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EX급 빙신(氷神), 출근합니다: Chapter 121 - Chapter 130

163 Chapters

121화: 주가 방어선과 배관공 2

​[아크 부대 지하 격납고]​우우우우웅-!​레비아탄의 콕핏에 올라타 생체 전류를 연결하자, 단전에서 잠들어 있던 빙정의 한기가 척추를 타고 찌릿하게 퍼져나갔다. 아마존의 그 불지옥에서 구르다 와서 그런지, 오늘따라 기체의 신경망 동기화가 훨씬 더 날카롭고 매끄럽게 맞물리는 기분이었다.​[형님! 오늘은 어디야? 이번에도 수금하러 가는 거야?]​외부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는 흑기사의 흉악한 목소리.내 오른손의 움직임에 맞춰, 레비아탄의 거대한 오른쪽 팔뚝에 압축 수납되어 있던 검붉은 건틀릿(파일벙커)이 육중한 금속음을 내며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오늘은 수당 없어. 그냥 꼴 보기 싫은 새끼들 밥상 뒤엎으러 가는 거니까, 출력 제한 풀고 시원하게 밟아."​[오케이! 무료 봉사는 취향이 아니지만, 다 때려 부수는 건 언제든 환영이지!]​쿠아아아앙-!!​격납고의 천장이 열리고, 시퍼런 극소용돌이 부스터가 폭발적인 화염을 뿜어냈다.레비아탄의 거체가 아크 부대를 박차고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부산 상공을 가로지르는 내내, 기체의 외부 센서는 서쪽 끝단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매연과 끔찍한 마력의 파장을 실시간으로 경고하고 있었다.​단 3분.음속을 돌파하여 날아간 내 시야 아래로, 목적지인 '낙동강 하구둑'의 처참한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와, 징그러운 것들. 아주 강바닥에 깨소금을 뿌려놨네."​내 입에서 절로 헛기침이 튀어나왔다.수십 개의 거대한 수문이 늘어선 콘크리트 하구둑 구조물 아래, 끝없이 펼쳐진 시커먼 갯벌과 강물 위를 뒤덮고 있는 건 수천, 아니 수만 마리의 '머드 크롤러' 떼였다.​딱딱한 진흙 색 갑각에, 게와 갯강구를 반반씩 섞어놓은 듯한 수십 개의 뾰족한 다리들. 놈들은 시뻘건 산성액을 침처럼 뱉어내며 거대한 콘크리트 수직 벽을 미친 듯이 기어오르고 있었다. 이미 몇몇 수문은 놈들이 뿜어낸 부식액에 녹아내려 철근을 앙상하게 드러내고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운 상태였다.​그리고 그 수문 위쪽.해운대 길드의 방어 병력들이 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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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배관공은 번개로 배관을 뚫는다 1

​외부 스피커를 통해 뿜어져 나간 내 묵직하고도 건방진 기계음.그 한마디에, 낙동강 하구둑 수문 위에서 필사적인 사투를 벌이던 해운대 길드의 황금색 기체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놈들의 시야에는 하늘을 찢고 벼락처럼 내리꽂힌 거대한 흑기사, 레비아탄의 흉악한 등짝이 보일 터였다.​"저, 저 미친 시커먼 깡통은 대체 뭐야...! 아크 부대 소속인가?!""통신망 열어! 당장 저기서 떨어지라고 해! 여긴 우리 해운대 길드가 국방부랑 독점 계약한 관할 구역이다! 민간 부대 개입은 불법이라고!"​등 뒤에서 엘리트 파일럿 놈들이 길길이 날뛰며 무전을 쳐대는 소리가 기체의 외부 수신기를 타고 고스란히 들려왔다.​"어휴, 진짜 염병들을 떤다."​나는 가볍게 통신 채널의 수신 볼륨을 0으로 줄여버렸다.자기들 목숨이 왔다 갔다 하고, 당장 한 시간 뒤면 부산 시민들 식수원에 썩은 괴물들 체액이 쏟아져 들어갈 판국인데. 그 지옥통 속에서도 자기들 밥그릇 뺏길까 봐 텃세를 부리고 규정 타령을 하는 꼴이라니.​머릿속에 돈과 주가밖에 안 들어찬 자본주의의 찌든 물을 빼주려면, 아예 그들이 밥을 먹던 밥상 자체를 박살 내서 엎어버리는 수밖에 없다.​키리리릭-! 키에에에엑-!!​그때, 얼어붙은 갯벌의 경계선 너머에서 소름 끼치는 쇳소리가 대기를 진동시켰다.하구둑 수문 근처로 기어오르던 선발대 수천 마리가 동결되어 박살 난 것을 목격한 '머드 크롤러'의 본대였다. 놈들은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동족의 피 냄새에 광분하며 시커먼 쓰나미처럼 갯벌을 덮으며 밀려오기 시작했다.​대충 콕핏의 레이더로 훑어봐도 최소 오만 마리는 족히 넘어 보이는 끔찍한 물량.갑각류와 거미를 기괴하게 섞어놓은 듯한 수십만 개의 뾰족한 갈고리 다리들이 진흙을 긁어대며 나를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놈들이 입에서 내뿜는 붉은 산성액이 갯벌 바닥에 닿을 때마다 치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누런 독가스가 피어올랐다.​[크하하하! 형님! 미꾸라지 새끼들 물량 보소! 아주 강바닥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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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화: 배관공은 번개로 배관을 뚫는다 2

쾅-!!​레비아탄이 거대한 허리를 숙이며, 벼락이 미친 듯이 휘감겨 있는 두꺼운 양손을 눈앞의 갯벌 바닥 깊숙하게 처박았다.​낙동강 하구. 바다에서 밀려온 짠물과 내륙에서 흘러든 민물이 섞여 있는 질척한 기수역(Brackish water zone).염분을 잔뜩 머금고 있는 이 끝없는 뻘밭과 진흙탕은, 내가 뿜어내는 고압의 벼락을 사방으로 퍼뜨리기에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하게 세팅된 '천연의 초거대 전도체(Conductor)'였다.​콰가가가가가가가각-!!!!!!!​기체의 양손에서 해방된 짙은 보랏빛 뇌전이, 축축한 갯벌의 수분과 염분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해 나갔다.​번개의 줄기가 마치 거대한 괴물의 신경망처럼 굵직한 가지를 치며, 진흙탕을 가르고 수 킬로미터 밖까지 뻗어 나갔다.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는 자연의 번개가 아니라, 땅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올라 세계를 집어삼키는 파멸의 뇌우(雷雨).​"키이이이이익-!!!!""기기기긱-!!!!"​갯벌을 새까맣게 뒤덮고 나를 향해 달려들던 오만 마리의 머드 크롤러들이, 단말마의 기괴한 비명을 터뜨리며 일제히 허공으로 팝콘처럼 튀어 올랐다.​볼품없는 진흙 갑각 따위가 수천만 볼트의 고압 전류를 막아낼 리 만무했다.테라와트급 전류가 놈들의 체액을 관통하는 순간, 놈들의 체내에 고여 있던 산성 피와 수분이 순식간에 끓어오르며 기화해 버렸다.​펑! 퍼퍼퍼펑-!!​마치 연속으로 터지는 지뢰밭처럼,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놈들의 딱딱한 껍질이 내부의 미친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연쇄적으로 터져 나갔다. 시커먼 진흙과 초록색 체액이 사방으로 비산했지만, 그것들조차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플라즈마의 초고열에 휩싸여 허연 잿가루로 산화해 버렸다.​"화력 지원이라는 건 찔끔찔끔 총알이나 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전장 자체를 지워버리는 거야, 이 샌님들아."​우르릉- 쾅!!​나는 갯벌에 박아넣은 기체의 양손에 더욱 힘을 쥐어짜 내며, 조종간의 출력을 한계치 너머로 끝도 없이 끌어올렸다.​내 단전에 박힌 한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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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화: 견적서는 팩스로 넣었습니다 1

​위이이잉- 지지직!기체 외부 센서가 미친 듯이 돌아가는 냉각팬의 굉음을 콕핏 안쪽까지 고스란히 처박아주고 있었다.​뭐, 당연한 거다.바닷물과 민물이 뒤섞인 그 찐득한 기수역 갯벌 한가운데서, 수만 마리의 벌레 새끼들을 상대로 무한동력 테라와트급 뇌전을 여과 없이 쥐어 짜냈으니까.​내 척추에 꽂힌 생체 전류를 통해, 수만 톤 단위의 미친 기계적 압력이 단전의 EX급 빙정 코어를 사정없이 짓이기고 비틀어댔다.그렇게 억지로 비틀린 얼음이 비명을 지르며 뿜어내는 상상 초월의 전기 분극.​내 밥줄이자 깡패 같은 파워 밸런스, '플렉소 일렉트릭'의 극단적인 오버로드였다.​솔직히 쫄리긴 했다.​[크으으. 형님! 관절 구동부 온도가 아직도 세 자릿수에서 안 떨어져! 실린더가 아주 뻐근하게 달아올랐다고. 그래도 이 맛에 내가 오버클럭을 못 끊지, 크하하!]​스마트워치 너머로 들려오는 레비아탄의 기계음은 짐승처럼 도파민에 흠뻑 절여져 있었다. 아주 신이 났다.​"야, 혓바닥 길다. 입 다물고 얌전히 냉각수나 뺑뺑 돌려라."​나는 조종간을 쥔 손을 털어내며 혀를 쯧 찼다.​"나도 지금 뇌전에 생체 전류 오버해서 끌어다 썼더니 척추가 빠개질 것 같으니까."​발아래로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부산 도심의 야경.​일요일 늦은 오후, 노을이 뉘엿뉘엿 넘어가며 빽빽한 아파트 단지와 빌딩 숲 위로 붉은빛이 찐득하게 번지고 있었다.참 평화롭기 그지없는 대도시의 나른한 주말 풍경이다.​저 아래에서 일요일의 끝자락을 뒹굴거리며 즐기는 수백만의 시민들은 알까.불과 십여 분 전, 자기들이 매일 마시는 낙동강 식수원을 덮치려던 수만 마리의 징그러운 벌레 떼가 바비큐로 튀겨졌다는 사실을. 아마 꿈에도 모르겠지.​뭐, 알아달라고 한 짓도 아니니까 상관없다.​내 단전에 폭주하는 빙결의 핵을 강제로 쑤셔 박고 간 SSS급 주지헌 영감탱이처럼, 거창하고 피곤한 지구 평화의 사도 행세를 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까.​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시민들의 열광적인 박수갈채나 국방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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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화: 견적서는 팩스로 넣었습니다 2

바싹 말라붙은 기수역 빙판 위로 산처럼 쌓여 있는 머드 크롤러들의 끔찍한 잔해들.​"야, 정상은 무슨. 엑셀을 밟으라고 엔진을 달아놨으면 기회 봐서 냅다 밟아 재끼는 게 드라이버의 기본 소양이지."​내가 낄낄거리며 철수의 어깨를 툭툭 쳤다.​"아무리 이 기체 뼈대가 삼천 그룹 1세대 연구진 영감탱이들이 군주 코어 박아 넣고 조립한 초기 모델이라지만, 내가 오늘처럼 무식하게 출력을 들이부었는데도 관절이 안 퍼지고 잘 버티더라."​나는 녀석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헝클어뜨리며 씩 웃었다.​"니가 신 소장이랑 며칠 밤새워가며 튜닝해 놓은 4차 냉각 밸브랑 보조 전도 회로가 기가 막히게 제 몫을 했어. 아주 잘 깎았어. 칭찬 스티커 하나 줄게."​내 농담 섞인 노고 치하에 철수의 퀭한 눈동자가 일순간 감격으로 일렁였다.​그때, 옆에 뒷짐을 지고 서 있던 사령관이 무거운 헛기침을 했다.​"크흠. 수고 많았네, 하 준위. 덕분에 영남권 최악의 국가적 사태는 막았어."​"사령관님.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로 입 싹 닦고 퉁칠 생각은 아니시겠죠?"​내가 빈 캔을 쓰레기통에 툭 던져 넣으며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올렸다.​"제가 아까 하구둑 수문에서 밥상 엎으면서, 분명히 견적서 팩스로 넣는다고 방송까지 쩌렁쩌렁하게 때렸잖습니까."​"당연하지."​"아크 부대 직인 쾅 찍어서 해운대 길드 본사에 정식으로 청구서 꽂아주십쇼."​내 당돌하고 뻔뻔한 요구에 사령관이 피식 웃으며 철수의 태블릿을 넘겨받았다.​"안 그래도 방금 전까지 국방부 예산처 놈들이랑 아주 즐거운 통화를 끝낸 참이네."​사령관의 눈빛이 매섭게 빛났다.​"민간 길드의 작전 실패 및 고의적인 은폐 시도로 인한 수도권 재난 상황을, 정규군 소속인 자네가 출동해서 무마해 줬으니. 청구할 항목은 아주 차고 넘치지."​사령관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튕기며 조목조목 읊기 시작했다.​"긴급 작전 투입 대행비. 하구둑 수문 붕괴 방어에 따른 시설 유지 보수비. 머드 크롤러 군락 섬멸에 따른 마석 부산물 채굴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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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견적서는 팩스로 넣었습니다 3

​"방금 들어간 청구서 내용이 마음에 안 드신 모양인데, 뭘 좀 단단히 착각하시나 봅니다."​[착각? 네놈들이 지금 민간 길드의 고유 권한을...]​"우리가 보낸 건 협상 테이블에 올릴 얄팍한 제안서가 아니라, 이미 국방부 결제 도장 쾅 찍힌 최종 청구서입니다."​내가 얼음장같이 차갑게 말을 잘랐다.​"당신들 방어선 뚫려서 바닥에 똥물 새기 직전인 거, 내가 아까운 휴일 반납하고 무한동력 돌려서 막아줬잖아. 그럼 서비스 이용료를 내야지."​[닥쳐라! 누가 도와달라고 했나! 우리 길드 병력만으로도 충분히 통제 가능한 상황이었다!]​윤대호의 목소리가 찢어질 듯 날카로워졌다.​[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 같은 놈이 감히 대한민국 2위 해운대 길드를 상대로 삥을 뜯으려 들어?! 당장 언론에 군의 민간 사유재산 침해로...]​"통제가 가능해?"​내가 픽 비웃으며 씹고 있던 필터를 퉤, 뱉어냈다.​"그 삐까뻔쩍한 황금색 장난감들 갯벌 진흙탕에서 스케이트 타면서 바지에 오줌 싸고 자빠져 있던 게 통제야?"​수화기 너머가 일순간 멈칫했다.​"회장님. 당신네 주가 방어하겠다고 무전기 끄고 버티던 거. 그리고 수문 뚫리기 직전까지 밀리면서 애먼 시민들 목숨 담보로 러시안룰렛 돌리던 그 역겨운 추태."​내 목소리가 격납고의 공기보다 더 서늘하게 가라앉았다.​"내 기체 블랙박스에 4K 60프레임으로 아주 예쁘고 선명하게 싹 다 찍혀 있거든?"​[.......!!]​"이거 뉴튜브 1위 채널이랑 내일 아침 9시 뉴스에 무삭제 원본으로 까발려지면 어떻게 될까."​침묵하는 윤대호를 향해, 나는 가장 자본주의적이고 치명적인 쐐기를 콱 박아 넣었다.​"내일 아침 증시 개장하자마자 해운대 길드 주식은 하한가 치다 상장 폐지 수순 밟을 거고, 국가 방위 독점 인가도 즉시 취소될 텐데. 천오백억이면 아주 싸게 막는 거 아닌가?"​수화기 너머는 마치 우주 공간에 내던져진 것처럼 무거운 정적이 흐르며 거친 쇳소리가 섞인 숨소리만이 씩씩거리며 윤대호 회장의 극악한 분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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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화: 금융 치료는 월요병을 찢어 1

​​딸랑-.​발걸음을 재촉해 남포동 하숙집의 익숙한 철제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현관문을 열자마자 1층 거실에서부터 구수하고도 짭짤한 냄새가 훅 밀려왔다.​어라? 그러고 보니 오늘 이모님이랑 성배 아저씨는 상가 건물 매입 기념으로 상인회 사람들이랑 단체로 온천 여행 가셨지.그럼 주방에서 나는 이 기가 막힌 찌개 냄새는 대체 누가 낸 건가 싶어 고개를 돌렸다.​"수고하셨어요, 오빠. 얼른 씻고 오세요. 찌개 다 끓었어요."​하얀 앞치마를 두른 하루 씨가 국자를 든 채로 빙긋 웃으며 나를 반겨주었다.식탁 위에는 보글보글 끓고 있는 구수한 된장찌개와 껍질이 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구이가 완벽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여행 가신 이모님의 빈자리를 완벽하게 메우는, 현모양처 그 자체의 훌륭한 내조였다.​거실 바닥에서는 희선이가 밥 먹을 생각도 안 하고, 내가 어린이날 선물로 땡겨 사준 최고급 VR 기기를 뒤집어쓴 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그 옆에서는 히나가 S급 티타늄 합금으로 맞춘 새까만 전술 우산을 마른걸레로 소중하게 닦고 있었다.​호랑이 같은 어른들이 집을 비우니 아주 고삐 풀린 망아지들이 따로 없다.​"우리 듬직한 에이스. 주말 특근 수당은 좀 짭짤하게 땡기셨나?"​별다방 마감을 일찍 치고 올라온 미혜 누나가 소파에 비스듬히 누운 채 나를 쳐다보았다.여사님이 안 계신 걸 기회 삼아 아주 짧은 반바지 차림으로 다리를 꼰 그녀의 시선이 도발적일 만큼 끈적했다.​"아,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오늘 하루 씨 고등어 굽는 폼 미쳤는데요?"​나는 군복 외투를 대충 소파에 던져두고 숟가락을 냅다 집어 들었다.​"밥 두 공기 예약입니다."​방금 전까지 신경망을 타고 흐르던 전투의 찌릿한 피로와 살갗을 찢던 날 선 감각들.그 모든 더러운 찌꺼기들이 하루 씨가 끓인 따뜻한 된장찌개 국물 한 숟갈에 눈 녹듯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그래. 수천억 원짜리 견적서나 거창한 세계 평화 따위보다, 당장 내 눈앞의 이 따뜻한 밥상이 수만 배는 훨씬 더 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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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화: 금융 치료는 월요병을 찢어 2

창밖으로 불어오는 끈적한 똥바람마저 최고급 리조트의 산들바람처럼 상쾌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오빠. 일어나셨어요?"​방문이 빼꼼 열리며 하루 씨가 고개를 내밀었다.하얀 앞치마를 두른 그녀의 손에는 뒤집개가 들려 있었다.​"어제 어른들도 안 계신데 혼자 주방 보느라 고생 많았죠. 아침부터 냄새가 기가 막히네요. 계란말이 합니까?"​"네. 희선이랑 히나 학교 가야 하니까요. 얼른 씻고 나오세요."​하루 씨가 수줍게 웃으며 총총 주방으로 사라졌다.침대에서 빠져나와 거실로 나가보니, 하숙집의 아침은 평소와 다름없이 분주했다.​별다방 출근 준비를 하느라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틀어 올리는 미혜 누나.잠이 덜 깬 얼굴로 교복 마이를 꿰어 입는 중학생 희선이와 히나.​어제저녁에 온천 여행을 가신 최 여사님과 성배 아저씨의 빈자리가 조금 허전하긴 했지만, 이 아늑하고 소란스러운 공기는 여전했다.​나는 식탁에 털썩 주저앉으며, 아직 켜져 있던 스마트폰의 뱅킹 앱 화면을 몇 번 툭툭 두드렸다.​[이체 완료]​띠링-! 띠링-!​곧바로 교복 리본을 묶고 있던 희선이와 히나의 스마트폰에서 동시에 경쾌한 알림음이 울렸다.액정을 확인한 희선이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오오옷! 미쳤다! 태수 햄! 아침부터 용돈 계좌에 동그라미가 몇 개고, 이게!"​히나 역시 입을 떡 벌린 채 폰 화면과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둘 다 오늘 학교 끝나고 분식집 가서 친구들한테 골든벨 한 번씩 시원하게 울려라. 피씨방도 가고. 어제 오빠가 밖에서 아주 나쁜 놈들 지갑을 통째로 털어왔거든."​"태수 오빠 최고! 진짜 평생 충성할게!""태수 오빠. 저, 맛있는 거 많이 먹고 검술 연습 더 열심히 할게요."​두 녀석이 허리가 끊어져라 배꼽인사를 하고는 현관문을 박차고 나갔다.등교하는 녀석들의 발걸음이 오늘따라 하늘을 날 듯 가벼워 보였다.​"태수야. 넌 애들 경제관념을 대체 어떻게 만들려고 아침부터..."​머리 세팅을 마친 미혜 누나가 어이없다는 듯 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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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9화: 금융 치료는 월요병을 찢어 3

​어제 내가 갯벌에 꽂아 넣었던 테라와트급 뇌전의 잔류 에너지를 놈들의 마석이 그대로 머금고 굳어버린 것이다.​"하 준위님! 너님 진짜 최곱니다! 어떻게 이딴 완벽한 전도체를 5만 개나 찍어낼 생각을 했어요?!"​신수지가 얼굴에 검댕을 묻힌 채 흥분해서 소리쳤다.​"이 머드 크롤러라는 놈들 체액 자체가 염분 덩어리잖아? 근데 플렉소 뇌전이 놈들의 수분을 한순간에 기화시키면서, 마석 내부에 진공 상태의 전도성 나노 튜브 구조를 만들어버렸어!"내가 그걸 알고 했겠는가.​그녀가 마석 하나를 집어 들고 혀를 날름거렸다.​"이걸 액화시켜서 레비아탄의 동력로 냉각수에 섞어 넣으면. 빙정 코어가 물리적으로 비틀리며 내뿜는 뇌전을 단 1볼트의 유실도 없이 100퍼센트 출력으로 뽑아낼 수 있다고! 완전한 초전도 쿨링 시스템의 완성이다!"​신수지의 전문 용어 폭격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뭔 소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요약하자면 내 깡패 같은 무한 동력이 한 단계 더 미친 수준으로 진화한다는 뜻이겠지.​"어제 관절 안 터진 것도 기적인데, 아예 맘 놓고 풀악셀 밟으란 소리네. 수고하세요. 나는 뒤에서 좀 쉴 테니까."​나는 손을 대충 흔들어주고는 격납고 구석에 마련된 간이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자판기에서 따뜻한 밀크 커피를 한 잔 뽑아 들고 낡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휴게실 벽면에 달린 대형 모니터에서는 아침 9시 정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다음 소식입니다. 어제 오후 발생한 낙동강 하구둑 돌연변이 해수 떼 출몰 사태와 관련하여, 대한민국 1위 화이트 타이거 길드와 2위 해운대 길드가 긴급 공동 기자회견을 열었습니다.]​"오, 뉴스 떴네."​기름 묻은 장갑을 벗어 던진 철수가 내 옆으로 다가와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으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했다.​화면 속에는 낯익은 면상 두 개가 나란히 서 있었다.번지르르한 명품 정장을 빼입은 화이트 타이거의 최무진 이사.그리고 어제 나와 통화하며 핏대를 세웠던 해운대 길드의 윤대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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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화: 자본주의와 전복 버터구이 1

​비릿하고 짭짤한 바닷바람이 콧속으로 훅 밀려 들어왔다.월요일 늦은 오후의 부산 남포동 자갈치 시장.​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 바닥 위로, 펄떡이는 생선 비늘과 붉은 핏물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초여름으로 넘어가는 5월 중순 특유의 끈적한 습기가 시장 골목 전체를 묵직하게 짓누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의 활기찬 고함 소리는 그 열기마저 뚫고 나올 만큼 쩌렁쩌렁했다.​"아지매요! 오늘 자연산 전복 씨알 굵은 놈으로 싹 다 주이소. 투뿔 한우도 짝으로 맞춰 놨으니까."​나는 익숙한 단골 수산물 좌판 앞에 쭈그려 앉으며 지갑을 꺼냈다.은행 띠지도 안 뜯은 빳빳한 신사임당 뭉치가 묵직하게 손끝에 감겼다.오늘 아침 내 계좌에 꽂힌 150억 원의 성과급. 그 달콤한 금융 치료의 여운이 아직도 척추를 짜릿하게 간지럽히고 있었다.​"아이고, 우리 태수 총각 아이가! 오늘 뭐 좋은 일 있나? 얼굴에 아주 기름기가 좔좔 흐르네!"​고무장갑을 낀 좌판 아지매가 내 지폐 뭉치를 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오늘 우리 하숙집 이모님이랑 아저씨 온천 여행 끝나고 오시는 날이거든요. 저녁 밥상에 전복 버터구이 좀 쫙 깔아보려고요. 돈은 넉넉하니까 수조에 있는 거 싹 다 건져주십쇼."​"하모하모! 우리 남포동 지켜주는 든든한 군인 총각 아이가! 내 특별히 젤로 튼실한 놈들로 챙겨주꾸마!"​아지매가 뜰채를 들고 기분 좋게 수조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시장통의 왁자지껄한 소음을 BGM 삼아 나른한 하품을 뱉어냈다.​어제 낙동강 갯벌에서 테라와트급 무한 뇌전을 뽑아내며 수만 마리의 벌레 새끼들을 통구이로 만들었던 지옥 같은 전장.그리고 오늘 아침 9시 뉴스에서 양복을 빼입고 연합이니 뭐니 떠들어대던 길드장 놈들의 얄팍한 정치질.​그딴 피곤한 세상사 따위는 이 평화롭고 비릿한 시장통의 활기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내게 중요한 건, 오직 내 밥상에 올라갈 저 두툼한 전복의 신선도뿐이다.​그렇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포장을 기다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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