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짐승 황태자의 집착을 받은 사연: Chapter 11 - Chapter 20

74 Chapters

#11. [맹수를 길들여야 하는 밤]

쏟아지는 빗속에 바닥은 온통 눈밭이고, 보이는 것이라곤 흉물스럽게 무너진 건물 잔해뿐이었다.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결계 속에 숨겨진 할 로드의 안전가옥, 그 오두막뿐이었다.위험할 때 몸을 숨기는 안전가옥이기에 만약 할 로드가 머물고 있다면 큰일이었다. 자신의 제국을 이 지경으로 만든 레투니카의 황태자를 그가 순순히 살려둘 리 없었으니까.하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둘이 마주친다면 어떻게든 내가 싸움을 중재해야 했다.나는 아처린을 바라보며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과연 내가 지하 미궁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거구를 안고 순간이동을 성공할 수 있을까."하하, 마리. 이렇게 날 유혹하는 거야?"이 남자의 머릿속에는 뭐가 들었는지.태어나 유혹을 해 본 적도 마음먹은 적도 없는 나였다.아름답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남자들에게, 심지어 이런 황족에게 감히."여기를 벗어나려고!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아린, 꽉 잡아!"나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은빛으로 일렁이는 마력을 온몸으로 내뿜었다. 공간이 뒤틀리고 시야가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기 시작했다.회복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마나가 비명을 지르듯 심장 부근이 타들어 가듯 아려왔다. 혼자라면 몰라도, 이 커다란 남자의 신체까지 끌어안고 공간을 뒤틀어버리는 건 도박 그 자체였다.그래도 내 목숨을 살려준 남자인데.심장이 터질 듯 온몸을 누군가 쥐어짜는 듯 고통이 밀려왔지만.거친 빗소리가 아득해지는 순간, 나는 내 손을 꽉 쥐고 있는 아처린을 끌어안은 채 그 자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공간이 뒤틀리는 은빛 아지랑이가 걷히자마자, 아처린의 신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하하! 갑자기 내 몸이 여기로 오다니! 마리, 여긴 안 부서졌어!"반면 나는 그 거대하고 맹수 같은 황태자를 통째로 끌어안고 공간을 이동시킨 여파로 제대로 숨조차 쉬어지지 않았다. 과부하가 걸린 마력이 심장을 쥐어짜듯 타들어 가는 고통에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하아, 헉, 헉······.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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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은밀하고 위험하게]

젖은 하녀복의 천이 찢어져 나가며, 차가운 공기와 함께 아처린의 거친 숨결이 드러난 내 살결에 와 닿았다.순간이동을 하느라 마력을 과도하게 쥐어짠 여파로 내 몸은 손가락 하나 뻥끗하기 어려울 만큼 탈진해 있었다. 소파에 쓰러진 채 헐떡이는 내 몸 위로, 묵직하게 내려앉은 아처린의 초록빛 눈동자가 짐승처럼 번뜩였다."아린, 잠깐만······. 내가, 내가 벗을 수 있어······." "거짓말."낮게 깔린 그의 음성이 내 귓가를 간지럽혔다. 하긴, 옷을 갈아입을 힘조차 남아 있을 리 없었다.기억을 잃었을지언정 오만한 황태자로서의 본능과 포악한 맹수의 피는 어디 가지 않았다. 그는 나의 유약한 반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에 젖어 피부에 딱 붙어 있던 속옷마저 망설임 없이 바닥으로 내던졌다."읏······ 부끄러운데······."실낱같은 옷가지조차 사라진 내 상체 위로, 아처린이 가져온 부드러운 수건이 덮였다. 하지만 그 수건을 쥔 그의 커다란 손길은 결코 물기만 닦아내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투박한 손가락이 젖은 수건 너머로 부드럽게 살갗을 훑고 지나갈 때마다, 나는 온몸의 감각이 서서히 예민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도드라진 쇄골과 허리선, 그리고 훤히 드러난 가슴 곡선을 따라 그의 손길이 천천히 내려앉았다. 열기에 휩싸인 손바닥이 닿을 때마다 내 몸은 전율로 크게 떨렸다."차갑네, 마리."아처린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내 몸을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방금 갈아입은 그의 튜닉 너머로, 짐승처럼 단단한 가슴 근육과 뜨겁게 펄떡이는 심장 소리가 내 몸에 그대로 밀착되었다. 축축하게 젖은 밤기운을 단번에 밀어내는, 숨 막힐 듯한 남자의 온기였다."따뜻하게 해주고 싶은데."비록 기억을 잃어 자신의 신분이나 현재 상황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이 상황에서도 도의적으로 내 건강을 염려해 주었다.몸을 닦아내던 아처린의 손길은 순간 멈추었다. 아무리 실내라고 한들 오두막 밖에서 세차게 몰아치는 빗소리와 함께 스며든 냉기가 서늘하게 공간을 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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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유혹]

천하의 레투니카 황태자에게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사실에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온수의 기분 좋은 온기와 그의 지극 정성어린 수발 덕분일까.타들어 가듯 피곤했던 몸의 피로가 사르르 풀려나가는 기분이었다. 소진되었던 마력이 차츰 차오르며, 손끝에서부터 부드러운 활력이 되살아나고 있었다.아처린은 내 몸을 조심스레 뒤로 돌리더니, 머리칼을 끌어안아 따뜻한 물로 적셔주었다. 천천히 두피를 꾹꾹 눌러주며 머리를 감겨주는 그의 손길은 지상의 어떤 수발보다도 다정하여, 순간 천국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그러나 내 몸을 다시 닦아내던 아처린의 손길이 어깨 근처에서 딱 멈추어 섰다.물속에서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는 그의 초록빛 눈동자가 짙은 열기로 일렁이고 있었다."마리, 못 참겠어." "뭐······?" "너무 아름다워서."그는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리며 내 어깨선에 진득하게 입을 맞추었다. 계속해서 나를 향해 아름답다고 외치는 그를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볼품없고 초라한 시녀에 불과하다고 믿어왔으니까.아처린이야말로 햇살을 머금은 듯 화려한 붉은 머리칼과 신비로운 초록 눈, 건강하게 그을린 단단하고 탄력 있는 피부를 지닌 천상의 사내였다. 그에 반해 나는 힘없이 창백한 몸에, 볼품없는 희미하고 푸석한 갈색 머리와 주근깨투성이로 평범함 축에도 들지 못한다고 생각했었다.욕실 한편에 커다란 거울이 놓여 있었지만, 나는 차마 눈을 돌려 거울을 바라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눈부시게 완벽한 그와 볼품없는 내 모습이 한 프레임 안에 담겨 비교되는 것 따위는 조금도 확인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대체 내 어디가 아름답다고 자꾸만 이런 달콤한 말을 퍼붓는 걸까."그리고 마리의 향기가······ 나를 더 미치게 해."아처린이 거친 숨을 내쉬며 내 젖은 쇄골과 목덜미 사이로 깊게 코를 묻었다.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결이 살갗에 스칠 때마다, 온몸의 감각이 오싹하게 곤두서며 전율이 뻗어 나갔다."너를 갖고 싶어." "아린, 잠깐만······ 읏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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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각자의 밤, 각자 다른 온도]

할 로드는 오랜만에 황궁에 들렀다가, 늦은 밤 레이나와 함께 마차에 몸을 싣고 하르트 대공령이 아닌 도르하르 공작령으로 향했다.황성을 벗어나자마자 창밖을 기세 좋게 두드리는 비바람 때문에 승차감은 엉망이었다."오늘 정말 날씨가 엉망이네."할 로드가 빗물이 어른거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나지막하게 말을 건넸다. 레이나는 피곤한 기색으로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그냥 빨리 돌아가요. 마차가 너무 흔들려서 어지럽단 말이에요." "하긴 자유민들이 영지를 얼마나 일궈놓았나 보려 했더니, 빗줄기가 너무 굵어져서 아무것도 안 보이네. 이대로 회차해야겠어."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과거 도르하르의 영토였으나 124년 전 전쟁의 포화 속에서 폐허로 버려진 곳이었다. 황제로 즉위한 카이우스에게 하사받은 공작령이라 할 로드는 내심 감지덕지한 마음이었지만, 명망 높은 가문의 공녀로 자란 레이나에게는 영 성에 차지 않아 보였다."아휴, 여길 언제 다 개척한대요? 10년 안에는 되려나 모르겠어요." "10년이 뭐야, 100년이 걸려도 해내야지. 내 가문이 다시 번성해야 그동안 억울하게 황제와 황태자의 손에 죽어간 도르하르 제국민들에게 부끄럽지 않지."할 로드의 대답에 레이나는 입술을 툭 내밀었다.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의 황량함이 어두운 밤비 속에 묻혀 한층 더 아득해 보였기 때문이다."그래도 평생 그 서늘하고 눅눅한 키요리타 산맥에서 살아야 한다고 각오했던 것에 비하면 훨씬 낫긴 하네요." "대신 아쉬운 건 하나 있지. 그 지하 미궁."할 로드가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리자, 레이나 역시 부정할 수 없는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마차 창문을 조금 열어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창문 틈새로 불어든 서늘한 밤바람과 빗방울이 살갗을 자극했다."맞아요. 거기 잠깐 다녀왔다고 피부가 어찌나 매끄러워졌던지. 어디 여기는 그런 곳 없나 모르겠네요." "없어. 그냥 맨땅이야. 수시로 마력이 채워지고 완벽한 치유력이 감돌던 지하 미궁이 무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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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달콤하게 구는 악마를 어찌할까]

나는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아무런 경계도 없이 고요히 잠들어 있는 아처린에게 다가갔다.조력자가 있다면 금방 그의 정체와 나의 악행이 드러나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천사처럼 순수하고 평온한 표정으로 잠든 이 사내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잔혹함과 광기로 얼룩진 '순수한 악' 그 자체일 텐데.지하 미궁이라는 기괴한 낙원에서 시작된 인연이 나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는 사실이 아득한 꿈처럼 느껴졌다.문득 그가 입고 있는 옷과, 내 몸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옷감으로 시선이 닿았다. 참으로 기묘하고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 옷들은 모두 도르하르 황태자인 할 로드가 입을 옷과, 그가 마음에 품고 결혼하게 될 레이나 공녀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실내복일 터.자세히 살펴보니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은 배제되었을지언정, 그 어떤 귀족이 입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단정하고 고급스러웠다. 몸에 부드럽게 감기는 감촉도, 세심하게 마무리된 정교한 바느질 역시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이 옷을 만든 궁정의 시녀들이 지금 살아서 이런 나를 본다면 뭐라고 할까.'분명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비웃었으리라. 레투니카 제국이든, 멸망한 도르하르 제국이든. 그 어느 쪽 사람들에게 사로잡히더라도 나는 손가락질을 받으며 단두대 위로 끌려갈 처지였다.레투니카에서는 선대 황제를 죽인 악녀이자 국가의 배신자. 도르하르에서는 제국을 멸망으로 몰고 간 원수이자 황태자의 품에 안긴 파렴치한 여자.이 복잡하고 위태로운 굴레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를 얻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바로 지금,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 황태자 아처린을 죽이고 멀리 도망치는 것.침대 곁에 내려놓은 그의 차가운 보검을 빼내 목을 베거나, 내 심장에서 들끓는 은빛 마력으로 그자의 생명줄을 잘라버리면 모든 위험은 눈 녹듯 사라질 터였다.'······죽이려면 바로 지금이어야 해.'차가운 결심을 품고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아처린이 나지막한 숨을 내쉬며, 잠결에 천천히 기다란 팔을 뻗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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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혀 끝에 남은 그 이름, 어쩌나]

아름다운 사내, 그리고 창밖을 가득 채운 호젓하고 몽환적인 풍경도 최고인 아침인데.몸에 깊이 밴 하녀로서의 습관이란 참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복잡한 계산과 경계심을 굴리면서도, 나는 나도 모르게 팔소매를 올려붙인 채 화덕으로 다가가 불을 지피고 있었다.이곳은 사멸한 도르하르 영지의 경계. 척박하고 물자가 귀한 땅이었으나, 다행히 할 로드를 위해 마련해 둔 오두막 한쪽에 오래 두고 먹을 수 있는 비상 식량이 제법 쌓여 있었다.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흙이 묻은 감자를 깔끔하게 씻어 가마솥에 찌고, 딱딱하게 잘 마른 고깃덩이를 결대로 잘게 찢어 냄비에 넣었다. 거기에 정수된 물을 붓고 수프를 끓이기 시작했다. 남아 있던 밀가루는 약간의 소금과 물을 섞어 찰지게 치댄 후, 화덕 안쪽의 달아오른 돌판 위에 납작하게 밀어 넣어 구웠다.이성보다 몸이 먼저 기억하고 움직이는 내 초라한 과거의 증거들이었다."잘은 모르겠지만, 요리에 아주 능숙한 레이디군. 움직이는 모습도 예쁘네."나직하게 들려오는 아처린의 목소리에 그만 손끝이 찌릿하게 굳어버렸다.레이디. 그리고 예쁘다고.어디 하나 고귀한 구석이라곤 없는 나를 향해 서슴없이 던지는 간지러운 칭찬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든 기억을 잃고 갓 눈을 뜬 사내라기엔, 그가 사용하는 어휘나 문장의 구조가 지나치게 세련되고 격식에 맞아떨어졌다. '대체 이 남자는 얼마만큼의 것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서늘한 의문의 가시가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랐다. 나는 일부러 덤덤한 척 숨을 내쉬며 화덕을 살폈다.수프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보글보글 끓어오르자, 선반에 놓인 투박한 나무 그릇 두 개를 찾아내어 물로 깨끗이 헹궈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슬보슬한 감자,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게 구워진 빵, 그리고 진하게 우러난 수프.작은 나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습기 어린 아침 햇살이 우리 두 사람 사이의 소박한 식탁 위로 비스듬히 내리쬐었다. *** "아린, 입맛에 맞을지 모르겠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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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어떻게 이 짐승에게 목줄을 맬까?]

"마리, 캔돔 가문과 관련 있어?"내가 겁에 질려 있는 걸 알아채기라도 한 듯, 아처린이 대뜸 말을 건넸다.하긴 태어나자마자 버려진 곳이 그곳이었다. 그리고 이 도르하르 제국의 결계 안 겨울만 지속되는 키요리타 산맥에 지낸 세월은 불과 반 년도 채 되지 않았다.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 그리고 할 로드를 연모하면서 나를 품고 안전하게 지켜준 캔돔 대공가를 배신한 나.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나에게는 과거가 있어. 비밀이야."그럴듯한 거짓말을 꾸며대야 했지만, 굳어버린 혀는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디서부터 말을 둘러대야 할지 막막한 두려움이 엄습했기 때문이다.아처린은 그런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이내 입꼬리를 비틀며 피식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거짓말이라곤 못하는 얼굴이네." "······대충 좋은 기억도 섞여 있고, 안 좋은 일도 있어서. 캔돔 대공가는······."부정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고개가 저어졌다. 그가 기억의 파편 속에서 '캔돔'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건져 올렸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불길한 징조였다.바아르 캔돔 대공과 황태자 아처린은 한때 깊은 지류를 공유했던 친구이자, 끝내는 서로의 목에 칼을 겨누었던 지독한 원수였으니까."고위 귀족 가문 이름이었군." "······아린. 그런 과거보다 우리 여행하기로 했잖아. 천천히 세상 구경이나 하면서 가자."나는 일부러 태연하게 수저를 들며 서둘러 화제를 바꾸려 했다. 그러나 아처린은 내 차분한 시도를 무심하게 잘라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캔돔 가문부터. 내 머릿속을 거슬리게 만드는 건 못 참는 성격이라."지나치게 태연한 그 말투에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기억도 제대로 없는 상태로 거길 갔다가, 무슨 봉변이라도 당하면 어쩌려고 그래?"손끝이 떨려왔다. 애써 가다듬으려 했던 목소리에도 서늘한 떨림이 그대로 묻어났다.아처린은 불안에 떠는 나를 보며, 오히려 기분 좋다는 듯 초록빛 눈동자를 반짝였다."싸움은 못할 것 없고, 무슨 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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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무너진 왕좌, 새로운 황제라니]

나는 서둘러 오두막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남은 식량과 챙길 수 있는 생필품을 아공간 속에 차곡차곡 밀어 넣었다. 할 로드를 위해 준비되어 있던 여벌 옷과 속옷, 선반 한쪽에 놓여 있던 소소한 마도구와 마정석도 빠짐없이 챙겼다.귀족들이 영지에서 편히 지낼 때 입는 생활복과 정교하게 짜인 튜닉 몇 벌도 발견되어 모조리 아공간에 밀어 넣었다.나는 아처린에게도 어울릴 튜닉 한 벌을 건넸다. 그는 소매를 만지작거리며 순순히 옷을 갈아입었다.식기나 야영에 쓰일 포근한 이불과 베개까지 모조리 챙겨 넣고 나니, 그야말로 오두막을 털어 가는 도둑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아처린은 죄책감 따위는 전혀 느끼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내 아공간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부러워할 뿐이었다."나도 빨리 마법을 쓸 수 있으면 좋겠다. 나라면 이 오두막을 통째로 집어넣었을 텐데."생각의 스케일 자체가 달랐다. 본능만 남은 광기의 황태자답게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내뱉는 파격적인 소리들이 신기하기만 했다."좋아. 준비는 다 끝났어. 아린, 가 보자."언제까지 이 오두막에만 있을 수도 없고, 만약 아처린을 깨워준 생존자든 해하려 한 사람이든 누군가가 있다면 이곳도 안전하지는 않을 터였다."그래. 마리."아처린이 성큼 다가와 내 품을 단단하고 따스하게 감싸 안았다.그의 깊고 묵직한 체향이 콧속으로 훅 밀려들었다. 은밀하고 아찔할 만큼 기분 좋은 감각에 몸 안의 이성이 자르르 녹아내리는 듯했다.나는 떨리는 손끝을 모아 은빛 마력을 피워 올렸다."어······?"이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마력이 팽팽하고 무겁게 증폭되어 있었다. 미궁 깊은 곳의 순수한 마도 기운을 잔뜩 머금은 덕분이었다.나는 기분 좋은 미소를 흘리며 머릿속으로 이동할 좌표를 또렷하게 지정했다.'내가 잘 알고 있는 곳, 캔돔 대공가의 활기찬 저잣거리로!'생각이 마무리되는 순간, 은빛 마력이 우리 두 사람의 시야를 환하게 감싸 안았다. 오두막의 한기(寒氣)와 정적이 점멸하듯 아득해지며, 우리는 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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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제는 잊혀진 과거라니까]

심지어 계절은 어느덧 4월 중순을 지나고 있었다.저잣거리를 이리저리 거닐며 확인한 세상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해 있었다. 만약 기억을 잃은 아처린이 이대로 황실에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야말로 파란이 일 터였다. 레투니카의 황제는 서거했고, 에스메 황녀 역시 섭정을 이끌다 도르하르 제국의 황궁 습격 사건 여파로 만삭의 몸을 이끌고 피신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길거리에 굴러다니는 전단과 소식지에는 믿기 힘든 사실들이 적나라하게 찍혀 있었다. 대공비가 도르하르에 납치되자 서열 1위인 바아르가 군대를 일으켜 키요리타 산맥에서 아내를 구출해 냈다는 것, 그리고 지금은 귀환한 카이우스가 황좌에 올라 '캔돔 제국력 1년'을 선포했다는 소식까지.일단 에스메의 남편인 레인이 당당히 공작위에 올랐다는 사실은 기이하게까지 느껴졌다.알고 보면 그녀가 황제와 황태자가 세실리에에게 잡혀가도록 방조한 인물인데, 캔돔 가문 입장에서는 개국 공신이 된 것이었다.하지만 그 무엇보다 마리의 심장을 거세게 흔든 건 다름 아닌 할 로드의 이름이었다."할 로드 전하가 도르하르 공작가라고? 개국 공신······?"순간 울컥하며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할 수 없었다.아무리 레투니카가 몰락하고 캔돔 제국이 들어서는 격변기 속에서 레이나와 함께 신제국의 편에 섰다고는 하나, 어떻게 이토록 태연하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단 말인가."마리,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소식지를 움켜쥔 채 얼굴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아처린이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피를 흘리며 참혹하게 스러져 간 도르하르의 제국민들은 그래도 독립된 제국을 원했는데.이제 역사라는 거대한 톱니바퀴 아래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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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이 남자와 함께라면 거칠 것이 없지]

나는 아처린을 데리고 저잣거리에서 가장 크다고 소문난 길드 상점으로 들어갔다.모험가와 상인, 거친 용병들이 빽빽하게 얽혀 드나드는 길드 상점 안은 낯설고 생경한 열기로 가득했다. 황태자 아처린의 존재감은 그 사내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띌 만큼 강렬했다. 붉은 머리칼 아래 미끈하게 잘생긴 얼굴도 그렇지만, 제복 대신 수수한 튜닉을 걸쳤음에도 숨겨지지 않는 귀태가 흘러넘쳐 수많은 시선이 뱀처럼 달라붙었다. 하지만 그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내 곁에 붙어, 귓가를 간지럽히듯 은밀하게 속삭였다."마리, 여기 재미있는 물건이 많네."배가 텅텅 비었는데, 다른 물건이 눈에 들어오는 그가 참 신기했다.아처린의 이런 몸에 밴 여유로움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일단 필요한 것부터 해결해야지."나는 일단 아공간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오두막 구석에 무심히 던져져 있던 마도구를 꺼내려던 순간, 섬뜩한 한기가 손끝을 스쳤다. 섬세하게 각인된 도르하르 황실 특유의 문양이 새겨진 마도구라 팔기만 하면 제값을 톡톡히 받겠지만, 이런 물건을 함부로 내놓았다간 길드 상점 전체에 추적자가 들이닥칠 위험이 있어 보였다. 나는 황급히 손을 돌려 오두막 구석에 잡동사니처럼 굴러다니던 칠흑 빛의 마정석 하나를 집어들었다. 그리 크지 않은 알갱이였기에 별생각 없이 길드 상점 카운터의 나무 탁자 위에 툭 내려놓았다."이거, 매입도 하시나요?"카운터 뒤에서 아처린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던 이십 대쯤의 여직원은 마정석을 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녀가 마력 감정구를 가져다 댄 순간, 감정구 속에서 눈부신 은빛 벼락이 사방으로 번쩍였다."이, 이런 세상에! 순도가 비교조차 되지 않을 만큼 흉측하게 높은 마정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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