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진이 능글맞게 웃으며 경례를 붙이자, 채희는 민망한지 짐짓 펜을 만지작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그날 이후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중대장실에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묘한 긴장감이 흘렀고, 소설 콘티를 짤 때 주고받는 대사 하나하나가 마치 서로를 향한 진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주일 뒤, 두 사람의 관계를 뒤흔들 거대한 계기가 찾아왔다. 3중대 전체가 참여하는 대규모 야간 혹한기 전술 훈련이 시작된 것이다. "이번 훈련은 야간 거점 방어 및 철수 작전이다. 한 사람의 낙오자도 발생해서는 안 된다. 알겠나?" 연병장에 모인 중대원들 앞에서 채희는 다시 차가운 독사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몰아치는 2월의 산속, 위장크림을 검게 바른 채희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전담 행정병인 도진은 무전기를 멘 채 그녀의 바로 뒤를 지켰다. 훈련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진행되었다. 산악 지형을 이동하던 중, 갑작스럽게 기상 악화가 겹치며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진눈깨비가 눈을 찌르고 강풍이 불어닥치자, 무전기 너머로 지지직거리는 소음만 가득할 뿐 본부와의 통신이 뚝 끊겨버렸다. "중대장님, 본부와 통신 두절입니다. 가시거리도 5미터가 안 됩니다." 도진이 안테나를 붙잡으며 소리쳤다. 채희는 지형지물을 확인하려 지도와 나침반을 꺼냈지만, 거센 바람에 눈발이 날려 분간이 불가능했다. "쯧, 일단 지형을 확보해야 한다. 민 상병, 내 뒤를 바짝 따라와라."
Last Updated : 2026-09-10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