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키요르 캔돔 제국력 1년, 5월의 마지막 날 오후.절기상 여름의 입구에 들어서며 기온이 무섭게 치솟기 시작했고, 제국 전역에는 또다시 불길한 가뭄의 그림자가 슬금슬금 스멀거리고 있었다.라이신과 바아르가 혼인식을 치른 지도 어느덧 두 달이라는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화산 폭발로 멸망의 위기에 처한 제국을 구하고, 카이우스를 키요리타 지하 감옥의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구출해 낸 공신 라이신.황제는 라이신에게 결혼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가르남 영지를 정식 공작령이라 선포하고 그녀에게 무려 ‘공작’이라는 파격적인 작위를 내렸다.그러나 구(舊) 레투니카 제국의 엄격한 법률상, 엄연히 남편이 존재하는 여인이 단독으로 영지 경영권을 쥐고 공작위에 오르는 예는 전무했다.매일 소식지에서는 이 문제가 다뤄져 제국 곳곳으로 퍼지게 되었다.[가르남 영지, 공식적인 작위와 공작령 선포는 아직까지 귀족들의 반대가······.][과연 키요르 캔돔 제국은 여성의 권리를 어디까지 확장할 것인가. 세간의 이목 집중.][카이우스 대공의 초대 황제로서의 정통성과 추진력, 가르남 영지 사태로 시험대에 올라.][구 레투니카 황제파 고위 귀족들, 캔돔가의 파격적인 독단에 집단 반발 조짐.][은둔 중인 레투니카의 황녀와 황태자, 이대로 키요르 캔돔가에 전권을 넘긴 채 수면 아래에 머물 것인가]정책이란 모름지기 찬반양론의 거센 풍랑을 동반하기 마련이었다.황궁 알현실에서 정무 회의가 열릴 때마다 대신들은 카이우스를 사방에서 압박했고, 라이신에게 내린 공작 작위와 가르남 영지를 즉각 회수하라는 탄원서가 매일같이 빗발쳤다.'남편이 있고 훗날 자식까지 얻을 여인이 어찌 독자적으로 영지를 다스린단 말인가
저택으로 돌아온 라이신은 침상에 누워서도 내내 가슴을 매섭게 짓누르는 기이한 의문을 도무지 떨쳐낼 수가 없었다.불과 얼마 전에도 이 결계가 높기로 소문난 캔돔가의 저택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던 침입자가 있었는데.오늘 파르교산 깊은 곳에서 체감했던 그 묵직한 진동은 무엇이란 말인지.마수조차 감히 얼씬거리지 못하고 드래곤의 피를 지닌 자들만이 호령한다던 그 무시무시한 험지에서, 마치 대지의 뼈대를 흔드는 듯한 정체불명의 마력 파동이 느껴진 라이신은 불길한 예감에 한숨만 흘렀다.연이어 터져 나오는 이 기묘하고 불쾌한 징조들에 불안감을 감추지 못한 그녀는 제 곁에서 나른하게 숨을 내쉬는 바아르의 단단한 가슴에 지그시 이마를 기대며 나직하게 물었다."전하, 아무래도 이상해요. 얼마 전 저택을 휘젓고 간 침입자도 그렇고, 오늘 파르교산 깊은 곳에서 느껴졌던 그 소름 끼치는 진동도 그렇고······.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게 맞을까요?"그러자 바아르는 별것 아니라는 듯 콧방귀를 픽 뀌더니, 피곤이 서린 매혹적인 눈매를 슬쩍 내리깔며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라이신. 파르교산의 수림이 워낙 기괴하고 마기가 짙은 곳이다 보니 가끔 마수들끼리 영역 싸움을 벌이다 지축이 흔들리기도 하는 법이야. 사람의 짓이라 한들, 지형도 모른 채 무작정 쳐들어온 겁 없는 잔챙이 모험가이거나, 호기심만 과해서 목숨 아까운 줄 모르는 도르하르의 얼간이 마법사 나부랭이겠지."바아르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고, 라이신을 제 품에 꼭 안은 채 조용히 침대로 이끌었다.그 뒤로 바아르는 걱정 말고 편히 쉬라고 전했다.라이신은 그의 가슴에 뺨을 댄 채 조심스럽게 제 손을 내리어 아랫배를 부드럽게 문질렀다. 한때 자신을 지켜주
파르교산 입구. 소문대로 산 초입부터 음산하기 짝이 없는 검은 연기가 자욱하게 깔려 있었다.나는 대공가 하녀 시절 이곳에 대한 흉흉한 소문을 누구보다 많이 들었던 사람이었다. 늘 할 로드는 이 파르교산이 대공가를 지켜주고, 다른 귀족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이유는 바아르의 핏줄이 이 산을 지배한다는 전설 때문이었다.드래곤의 피가 이어진 캔돔가의 남자들.24살까지 불규칙적으로 가끔씩 발작을 하고, 이성을 잃을 정도로 짐승처럼 날뛰며 칼을 휘두르고 주변의 그 무엇도 거슬리면 다 베어 버리는 흉포함을 지닌 그이지만.함부로 마수들이 그들에게 접근조차 못하는 강력한 마력 때문에 두려워한다는 이야기를 항상 들었었기에 나 역시도 선대 대공과 바아르를 경외했었다.과연 이곳의 주인인 바아르는 얼마나 대단하길래 이 무시무시한 산을 그리 제 집 드나들듯 다닌단 말인지.가끔 라이신도 데리고 갔다 왔다는 이야기도 꽤 들었었다.몇 걸음 안쪽으로 발을 내딛자, 그것이 강대한 결계 탓인지 아니면 자연적인 공간의 뒤틀림 때문인지 순식간에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공기층이 묵직하고 축축하게 변하는 기분이 들었다.시야가 온통 검은 안개에 막혀 눈에 보이는 것이 거의 없자, 나는 서둘러 손끝에 환한 마법의 빛을 피워 올렸다. 그제야 겨우 앞이 훤하게 밝아지며 가시거리가 확보되었다. 산의 아주 초입인데도 이 정도라니, 절로 가슴이 쪼그라들었다.바스락, 크르르르······.그때, 검은 안개 너머에서 기괴하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어머! 아린!""크하하, 마수가 드디어 나타났군!"아처린은 겁을 먹기는커녕 오히려 신이 난 표정으로 검을 쥔 손에 황금빛 오러를 화려하게 불어넣었다. 찬란한 금빛이 안개를 찢었지만, 맞은편에서
내가 제 눈치를 살피며 손끝을 떨자, 아처린은 황궁을 향하던 몸을 미련 없이 반대로 돌려섰다.희미한 두통 때문이기도 했지만, 황성이라는 장소에 들어서기에는 아직 나라는 여인과의 심리적 거리가 멀게 느껴진 탓이었다.그가 나를 배려해 시선을 돌린 순간, 반대쪽 저 멀리 지평선 끝자락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을 것만 같은 기괴하고 웅장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하늘과 맞닿을 듯 우뚝 솟아 있는 거대하고 시커먼 산맥. 5월의 찬란한 햇살마저 집어삼킬 듯 서늘하고 불길한 오라를 내뿜는 기괴한 검은 산이었다."마리, 저기는 뭐야?"아처린의 나직한 물음에 나 역시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솟은 험준한 산세를 바라보며 나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고, 손사래를 이리저리 치며 고개를 저었다."저기는 파르교산이야. 제국에서 손꼽히는 엄청 무시무시한 곳이지. 일반 모험자들은 감히 들어갈 엄두도 못 내고, 마수가 들끓는 험지 중의 험지거든."그러자 아처린은 ‘오호-’ 하는 흥미로운 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깊이를 알 수 없는 그의 푸른 눈동자가 기이한 호기심으로 빛나기 시작했다.사실 캔돔 대공가 시절, 바아르가 발작이 일어나면 이성을 잃을 때까지 저기서 마수를 사냥한다는 것은 대공가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이해하는 진실이었다.그곳은 함부로 갈 수도 없고, 검은 연기가 휩싸여 한낮에도 눈앞이 캄캄할 정도로 무시무시하다고 전해져 아무도 그곳에 심부름을 보내지 않는다는 것도 유명했다."저기 가서 마수나 잡아볼까?"갑작스러운 그의 장난기 어린 소리에 나는 혀를 내두르며 깊은 한숨을 흘렸다."아무리 능숙한 검사라도 순식간에 찢겨 나가. 예전에 할 로드 전하도 저 산은 함부로 가지 않았는데···&
손에 피를 묻히더라도 자신을 위해 돈을 구하겠다는 말은 고맙기는 했지만, 그 소리가 너무도 살벌하고 가혹하여 나는 순간 목에 무언가가 콱 걸리는 것만 같았다.숨이 턱 막혀 마른침을 삼키는 나를 보며, 아처린은 느긋하게 붉은 입술을 올려 호선을 그려 보였다."아린, 좀 무서운걸? 도적이라도 되겠다는 건 아니지?""너무 심각하게 들을 것 없어. 내가 검을 휘둘러 직접 마수를 잡아서라도 너를 돌본다는 뜻이니까."그의 목소리는 비단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 하지만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내 가슴속에는 여전히 가느다란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본래 잔혹한 데다 즉흥적이어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사내였다.이렇게 서늘한 성정을 지닌 아처린이 앞으로 나를 위해 어떤 거칠고 무서운 일을 벌이게 될지 절로 걱정이 밀려왔다.방법이야 어찌 되었든 이 모든 맹세가 기사가 레이디에게 마음을 다해 지켜준다는 의미였기에, 이런 대접을 받는 것이 영광스럽기는 했지만 등골은 그저 서늘하기만 했다. 나는 가슴을 짓누르는 중압감을 누르며 조심스레 주스를 마셨다.하지만 이미 내 입에는 더 이상 주스가 달게 느껴지지 않았다.차갑게 식어버린 단맛 사이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감돌아, 나는 그의 눈치만 계속해서 살필 수밖에 없었다.***다음 날 정오.지난 밤 아처린이 계속 내 몸을 지분거리며 부벼 댄 탓에 몸이 무거워 늦잠을 자게 되었다. 느지막이 나는, 숙소 식당에서 아처린과 식사를 마친 뒤 다음 여정을 고민하게 되었다. 아처린은 오늘도 나를 위해 포션을 구해왔고, 한층 더 애틋하게 여기며 온종일 곁을 지켰다.누가 봐도 완벽한 연인처럼 구는 그였기에, 내 머리칼을 가만히 쓸어 넘겨주고 손끝으로 볼을 어루만지는 손길 하나하나에 연신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 시각, 대공가의 침실에서는 늦은 아침이 되도록 일어나지 못한 라이신 황태자비와 바아르 황태자가 있었다.말이 황태자지 황궁은 되도록 가지 않으려 아무리 황궁에서 사람을 보내도 하루 이틀 함흥차사만 반복되고 있는데.그 이유는 바로 카이우스 키요르 폰 캔돔 황제가 그 자리에서 제 몫을 해주기 때문이다.고리타르의 의문의 죽음, 아처린 황태자의 실종, 그리고 에스메의 황궁을 버린 충격적인 사건까지.이 모든 제국의 혼란은 캔돔 선대 대공 카이우스가 등장하면서 모두 해결되었다.그래서 카이우스가 황제로 제국을 새롭게 건국을 하게 된 것은 하늘이 내려준 축복이나 다름없다.“전하, 이제는 좀······. 황궁은 오늘도 안 가실 건가요?”“대충 컨디션이 안 좋다고 세이바로 경에게 말해 놨어.”컨디션이 안 좋기는 무슨.최고조 절정을 매일 달리고 있어 라이신은 피곤하던 차였다.사실 바아르는 불규칙적인 발작으로 인해 항상 긴장한 채로 대공가에 갇혀 어린 시절부터 살아왔다. 그러나 24세가 지나가고 아버지의 등장으로 인해 드디어 평범한 인생을 되찾게 되었다.그래서 이제 짐승 같은 발작은 핑계거리도 되지 않았다.“전하, 이러다 폐하께 뜨거운 맛을 보실 수도 있어요.”바아르는 여전히 라이신의 가슴을 쓰다듬다 입을 맞추며 지분거리느라 그녀를 놓아줄 기미가 없었다.그의 시선이 라이신의 나신에 닿자 새하얀 피부에 부풀어 오른 곡선이 은은하게 빛났다. 봉긋 솟은 가슴 끝자락의 분홍빛 돌기는 임신으로 더욱 도드라져, 마치 금지된 열매를 보는 듯한 위험한 유혹을 풍겼다.“아버지는 나에게 져. 나는 너에게 지고. 그나저나 넌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