 결국 그림 연습을 포기하게 만들었던 얼굴까지.“그래서 한 줄만 써놓은 거예요?”“네.”서윤은 스케치북을 덮었다.“그럼 연습해야겠네.”“뭘.”“사람 그리는 거.”“《사이》에서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본편은 거기서 하고.”서윤이 소파에서 일어났다.“연습은 지금.”“지금?”“응.”서윤은 자신의 작업 공간으로 들어갔다.잠시 뒤 작은 메모지 묶음과 펜을 들고 나왔다.도현이 그것을 보고 물었다.“그걸로?”“어차피 연습인데.”서윤은 식탁 의자를 끌어다 창가에 놓았다.그리고 앉았다.“5분.”“너무 짧습니다.”“그러니까 얼굴만.”서윤은 턱을 괴었다.“시작.”도현이 결국 맞은편에 앉았다.펜을 들었다.처음 몇 초 동안은 아무것도 그리지 않았다.서윤이 물었다.“왜 안 해요?”“움직이지 마십시오.”“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는데.”“말하면서 움직였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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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2화. 방해하지 않겠다는 약속

“그건 약속 못 하는데.”서윤의 대답에 도현이 예상했다는 듯 웃었다.“그럴 줄 알았습니다.”“왜요?”“지난번에도 그림보다 키스를 먼저 선택했으니까.”“그건 도현 씨도 똑같았잖아요.”서윤이 스케치북을 품에 안았다.“싫었어요?”“아니요.”“그럼 됐네.”도현은 반박하지 않았다.서윤은 두 사람이 그린 메모지를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스케치북을 책장에 꽂았다.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 돌아섰다.“그러면 연습 방법을 바꾸면 되겠다.”“어떻게.”“시간 제한.”도현의 눈썹이 올라갔다.“《사이》에서 나 그릴 때 삼십 분.”“짧습니다.”“한 시간?”“그것도.”“얼마나 필요한데요?”도현은 태연하게 말했다.“모르겠습니다.”“사람 하나 그리는데?”“당신이 계속 움직일 테니까.”서윤이 팔짱을 꼈다.“나 가만히 잘 있거든요.”도현이 대답하지 않았다.그 침묵이 더 얄미웠다.“왜 아무 말 안 해요.”“오늘 5분도 실패했습니다.”“도현 씨가 쳐다봐서 웃은 거잖아요.”“그림을 그리려면 봐야 합니다.”“그러니까.”서윤은 잠시 고민했다.“좋아요. 연습 한 번 더.”“지금?”“응.”서윤은 소파에 앉았다.이번에는 등을 편하게 기대고 두 다리를 소파 위로 올렸다.“아까처럼 포즈 잡고 있으면 자꾸 신경 쓰이니까 그냥 있을게요.”“뭘 하면서?”“책 읽을래요.”테이블에 놓여 있던 책을 집었다.“도현 씨는 알아서 그려요.”“이번에는 방해 안 합니까.”서윤이 책을 펼치며 말했다.“안 해요.”“확실합니까.”“네.”도현은 잠시 그녀를 보다가 결국 스케치북을 가져왔다.맞은편 의자에 앉았다.이번에는 정말 조용했다.서윤은 책을 읽었다.도현은 그렸다.사각거리는 연필 소리만 가끔 들렸다.십 분.이십 분.처음에는 신경 쓰이던 시선도 시간이 지나자 익숙해졌다.서윤은 책에 집중했다.다리를 조금 움직였다가 다시 편하게 접었다.머리카락이 앞으로 흘러내리면 귀 뒤로 넘겼다.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자세를 고쳐달라는 말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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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3화. 완성하지 않은 그림

다음 날 아침.서윤은 거실 테이블 앞에서 한참 서 있었다.어젯밤 그대로 펼쳐진 스케치북 때문이었다.책을 읽고 있는 자신의 모습.아직 얼굴 한쪽과 머리카락 끝부분은 선이 덜 들어가 있었다.분명 미완성이었다.그런데 이상하게 계속 눈이 갔다.서윤은 의자에 앉아 그림을 가까이 끌어왔다.그리고 그 옆에 놓인 연필을 들었다.한참 고민하다가 그림 아래 아주 작게 적었다.방해하기 전.쓰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뭘 합니까.”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서윤이 급히 손으로 글씨를 가렸다.도현이 주방에서 커피 두 잔을 들고 나오고 있었다.“아무것도.”“제 스케치북에 뭘 쓴 것 같은데.”“잘못 봤어요.”도현이 커피를 내려놓고 다가왔다.서윤은 스케치북을 닫으려 했다.한발 늦었다.도현이 손으로 막았다.“보여주십시오.”“싫어요.”“제 겁니다.”“내 그림이잖아요.”“제가 그렸습니다.”“모델 권리.”도현이 결국 웃었다.서윤이 손을 치우자 작은 글씨가 드러났다.방해하기 전.도현이 그것을 내려다봤다.“왜요.”“아무것도 아닙니다.”“웃었잖아요.”“맞는 말이라서.”서윤은 커피를 들었다.“그래서 이거 오늘 완성할 거예요?”도현이 그림을 봤다.잠시 대답이 없었다.“아니요.”“왜?”“그대로 둘 겁니다.”서윤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어제는 완성한다고 했잖아요.”“생각이 바뀌었습니다.”“어디가 마음에 안 들어요?”“반대입니다.”도현은 그림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한번 쓸었다.“여기서 더 그리면 어제 그 순간이 아닌 것 같아서.”서윤은 그림을 다시 봤다.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은 선.조금 비어 있는 부분.그런데 그래서 오히려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그럼 《사이》에서 그리는 건?”“새로 그립니다.”“흰 셔츠?”“약속했잖습니까.”서윤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그때는 완성할 수 있을까?”“당신이 방해하지 않으면.”또 그 말이었다.서윤이 눈을 가늘게 떴다.“계속 그렇게 말하면 진짜 방해할 건데.”“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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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4화. 종이 밖으로 나온 방

월요일 저녁.현관문을 열자마자 서윤은 평소와 다른 냄새를 맡았다.나무와 페인트가 섞인 듯한 냄새.신발을 벗기도 전에 안쪽을 바라봤다.“시작했어요?”주방에서 나오던 도현이 고개를 끄덕였다.“오늘 오전부터.”서윤은 가방을 내려놓고 곧장 복도 끝으로 향했다.《사이》가 될 방의 문은 열려 있었다.아직 완성된 건 거의 없었다.기존 가구는 전부 빠졌고 벽 한쪽에는 작업용 보호지가 붙어 있었다.바닥에는 자재가 정리되어 있었다.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전혀 다른 공간처럼 보였다.서윤은 문턱 앞에 서서 한참 안을 바라봤다.“이상하다.”뒤따라온 도현이 물었다.“뭐가.”“진짜 생기고 있잖아요.”그동안 수없이 봤던 도면.스케치북에 그려진 선.소파 위치를 바꾸고,거울 각도를 고민하고,러그와 나무를 골랐던 것들이 실제 방 안에 하나씩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서윤이 안으로 한 걸음 들어갔다.“여기가 의자?”창가 가까운 곳을 가리켰다.“네.”“거울은?”도현이 맞은편 벽을 가리켰다.“저쪽.”서윤은 창가로 가서 뒤를 돌아봤다.머릿속으로 완성된 모습을 그려봤다.차콜색 의자.그 위에 앉아 있을 도현.자신은 그 무릎 위.그리고 맞은편의 커다란 거울.서윤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도현이 물었다.“왜 웃습니까.”“안 웃었어요.”“웃었습니다.”“그냥 위치 확인한 거예요.”“무슨 위치를 확인했는지는 알 것 같습니다.”서윤이 돌아봤다.“말하지 마요.”“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얼굴이 했어요.”도현이 작게 웃었다.서윤은 괜히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여기가 소파고.”“네.”“여기는 책장.”“맞습니다.”마지막으로 방 가운데.일부러 비워두기로 했던 곳에 섰다.서윤은 양팔을 조금 벌려봤다.생각보다 넓었다.“여기 러그 깔리면 진짜 누워 있기 좋겠다.”“그래서 큰 걸 골랐잖습니까.”“도현 씨도 같이 누울 거죠?”“싫다고 한 적 있습니까.”서윤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됐어요.”한 바퀴를 더 돌아본 뒤에야 밖으로 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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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5화. 문을 여는 날

토요일 오전부터 서윤은 이상할 정도로 시계를 자주 봤다.오전 열한 시.열두 시 십 분.한 시 반.도현은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보고 있다가 결국 물었다.“오늘만 몇 번째입니까.”서윤이 휴대폰 화면을 껐다.“뭐가요.”“시간 확인하는 거.”“그냥 본 건데.”“밤에는 시계도 안 보겠다던 사람이 낮에는 계속 보고 있습니다.”서윤은 대답 대신 소파 쿠션을 끌어안았다.《사이》의 문은 여전히 닫혀 있었다.어제 모든 작업이 끝났다.청소도 끝났고 가구 배치까지 마쳤다.하지만 서윤은 보지 않았다.완성된 뒤 처음 문을 여는 건 자신이 하고 싶다고 했으니까.“몇 시에 들어갈 거예요?”도현이 물었다.“밤.”“몇 시.”“그건 안 정했어요.”“그럼 왜 계속 시간을 봅니까.”서윤이 결국 도현을 노려봤다.“기다리니까 그렇죠.”도현이 웃었다.“그렇게 궁금하면 지금 들어가도 됩니다.”“싫어요.”대답은 단호했다.“왜.”“기다렸으니까 끝까지 기다릴래.”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오늘 저녁은 일찍 먹어요.”“알겠습니다.”“휴대폰도 충전해두고.”“밖에 둘 거라면서요.”“그러니까 들어가기 전에 필요한 거 다 하고.”서윤은 손가락을 접으며 하나씩 확인했다.“내일 일정 없죠?”“없습니다.”“급한 연락 올 것도?”“없습니다.”“좋아.”도현이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긴장됩니까.”“아니.”“또 바로 대답합니다.”서윤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그리고 인정했다.“조금.”“왜.”그 이유는 서윤도 정확히 몰랐다.그저 방 하나일 뿐이었다.그런데 몇 주 동안 둘이 원하는 걸 하나씩 골랐다.함께 누울 러그.나란히 앉을 소파.둘이 들어갈 만큼 넓은 의자.서로를 볼 거울.아무것도 보지 않고 싶을 때 완전히 끌 수 있는 조명.같이 그림을 그릴 도구.그리고 끝까지 비워둔 공간.서윤이 말했다.“처음이라서.”도현은 더 묻지 않았다.밤 아홉 시 십칠 분.서윤은 침실에서 나왔다.편한 검은색 바지에 얇은 니트.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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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화. 이번에는 내 무릎에

“여기로.”서윤이 두 팔을 벌린 채 자신의 앞을 가리켰다.도현은 움직이지 않았다.“왜요?”“제가 제대로 들은 건지 생각 중입니다.”“뭘 생각까지 해요.”서윤이 의자 등받이에 더 깊게 기대었다.“지난번에는 내가 도현 씨 무릎에 앉았잖아요.”“네.”“오늘은 반대.”도현이 의자를 한번 봤다.두 사람이 함께 앉으려고 일부러 넓은 걸 골랐지만, 애초에 이런 방식까지 생각한 건 아니었다.“제가 앉으면 당신이 불편할 텐데.”“그러니까 완전히 앉으라는 게 아니잖아요.”서윤이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와봐요.”도현이 결국 다가왔다.서윤은 그의 손을 잡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옆으로.”도현이 조심스럽게 몸을 낮췄다.정확히 무릎 위라기보다 서윤의 다리와 의자 사이에 체중을 나눠 기대는 자세가 됐다.서윤이 바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봐요. 되잖아.”“이걸 하려고 큰 의자를 산 겁니까.”“새로운 용도 발견.”도현이 웃었다.서윤은 그의 등을 감싼 채 거울을 바라봤다.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늘 자신을 안고 있던 도현이 지금은 자신의 품 안에 있었다.서윤의 턱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좋다.”“뭐가.”“도현 씨가 나한테 기대 있는 거.”서윤은 그의 등을 천천히 쓸었다.“좀 더 기대봐요.”“이 이상?”“응.”도현이 조심스럽게 힘을 뺐다.등이 서윤에게 조금 더 닿았다.그 순간 서윤이 웃었다.“이거.”“왜요.”“내가 원했던 거 맞네.”도현이 고개를 돌렸다.“뭘 말입니까.”“전에 거울 앞에서 말했잖아요.”자신이 안기는 모습만 보고 싶은 게 아니라고.자신이 도현을 안고 있는 모습도 보고 싶다고.그때는 서서 잠깐 해봤을 뿐이었다.지금은 달랐다.도현이 정말 자신의 품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서윤은 거울 속 모습을 한참 바라봤다.“도현 씨.”“네.”“나한테 기대는 거 어색해요?”잠시 뒤 대답이 돌아왔다.“조금.”“싫어요?”“아니요.”서윤의 팔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그럼 조금만 더 있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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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7화. 첫날 밤의 두 번째 선택

러그 위에 누운 채 서윤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도현의 팔을 베고 누워 천장만 바라봤다.낮게 켜둔 간접조명 때문에 방 안에는 부드러운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있었다.음악도 어느새 멈췄다.“도현 씨.”“네.”“우리 지금 몇 시쯤 됐을까요?”“시간 안 보기로 했습니다.”“알아요. 그냥 맞혀보라고.”도현이 잠시 생각했다.“열한 시?”“나는 열두 시 넘었을 것 같은데.”“확인할까요?”“아니.”서윤이 바로 대답했다.“궁금한 채로 있을래요.”도현의 가슴에 뺨을 붙였다.규칙처럼 정해놓고 지키려는 게 아니었다.그저 오늘만큼은 다음 시간이 무엇인지 몰라도 괜찮았다.잠시 뒤 서윤이 몸을 일으켰다.“배고파요.”도현도 따라 일어났다.“뭐 먹을까요.”“잠깐.”서윤이 그의 손목을 잡았다.“밖에 나가면 휴대폰 보게 될 것 같아.”“안 보면 됩니다.”“냉장고에 뭐 있어요?”“샌드위치 만들어 먹을 정도는.”서윤은 잠시 고민하다가 일어섰다.“그럼 빨리 갔다 와요.”“같이 안 갑니까?”“나는 여기 있을래.”“혼자?”“응.”서윤이 러그 위에 다시 털썩 누웠다.“도현 씨 없는 《사이》도 한번 있어보고 싶어.”도현이 문 앞에서 돌아봤다.“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천천히 해요.”문이 열렸다.그리고 닫혔다.서윤은 혼자 남았다.조용했다.그녀는 천장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소파.책장.거울.창가의 의자.조금 전까지 도현과 함께 있었던 자리들이 눈에 들어왔다.이상하게 외롭지는 않았다.오히려 편했다.서윤은 일어나 책장으로 갔다.아직 책이 많지는 않았다.둘이 같이 읽을 만한 것 몇 권.도현의 건축 책 몇 권.그리고 아래쪽 한 칸에는 작은 상자가 놓여 있었다.서윤이 열어봤다.두 장의 메모지가 들어 있었다.자신이 그린 도현.나를 볼 때 제일 다정한 사람.그리고 도현이 그린 자신.나를 보고 웃기 직전.“벌써 가져다 놨네.”서윤은 혼자 웃었다.그때 문이 열렸다.“뭘 보고 있습니까.”도현이었다.한 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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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8화. 불을 켠 뒤에도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서윤은 어둠 속에서 도현의 가슴에 기대 있었다.방 안은 조용했다.희미하게 들리는 건 서로의 숨소리뿐이었다.“도현 씨.”“네.”“안 졸려요?”“조금.”“나도.”그렇게 말하면서도 서윤은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도현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다가 손목으로 내려갔다.익숙한 은색 팔찌가 손끝에 걸렸다.서윤은 각인된 부분을 찾아 천천히 문질렀다.“이거 여기서 만지니까 이상하다.”“팔찌?”“응.”붙잡아 달라고 말할 수 있도록.처음 이 문장을 봤을 때와 지금은 느낌이 많이 달랐다.서윤이 도현의 손을 꽉 잡았다.“지금은 말 안 해도 잡고 있는데.”“그러네요.”“도현 씨도.”“네.”“잡아달라고 말해도 돼요.”잠깐 정적이 흘렀다.도현이 손을 뒤집어 서윤의 손을 맞잡았다.“그럼 잡고 있어주십시오.”서윤은 대답 대신 손에 힘을 줬다.“이렇게?”“조금 더.”서윤이 웃었다.“욕심 생겼네.”“말해도 된다면서요.”“잘했어요.”서윤은 그의 손을 놓지 않은 채 몸을 일으켰다.어둠에 눈이 익었지만 여전히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갑자기 궁금해졌다.“나 지금 보고 싶어요?”“네.”“얼마나?”“불을 켜고 싶을 정도로.”서윤이 소파에서 내려왔다.“그럼 켜요?”“당신이 정하십시오.”서윤은 조명 스위치 앞에 섰다.손끝이 다이얼에 닿았다.아주 조금 돌렸다.바닥 가까이부터 희미한 빛이 번졌다.조금 더.소파의 윤곽이 보였다.도현의 얼굴도 천천히 드러났다.서윤은 거기서 멈췄다.“이 정도.”도현이 그녀를 바라봤다.서윤도 그를 봤다.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옷깃도 마찬가지였다.서윤은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려다 거울과 눈이 마주쳤다.그리고 웃었다.“엉망이네.”“누가요.”“둘 다.”도현이 일어났다.서윤 앞으로 걸어왔다.“후회합니까.”“뭘.”“거울 크게 한 거.”“전혀.”서윤은 거울 앞으로 갔다.도현도 자연스럽게 뒤에 섰다.서윤은 거울 속의 자신보다 도현을 먼저 봤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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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9화. 아침이 된 줄도 모르고

서윤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천장이었다.익숙한 침실 천장이 아니었다.낮은 간접조명.벽을 따라 이어진 책장.그리고 시야 끝에 걸린 커다란 거울.서윤은 몇 초 동안 눈만 깜빡였다.그러다 자신의 허리를 감싸고 있는 팔을 느꼈다.“아.”《사이》였다.정말 여기서 잠들었다.서윤은 몸을 돌렸다.도현은 아직 자고 있었다.러그 위에 나란히 누운 채였다.언제 가져왔는지 얇은 이불까지 덮여 있었다.서윤은 어젯밤을 천천히 떠올렸다.춤을 췄고.그림을 그리다가 실패했고.샌드위치를 먹었다.불을 껐다가 다시 켰다.소파에 있다가 러그로 내려왔다.그 뒤로는—서윤이 입술을 꾹 눌렀다.“진짜 오래 있었네.”목소리를 낮췄는데도 도현이 눈을 떴다.“깼습니까.”잠긴 목소리였다.“응.”“잘 잤어요?”“도현 씨는?”“방금까지 잘 잤습니다.”서윤이 웃었다.“여기서 자니까 어때요?”도현은 잠시 주변을 봤다.“침대가 더 편합니다.”“분위기 없게.”“허리는 솔직합니다.”서윤이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그러게 누가 여기서 자자고 했지.”“당신.”“말리지 그랬어요.”“안 들었을 것 같은데.”“맞아요.”서윤은 다시 도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몇 시지?”둘 다 동시에 문 쪽을 봤다.휴대폰도 시계도 밖에 있었다.서윤은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말했다.“근데 밖이 밝긴 해요.”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아침은 맞는 것 같습니다.”“몇 시인지는 모르고?”“네.”서윤이 만족스럽게 다시 누웠다.“그럼 됐어.”“확인 안 합니까.”“조금 있다가.”도현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줬다.서윤은 그 손길을 받다가 갑자기 물었다.“도현 씨.”“네.”“어제 제일 좋았던 거 뭐였어요?”“하나만?”“응.”도현은 꽤 오래 생각했다.서윤이 그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툭 쳤다.“왜 그렇게 오래 고민해요.”“많아서.”“그중 하나.”도현의 시선이 방 가운데로 향했다.“춤.”서윤의 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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