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낮에는 오빠, 밤에는 주인님: Chapter 21 - Chapter 30

123 Chapters

21화. 그냥 있어

알람이 울리자 해원은 눈을 떴다.협탁 위에 엎어둔 개인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밤사이 쌓인 메시지와 메일 알림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마지막 연락은 자정을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해원은 침대에 기대앉아 알림을 차례로 확인했다.태원그룹 홍보실에서 VIP 대기실 위치를 바꿔달라는 요청을 보냈고, 촬영팀은 전용 엘리베이터 사용 시간을 앞당길 수 있는지 물었다. 외부 장식 업체에서도 반입 시간을 확정해달라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그 아래로 태원호텔 연회팀장이 전달한 메일이 보였다.본부장 지시로 추가 변경은 오전 열 시까지 보류하겠습니다. 기존 확정안을 유지하며, 윤해원 총괄 확인 후 최종 반영하겠습니다.태헌은 어느 쪽도 대신 결정하지 않았다.질문이 더 들어오지 않게 막아두고, 해원이 판단할 자리만 그대로 남겨놓았다.출근한 해원은 가장 먼저 두 동선표를 나란히 띄웠다.VIP 대기실을 옮기면 촬영팀이 사용할 엘리베이터 앞을 지나야 했다. 요청을 모두 받아들이면 신부 이동 시간과 겹쳤다.해원은 대기실을 기존 위치에 두고 촬영팀 탑승 시간만 십오 분 앞당겼다. 장식물 반입은 예정대로 진행하되 설치 확인 인원을 한 명 추가했다.결정을 내려 회신하자 연회팀장이 곧바로 답을 보내왔다.확인했습니다. 해당 안으로 진행하겠습니다.밤새 붙잡고 있었어도 달라지지 않았을 일이었다. 오히려 잠을 자고 나니 충돌하는 지점이 한눈에 들어왔다.해원은 잠시 메일함을 내려다보다 개인 휴대전화를 들었다.태헌과의 대화창에 짧게 입력했다.어젯밤 요청 건 확인했습니다.답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문제 생겼어?아니요.그럼 됐어.해원은 마지막 문장을 한 번 더 읽었다.왜 자신이 맡은 일처럼 책임졌는지 묻지는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전날 밤 이미 들었다.내가 책임져.태헌은 밤사이 자신이 가져간 몫을 책임졌고, 아침이 되자 판단할 자리를 해원에게 그대로 돌려주었다.해원은 휴대전화 화면을 끄고 다시 일을 시작했다.그날 밤, 저택으로 돌아온 해원은 샤워를 마친 뒤 다음 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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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조금 더 가까이

결혼식까지 28일. 본관 응접실 한쪽 벽이 비워져 있었다.평소 놓여 있던 콘솔과 장식장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촬영용 조명과 흰색 배경이 설치돼 있었다. 바닥에는 네 사람이 설 위치를 표시한 작은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본식 전에 찍어두기로 한 가족사진이었다.해원은 응접실로 들어서자마자 창가에 세워둔 꽃 장식을 보았다. 조명에 가려 꽃병의 한쪽이 어둡게 보였다.그쪽으로 다가가려는데 촬영 진행표를 확인하던 홍보실 직원이 먼저 해원을 불렀다.“윤 총괄님.”해원이 걸음을 멈췄다.“꽃 위치를 조금 옮기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그건 저희가 확인하겠습니다.”직원이 바닥에 붙은 표시를 가리켰다.“오늘은 이쪽이 아니라 가족분 자리로 가시면 됩니다.”해원은 바닥의 테이프를 내려다보았다.결혼식과 관련된 자리에 올 때마다 해원이 서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신부의 동선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 진행 인력에게 지시를 내릴 수 있는 자리, 문제가 생기면 가장 먼저 움직일 수 있는 자리였다.카메라 앞에 서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하는 쪽이었다.오늘은 자신이 그 안에 들어가야 했다.“해원아.”수경이 다가와 해원의 옷깃을 정리했다. 어깨에 내려앉은 머리카락도 손으로 가볍게 쓸어 넘겼다.“오늘은 일하지 말고 사진만 찍어.”“엄마, 저것만 조금 옮기면—”“사람이 몇 명인데 네가 그것까지 해.”수경은 해원의 몸을 촬영 표시 쪽으로 돌려놓았다.“오늘은 내 딸로 온 거잖아.”해원은 더 말하지 않았다.촬영 보조가 명우와 수경의 위치를 확인하는 동안, 홍보실 직원은 탁자 위에 가족 프로필 카드를 내려놓았다. 사진과 함께 보관할 이름과 관계를 확인하기 위한 자료였다.맨 위에는 차명우의 이름이 있었다. 그 아래로 한수경, 차태헌, 윤해원이 차례로 적혀 있었다.해원은 자신의 카드를 잠깐 내려다보았다.이름과 생년, 라비엘 프라이빗 재직 정보 아래로 가족관계가 이어졌다. 부친 항목에는 아버지 회사의 법인명과 폐업 연도까지 적혀 있었다.촬영 자료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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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완벽한 오빠

동관 복도나 태헌의 방이었다면 의식하지 않았을 거리였다. 그의 무릎 앞에 앉고, 손이 닿는 대로 몸을 맡겼다. 이틀 전에는 자신의 허벅지 위에 태헌의 머리를 올려두고 한참 동안 머리카락을 만졌다.지금은 어깨가 스치는 것만으로도 몸에 힘이 들어갔다.두 사람을 바라보던 사진사가 말했다.“오빠분이 동생분 어깨를 조금 더 감싸주세요.”해원의 시선이 정면에서 잠깐 흔들렸다.태헌의 오른손이 올라왔다.손바닥이 해원의 어깨 위에 놓였다. 손가락이 어깨 끝을 감싸고, 팔이 등 뒤로 이어졌다.사진사는 손으로 거리를 좁히는 시늉을 했다.“네. 그대로 조금만 더 가까이 붙어볼게요.”태헌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해원의 몸이 그의 옆으로 당겨졌다. 벌어져 있던 거리가 사라지고 두 사람의 어깨가 완전히 맞닿았다.응접실 안의 누구도 이상하게 보지 않았다.새로 가족이 될 오빠가 동생의 어깨를 감싸고 사진을 찍는 것뿐이었다.해원은 정면의 카메라를 바라보았다.어깨 위에 놓인 손의 무게가 선명했다. 손가락 하나가 움직일 때마다 어디까지 닿아 있는지 알 수 있었다.사진사가 셔터를 눌렀다.한 번.다시 한 번.“동생분, 어깨에 힘을 조금만 빼주세요.”해원은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하지만 굳어 있던 어깨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태헌이 고개를 아주 조금 숙였다.“힘 빼.”해원에게만 들릴 만큼 낮은 목소리였다.사진사에게는 긴장한 동생을 달래는 말로 들렸을 것이다.해원은 그 말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어깨에서 힘을 뺐다.태헌의 팔 안으로 몸이 조금 더 들어갔다. 그가 감싸고 있는 쪽으로 중심이 기울었다.사진사가 곧바로 셔터를 눌렀다.“좋습니다. 지금 아주 자연스러워요.”태헌의 손가락이 해원의 어깨를 한 번 눌렀다.사진사는 해원에게 얼굴을 태헌 쪽으로 아주 조금만 기울여달라고 했다. 해원은 고개를 움직였다. 태헌의 어깨가 조금 더 가까워졌다.“오빠분도 동생분 쪽을 한번 봐주시겠어요?”태헌이 고개를 돌렸다.해원은 카메라를 보고 있었지만 옆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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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차고 내려가

검은 휴대전화가 울린 것은 결혼 발표 만찬 시작 한 시간 전이었다.해원은 태원호텔 행사 준비실에서 막 옷을 갈아입은 참이었다.거울 속에는 짙은 남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몸에 맞게 떨어지는 단정한 디자인이었다. 신부의 딸로 인사하기에도, 행사장을 오가며 사람들을 상대하기에도 부족함이 없었다.테이블 위에는 두 대의 휴대전화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개인 휴대전화에는 확인하지 못한 메시지가 쌓여 있었다. 연회팀장은 먼저 도착한 참석자의 대기실을 물었고, 홍보실에서는 최종 좌석표를 다시 보내왔다.불이 들어온 검은 휴대전화에는 문장 하나만 떠 있었다.입을 옷 입었으면 2701호로 와.해원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았다.나흘 전에는 개인 휴대전화로 연락이 왔다.안 자면 잠깐 와.그날 태헌은 자신을 불러놓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머리를 무릎 위에 올리고, 그저 있으라고 했다.오늘은 검은 휴대전화였다.시키려고 부른다는 뜻이었다.해원은 화면을 끄지 않은 채 거울 속 자신을 다시 보았다. 무엇을 요구받을지 알 수 없는데도 목 아래부터 천천히 열이 올라왔다.두려워서 생기는 긴장과는 달랐다.기다렸던 물건이 다시 울렸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해원은 개인 휴대전화를 들고 다연에게 전화를 걸었다.“나 잠깐 가족 대기실 확인하고 올게.”—응. 그동안 이쪽은 내가 보고 있을게. “십 분 안에 내려올게. 좌석은 건드리지 말고, 일찍 도착한 분들만 대기실로 안내해 줘.”통화를 끝낸 해원은 두 대의 휴대전화를 모두 챙겨 준비실을 나왔다.전용 엘리베이터에 올라 27층 버튼을 눌렀다.문이 닫히자 거울 벽에 해원의 모습이 비쳤다. 한 손에는 업무용 개인 휴대전화가, 다른 손에는 검은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다.층수가 올라갈수록 검은 휴대전화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27층에 도착한 해원은 복도 끝에 있는 2701호 앞에 섰다.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태헌의 목소리가 들렸다.“들어와.”해원이 문을 열었다.거실과 응접 공간이 함께 있는 VIP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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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실수하게 두지않아

치마를 끌어 올리자 발목과 종아리가 차례로 드러났다. 무릎을 지나 허벅지까지 올라간 자리에서 해원의 손이 멈췄다.“더.”손이 다시 움직였다.해원은 거울 속 태헌을 바라보았다. 태헌의 시선은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그가 상자에서 도구를 꺼냈다.차가운 감촉이 피부에 닿자 해원의 다리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태헌은 서두르지 않고 속옷 안쪽에 도구를 고정했다.손끝이 닿을 때마다 해원의 호흡이 조금씩 흐트러졌다.착용이 끝나자 태헌이 말했다.“내려.”해원은 잡고 있던 드레스 자락을 놓았다.짙은 남색 천이 다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거울 속 해원은 조금 전과 똑같았다.태헌은 테이블로 돌아가 리모컨을 집었다.해원은 언제 작동할지 몰라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태헌의 엄지가 버튼을 눌렀다.드레스 아래에서 갑작스럽게 진동이 시작됐다.해원의 허리가 굳었다. 숨이 짧게 끊기며 손이 옆에 있는 테이블을 짚었다.“똑바로 서.”해원은 테이블에서 손을 뗐다.무릎에 들어간 힘을 풀지 못한 채 허리를 세웠다. 태헌이 강도를 한 단계 높였다.몸 안쪽으로 파고드는 감각에 해원의 입술이 벌어졌다. 흐트러지려는 호흡을 참으려 했지만 얕은 숨이 새어 나왔다.“나 봐.”해원은 고개를 들었다.태헌이 자신의 반응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보고 있었다.그 시선을 확인하는 순간, 감추려던 표정이 오히려 더 쉽게 무너질 것 같았다. 해원은 입술을 다물고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태헌의 엄지가 다시 움직였다.진동이 멈췄다.갑자기 사라진 감각 뒤로 여운만 남았다. 해원은 흐트러진 숨을 천천히 고르며 자세를 유지했다.태헌이 물었다.“할 수 있겠어?”해원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방금 전까지 도구가 닿아 있던 자리가 선명했다. 아래층에 내려가면 언제 다시 시작될지 알 수 없었다.해원이 물었다.“제가 사람들 앞에서 실수하면요?”“실수하게 두지 않아.”태헌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없었다.해원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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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오빠가 잘 챙겨줘요

엄마와 차 회장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몸 안쪽에서 진동이 번졌다.해원은 들이마시던 숨을 멈췄다.한 걸음만 더 나가면 두 사람을 맞아야 했다. 그런데 발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드레스 자락 아래로 두 다리가 맞붙었다.곁에 선 태헌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그의 오른손은 바지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다.“해원아.”수경이 먼저 다가왔다.“엄마.”겨우 목소리를 냈다. 웃어야 한다는 생각이 뒤늦게 따라왔다.진동이 한 번 더 깊어졌다.해원은 손에 든 진행표를 움켜쥐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그렇지만 몸 안에서 일어나는 반응까지는 누르지 못했다.수경의 걸음이 느려졌다.“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대답이 나오지 않았다.태헌의 주머니 안에서 손이 움직였다. 진동이 끊겼다.갑자기 찾아온 정적에 오히려 다리가 휘청할 것 같았다. 해원은 숨을 들이마시고 입꼬리를 올렸다.“조명이 좀 쎈가봐.“수경이 해원의 뺨에 손을 댔다.“열 있는 거 아니야?”“아니야. 긴장했나 봐.”“네가 이런 자리 한두 번 해?”“내가 진행한 적은 많아도 가족으로 서는 건 처음이잖아.”거짓말은 아니었다.수경의 표정이 금세 풀렸다. 딸의 붉어진 얼굴을 긴장 탓으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너무 무리하지 마.”“응.”옆에서 물잔이 내밀어졌다.“물 마셔.”태헌이었다.해원이 잔을 받으려다 그의 손가락을 건드렸다. 유리끼리 가볍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별것 아닌 소리인데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태헌은 잔을 놓지 않았다.해원이 제대로 쥘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손을 뗐다.“고마워, 오빠.”말끝이 조금 갈라졌다.수경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웃었다.“그래도 태헌이가 옆에서 잘 챙겨주네.”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원이 물을 마시는 동안 잠깐 그녀를 바라봤을 뿐이었다.그 시선 때문에 목으로 넘긴 물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해원아.”다연이 진행표를 들고 빠르게 다가왔다.“앞쪽 테이블에 한 분 추가됐어. 잔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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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그가 미웠다

박수가 끝나자 해원은 단상에서 내려왔다.세 걸음을 옮길 때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태헌은 명우 옆에 남아 인사를 받았다. 주머니에서 꺼낸 오른손으로 악수를 하고, 말을 건네는 사람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해원 쪽은 보지 않았다.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이제는 일만 하면 됐다.“해원아.”다연이 다가오며 태블릿 화면을 내밀었다.“영상 끝나는 시간이 십 초 늘어났어. 마지막 자막을 못 줄이겠대.”“그럼 건배 음악을—”몸 안쪽에서 진동이 시작됐다.해원은 말을 멈췄다.이번에는 시작되는 순간을 알았다. 놀라지 않으려 했는데 몸이 먼저 굳었다. 허벅지에 힘을 주자 감각이 더 선명해졌다.“건배 음악을?”다연이 다음 말을 기다렸다.해원은 태블릿 화면을 보았다. 숫자와 진행 순서가 분명히 적혀 있는데도 읽히지 않았다.진동이 한 단계 깊어졌다.“건배 먼저 준비하고 식사 서비스…….”말을 하던 해원이 입술을 다물었다.순서가 아니었다.아직 영상이 남았고, 명우의 환영 인사가 먼저였다. 자신이 방금 무엇을 지시했는지 깨닫는 데 몇 초가 걸렸다.“해원아?”다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해원은 고개를 들었다.사람들 사이로 태헌이 보였다.임원 하나의 말을 듣고 있으면서도 그의 시선은 정확히 해원에게 와 있었다. 표정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순간 그가 미웠다.지금은 자신의 방이 아니었다. 아래층 연회장이었고, 엄마가 있었고, 수십 명의 직원이 해원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그만 좀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왜 하필 지금 자신을 이렇게 흔들어 놓는지 묻고 싶었다.진행표를 쥔 손이 떨렸다.태헌의 표정이 달라졌다.아주 잠깐, 그의 시선이 해원의 손으로 내려갔다. 뒤늦게 주머니 속 손이 움직였다.진동이 멎었다.해원은 눈을 감지 않았다. 한 번 길게 숨을 들이마신 뒤 태블릿을 다시 봤다. 흐트러졌던 순서가 제자리로 돌아왔다.“……아니. 잠깐만.”해원이 손가락으로 화면을 짚었다.“영상 끝나면 회장님 환영 인사야. 건배는 그다음. 음악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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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나 봐

무슨 말을 하려던 것인지는 해원도 몰랐다. 붙잡아 놓고 보니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태헌은 재촉하지 않았다. 그저 기다렸다. 해원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태헌은 잠시 그녀를 바라본 뒤 돌아섰다. 곧 영상이 끝난다는 안내가 나왔다. 해원은 자리로 돌아가 음향팀과 서비스 직원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해야 할 일은 다시 정확하게 보였다. 그런데 환영 인사가 시작된 뒤에도 해원의 시선은 자꾸 태헌을 향했다. 그가 먼저 자신을 볼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태헌은 곧바로 주머니에 손을 넣지 않았다. 해원이 피할 시간을 주듯 가만히 바라봤다. 해원도 눈을 돌리지 않았다. 잠시 뒤, 익숙한 진동이 다시 시작됐다. 이번에는 숨이 막히지 않았다. 해원은 자신이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진동은 짧게 끝나지 않았다. 명우의 환영 인사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낮고 일정하게 해원을 붙들었다. 해원은 단상 옆에 선 채 진행표를 내려다봤다. 이제 글자는 읽혔다. 다음 순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손끝이 말을 듣지 않았다. 종이가 미세하게 떨렸다. 해원은 진행표를 양손으로 붙잡는 대신 한 손을 내렸다. 떨림을 숨기려다 더 눈에 띄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단상 위의 명우가 말을 마무리했다. “오늘 함께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박수가 터졌다. 지금이었다. 해원은 음향팀을 향해 손가락을 들었다. 건배 음악이 제시간에 흘러나왔다. 이어 서버들이 샴페인 잔을 들고 들어왔다. 순서는 틀리지 않았다. 그 사실에 안도한 순간, 진동이 조금 더 강해졌다. 해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시선을 돌리자 태헌이 보였다. 그는 왼손으로 샴페인 잔을 받아 들고 있었다. 오른손은 재킷 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었다. 해원의 입술이 굳었다. 분명 자신이 원했다. 그가 다시 봐 주기를 기다렸고, 눈을 피하지 않은 것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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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혜주

만찬회가 끝나고 이틀후. 태원호텔 삼십이 층 프라이빗 다이닝룸은 해원에게 익숙한 장소였다.행사 규모에 따라 테이블을 바꿀 수 있는 구조와 서버가 들어오는 문, 음식이 놓이는 순서까지 알고 있었다. 예약 명단을 확인하고 테이블 위의 잔 수부터 세는 것도 습관이었다.하지만 오늘 해원의 손에는 진행표도 무전기도 없었다.물잔의 간격이 하나만 어긋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도 고치지 못했다.“해원아.”수경이 해원의 시선을 따라 테이블을 봤다.“오늘은 네가 일하는 자리 아니야.”“알아.”“아는데 왜 계속 잔만 보고 있어?”해원은 시선을 거뒀다.“그냥 눈에 보여서.”오늘은 서원그룹 신 회장과 사전 축하 오찬이었다. 명우와 오랜 친구인 그가 결혼식 전에 따로 축하하고 싶다고 마련한 자리였다.업무 미팅도, 공식 행사도 아니었다.해원은 웨딩플래너가 아니라 수경의 딸로 이 자리에 와 있었다.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생각보다 불편했다.“왔군.”입구 쪽에서 명우의 목소리가 들렸다.신 회장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 뒤를 혜주가 따랐다.짙은 회색 정장을 입은 혜주는 지난번 호텔 답사 때보다 한결 편안한 얼굴이었다. 명우에게 먼저 인사한 뒤 수경의 두 손을 잡았다.“관장님, 정말 축하드려요.”“고마워요. 바쁠 텐데 어떻게 왔어요?”“아버지가 혼자 오시면 심심하시잖아요.”신 회장이 헛기침했다.“내가 언제 심심하다고 했어?”“차 안에서 세 번 말씀하셨어요.”가벼운 웃음이 돌았다.혜주는 해원을 발견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왔다.“해원 씨, 다시 뵙네요.”“안녕하세요, 신 이사님.”“오늘은 이사 아니에요.”혜주가 신 회장 쪽으로 고개를 기울였다.“그냥 아버지 따라온 딸이에요.”해원도 수경과 함께 온 딸이었다.같은 말인데 이상하게 같게 들리지 않았다.그때 창가에 서 있던 태헌이 돌아왔다.혜주의 얼굴이 밝아졌다.“오랜만이에요, 오빠.“망설임도, 의식도 없는 호칭이었다.“오랜만이네.”태헌도 익숙하게 대답했다.그뿐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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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신기한게 있던데

식사가 시작되자 자연스럽게 오래전 이야기가 나왔다.“둘이 처음 만난 게 언제였지?”명우의 물음에 신 회장이 포크를 내려놓았다.“혜주가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이었을 거야. 자네 집 정원에서 넘어져서 울고 있는데 태헌이가 업고 들어왔잖아.”“제가 울었다고요?”혜주가 웃으며 물었다.“아주 서럽게 울었지.”“기억 안 나는데.”“업어 준 사람은 기억하겠지.”신 회장이 태헌을 보았다.“기억하나?”“아니요.”태헌은 짧게 대답하고 물잔을 들었다.“저것 봐. 혜주만 섭섭하게 됐군.”“저도 기억 안 난다니까요.”혜주는 조금도 섭섭해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사람처럼 웃고 넘겼다.해원은 말없이 전채 요리를 잘랐다.자신이 모르는 태헌의 어린 시절이 대화 속에서 자연스럽게 오갔다. 혜주는 굳이 기억해 내려고 하지 않아도 그 시간 안에 있었다.그 사실이 부럽지는 않았다.과거까지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다만 자신과 태헌에게는 남들 앞에서 꺼낼 수 있는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첫 만남도, 계약도, 함께 보낸 밤도 모두 숨겨야 했다.“그래도 두 사람 나란히 있는 걸 보니 옛날 생각이 나는군.”신 회장이 웃으며 명우를 봤다.“자네 집은 앞으로도 경사가 이어지겠어.”누구의 이름도 나오지 않았다.그런데 테이블에 앉은 모두가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수경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혜주도 잔을 들어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듣는 사람이 아닌 듯했다.태헌은 수락하지 않았다.그렇다고 거절하지도 않았다.“음식 식겠습니다.”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끊었을 뿐이었다.해원은 포크 끝으로 접시 위의 채소를 눌렀다.태헌이 혜주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방금 말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가 침묵하는 동안에는 가능성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테이블 위에 놓아 둔 휴대전화가 짧게 울렸다.화면에는 다연의 이름이 떠 있었다.“엄마,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그래.”해원은 자리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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