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여자친구의 조카를 사랑했다.: Chapter 11 - Chapter 20

59 Chapters

11화 : 침입자들(3)

유진은 당당했다. 그 당당함이 오히려 친구들의 의심을 잠재우는 강력한 약이 되려는 걸까. 광수가 입을 열었다. “그럼 둘이 왜?” 유진은 웃으며 옆에 앉은 날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모가 놀러 오라고 하셨거든요. 제가 깜짝 놀라게 해드리려고 연락도 없이 불쑥 왔는데, 이모가 여행 중이더라고요.” 매끄럽게 이어졌다. 사실이 아닌 대답이. “그래서 그냥 가려고 했는데, 삼촌이 밤늦게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고 바래다준다고 하셔서요.” 계속 침묵을 유지한 채 식탁 중앙에 놓인 유진의 휴대폰을 보던 진우가 입을 열었다. “그 옷은요?” 순간, 기억이 스쳤다. 진우는 채영의 원피스를 알고 있었다. ㅡ와, 누나 진짜 예쁘세요! 난 나도 모르게 바짓단을 쥐었다. 그러자, 유진이 식탁 아래로 내 손을 잡았다. 심장이 뛰었다. “모르시죠? 저희 이모들 종종 똑같은 옷 사서 입어요. 가족 모임 때 입으려고. 또 유일한 여자 조카인 제게도 보내주시거든요.” 이어서 유진이 기분 나쁘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왜요, 당장 안방에서 이거랑 똑같은 원피스 가지고 나올까요?” 진우가 당황했다. “아, 아뇨. 죄송합니다.” 유진은 옅은 한숨을 쉬었다. “저, 이모랑 좀 닮지 않았어요?” 광수와 진우가 동시에 고개를 들어 유진의 얼굴을 살폈다. 그리고 나를 봤다가, 다시 유진의 이목구비를 훑었다. “…그러고 보니.” 광수가 중얼거렸다. “제수씨 눈매, 얼굴형이랑 똑같아.” 진우는 여전히 말이 없었지만, 유진의 날 선 기세에 한풀 꺾인 모양새였다. 아니다. 원피스는 채영의 옷이 맞다. 무엇보다 유진은 오늘 온 것도 아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된다. 그런데, 그 사실을 말할 수 있을 리가. 어쨌거나, 이 녀석들이 납득하고 있을 때 서둘러 매듭을 지어야 한다. “진짜 채영 씨 조카 맞다니까 그러네. 오해야. 그러니까 빨리ㅡ” 친구들에게 가라고 하려던 그때, 유진이 잡고 있던 내 손을 세게 쥐었다. “…?” 광수가 무릎을 탁 치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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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 그때.

바깥의 밤공기는 조금 차가웠다.광수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말했다.“진우야, 우리가 괜히 사람 이상하게 본 거 아니냐?”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녀석은 한동안 담배만 태우다가 입을 열었다.“이모부를 보는 눈이 아냐.”“뭐?”진우가 나를 봤다.“쟤 눈 정상이 아냐.”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왔다.“야, 뭔 소리야. 그런 눈이 따로 있냐?”진우가 담뱃재를 털며 덧붙였다.“똑바로 들어.”“뭔 소리야, 인마.”“자꾸 확인하잖아.”“뭘 확인해?”진우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자기가 어디까지 해도 네가 따라오는지.”입이 다물어졌다.“아까도 봤어. 일부러 애매한 말 던지고, 네 표정 보고. 또 던지고.”“…….”“근데 넌 그때마다 반응하고.”광수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야, 진우야 뭔 소리야. 유진 씨가 그럼 규현이한테 맘이라도 있단 소리야?”진우는 뭔가 생각하는 듯 담뱃불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다.“위험해, 당장 보내.”내가 반박했다.“야, 진짜 뭔 소리ㅡ”진우가 내 말을 잘랐다.“봐.”“뭐?”“너 벌써 그러잖아.”“뭐가.”“넌 쟤가 왜 저러는지는 하나도 안 궁금해.”진우가 한 걸음 내게 다가왔다.“너, 쟤가 가는 거 싫지.”“…….”진우가 피우던 담배를 버리고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지금 채영 누나 조카 안 내보내면 나 오늘 안 간다.”“뭐?”“광수랑 자고 갈 거야.”“엥? 나까지?”진우가 라이터를 켰다.“내가 틀렸으면 술이나 더 처먹고 자면 되고.”불꽃 너머로 녀석의 눈이 보였다.“적어도 너 혼자 저 여자랑 있게는 안 둬.”***세 남자가 나간 식탁에 홀로 앉아 있었다.“진우라고 했었나.”처음부터 그 사람은 달랐다.다른 사람은 내가 채영 이모의 조카라는 말에 금세 경계를 풀었지만, 그는 아니었다.계속 나를 봤다.정확히는 나를 보고, 규현을 봤다.내가 무슨 말을 할 때마다 규현의 표정을 확인했다.마치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사람처럼.“…푸핫….”나도 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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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 오류이길.

이상한 기분이다.어제부터 좀처럼 떨쳐지지 않는 이 찝찝함은 뭘까.나는 휴대폰을 들었다.잠금 화면을 켰다가, 다시 껐다.규현은 내게 지독할 정도로 잘 맞췄다.그렇다는 건 참았을 거라는 얘기, 나와 살면서 쌓인 게 없을 리 없었다.말하지 않았을 뿐, 싫었던 것도 있었을 테고, 귀찮았던 것도 있었겠지.그래서 여행이나 출장 때마다 종종 자유를 줬다.원하는 대로 하라고. 클럽을 가든, 밤을 새워 술을 마시든.사람은 가끔 숨을 돌릴 시간이 필요하니까,나에게 돌아올 때만 온전하면 된다고 생각했다.출국하면서 남긴 경고는 그가 선을 넘지 않을 것을 알기에 그냥 남긴 말이었다.“내가 예민한 건가.”그래, 친구들과 놀 수도 있고, 집에서 작업을 할 수도 있다.내가 없는 동안 뭘 하든 규현 씨 자유였다.그런데 규현 씨가 집에 있다.그것도 작업을 하면서.“…….”이상하다.제작 의뢰도 그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간간이 내가 알바를 고용해서 의뢰를 남긴 것 외에는 없다시피 했다.“그랬는데, 내가 없는 시간에 내 손이 닿지 않는 의뢰가 들어왔다고.”우연이라기엔 이상한 기분.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규현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에서 멈췄다.ㅡ돌아오면 주물러줄게.그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그건 다정함이라기보다 서두르려는 것 같았다.숱하게 쌓인 내 데이터에 담긴,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그 이면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 보지 못하게 하려는 대답.나는 알 수 있다.내 데이터들이 계속 날 이끈다.못보게 하려 할 수록 들여다보고 싶어지는 이 불길한 완벽함.나는 다시 화면을 봤다.규현의 이름이 위에 멈췄던 손가락을 움직여 통화 버튼을 눌렀다.신호음이 울렸다.한 번. 두 번.그냥, 내 데이터의 오류이길“여보세요? 이모!”바랐다.***엘리베이터에 탑승하며 진우에게 말했다.“야, 니들 가면 보낼 테니까 그냥 집에 가라니까.”진우가 곧장 받아쳤다.“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까, 채영 누나 조카 갈 때까지 있어 준다고.”왜 싫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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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 거짓말.

나한테 무슨 질문을 던질까.왜 전화 안 했냐는 질문이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그러나 그녀는 여행이나 출장 중에 내게 전화를 잘 걸지 않았다.연애 1년까지는 내가 토라졌을 정도니까.그럼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유진이 언제 왔어?”역시 송곳처럼 날카롭다.침이 저절로 목구멍을 넘어갔다.“오, 오늘.”“오늘 언제?”내 시야가 흔들렸다.언제 왔다고 해야 하지.사실대로 말하면 벌써 며칠 전인데.그런데, 사실대로 말하면ㅡ그때 진우가 날 보며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그리고는 입모양으로 말했다.[우리가 먼저 왔다고 해.]왜?아, 아니지. 알 거 같다.이미 유진이 거짓말을 던져놓은 상태잖아.ㅡ삼촌이랑 삼촌 친구분들이 놀고 계시더라고요. 그래서 아쉬운 대로 저도 같이 놀고 있었어요.일단은 그 거짓말을 따라야 했다.그편이 가장 안전하다.난 채영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심호흡하고서 말했다.“광수랑 진우 오고 한 시간 정도 있다가.”“그래?”제발 그냥 넘어가 줘.“그래, 알았어. 일단 친구들하고 재밌게 놀아.”“으응, 알았어.”“그리고 유진이ㅡ”‘바꿔 달라고? 그건 아니겠지?’아니었다.“아니다. 내가 따로 통화할게.”뭘 통화해?하지만, 일단은 끊는 게 우선이었다.“응응.”마침 유진도 화장실을 나와 다시 식탁으로 오고 있었다.뚝.전화가 끊어졌다.한숨이 길게 나왔다.그런데 나뿐 아니라 진우와 광수도 한숨을 길게 쉬었다.“다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요?”우리 셋의 눈동자가 커져서는 유진을 바라봤다.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조금 전 유진의 행동으로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다.밉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그런데도 웃고 있는 유진을 보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놓였다.“…….”광수가 쉰 소리를 내며 말했다.“이제 그만 마시고 자자. 피곤하다.”광수의 제안으로 자리는 끝났다.식탁 위에는 찌그러진 캔맥주와 흩어진 안주 부스러기들만이 남았다.내가 식탁의 쓰레기를 치우는 사이 유진이 컵을 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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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 -더 솔직해지세요.-

광수와 함께 아파트 공동현관을 나와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광수가 입을 열었다. “진우야.” “어.” “괜찮겠지?” 나는 걸음을 멈췄다. 광수도 덩달아 걸음을 멈췄다. 뒤돌아 아파트를 바라봤다. “아니, 안 괜찮을 거야.” “그럼…” “그나마 다행인 건 그 여자가 제 발로 나갔다는 건데. 그리고 채영 누나가 곧 돌아올 거라는 건데.” 그 안에 그 여자가 규현이에게 다시 접근하는 일이 없길 바라야지. 광수가 물었다. “근데 너 왜 제수씨한테 누나라고 하냐?” 난 멈췄던 발을 움직였다. “뭐 어때, 규현이랑 결혼한 것도 아니고.” “누나보단 이모뻘인데.” 난 피식 웃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그 얼굴이랑 몸매가 어딜 봐서 이모냐 새꺄.’ 그나저나 걱정이다. 유진이라는 여자의 눈은 익숙했다. 과거, 딱 일주일간 만났던 한 여자가 떠올랐다. 사람 미치게 만드는 눈에 홀려서는, 고작 일주일의 만남으로 몇 달을 폐인처럼 살았던 나 자신이. 내게 정신 차리라며 멱살을 잡고 끌어내 주었던 게 바로 규현이었다. 아니 솔직해지자. ‘누나 때문에 벗어난 거잖아.’ 처음 봤을 때의 그녀 모습이 머릿속을 스쳤다. *** 손으로 허물처럼 벗겨진 원피스를 잡았다. 유진이 어디 사는지, 어디로 갔는지 아는 게 없었다. ㅡ밥 먹고 집에 가려고요. “그래.” 간다고 했었다. 원래는 어제 갔어야 했다. ㅡ작업 준비 다 끝난 거 아녜요? 사진도 많이 찍으셨잖아요. “가는 게 맞잖아.” ㅡ저 만들어 주세요. 그래, 그냥 부탁을 들어줄 뿐이었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왜 이 빌어먹을 심장이 자꾸 아린 거냐. 나는 휴대폰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유진의 연락처는 없었다. 엄지손가락이 연락처를 훑다 멈췄다. -채영 걸면 안 된다. 이건 미친 짓이다. 하지만 내 손가락은 이미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연결음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방바닥에 떨어진 기다란 머리카락 한 올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달각. “응, 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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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 중독.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속에 무언가 팽팽하게 차 있었는데, 지금은 텅 빈 기분이다. 솔직해지라고. 그냥 가버리고 솔직해지라는 건 뭔데. 휴대폰 액정이 꺼졌다. 검은 유리 위로 초점 풀린 내 눈이 비쳤다. 다시 켰다. 알림도, 메시지도, 부재중 전화도 없었다. 알고 있었다. 연락 같은 게 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엄지손가락은 기계적으로 SNS 검색창을 두드렸다. 김유진 수십 개의 프로필이 쏟아졌다. 사진들을 하나하나 눌러 확대했다. 눈매가 닮은 여자, 입술의 선이 비슷한 여자. 전부 아니었다. 뒤로 가기. 다시 클릭. 다시 뒤로. 이미 확인한 계정인 줄 알면서도 다시 들어갔다. 의미 없는 스크롤이 반복됐다. 화면 끝에는 '더 이상 읽어올 게시물이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떴다. 액정 위를 손가락이 무의미하게 문질렀다. 다른 SNS로 넘어갔다. 검색 결과는 더 처참했다. 나는 그녀와 비슷한 얼굴을 한 어떤 여자의 프로필사진을 최대치로 확대했다. 깨진 픽셀이 화면을 가득 채울 때까지. 김유진 흔한 이름이지만, 그녀는 없었다.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졌다. 톡이 울렸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낚아챘다. 광고 메시지였다. “…하….” 집 안이 너무 조용해서 고막마저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또다시 안방이었다. 문을 열었다. 침대는 여전히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나는 침대 위로 손을 뻗었다. 유진이 입었던 채영의 원피스를 다시 끌어안았다.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이내 얼굴을 파묻었다. “…없네.”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듯 중얼거렸다.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옅어져 가는 그녀의 향기를 맡으며, 먼지를 삼켜 사레들 때까지 코를 박고 유진의 환영을 뒤쫓았다. 시야가 핑 돌았다. 몸을 일으켰다. “…미친 거 아니냐, 진짜.” 허공에 대고 비웃음을 흘렸다. 화장실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거울이 보였다. 거울 속에는 눈이 풀리고 얼굴이 하얗게 질린 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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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 처음부터.

아마도, 내 눈이 엄청 커졌을 것이다.유진은 그런 날 바라보다가 웃었다.“푸핫!”“왜 웃어요?”심장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기분이었다.유진은 내 경악을 유희처럼 감상하며 다가왔다.“귀신 본 얼굴은 아니네요.”“…어디 갔다왔어요?”그녀는 대답이 없었다.내 옆을 스치듯 지나 모니터 앞에 멈춰 서서 마우스를 움직였다.딸칵, 딸칵.화면 속에는 내가 찍었던 유진의 조각들이 차례로 넘어갔다.“생각보다 사진을 훨씬 많이 찍으셨던데.”“.......”유진이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뻔히 다 안다는 듯한 시선에 나는 숨을 멈췄다.“내가 없으니까, 죽을 것 같았죠?”“어디 갔다 왔냐구요.”내 질문에 그녀가 내게 한 발짝 다가왔다.좁혀진 거리. 그녀의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 하나가 작업실 바닥에 떨어졌다.왜 나갔다가 돌아온 걸까.아니, 그보다 왜 다시 돌아온 거지.“중요한 강의가 있어서 듣고 왔죠.”너무 반가웠는데, 오히려 반대로 행동했다.분노인지, 수치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그럼 집으로 가지 왜 다시 왔어요.”하지만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아직이라면서요?”“네?”“아직 작업 준비 안 끝났다면서요?”“그건ㅡ”작업 준비는 이미 끝났다. 불필요한 사진까지 그득할 정도로.준비가 안 됐던 건, 쿵쾅거리는 이 빌어먹을 심장이었지.유진이 피식 웃었다.“고작 몇 시간 만에 솔직해졌네요.”울컥했다.아니라고, 난 그런 적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데.오늘 내가 한 짓들을 떠올리면.솔직.그래, 어쩌면 그녀가 사라졌던 시점에서 난 솔직했던 것일 수도 있다.그녀는 다시 한번 한발 다가왔다.그리곤 까치발을 들어 속삭이듯 물었다.“자, 그래서 부족한 게 뭐죠?”나도 모르게 입술에 침을 발랐다.“말해요. 뭐가 부족해요?”가까워진 그녀의 입술.나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처럼 그녀의 입술로 달려들 뻔한 걸 간신히 참아냈다.“왜 이러는 거예요. 유진 씨. 당신은 채영 씨 조카잖아요. 난 채영 씨의 남자친구ㅡ”“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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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 헤라.

일본의 대형 매장 형광등은 매우 밝았다.이번 여행에서만 벌써 세 번째 방문인데도 난 딱히 산 게 없었다.친구들은 과자며 화장품이며 이것저것 장바구니에 쓸어 담고 있었다.“채영아, 이거 어때?”“난 됐어.”나는 대충 웃으며 진열대를 훑었다.잠시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조형용 공구들이 있는 작은 코너였다.내가 유심히 보자 친구 하나가 물었다.“뭐 봐?”진열대에서 조형용 헤라 세트 하나를 집어 보았다.“규현 씨가 좋아하겠다.”옆에 있던 친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이건 뭐야?”“조형할 때 쓰는 거야.”“시계 같은 거 사줘. 돈도 많으면서.”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런 건 많이 사줬지.”옆에 있던 다른 헤라 세트도 꺼냈다.이번 건 조금 더 넓고, 끝은 둥글었다.규현이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둘 다 장바구니에 넣었다.내 모습을 보고 있던 친구들이 피식 웃었다.“근데 채영아.”“응?”“규현이는 왜 만나는 거야?”나는 진열대를 보다가 친구를 돌아봤다.“뭐?”“아니, 갑자기 궁금해서.”다른 친구도 끼어들었다.“맞아. 어려서?”“어리긴 하지.”“열두 살이지?”“응.”다른 친구가 말했다.“그래도 규현이 잘 생겼잖아. 키도 크고.”어디나 현실적인 이야기는 있는 법이다.“그렇긴 해도, 돈도 제대로 못 번다며.”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응. 한 달에 백만 원도 못 벌 때 많아.”친구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집은?”“없어.”“차는?”“내 차 줬지.”“허, 그 차를? 학벌은?”“전문대 중퇴.”“직업은?”“원형사 지망생.”잠깐 정적이 흘렀다.친구 하나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원형사가 뭐야?”“간단히 말해서 피규어 만드는 직업이라고 생각하면 돼.”“뭐? 그게 뭐야. 그런 애를 왜 만나.”나는 진열대에서 사포 세트를 하나 집었다.직원에게 이것저것 물어본 뒤 장바구니에 넣었다.“왜 만나긴. 좋으니까 만나지.”친구들이 동시에 헛웃음을 터뜨렸다.“그게 끝이야?”“그럼 뭐가 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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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 핸드크림.

조각칼이 굳은 퍼티를 깎는 소리가 작업실에 울렸다.사진을 다시 봤다.모니터 속 유진은 벚꽃 아래 서 있었다.고개를 조금 기울인 채, 카메라가 아니라 그 너머의 나를 보고 있었다.퍼티를 깎은 부분에 덧붙였다.그리고 헤라로 문질렀다. 목에서 어깨로 어깨에서 허리로.아직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앙상한 상태였다.“조금 이상한데.”뒤를 돌아봤다.유진이 내 뒤에 서 있었다.“뭐가요?”“어깨요.”유진이 자기 어깨를 가볍게 만졌다.“내 어깨가 그렇게 넓지 않은데.”“아뇨, 붙이고 깎고를 반복해요. 퍼티는 조금 다루기 힘들거든요.”“그 퍼티라는 게 점토 같은 거죠?”“네, 피규어 조형할 때 대표적으로 쓰는 것 중 하나예요.”유진이 내 등 뒤로 다가와 내 어깨 너머로 몸을 숙였다.긴 머리카락이 뺨을 간질였다.향기가 났다.나는 애써 모니터를 바라봤다.“방해돼요.”“그럼 집에 갈까요?”헤라를 쥔 손이 멈췄다.유진이 웃었다.“농담이에요. 계속해요.”다시 손을 움직였다.그런데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모니터 속 유진과, 등 뒤의 유진이.사진을 확대했다.허리.손가락.발목.유진이 물었다.“어때요? 나 보는 거.”“그냥 작업하는 거죠.”“그래요?”그녀가 내 귀 가까이에서 웃으며 덧붙였다.“아니면서.”유진의 손가락이 아직 뼈대일 뿐인 허리 부분을 톡 건드렸다.“그렇게 보고 싶어 했으면서.”***채영 누나 집에서 나온 후로 계속 불안했다.“규현이한테 전화해 봐.”“내가?”“그럼 내가 하냐?”광수가 황당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네가 궁금한 거잖아.”“넌 안 궁금하냐?”“궁금하긴 한데…….”광수가 말끝을 흐렸다.결국 내가 휴대폰을 들었다.-규현통화 버튼을 눌렀다.신호음이 몇 번 이어졌다.달각.“어.”규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뭐 하냐?”“작업.”“작업?”“어.”나는 광수를 바라봤다.광수가 어깨를 으쓱했다.“나와. 술 먹자.”“오늘은 안돼.”“왜?”“작업해야 한다니까.”“내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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