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Chapter 61 - Chapter 70

98 Chapters

누구도 당신에게 선택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사흘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그동안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리시안은 무리해서 걸음 수를 늘리지 않았고, 리아는 그가 의사의 지시를 어기지 않는지 하루에도 몇 번씩 확인했다. 카르딘과 에드윈은 각자 별도의 구금시설에서 자신들의 공판을 준비했고, 테르반이 제출한 진술서는 법무부의 확인을 거쳐 라시안 사건의 증거 목록에도 정식으로 편입되었다. 테르반이 앞으로 피고인으로 심판받아야 할 일과, 열두 살 무렵 라시안에게 당한 실험은 처음부터 별개의 일로 다루기로 했기 때문이다.그리고 우리도 기다렸다.정확히 말하면,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이미 제출할 기록은 제출했고, 말해야 할 사람들의 진술도 정리되고 있었다. 남은 것은 법정에서 그것들을 하나씩 확인하는 일이었다.라시안과 다시 마주할 날을.첫 공판이 열리는 아침, 나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창밖에는 아직 희미한 새벽빛만 남아 있었고, 커튼 사이로 스며든 푸른빛이 방 안 가구의 윤곽만 겨우 드러내고 있었다. 몸을 조금 움직이자 바로 옆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레오나르드는 이미 깨어 있었다.“안 잤어요?”내가 작게 묻자 그가 천장을 바라본 채 대답했다.“잤어.”“몇 시간.”잠깐 침묵이 흘렀다.“세 시간쯤.”나는 몸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그건 잔 게 아니라 눈 감았다가 뜬 거 아닌가요?”“그래도 꿈은 꿨어.”“무슨 꿈.”“기억 안 나.”“그럼 증거 불충분.”레오나르드가 아주 작게 웃었다. 웃기는 했지만 눈 밑에는 옅은 그늘이 남아 있었다. 나는 이불 속에서 손을 움직여 그의 손을 찾았고, 손끝이 닿자 레오나르드가 자연스럽게 손가락을 맞물렸다. 이제는 이런 접촉 하나에도 일일이 이유를 붙일 필요가 없었다.“무서워요?”레오나르드는 이번에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응.”“뭐가 제일.”“누나가 증언하는 거.”조금 의외의 대답이었다.“라시안보다?”“응.”그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누나가 그날 일을 다시 말해야 하잖아.”라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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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법이 없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공판이 열리기 전날, 황실 법무부에서 보낸 서류가 우리 방으로 도착했다.나는 봉인을 뜯기 전에 봉투를 한동안 바라봤다. 첫 공판이 끝난 뒤에도 법무부에서는 오래된 연구 기록과 성소 관리 문서를 계속 분류하고 있었고, 다음 기일에는 라시안이 주장한 ‘당시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말을 실제 기록과 대조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서류가 오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봉투를 건넨 시종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던 탓인지,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레오나르드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내가 봉투를 뜯지 않고 있자 그가 먼저 물었다.“왜.”“괜히 불길해서요.”“열지 말까?”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그렇게 해놓고 밤새 신경 쓸걸요.”“맞아.”“당신도 그렇죠?”“응.”나는 결국 봉인을 뜯었다. 안에는 짧은 안내문과 함께 복제된 연구 기록 세 장이 들어 있었다. 법무부가 내일 공판에서 다룰 예정인 자료 가운데 사건 당사자에게 미리 열람을 허용한 부분이었다.첫 장에는 익숙한 제목이 적혀 있었다.「대체 핵 연구 제3차 검토 보고」두 번째는 「결속 반응 실험의 위험도 및 대체 절차」, 세 번째는 **「인체 적용 보류 권고」**였다.나는 마지막 제목에서 손을 멈췄다.레오나르드가 내 표정을 보고 물었다.“뭐야.”나는 말없이 종이를 건넸다.그가 읽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지만 두 번째 장을 지나 세 번째 문단에 닿았을 때 턱이 굳었다.“이거.”“네.”“대안이 있었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보고서에는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 직접 마력을 주입하거나 결속 반응을 강제로 유도하는 방법 외에도, 이미 존재하는 마력핵의 잔류파와 가공된 마력석을 이용해 적합성을 간접적으로 검증하는 방법이 있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정확도가 낮다는 단점은 있었지만, 적어도 사람의 몸을 실험대상으로 삼지 않아도 되는 방식이었다.그리고 더 중요한 문장이 있었다.레오나르드가 그 부분을 소리 내어 읽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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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을 당신의 이유로 쓰지 마세요

세 번째 공판이 열리는 아침, 레오나르드는 평소보다 먼저 준비를 마쳤다.검은 정복의 마지막 단추까지 잠근 채 창가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겉으로만 보면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흐트러진 곳 하나 없이 단정했고, 표정도 차분했다. 하지만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한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긴장했죠?”레오나르드가 창밖을 보던 시선을 돌렸다.“응.”이번에는 정말 빨라졌다.예전 같았으면 괜찮다거나 별일 아니라고 먼저 말했을 텐데, 이제는 숨기는 쪽보다 인정하는 쪽이 자연스러워지고 있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어제 생각한다던 건요?”“생각했어.”“뭐라고 말할지?”“응.”“알려줄 거예요?”레오나르드는 잠시 나를 내려다봤다. 금빛 눈이 평소보다 조금 어두워 보였다.“법정에서 먼저 말하고 싶어.”나는 더 묻지 않았다.“그래요.”그의 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안 궁금해?”“엄청 궁금한데요.”“근데.”“기다려달라는 것 같아서.”레오나르드의 표정이 아주 미세하게 풀렸다.나는 그의 옷깃을 한번 정리해주고 손을 내렸다. 그러자 레오나르드가 내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세리아.”“네.”“오늘.”잠깐 망설였다.“옆에 있어줘.”나는 눈을 깜빡였다.“원래 있을 건데요.”“알아.”“그럼 왜 물어요?”“말하고 싶어서.”아.나는 웃지 않으려고 했지만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좋아요.”손을 돌려 그의 손가락 사이에 내 손가락을 끼웠다.“옆에 있을게요.”레오나르드의 금빛 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그리고.”“또 있어요?”“끝나고.”이번에는 내가 기다렸다.“안아줘.”나는 결국 웃었다.“미리 예약하는 거예요?”“응.”“알겠습니다. 오늘 공판 종료 후 포옹 한 회.”레오나르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한 회?”“추가는 별도 협의.”“계약서에 써.”“그 계약서 이제 얼마나 길게 만들려고요?”“평생 쓸 거잖아.”너무 아무렇지 않게 나온 말이라.이번에는 내가 먼저 입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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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는 제가 요구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에드윈 마르켈의 공판은 라시안의 세 번째 공판이 끝난 지 나흘 뒤 열렸다.그사이 라시안에 대한 나머지 혐의 심리는 별도의 기일로 정리되었고, 황실 법무부는 이미 확보된 기록과 증언을 토대로 위장 사망과 황실 마력망 불법 개조, 확인된 살해 및 살해 시도에 관한 증거를 분류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한 사람의 이름 아래 한꺼번에 쏟아붓는 대신, 누가 무엇을 지시했고 누가 어디까지 실행했는지를 다시 나누는 작업이었다. 시간이 더 걸리더라도 그래야 했다. 지난 공판에서 우리가 그렇게까지 지키려고 했던 원칙이 있었으니까.누구의 죄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는다.그 원칙은 오늘 법정에 설 사람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했다.나는 마차 안에서 공판 자료를 다시 한번 넘겼다. 오늘 제출될 증거는 단순히 에드윈이 무엇을 지시했느냐에 그치지 않았다. 리아에게 제3단계 매개체를 이식하라는 지시가 실제 시술로 이어졌는지, 그 뒤 리아에게서 확인된 반응값이 제4단계 전사 연구에 사용됐는지, 다시 그 결과를 안정시키기 위해 이안이 제5단계의 그릇으로 지정됐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연구가 리시안이 묶여 있던 구 황실 마력망의 제6단계 기동까지 어떻게 이어졌는지를 순서대로 확인하게 되어 있었다.맞은편에 앉은 레오나르드는 내 손에 들린 종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세 번째야.”“뭐가요?”“같은 장 읽는 거.”나는 종이를 내려다봤다. 정말이었다.“긴장했나 봐요.”“응.”“당신이 왜 대답해요?”“나도 긴장했으니까.”나는 피식 웃었다.“오늘은 당신 재판 아니잖아요.”“그래도.”레오나르드가 창밖을 한번 바라봤다.“리아가 관련돼 있잖아.”웃음이 조금 가라앉았다.오늘 공판의 중심에는 에드윈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한 일을 확인하려면 결국 리아와 이안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했다. 리아의 몸에 제3단계 매개체를 심도록 지시한 사람. 이안을 제5단계 정착용 그릇으로 사용하려 한 사람. 그리고 라시안이 남긴 연구를 황실의 오래된 마력망에 적용해 제6단계 기동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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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이름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에드윈 마르켈의 마지막 공판은 첫 심리가 끝난 지 닷새 뒤 열렸다.그사이 새로운 범죄가 발견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법무부가 닷새 동안 한 일은 이미 법정에 제출된 기록에서 무엇이 확인되었고 무엇이 확인되지 않았는지를 다시 나누는 일이었다. 리아에게 제3단계 매개체를 이식하라고 지시한 사람은 에드윈이었고, 이안의 생존과 안정화를 이용해 그 명령을 실행하게 한 것도 에드윈이었다. 리아에게서 얻은 반응은 제4단계 전사 연구에 사용됐고, 이안은 제5단계 정착용 그릇으로 지정됐다. 에드윈은 리시안이 살아 있는 제어핵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뒤에도 그 연구를 기존 제어망에 연결했고, 자동 기동 가능성을 알고 있으면서도 제6단계 접속을 시도했다.반면 에르반 저택의 화재를 직접 지시하거나 실행했다는 증거는 없었다. 리시안을 처음 살아 있는 제어핵으로 만든 사람이라는 증거도 없었으며, 제6단계에서 제5단계 반응이 갑자기 끌려 들어간 순간 그 흡인을 직접 명령했다는 기록도 발견되지 않았다.오늘 법정이 판단해야 하는 것은 그 사이였다.하지 않은 일까지 벌할 수는 없었다.하지만 하지 않은 일이 있다는 이유로 한 일까지 흐려져서도 안 됐다.나는 아침부터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되풀이했다.“오늘도 긴장했어?”옆에서 레오나르드가 물었다.우리는 법정으로 가기 전 황궁의 작은 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지난번처럼 마차 안에서 서류를 네 번 읽는 일은 하지 않았다. 애초에 레오나르드가 내 손에 서류를 쥐여주지 않았기 때문이다.나는 그를 흘겨봤다.“공작님이 압수했잖아요.”“효과 있었네.”“아직도 보고 싶은데.”“안 돼.”“왜요?”“다 외웠잖아.”“확인하고 싶어서 그러죠.”레오나르드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손을 내밀었다.“그럼 나한테 물어.”“뭘요?”“기억 안 나는 거.”“당신이 틀리면요?”“같이 틀리지.”너무 태연한 대답에 결국 웃음이 나왔다.“전혀 도움이 안 되잖아요.”“긴장은 좀 풀렸잖아.”그건 맞았다.나는 그의 손을 잡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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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였던 것이 제 죄를 없애지는 않습니다

테르반 발테리온의 공판 당일, 레오나르드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정확히는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새벽녘 한 번 눈을 떴을 때도 그는 천장을 보고 있었고, 내가 다시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도 자세가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눈은 감겨 있었지만 잠든 사람의 호흡이 아니었다.나는 한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예전 같았으면 괜찮냐고 먼저 물었겠지만, 요즘은 조금 달라졌다. 괜찮다는 말 하나로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주지 않기로 했으니까.“몇 시간 잤어요?”금빛 눈이 천천히 열렸다.“조금.”“조금은 시간이 아니에요.”“두 시간?”“물음표는 왜 붙어요?”“정확히 기억 안 나.”나는 이불 안에서 손을 뻗어 그의 뺨을 만졌다. 레오나르드는 피하지 않고 손바닥에 얼굴을 조금 기댔다.“많이 힘들어요?”이번에는 대답이 빨랐다.“응.”“어떤 게 제일?”그 질문에서는 조금 오래 생각했다.“오늘 판결이 어떻게 나올지. 테르반이 무슨 말을 할지도.”잠시 침묵하던 그가 덧붙였다.“그리고 내가 그걸 듣고 어떻게 생각할지도.”나는 엄지로 그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마지막 건 미리 안 정해도 돼요. 미워해도 되고, 불쌍해해도 되고. 둘 다 해도 되고요.”레오나르드가 아주 조금 웃었다.“그건 전에 배웠어.”“복습이에요.”“선생님.”“수업료 비싸요.”“뭐로 내?”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선불로 받았어요.”레오나르드의 귀가 조금 올라갔다. 하지만 표정은 금세 다시 차분해졌다.“세리아. 오늘 걔가 형이라고 불러도.”그가 망설였다.“내가 받아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그것도 오늘 결정 안 해도 돼요. 부르는 건 테르반 마음이고, 받아들이는 건 당신 마음이라고 했잖아요.”“기억하네.”“당연하죠. 오늘 형이 되어주겠다고 약속한 적도 없고, 용서한다고 한 적도 없어요. 당신이 약속한 건 하나였잖아요.”살아서 벌받으라고.죽는 것으로 끝내지 말라고.레오나르드의 시선이 낮아졌다.“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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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난 사람과, 아직 끝나지 않은 사람

테르반의 판결이 내려진 다음 날 아침.레오나르드는 평소보다 늦게 눈을 떴다.나는 먼저 일어나 있었지만 일부러 깨우지 않았다. 어제 법정에서 돌아온 뒤에도 그는 한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야기를 많이 한 것도 아니었다. 저녁을 먹고, 씻고, 침대에 들어온 뒤 나를 끌어안고 한참 가만히 있었을 뿐이었다.그러다 잠들기 직전.한마디를 했다.다행인 것 같아.무엇이 다행인지 묻지 않았다.테르반이 죽지 않은 것인지.자신이 끝내 죽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인지.아니면 열두 살의 테르반이 당한 일이 공식 기록에 남은 것인지.어쩌면 전부일 수도 있었다.그래서 나는 그냥 그의 손을 잡았다.그리고 오늘 아침.눈을 뜬 레오나르드가 가장 먼저 한 말은 뜻밖에도 이것이었다.“배고파.”나는 책에서 눈을 들었다.“좋은데요.”“뭐가?”“배고픈 거.”“왜?”“어제 저녁 거의 안 먹었잖아요.”레오나르드가 눈을 가늘게 떴다.“먹었어.”“수프 세 숟갈.”“빵도.”“두 입.”“고기도.”“한 조각.”“다 기억해?”“당연하죠.”레오나르드는 한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이불을 걷었다.“무섭네.”“이제 알았어요?”침대에서 내려오던 그가 멈췄다.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몸을 숙여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좋아해.”나는 눈을 깜빡였다.“아침부터 계약 조항 준수?”“중요하잖아.”개정된 계약서에 우리가 직접 적은 문장.좋아하면 좋아한다고 말한다.“훌륭해요.”“수업료.”이번에는 내가 그의 셔츠 깃을 잡아 조금 더 길게 입을 맞췄다.레오나르드의 꼬리가 뒤에서 한 번 크게 움직였다.“많이 냈는데.”“거스름돈 없어요.”“또 내도 돼?”“밥부터 먹어요.”“세리아.”“안 돼요.”그가 웃었다.어제 법정에서 울음을 참던 얼굴과는 달랐다.그렇다고 어제의 일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그냥.오늘 아침도 온 것이었다.테르반에게도.우리에게도.⸻아침 식사를 마칠 무렵 황궁에서 서신이 도착했다.봉투를 확인한 레오나르드의 표정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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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카르딘 발테리온의 정식 심리가 열리는 날 아침, 레오나르드는 결국 증언 의사를 밝혔다.결정은 전날 밤에 내렸다. 황실 재판부에 보낼 회신서를 책상 위에 펼쳐놓고도 한참 펜을 들지 못하더니, 마지막에는 길게 쓰지도 않았다.필요한 범위에서 진술하겠습니다.그게 전부였다.나는 옆에서 그 문장을 읽고 물었다.“필요한 범위가 어디까지예요?”“모르겠어.”“그런데 이렇게 써도 돼요?”“그래서 필요한 범위라고 썼어.”레오나르드가 펜을 내려놓았다. 금빛 귀가 조금 뒤로 누워 있었다. 펜을 쥐고 있던 손가락도 바로 펴지지 않았다. 손가락을 한 번 접었다 펴자 굳어 있던 마디가 느리게 풀렸다.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에는 이미 힘이 들어가 있었다.레오나르드는 제 손을 내려다보다가 말했다.“내가 아는 건 말하고, 모르는 건 모른다고 하려고. 그리고…… 아직 내가 뭘 느끼는지도 잘 모르겠으니까, 그것도 억지로 정하지 않을 거야.”그 말을 하고 나서야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모르겠다고 말해도 된다고 스스로 허락하자 몸이 먼저 긴장을 하나 놓은 모양이었다.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웃었다.“잘 배웠네요.”“또 수업?”“이번에는 칭찬.”금빛 귀가 조금 올라왔다.“보상은?”“왜 칭찬받을 때마다 보상을 요구해요?”“계속 잘하려고.”그럴듯했다.그래서 결국 입을 맞춰줬다.입술이 떨어졌을 때 귀가 조금 더 섰고, 꼬리 끝도 가볍게 한 번 움직였다. 긴장으로 굳어 있던 입가에도 아주 옅은 웃음이 걸렸다.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시선이 책상 위 회신서로 돌아간 순간 웃음이 먼저 사라졌다. 뒤이어 올라왔던 귀가 다시 조금 눕고, 움직이던 꼬리도 천천히 가라앉았다.아직 법정에 가지도 않았는데 몸은 벌써 알고 있었다.오늘 만날 사람이 단순한 증인도, 단순한 피고인도 아니라는 것을.한때 믿었던 어른.아버지를 말리던 모습을 기억하는 숙부.그리고 어쩌면.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많은 것을 알고 있었던 사람.그때까지만 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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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카르딘 발테리온의 두 번째 심리가 열리는 날, 레오나르드는 아침 식탁에서 빵을 두 조각이나 먹었다.별것 아닌 일이었다.적어도 다른 사람에게는.하지만 나는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꽤 오래 바라봤다.레오나르드가 결국 시선을 느꼈는지 빵을 씹다가 눈을 들었다.“왜?”“먹고 있길래요.”“……아침이니까?”“지난번에는 아침이어도 제대로 못 먹었잖아요.”그제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은 모양이었다.레오나르드가 천천히 씹던 것을 삼켰다. 지난 심리 날에는 법원에 가기도 전부터 속이 굳어 있었다. 카르딘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듣게 될지 몰랐고, 정작 심리가 시작된 뒤에는 예상보다 오래전부터 숙부가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하나씩 드러났다.그날 레오나르드의 몸은 마음보다 먼저 무너졌다.숨이 멎었고.손이 떨렸고.꼬리가 굳었다가 몸 가까이 말렸고.다리에 힘이 빠졌다.오늘은 달랐다.긴장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오른쪽 귀가 가끔씩 뒤로 움직였고, 차를 든 손가락도 평소보다 잔에 오래 머물렀다.하지만 빵을 먹었다.차도 마셨다.그리고 무엇보다.“나 긴장돼.”먼저 말했다.나는 웃지 않았다.대신 고개를 끄덕였다.“어디가 제일 그래요?”레오나르드는 잠시 생각했다.예전이었다면 그런 걸 어떻게 아느냐는 얼굴을 했을 것이다.이번에는 정말 자기 몸을 살폈다.손을 한 번 펴보고.어깨를 움직이고.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배.”“아파요?”“아픈 건 아닌데. 딱딱해.”“속이 긴장한 것 같아요?”“응.”그가 제 배를 내려다봤다.“지난번에는 이걸 법원 가서야 알았는데.”“오늘은 아침에 알았네요.”“발전인가?”“엄청난 발전.”귀 하나가 슬쩍 올라왔다.“보상은?”나는 빵 바구니를 밀어줬다.“한 조각 더.”레오나르드의 표정이 굳었다.“이건 벌 같은데.”“아침 잘 먹는 사자에게 주는 상이에요.”“키스가 더 좋은데.”“세 번째 조각 먹으면 생각해볼게요.”레오나르드는 빵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결국 빵을 집었다.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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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답하지 않아도 남아 있는 말

카르딘 발테리온에 대한 최종 판단이 내려지는 날 아침, 레오나르드는 내 손을 세 번 잡았다. 처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면서 한 번, 아침 식사를 마치고 마차에 오르기 직전에 또 한 번, 그리고 법원으로 들어가는 계단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번.나는 세 번째에야 결국 물었다.“오늘따라 좋아한다는 말을 손으로 많이 하네요.”레오나르드는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대답했다.“확인하는 거야.”“뭘요?”“한 번이 뭔지.”“……설마 나중에 두 번이랑 헷갈릴까 봐요?”“중요하잖아.”너무 진지해서 웃을 수도 없었다. 우리가 정한 신호는 단순했다. 손을 한 번 잡으면 좋아한다는 뜻이고, 두 번 잡으면 법정에서 나가고 싶다는 뜻이었다. 물론 입으로 말해도 됐다. 손을 두 번 잡아야만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말이 나오지 않을 때 사용할 수 있도록 둘이 정해둔 신호 하나일 뿐이었다.그런데 레오나르드는 그것을 꽤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그럼 시험해볼까요?”“어떻게?”나는 그의 손을 한 번, 그리고 다시 한 번 잡았다.레오나르드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나가고 싶어?”“정답.”“세리아.”“왜요?”“장난치지 마.”“왜요?”“진짜인 줄 알았잖아.”귀가 완전히 뒤로 눕는 것을 보고 나는 얼른 그의 손을 다시 한 번 잡았다.“이건?”레오나르드가 잠시 나를 노려보다가 대답했다.“……좋아한다는 뜻.”“맞아요.”“하.”한숨을 쉬면서도 뒤로 누웠던 귀는 조금 올라왔다. 이번에는 그가 내 손을 한 번 잡았다.“이건.”“좋아한다는 뜻.”“응.”레오나르드는 잠시 뒤 손가락을 고쳐 얽더니 낮게 말했다.“근데 오늘 진짜 두 번 잡을 수도 있어.”그 말에 자연스럽게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오늘은 카르딘의 최종 판단만 있는 날이 아니었다. 그 판단이 끝나는 즉시 라시안 발테리온의 잔여 혐의 심리가 재개된다. 레오나르드는 어젯밤까지도 참석 여부를 고민했고, 결국 참석하기로 했다. 다만 증언은 하지 않기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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