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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련 없는 아내의 퇴장법
미련 없는 아내의 퇴장법
Author: 꽃잎소녀

제1화

Author: 꽃잎소녀
남가희는 붉어진 얼굴로 몸을 일으켜 속옷을 챙겨 입었다.

“교수님, 저... 임신이 가능할까요?”

가희는 불안한 눈으로 세면대 앞에 선 남자를 바라봤다.

윤주환은 허리를 조금 숙인 채 손을 씻고 있었다. 길고 반듯한 손가락 위로 물줄기가 흘렀고, 소매 아래로 드러난 팔뚝에는 힘줄이 은근히 도드라져 있었다.

주환의 시선이 가희에게 닿았다.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검은 눈에는 담담한 냉기가 배어 있었다.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않았습니까?”

가희의 얼굴이 귀까지 붉어졌다.

입술을 깨문 끝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번뿐이었어요.”

“한 번?”

“왜, 왜요? 문제가 있나요?”

가희는 치맛자락을 쥐며 속으로 계속 되뇌었다.

‘의사한테는 환자가 다 똑같아. 아무것도 이상할 거 없어.’

하지만 주환의 길고 반듯한 손가락이 눈에 들어오자 조금 전 진료 화면이 떠올랐고, 호흡이 괜히 흐트러졌다.

가희는 딴생각을 떨쳐 내려고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주환 앞에 놓인 진료기록지가 보였다.

글씨는 놀라울 만큼 정갈했다.

흔히 떠올리는 알아보기 힘든 필체와는 달리 선이 또렷하고 단정했다.

“기초 체력이 많이 약합니다. 조기 진통 위험도 있고요. 아이를 유지하고 싶다면 입원해서 경과를 봐야 합니다. 보호자에게 바로 연락하는 게 좋겠습니다.”

가희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임신 기간 내내 조심했다. 유산 위험이 있다는 말을 들은 뒤로는 처방받은 주사도 빠뜨리지 않았고, 최근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어렵게 유명한 전문의 진료까지 잡았다.

그런데 설마 아이를 잃을 위험이 있을 줄은 몰랐다.

가희는 치맛자락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교수님, 아이만 낳을 수 있다면 뭐든 할게요.”

결혼한 지 3년.

부원우는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말 하나로 결혼 후 단 한 번도 가희를 안지 않았다.

이번 임신은 술에 취했던 밤에 벌어진 뜻밖의 일이었다.

가희는 원우가 아이를 원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처음으로 남편 뜻을 거슬렀다.

원우가 M국으로 반년짜리 출장을 떠난 틈을 타 몰래 임신 유지 치료를 시작했다.

몸에 좋다는 보조약까지 챙겨 먹다가 위장 출혈로 고생하면서도 버텼고, 그렇게 겨우 임신 7개월까지 왔다.

‘우리 사이에 아이만 생기면... 식어 가던 사랑과 결혼도 다시 붙잡을 수 있을 거야.’

“아이를 유지하든 다른 결정을 하든, 지금 상태에서는 보호자 서명이 필요합니다.”

차가운 목소리가 가희의 생각을 끊어 냈다.

마치 어디까지 생각이 치달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가희는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정신을 가다듬었다.

입술을 깨물며 마음을 굳혔다.

“알았어요. 지금 전화할게요.”

가희가 진료실을 나오자 다음 산모가 들어갔다.

이곳은 상위 고객을 주로 받는 프라이빗 병원이라 복도도 비교적 한산했다.

가희는 사람이 없는 쪽으로 자리를 옮긴 뒤 부원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 번째 통화는 받지 않았다.

두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에야 연결음이 끊겼다.

하지만 전화받은 사람은 남편 부원우가 아니었다.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는 엄마랑 뽀뽀하고 있는데요. 자꾸 전화하면 귀찮잖아요.]

가희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따져 물을 틈도 없었다.

전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희에게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부드러운 어조였다.

[나은아, 착하지. 핸드폰 아빠 줘.]

[아빠, 아까 베란다에서 엄마랑 뽀뽀하고 있었잖아. 벌써 끝났어?]

[한나은, 장난 그만.]

이번에는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섞였다.

[자기가 자꾸 그렇게 다 받아 주니까 나은이 더 장난꾸러기가 되잖아.]

원우가 낮게 웃었다.

[우리 나은이도 벌써 3살인데, 대체 언제 나랑 결혼해 줄 거야?]

[그런 말 하지 마. 너 이미 가정 있잖아.]

[내가 왜 걔랑 결혼했는지 네가 더 잘 알잖아. 그때 네가 나 밀어낸 게 홧김에 한 결혼이야.]

원우의 목소리가 싸늘해졌다. 혐오를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남가희 같은 속 빈 인형을 3년 동안 아내로 두면서 손 한 번 대는 것도 역겨웠어. 아직도 그날 밤 남자가 나라고 믿고 있겠지.]

그 한마디가 둔탁하게 가희의 가슴을 후려쳤다.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날 밤 사람이... 원우가 아니었다고?’

‘그렇다면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

갑자기 들이닥친 진실에 속이 뒤집혔고, 아랫배에서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가희는 통증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머릿속에는 7개월 전 일이 계속 되풀이됐다.

...

7개월 전.

원우는 느닷없이 가희를 비즈니스 모임에 데리고 나갔다.

결혼한 3년 동안 원우는 가희와 외출하는 일조차 거의 없었다.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다. 법적으로 혼인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양가 가족 정도였다.

그래서 그날 가희는 정말 기뻤다.

대학 마지막 학년 때 원우를 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그를 좋아해 왔다.

무려 6년 동안 티도 제대로 내지 못한 채 곁을 맴돌았다.

그러다 원우가 마침내 자신을 봐 줬고, 두 사람은 빠르게 혼인신고를 했다.

그날 가희는 이유도 모른 채 술을 많이 마셨다.

눈을 떴을 때는 호텔 침대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혼자 누워 있었다.

원우는 이미 M국 출장길에 오른 뒤였다.

가희는 줄곧 그 밤을 원우와 보냈다고 믿었다.

그때 기자로 일하는 절친 심지아에게서 메시지가 연달아 쏟아졌다.

선명한 사진 몇 장도 함께였다.

[가희야, 이게 무슨 일이야? 네 남편이 왜 네 언니랑 같이 있어?]

사진 속 원우는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한쪽 팔에는 핑크색 공주 원피스를 입은 여자아이를 안고, 다른 손으로는 선글라스를 쓴 여자의 손을 잡고 있었다.

옆모습만 찍혔지만 가희는 단번에 알아봤다.

친언니, 정희였다.

원우는 손으로 정희를 마주보며 목도리를 직접 정리해 주고 있었다.

조심스러운 손길에는 가희가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는 애틋함이 묻어 있었다.

다리 사이로 따뜻한 액체가 흘러내렸다.

배를 쥐어짜는 통증도 더 심해졌다.

결혼한 지 3년인데, 언니와 남편 사이의 아이는 이미 3살이었다.

사진 속 세 사람은 가희의 6년 짝사랑과 3년 결혼 생활이 전부 우스운 장난이었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가희가 웃었다.

‘부원우가 그렇게까지 남의 아이 아빠가 되고 싶어 했다면, 소원대로 해 줘야지.’

가희는 다시 진료실로 돌아갔다. 목소리는 오히려 차분했다.

“교수님, 제 남편이 바람났어요. 임신 유지 시술 동의서는 제가 직접 쓸게요.”

고개를 숙여 기록을 적던 주환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든 주환은 붉게 충혈된 가희의 눈과 단단히 굳은 표정을 마주했다.

주환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그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가희에게 다가갔다.

팔을 뻗어 몸에서 힘이 빠져서 그대로 주저앉을 뻔한 가희를 그대로 안아 들었다.

가희에게서 흘러나온 피가 주환의 흰 가운을 붉게 적셨다.

주환은 거기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응급실 쪽으로 빠르게 걸었다.

“산모 대량 출혈입니다! 응급수술 바로 들어갈 수 있게 준비해 주세요!”

...

M국.

원우는 나은에게서 핸드폰을 되찾았다.

통화기록에 찍힌 ‘남가희’이라는 이름을 보자 잠시 멈칫했다.

뒤늦게 이유를 설명하기 어려운 짜증이 치밀었다.

‘아까 한 말... 전부 들은 건가?’

원우가 가희를 싫어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고 믿었다.

과거 가희가 유학 기회를 빌미로 임신한 정희를 해외로 내몰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3년 동안 가희에게 차갑게 굴었다.

그래도 인정할 건 있었다.

가희는 자기 아내 역할만큼은 흠잡을 데 없이 해 왔다.

막상 모든 사실이 드러나 일이 커질 거라고 생각하니, 뜻밖에도 마음 한구석이 걸렸다.

그때 하얀 팔이 뒤에서 원우의 허리를 감쌌다.

정희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한숨 섞인 말투였다.

“자기는 그냥 가희한테 돌아가는 게 낫지 않을까? 가희가 뱃속의 아이가 네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많이 힘들 거야. 가희도 부모님이 보육원에서 데려온 애잖아. 그래도 네가 옆에 있어 주면 덜 외롭지 않겠어?”

“자업자득이지.”

원우가 비웃었다.

“남가희는 내 아내 자리도 내놔야 하고, 재산 한 푼 없이 나가야 해. 네가 그때 겪었던 고통이 어떤 건지 똑같이 느끼게 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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