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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방법이 없었던 게 아니었습니다

Autor: 유월
last update Fecha de publicación: 2026-09-15 11:12:06

두 번째 공판이 열리기 전날, 황실 법무부에서 보낸 서류가 우리 방으로 도착했다.

나는 봉인을 뜯기 전에 봉투를 한동안 바라봤다. 첫 공판이 끝난 뒤에도 법무부에서는 오래된 연구 기록과 성소 관리 문서를 계속 분류하고 있었고, 다음 기일에는 라시안이 주장한 ‘당시 다른 방법이 없었다’는 말을 실제 기록과 대조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러니 서류가 오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 봉투를 건넨 시종의 표정이 묘하게 굳어 있었던 탓인지,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레오나르드는 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내가 봉투를 뜯지 않고 있자 그가 먼저 물었다.

“왜.”

“괜히 불길해서요.”

“열지 말까?”

나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해놓고 밤새 신경 쓸걸요.”

“맞아.”

“당신도 그렇죠?”

“응.”

나는 결국 봉인을 뜯었다. 안에는 짧은 안내문과 함께 복제된 연구 기록 세 장이 들어 있었다. 법무부가 내일 공판에서 다룰 예정인 자료 가운데 사건 당사자에게 미리 열람을 허용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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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네 번째 걸음은 허락받고 걷습니다

    리시안이 아버지의 수첩을 펼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누군가 곁에 있을 때도 아니었고, 특별히 마음을 먹고 책상 앞에 앉은 것도 아니었다. 평소처럼 눈을 뜨고 약을 먹은 뒤 하인이 가져다준 따뜻한 물을 반쯤 마셨다. 재활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고, 창밖에는 전날 밤 내린 비가 난간 끝에 조금씩 맺혀 있었다.책상 위에는 어젯밤 그대로 두었던 두 가지가 있었다.접어둔 에르반 영지 지도.그리고 아버지의 수첩.리시안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채 한참 그것들을 바라봤다.어제는 지도부터 펼쳤다. 서쪽 제분소 뒤에 메이라 홀튼의 집을 표시하고, 그 옆에 아직 이름도 제대로 외우지 못한 열여섯 가구의 위치를 작은 점으로 남겼다. 그 일을 끝내고 나서야 수첩에 손을 댔지만 결국 열지 않았다.오늘은 반대였다.지도를 건드리지 않고 수첩을 집었다.낡은 가죽 표지에 손가락을 올리고 잠시 기다렸다. 심장이 빨리 뛰는 것도 아니었고 손이 떨리지도 않았다. 이상할 만큼 평범했다.그래서 오히려 첫 장을 넘길 수 있었다.처음 나온 것은 예상과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북쪽 제방 보수. 우기 전에 석재 추가 필요.리시안의 눈이 멈췄다.다음 줄.밀 수확량 전년 대비 감소. 서부 농가 종자 지원 검토.그 아래에는 비용으로 보이는 숫자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리시안은 눈을 깜빡이고 다음 장을 넘겼다.마구간 지붕 누수.서쪽 우물 수질 검사.도란에게 겨울 장작 배분량 다시 확인할 것.그리고 페이지 아래쪽에 전혀 다른 내용이 하나 끼어 있었다.리시안 검술 수업 또 도망감.“…….”리시안의 표정이 묘해졌다.바로 아래에는 작은 글씨가 덧붙어 있었다.뒤뜰 나무 위에서 발견. 내려오라고 하니 배고프다고 함.리시안이 수첩을 조금 멀리 떨어뜨렸다.기억났다.아주 희미하게.검술 선생이 싫어서 뒤뜰 나무 위로 올라갔던 날이었다. 찾으러 온 아버지가 화를 낼 줄 알았는데, 한참 올려다보다가 정말 배가 고프냐고 물었다.그 뒤의 기억은 조금 더 선명했다.아버지가 하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돌아온 사람이 있다고 떠날 필요는 없습니다

    리아의 빨간 리본은 다음 날 아침에도 침대 옆 탁자 위에 있었다.어젯밤 잠들기 직전에 풀어둔 그대로였다. 아침 햇빛이 창문을 넘어 탁자 끝까지 들어왔을 때 리아는 한동안 그 리본을 바라봤다고 했다. 다시 머리에 묶을까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손가락으로 매듭 자국이 남은 천을 한 번 쓸어보고 방을 나왔다.그 이야기를 굳이 먼저 꺼낸 사람도 리아였다.“오늘은 안 묶을 거야.”아침 식탁에 앉아 빵을 반으로 뜯던 리아가 갑자기 선언했다.리시안은 수프를 한 숟가락 뜨려다 말고 동생을 봤다. 전날 면담에서 돌아온 뒤에도 리아가 꽤 오랫동안 리본을 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얼굴이었다.“누가 물어봤어?”“아무도.”“그런데 왜 말해?”리아는 뜯은 빵 한쪽을 수프에 적셨다.“내 마음이니까.”리시안의 입술이 한 번 달싹였다. 예전 같았으면 ‘그럼 굳이 왜 말하느냐’고 한마디 더 했을 텐데, 요즘은 동생과 말싸움을 시작하기 전에 그 끝이 어디쯤일지 짐작하는 법부터 배우고 있었다.“……그래.”결국 그것만 말하고 다시 수프를 먹었다.리아는 자기가 이겼다는 듯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내일은 묶을 수도 있어.”“그것도 네 마음이지.”“응.”“미리 말 안 해도 되고.”리아의 숟가락이 그제야 멈췄다.“오빠 요즘 말이 많아졌어.”“누구 때문인데.”“치료사?”“너.”“왜 나야?”“네가 말을 계속 시키잖아.”“나는 대답하라고 한 적 없는데.”리시안이 할 말을 잃었다.맞은편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레오나르드가 찻잔을 입에 댔다. 웃음을 감추려는 것이 너무 뻔해서 나는 식탁 아래로 그의 무릎을 살짝 건드렸다. 황금빛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웃지 말라는 뜻으로 눈짓했는데, 오히려 입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리아는 그런 우리를 보지 못한 채 리시안의 접시를 내려다봤다.“그런데 오빠 오늘은 다 먹어.”“먹고 있잖아.”“어제는 반 남겼잖아.”“어제는 피곤했으니까.”“오늘은?”리시안은 잠시 자기 몸의 상태를 확인하듯 다리를 내려다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기다린 마음까지 책임질 필요는 없습니다

    에르반가에 다녀온 다음 날, 리시안은 늦잠을 잤다. 정확히는 치료사가 깨우지 못하게 했다.“어제 장거리 이동에 현장 확인까지 했습니다. 오늘 오전 재활은 없습니다.”아침 식탁에서 그 말을 들은 리시안은 숟가락을 든 채 굳었다.“아예요?”“아예입니다.”“세 걸음도?”“오늘 오전에는 없습니다.”“그럼 오후에는요?”치료사가 차를 한 모금 마셨다.“상태를 보고 결정하겠습니다.”“걷지 않으면 상태가 좋은지 어떻게 압니까?”“환자분은 걸어야만 상태를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리시안의 입이 다물렸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리아가 빵에 잼을 바르며 중얼거렸다.“또 졌네.”“나는 지금 싸우는 게 아니야.”“맨날 지는 사람은 그렇게 말해.”“누구한테 배운 말이야?”“내가 만들었어.”“요즘 네가 만드는 말은 왜 다 나를 공격하지?”“쓸 데가 오빠밖에 없으니까.”나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레오나르드도 웃으려다가 리시안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차를 마셨다.“방금 웃으셨죠?”“아닌데.”“웃으셨습니다.”“증거 있어?”리아가 눈을 크게 떴다.“그거 내 말인데.”“좋은 말은 같이 쓰는 거야.”“돈 내요.”“왜?”“내가 만들었으니까.”“얼마?”리아가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리시안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둘을 번갈아 봤다.평범한 아침이었다. 어제 십이 년 만에 불탄 집을 보고 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리아는 평소처럼 빵을 먹었고, 리시안은 재활을 못 한다고 불평했다. 레오나르드는 리아가 잼을 너무 많이 바른다고 했다가 자기 접시의 고기를 빼앗겼고,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있던 과일 접시를 슬쩍 내 쪽으로 옮겼다.그리고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하인이 편지 한 통을 가지고 들어왔다.“리시안 에르반 님께 황실 재산관리국에서 전달된 서신입니다.”리시안의 표정이 달라졌다.어제도 같은 곳에서 문서를 받았다. 에르반가의 잔존 재산과 작위 및 가문 복원 절차, 그리고 결정을 유예할 수 있다는 안내였다. 오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집인지, 옛집인지

    이틀 뒤.리시안은 세 걸음을 걸었다.첫 번째 걸음은 안정적이었다.두 번째 걸음에서는 오른쪽 무릎이 아주 조금 흔들렸지만 스스로 중심을 잡았다.세 번째 걸음을 내디딘 뒤에는 치료사가 손을 떼었다.“하나.”리아가 먼저 세기 시작했다.“둘.”리시안이 숨을 골랐다.“셋.”발끝이 조금 움직였다.“넷.”허리는 곧게 펴져 있었다.“다섯.”치료사가 리시안의 무릎을 살폈다.“여섯.”리아의 목소리가 조금 작아졌다.“일곱.”리시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여덟.”“앉으세요.”리시안은 곧바로 앉았다.토를 달지 않았다.네 번째 걸음을 내딛으려 하지도 않았다.의자에 앉은 뒤에는 먼저 자기 다리를 내려다봤다. 오른쪽 무릎을 천천히 굽혔다 폈다가 발끝을 움직여보고, 눈을 감은 채 몸 안쪽의 마력 흐름까지 확인했다.치료사가 물었다.“어떻습니까?”“오른쪽 발바닥이 조금 저립니다.”“어제보다?”“비슷합니다. 통증은 없고, 어지러움도 거의 없습니다.”“역류는요?”리시안이 조금 더 기다렸다.“없습니다.”치료사는 손목의 맥과 마력 회로를 확인했다.리아가 옆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않고 기다렸다.마침내 치료사가 손을 놓았다.“좋습니다.”리아의 얼굴이 밝아졌다.리시안은 더 빨랐다.“그럼 갈 수 있습니까?”치료사가 대답하기도 전에 리아가 끼어들었다.“에르반가.”“알고 있습니다.”“오늘.”“그것도 알고 있습니다.”“마차도 준비했어요.”“그건 왜 벌써 준비했습니까?”리아가 레오나르드를 가리켰다.“저 사람이.”레오나르드가 억울한 얼굴로 리아를 봤다.“네가 준비해달라고 했잖아.”“그래서 준비했잖아요.”“그럼 네가 준비한 거지.”“돈은 대공님 거잖아요.”레오나르드가 입을 다물었다.리아가 이겼다.요즘 자주 보는 광경이었다.나는 웃음을 참으며 치료사를 봤다.“상태는 괜찮은 거죠?”“현재로서는 그렇습니다.”그 말에 리시안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치료사가 바로 손을 들었다.“끝까지 들으십시오.”리시안이 다시 등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돌아갈 곳은 우리가 정합니다

    세레나가 라비에나를 만난 다음 날에도 아침은 왔다.그 사실이 이상하게 마음에 남았다.십이 년 만의 재회가 있었다고 해서 해가 늦게 뜨는 것도 아니었고, 저택의 식사 시간이 달라지는 것도 아니었다. 주방에서는 평소처럼 빵 굽는 냄새가 올라왔고, 복도에서는 하인들이 창문을 열었다. 정원사는 밤사이 떨어진 잎을 쓸었고, 리시안은 아침부터 치료사에게 네 번째 걸음을 허락해달라고 조르고 있었다.“안 됩니다.”“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요.”“말씀하실 걸 아니까요.”“제가 오늘은 다른 부탁을 할 수도 있잖습니까.”“그러면 말씀해보십시오.”리시안이 입을 다물었다.리아가 옆에서 빵을 씹으며 말했다.“네 걸음.”치료사가 고개를 끄덕였다.“역시.”“둘이 짰어?”“안 짜도 알아.”“너는 왜 아침부터 여기 있어?”“오빠가 사고 칠까 봐.”“내가 언제 사고를 쳤다고.”리아가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어제.”“그건 사고가 아니었어.”“그저께.”“그것도.”“사흘 전.”“…….”“더 해?”리시안이 입을 다물었다.나는 재활실 문 앞에서 웃음을 참았다.옆에 서 있던 레오나르드가 작게 말했다.“오늘도 리아가 이겼네.”“매일 이기는데요.”“리시안은 왜 계속 싸우는 거지?”“언젠가는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죠.”“근거 없는 낙관이네.”“들립니다.”안에서 리시안의 목소리가 날아왔다.우리는 결국 웃으며 들어갔다.오늘도 의자는 정확히 세 걸음 떨어져 있었다.치료사는 리시안의 다리 상태부터 확인했다. 무릎을 굽혔다 펴게 하고, 발끝의 감각과 마력 흐름을 살폈다. 예전처럼 조금만 움직여도 마력 회로가 들쭉날쭉 흔들리지는 않았다.“오늘 상태는 좋습니다.”그 말에 리시안의 얼굴이 바로 밝아졌다.“그럼 네 걸음.”“세 걸음입니다.”“상태가 좋다면서요.”“그래서 세 걸음을 더 안정적으로 하는 겁니다.”리시안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리아가 혀를 찼다.“오빠는 왜 발전을 숫자로만 생각해?”“걷는 건 원래 숫자로 세잖아.”“그

  • 사자와 결혼한 여우의 사정   그날, 내 말을 들었나요

    약속한 날이 왔다.세레나는 약속 시간보다 삼십 분 먼저 찻집에 도착했다. 일찍 만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라비에나가 오기 전에 자기가 먼저 도착해서 자리를 보고 싶었다.문이 어디에 있는지. 창문은 얼마나 큰지.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라비에나가 들어왔을 때 어느 쪽으로 앉게 될지. 그리고 자신이 나가고 싶어졌을 때 누구에게도 비켜달라고 말하지 않고 바로 나갈 수 있는지.세레나는 그것들을 하나씩 확인했다.찻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작았다. 수도 외곽에 있어서 손님도 많지 않았고, 안쪽 별실에는 작은 원형 탁자 하나와 의자 두 개가 전부였다. 세레나가 예약할 때 확인했던 것처럼 오른쪽에는 정원으로 바로 이어지는 문이 있었다.문고리까지 세 걸음.세레나는 직접 걸어봤다.하나.둘.셋.손을 뻗으면 바로 닿았다. 문도 잠겨 있지 않았다. 밀자 곧바로 열렸고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안으로 들어왔다.세레나는 한동안 열린 문 앞에 서 있었다.별것 아닌 확인이었다.그런데 문이 정말 열리는 것을 보고 나서야 굳어 있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오늘은 자신이 나가고 싶으면 나갈 수 있었다.누구의 허락도 필요 없었다.누군가가 문을 막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그 사실을 확인하고 나서야 세레나는 문을 다시 닫았다.“괜찮으십니까?”찻집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세레나는 곧장 괜찮다고 대답하려다가 잠깐 멈췄다.긴장하고 있었다.손끝도 조금 차가웠다.그래도 지금 당장 돌아가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네.”그 정도면 충분했다.“차는 약속 시간에 맞춰 준비해드릴까요?”“아니요. 제 것은 지금 주세요.”“상대분 것은요?”그 질문에 세레나의 손끝이 잠깐 멈췄다.예전이었다면 자기도 모르게 대신 골랐을지 몰랐다. 무슨 차를 마시는지 모르니까 적당한 것으로.하지만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그분이 오면 직접 물어봐 주세요.”“알겠습니다.”직원이 나간 뒤 세레나는 창가에 앉았다.차가 나왔다.한 모금 마셨다.맛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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