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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다정한 지옥: Chapter 61 - Chapter 70

76 Chapters

61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재가 고개를 들었다. 거실에는 식탁 위 스탠드만 켜져 있었다. 노트북 화면을 가득 채운 숫자와 문서 사이로 시선을 옮기자, 태혁이 현관에 서 있었다. 재킷을 벗어 한쪽 팔에 걸친 채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고 있었다. “왔어요?” “네.” 이재가 화면 구석의 시간을 확인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늦었다. “밥은요?” 구두를 벗던 태혁이 이재를 봤다. “아직.” “그럴 줄 알았어.” 이재는 노트북에서 손을 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들어가 냉장고 문을 열었다. 저녁에 먹고 남겨둔 음식이 그대로 있었다. 반찬통 두 개를 꺼내고, 아래 칸에서 밥을 찾아 전자레인지에 넣었다. 뒤늦게 따라온 태혁이 식탁 의자를 빼며 물었다. “먼저 먹었어요?” “남자친구가 늦는대서.” 태혁이 의자를 빼다 말고 이재를 봤다. “잘했어요.” “뭘.” “기다리지 않은 거.” 이재가 냉장고 문 너머로 그를 쳐다봤다. 태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앉았다. 전자레인지가 울렸다. 이재는 밥을 꺼내 식탁에 올려놓고 다시 냉장고로 향했다. 태혁이 물을 가지러 일어나려 하자 손으로 앉으라는 시늉을 했다. “됐어요. 먹기나 해요.” 태혁이 얌전히 다시 앉았다. “좋네요.” “뭐가요.” “퇴근하고 오면 밥 챙겨주는 사람도 있고.” 이재가 물컵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며칠 만에 너무 익숙해진 거 아니에요?” “그러게요.” 태혁이 젓가락을 들며 이재를 올려다봤다. “큰일 났네.” “뭐가.” “없으면 허전하겠는데.” 물컵을 놓던 이재의 손이 잠깐 멈췄다. 태혁은 이미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잘 먹겠습니다.” 이재는 괜히 입술을 한번 꾹 누르고 맞은편으로 돌아갔다. 노트북을 다시 끌어당기고 아까 보던 문서를 열었다. 한동안 식탁에는 키보드 소리와 수저 부딪히는 소리만 번갈아 났다. 태혁이 밥을 먹다가 맞은편을 봤다. 이재는 한쪽 다리를 의자 위로 올린 채 화면을 보고 있었다. 머리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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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김현석의 진술을 다시 읽는 건 세 번째였다. 태혁은 화면을 내리지 않은 채 의자에 등을 기댔다. ― 졸업하고는 자연스럽게 멀어졌습니다. ― 안 친했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멀어졌다고 했죠. ― 그래도 친구였습니다. 문장만 놓고 보면 이상할 게 없었다. 실제로 김현석은 서진우를 만나지 않았다고 한 적도, 연락을 끊었다고 한 적도 없었다. 졸업한 뒤에도 몇 번 따로 만났다는 사실은 순순히 인정했으니, 진술 자체에서 거짓을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 몇 번이 어느 정도였는지는 말하지 않았다. 태혁이 마우스에서 손을 뗐다. “준호야.” “네.” 맞은편에서 자료를 보던 준호가 고개를 들었다. “김현석 말고 서진우 쪽 다시 보자.” “서진우요?” “어.” “뭐부터요?” 십 년 전에는 서진우가 범인이었다. 당시 확보한 자료 역시 피해자들과의 접점이나 범행 준비, 도주 경로처럼 사건을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들여다봤다. 서진우가 누구와 어울렸고 어떤 시간을 보냈는지도 조사했지만, 지금처럼 특정한 한 사람을 염두에 두고 들여다본 건 아니었다. “옛날 압수물 중에 개인 기록 남아 있는 거 확인해봐.” “십 년 전에 다 봤을 텐데요.” “그때는 김현석을 찾은 게 아니잖아.” 준호가 잠깐 태혁을 보다가 몸을 돌렸다. “확인해보겠습니다.” *** 당시 확보했던 개인 자료 가운데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확인되지 않았던 것들은 별도로 분류되어 있었다. 수첩과 사진을 비롯해 서진우의 과거 행적과 교우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확보했던 기록들이었다. 수빈은 보존 자료 목록을 화면에 띄워 하나씩 대조했고, 준호는 기록철을 넘겼다. 태혁도 당시 자료를 다시 훑으며 기억과 기록을 맞춰갔다. 한참 뒤 준호가 사진 자료를 찾아냈다. “이런 것도 있네요.” “뭔데.” “사진이요.” 인화사진이 여러 묶음이었다. 당시에도 전부 확인했지만 피해자나 범행 장소와 연결되는 사진은 없었고,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없는 개인 사진으로 정리된 자료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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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사진을 다시 들여다본다고 김현석이 카메라 뒤에 있었다는 증거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태혁은 테이블 위에 펼쳐진 사진들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한데 모았다. 김현석의 옛 번호가 적힌 인화 봉투만 따로 빼두었다. 준호가 물었다. “다시 불러볼까요?” “불러서 뭐 물어보게.” “서진우랑 무슨 사이였냐고요.” “친구였다고 하겠지.” 이미 한 번 들은 대답이었다. 틀렸다고 증명할 수도 없었다. 친구 사이에 사진을 찍어줄 수도 있고, 대신 인화를 맡길 수도 있었다. 다만 그 우연이 몇 년에 걸쳐 반복됐다는 사실을 새로 알게 됐을 뿐이었다. 태혁이 자리로 돌아왔다. “지금 사건이랑 김현석 맞춰봐.” 준호가 따라와 의자에 앉았다. “어떤 걸요?” “네 건 전부.” 첫 번째 사건부터 다시였다. 피해자와 범행 장소, 발생 시각, 주변 CCTV와 차량, 확인된 동선. 현장에서 나온 것과 나오지 않은 것까지, 이번에는 그 사이에 김현석이라는 이름이 들어갈 자리가 있는지 처음부터 다시 보기로 했다. 수빈이 자료를 불러오는 동안 준호가 중얼거렸다. “기자인 것도 좀 걸리긴 하네요.” “그게 왜.” “자료 찾기는 일반인보다 익숙할 거 아닙니까. 옛날 사건 찾아보는 것도 그렇고.” “그걸로 사람 잡을 거야?” “아니죠.” 준호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 태혁은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김현석이 기자라는 사실만으로 설명되는 건 없었다. 오히려 취재를 위해 오래된 사건이나 과거 자료를 뒤지는 일은 기자에게 자연스러웠다. 필요한 건 다른 것이었다. 김현석이 서진우의 과거에 있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지금 벌어지는 사건에도 있었는지. “최근 취재한 것도 확인해봐.” 수빈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 쪽으로요?” “기업 관련해서 오래된 사건 다시 다룬 거 있는지. 산재나 사고 쪽부터.” “네.” 준호도 현재 사건 자료를 끌어왔다. 태혁은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나간다. 뭐 나오면 연락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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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태혁은 이재가 짐을 챙기는 동안 천천히 방 안을 둘러봤다. 몇 번 들어온 집이었지만 이렇게 오래 머문 적은 없었다. 천천히 둘러보니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 액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태혁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이재가 금발의 여자와 어깨를 맞댄 채 웃고 있었고, 그 뒤로 서너 명이 더 찍혀 있었다. “클로이예요.” 옷을 접던 이재가 먼저 말했다. “제 친구. 전에 말했죠?” “네.” “태혁 씨 엄청 궁금해해요. 한국에서 남자친구 생겼다고 했더니 사진 보내라고 얼마나 난리인지.” 태혁은 사진을 보고 있었다. “아직 안 보냈어요. 직접 만나면 보여주려고.” 대답이 없자 이재가 그를 돌아봤다. 태혁의 손가락이 사진 한쪽을 가리켰다. “아니. 말고.” “네?” “이 남자.” 클로이 옆,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남자였다. 이재가 눈을 가늘게 뜨고 사진을 들여다봤다. “아.” “누굽니까.” “대학교 친구.” “친해요?” 그제야 이재가 태혁을 쳐다봤다. 표정은 평소와 똑같았다. 그래서 더 웃겼다. “왜요?” “그냥 물어보는 겁니다.” “그냥?” “네.” 이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별로 안 친했어요.” “그렇습니까.” “지금은 연락도 안 하고.” “다행이네요.” 태혁이 액자를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이재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질투하네.” “맞아요.” “무서워라.” 이재는 웃으면서 다시 옷장으로 돌아갔다. 서랍 안쪽을 확인하던 이재가 문득 손을 멈췄다. “아, 맞다.”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태혁이 돌아봤다. “뭡니까.” 상자 안에는 손바닥보다 작은 캐릭터 인형이 들어 있었다. 둥글고 우스꽝스럽게 생긴 얼굴이었다. 태혁이 뜻밖이라는 듯 이재와 인형을 번갈아 봤다. “그런 취향이었어요?” “뭐가요?” “귀엽네.” 이재가 인형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저 말고요. 다은 씨라고 제 후배 있거든요. 지나가다가 생각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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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다은은 제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상자를 내려다봤다.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네.” “갑자기요?” “전에 샀는데 계속 까먹었어요.” 상자를 열자 손바닥보다 작은 캐릭터 인형이 나왔다. “귀엽다.” 다은이 웃으며 인형을 꺼냈다. “근데 왜 제 생각이 나셨어요?” 이재가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말했다. “귀여워서.” 다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저랑 닮아서 사신 건 아니죠?” “귀여운 걸 보니까 귀여운 다은 씨가 생각났어요.” 잠깐 말이 없던 다은이 인형을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대리님 진짜 사람 설레게 한다.” 이재가 웃었다. 다은은 인형을 제 모니터 아래에 세워놓고 몇 번 각도를 고쳤다. “감사합니다. 잘 키울게요.” 다은이 자리로 돌아간 뒤 이재도 다시 모니터를 봤다. 오전에 처리할 자료가 몇 개 남아 있었다. 메일에 답을 달고 다음 파일을 열려는데 화면 한쪽의 회사 로고가 눈에 들어왔다. 세림호텔앤리조트. 어젯밤 차 안에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 그런데 그중에 세림호텔도 있습니다. 이재의 손이 멈췄다. 왜 하필 우리 호텔일까요. 태혁은 확인할 게 있다고 했다. 확인되면 말해주겠다고도 했다. 이재는 새 창을 열었다. 십 년 전을 전후로 기간을 설정하고 세림호텔을 검색했다. 오래된 기사들이 쏟아졌다. 신규 사업과 실적, 행사, 인사 관련 기사 사이로 몇 페이지를 넘겼을 때 낯익은 사진 하나가 눈에 걸렸다. 이재가 마우스를 멈췄다. 네 번째 사건 현장에 놓여 있던 기사였다. 이번에는 처음부터 읽었다. 세림호텔에서 보안 업무를 하던 직원이 근무 중 사고를 당해 중태에 빠졌다. 사고 경위를 두고 회사의 안전관리 책임이 제기됐고, 이후 피해자 가족과 회사 사이에 책임 소재를 둘러싼 갈등이 있었다는 내용이었다. 기사 날짜는 십 년 전 사건이 벌어지기 전이었다. 이재는 관련 기사를 몇 개 더 열었다. 사고 직후 기사와 회사 측 입장, 피해자 가족의 반발까지 내용은 비슷했다. 피해자의 실명은 없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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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오후가 되어서도 저장해둔 기사가 자꾸 눈에 밟혔다. 결국 이재는 사내 시스템을 다시 열었다. 오전에 찾아본 건 홍보 자료뿐이었다. 피해자 가족과 책임 공방까지 있었다면 다른 데에도 흔적은 남았을 터였다. 십 년 전 조직도를 찾아보니 당시 사고 대응은 경영지원본부 산하 안전관리팀과 법무팀이 함께 맡고 있었다. 안전관리팀은 몇 년 전 조직 개편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재는 현재 경영지원실 조직도를 훑다가 사내 메신저를 열었다. 십 년 전에도 이 회사에 있었던 사람을 찾았다. *** “십 년 전 세림호텔 사고요?” 경영지원실 부장이 잠시 생각했다. “보안 쪽 직원이었던 것 같은데.” “맞아요.” “갑자기 그건 왜?” “예전 자료를 보다가요. 사고 이후 기록이 안 보여서.” “그때 일이 좀 길게 갔을 겁니다. 가족하고도 문제가 있었고.” 이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후속 대응은 법무 쪽에서 했을까요?” “아마 그럴 겁니다. 그때도 법무가 붙었던 걸로 기억해요.” “당시 자료도 남아 있을까요?” “목록은 있을 겁니다. 오래된 건 권한 없으면 본문까지는 못 볼 거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자리로 돌아온 이재는 법무 쪽 과거 문서 목록을 열었다. 본문은 볼 수 없어도 제목과 작성 시점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사고가 있었던 달을 따라 내려가자 비슷한 제목들이 걸렸다. 세림호텔 안전사고 관련 법률 검토. 피해자 측 협의 건. 사고 후속 대응 검토. 첫 번째 문서를 눌렀지만 예상대로 접근 권한이 없었다. 대신 목록에는 오전에 본 기사보다 정확한 사고 일자가 남아 있었다. 이재는 날짜를 메모했다. *** “범행일 기준으로 다시 맞춰보고 있습니다.” 수빈이 자료를 넘겼다. 김현석을 용의선에 올린 뒤부터 확인해야 할 범위도 달라졌다. 거주지와 차량, 근무 기록을 다시 보고 네 사건이 발생한 날의 동선을 하나씩 맞추는 중이었다. “회사 기록은?” “확인되는 날은 있습니다. 퇴근 이후가 비어요.” “차량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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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이재는 기사 창을 하나 더 열었다. 성 하나만 같았다. 그것만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십 년 전 사건 당시 서진우를 다룬 기사들을 찾아 내려갔다. 범행과 피해자에 관한 자극적인 제목 사이로 몇 페이지를 넘기고서야 가족관계를 언급한 기사가 나왔다. 어머니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아버지와 단둘이 살았다. 이재는 세림호텔 사고 기사로 돌아갔다. 피해자 역시 아들과 단둘이 생활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사고가 난 건 연쇄살인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맞아떨어지는 게 많았다. 이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태혁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 네. “지금 통화돼요?” ― 네. 무슨 일 있어요? 이재는 모니터에 띄워둔 두 기사를 번갈아 봤다. “하나만 물어볼게요.” ― 뭔데요? “서진우 아버지.” 잠깐 말을 멈췄다. “세림호텔에서 일했어요?”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이번에는 이재가 기다렸다. ― ……네. 그 한마디로 충분했다. “알고…… 있었어요?” 다시 짧은 침묵이 흘렀다. ― 네. 이재의 손끝이 천천히 마우스에서 떨어졌다. “언제부터요?” 태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 십 년 전 수사할 때 알았습니다. 십 년 전. 이재는 모니터를 바라봤다. 자신이 오늘 하루를 들여 겨우 이어 붙인 사실이 태혁에게는 이미 지나간 수사의 일부였다. “그럼…… 왜 한 번도 얘기 안 했어요?” 한 박자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 말했어야 했는데. 이재의 눈이 조금 움직였다. ― 그때는 사고하고 연쇄살인이 직접 연결된다는 증거가 없었습니다. “그때는요?” 태혁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이재가 먼저 물었다. “지금도 없어요?” ― 지금 다시 확인하고 있어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알았어요.” ― 이재 씨. “네.” ― 어떻게 알았어요? 그제야 이재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기사 찾아봤어요.” ― 무슨 기사요? “어제 얘기했던 거요. 네 번째 현장에 있던 세림호텔 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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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태혁에게 연락이 왔다. [내려와요.] 이재는 모니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오전부터 띄워두었던 문서 제목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경영진 보고. 자신의 아버지, 윤정호. 그리고 십 년 전 자신이 살아남았던 그 집. 하지만 더 찾아보지는 않았다. 김현석의 차가 범행 현장 근처에서 확인됐고, 경찰은 영장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제는 그쪽에서 답이 나올 차례였다. *** 차는 회사 건너편에 서 있었다. 이재가 조수석에 타자 태혁이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오래 기다렸어요?” “아니요.” 안전벨트를 매는 동안에도 전화가 한 번 울렸다. 태혁은 화면만 확인하고 시동을 걸었다. “바빠 보여요.” “좀.” 차가 도로로 들어섰다.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이재도 굳이 말을 붙이지 않았다. 태혁의 휴대전화가 다시 울린 건 신호에 걸렸을 때였다. 이번에는 바로 받았다. “어.” 준호의 목소리가 작게 새어 나왔다. 태혁의 표정이 달라졌다. “나왔어?” 잠시 뒤 그가 시간을 확인했다. “알았어. 바로 갈게.” 통화를 끊은 태혁이 말했다. “영장 나왔어요.” 이재가 그를 돌아봤다. “바로 가요?” “네.” “김현석한테?” 태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 안이 조용해졌다. 이재는 잠시 앞을 바라보다 말했다. “잡아요.” 태혁의 시선이 잠깐 이재에게 향했다. “꼭.” 신호가 바뀌었다. 태혁이 다시 앞을 보며 대답했다. “네.” *** 태혁의 집에 도착하자 이재는 먼저 차에서 내렸다. 태혁은 평소처럼 현관 앞까지 함께 올라왔다. 문을 열던 이재가 돌아봤다. “조심해요.” “알았어요.” “끝나면 연락하고.” “네.” 태혁은 이재가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한 뒤 곧바로 돌아섰다. *** 김현석이 사는 곳은 오래된 빌라였다. 골목 안쪽에 들어선 건물 앞에 준호가 먼저 와 있었다. 태혁이 차에서 내리자 준호가 다가왔다. “차는 있습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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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태혁은 잠시 김현석을 바라봤다. “뭘 모른다는 겁니까.” “십 년 전에 자기 집에서 왜 사람이 죽었는지.” “서진우가 윤정호 회장을 노렸다는 뜻입니까.” 김현석은 대답 대신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을 내려다봤다. “진우 아버지가 세림호텔에서 일했던 건 아시죠.” “압니다.” “사고 난 것도.” “네.” 김현석의 시선이 다시 올라왔다. “알고 계셨네요.” 태혁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럼 얘기가 빠르겠네요.” “서진우가 윤정호 회장한테 원한을 품은 것도 알고 있었습니까.” “네.” “그래서 찾아간 겁니까.” “찾으러 간 겁니다. 집을요.”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확한 주소를 몰랐습니다. 성림동에 산다는 것만 알았어요. 그래서 시설 점검 기사로 위장해서 집집마다 돌아다닌 겁니다.” 십 년 전 수사 기록이 머릿속을 스쳤다. 부유층 주택가. 시설 점검을 핑계로 문을 열게 한 뒤 벌어진 살인. 서로 아는 사이도,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재산과 거주 지역을 제외하면 피해자들 사이에서 끝내 공통점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무작위라고 생각했다. “그럼 앞에 죽은 사람들은 뭡니까.” 김현석은 잠시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죽이려고 들어간 건 아니었습니다.” “그럼…….” “첫 번째 집에서 들켰습니다. 진우가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알았고, 신고하려고 했어요.” 태혁의 시선이 굳었다. “그래서 죽인 겁니까.” “네.” 짧은 대답이 떨어졌다. 김현석은 한동안 테이블만 바라봤다. “그다음부터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윤정호를 찾는 건 멈추지 않았고, 정체를 들키거나 신고하려는 사람이 생기면 죽였어요.”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마지막 말에서 아주 조금 느려졌다. “그때부터는 저도 말릴 수가 없었습니다.” “말릴 생각은 있었습니까.” 김현석의 시선이 멈췄다. “있었습니다.” “경찰에 신고할 생각은.” 이번에는 대답이 늦었다. “……없었습니다.” 태혁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십 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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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출근하자마자 메일함을 열던 이재의 손이 멈췄다. 새벽에 들어온 메일 하나가 읽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제목은 없었다. 발신자는 김현석이었다. 태혁에게 몇 번이나 들어 이미 익숙해진 이름이었다. 이재는 메일을 열었다. [십 년 전, 서진우는 당신 아버지에게 직접 연락했습니다. 미리 찾아가겠다고까지 했는데, 왜 그날 당신의 어머니가 죽었을까요. 궁금하면 직접 물어보세요.] 짧은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어제까지 자신이 찾아낸 것들 위로 마지막 한 조각이 떨어졌다. 이재는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 회장실에서 마주 앉은 윤정호는 이재가 서진우의 이름을 꺼내자 예상했다는 듯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서진우 아버지, 세림호텔에서 일했죠?” “……어떻게 알게 됐니. 강 형사가 말하던?” “제가 찾았어요.” 정호의 시선이 이재에게 머물렀다. “사고 난 것도 알고 계셨죠?” “알고 있었다.” “자료를 보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재는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봤다. “당시에 그 사고를 조용히 정리하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됐을까.” 정호의 표정이 굳었다. “그중에서도 승계 구도 제일 위에 있던 사람이 누구였을까.” “이재야.” “아빠였어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는 회사가 먼저였다.” 부정은 아니었다. “사고 하나로 회사 전체가 흔들릴 수도 있었어.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고.” “그래서 그렇게 정리하신 거예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을 한 거다.” 정호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이재를 바라봤다. “그게 결국 너한테까지 돌아올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겠지.” 이재의 손끝이 미세하게 굳었다. “서진우가 우리 집에 온 것도 그 일 때문이었던 거죠.” 정호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경찰에서도 지금은 그렇게 의심하고 있다더구나.” “그럼 서진우가 사람들을 죽인 것도…… 아빠 때문인 거예요?” “그것까지 전부 내 탓이라고 할 수는 없지.” 정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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