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us les chapitres de : Chapitre 21 - Chapitre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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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나에게만 다정한 빌런 황태자]

부길드장이 직접 안내한 길드 상점 안쪽 식당은 저잣거리 모험가들과 상인들이 어우러져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정감 어린 곳이었다.곳곳에서 커다란 맥주잔을 부딪치는 소리가 청량하게 울렸고, 갓 구워낸 고기의 향긋한 냄새가 공기 중에 가득했다.잠시 후, 식탁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최고급 고기구이와 진하고 부드러운 수프, 오크통에서 막 꺼낸 향긋한 럼주, 그리고 달콤한 디저트까지 그야말로 푸짐한 한 상이 차려졌다.나는 이렇게 훌륭한 음식을 밖에서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우아하게 식기류를 움직이는 아처린의 손길을 조심스레 따라 하느라 절로 천천히 식사를 즐기게 되었다."그나저나 아가씨, 그리 귀한 마정석은 대체 어디서 얻은 거요?"고기를 써는 동안, 지나가던 거친 차림의 모험가 하나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다가와 슬쩍 말을 건넸다.내가 당황해 입을 떼기도 전에, 내 옆자리의 아처린이 나이프를 든 채 서늘한 초록빛 눈동자를 슬쩍 돌렸다."나의 레이디가 식사 중이니, 가던 길이나 가시오."낮게 가라앉은 한마디였지만, 그 속에 담긴 오만한 귀기와 기형적인 압도감에 모험가는 침을 꼴깍 삼키며 황급히 물러섰다.그 이후로는 감히 누구도 우리 식탁 근처에 접근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아처린, 앞으로 저렇게 우리한테 물어보는 사람이 많아질 것 같아. 그냥 시비가 붙을 수도 있으니 부드럽게 말해줘. 응?""최대한 부드럽게 말한 건데."환장할 노릇이었다. 하긴 태생이 황족인 사내가 평민에게 저 정도로 말해 준 것만으로도 참 기특한 일이었다.그러나 고압적인 태도는 언젠가 누군가의 허점이 되거나 반발을 사기 마련일 터. 함께 여행할 앞날에 걱정이 밀려왔다."아, 걱정이 되긴 하군."그가 웬일로 내 말에 동조하나 싶었더니, 제 가슴팍과 팔뚝을 손으로 툭툭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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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나의 처음이 그리 중요해?]

늦은 밤. 칠흑 같은 어둠이 짙게 깔린 길드 상점 안쪽 집무실로 서아리노 길드장이 육중한 문을 열고 모습을 드러냈다.캔돔 영지의 상권과 비밀스러운 정보망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그는, 오늘 저녁 본 상점에 시세를 가늠하기조차 힘들 만큼 귀하고 대단한 마정석 하나가 들어왔다는 긴급 보고를 받고 부랴부랴 달려온 참이었다.서아리노는 묵직한 옻칠 궤짝 속에서 꺼내어진 칠흑 빛의 마정석을 감정구 옆에 내려놓으며 흠칫 놀란 눈을 빛냈다. 촛불 아래서 고고하게 일렁이는 잔잔한 마력의 파동은 보기 힘든 무결점의 고순도 마정석이 분명했다. 부길드장인 리노가 감정도 아주 훌륭히 해낸 것이 확실했기에 그의 눈가에 흥분의 열기가 번져 나갔다."리노, 이 엄청난 물건을 대체 누가 가져왔지?"옆에 얌전히 서 있던 리노는 허리를 깊숙이 굽히며 낮게 대답했다."서아리노 님, 엄밀하게 말씀드리자면 거래를 주도한 건 갈색 머리의 여인이었습니다. 하지만 함께 있던 붉은 머리 사내가 시선을 강탈할 만큼 지나치게 범상치 않아 보는 내내 숨이 턱 막혔습니다. 차림새는 평범했지만, 자태와 눈빛이 마치 고위 귀족 나으리 같았거든요."범상치 않은 붉은 머리칼의 사내라니.서아리노는 최상위 마수의 짙은 정수가 일렁이는 마정석을 손가락으로 이리저리 감싸 쥐며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키요리타 산맥 깊은 결계 속에서도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희귀 마수, 라이칸스로프의 마정석이 확실해. 아주 잘 확보했군. 당장 길 소르도 대공 각하께 이 소식을 전하고 연락을 취해야겠어."하지만 상인 특유의 매서운 직감과 정세 판단력을 지닌 서아리노는 이내 눈매를 가늘게 찌푸리며 깊은 의문과 의심을 드러냈다.도르하르 대륙 전체를 통틀어도 눈부신 붉은 머리칼을 지닌 혈통은 지극히 드물었다. 황실의 정통 핏줄이거나, 적어도 황족과 가장 가까운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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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기품 있는 망나니의 정확한 시력]

아처린은 지금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었다.순간순간 관자놀이를 지르는 통증도 통증이었지만, 욕실 안에서 불안에 떨며 제 눈치를 살피던 마리의 얼굴이 자꾸만 잔상을 남겼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무력한 처지 탓에 제 여인 하나 편안히 품지 못한다는 자괴감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차갑게 끓어올랐다.게다가 손님이 묵고 있는 방에 예고도 없이 이 밤중에 찾아오다니. 아무리 기억을 잃고 차림새가 허름해졌다 한들, 제게 가해지는 오만방자한 침범은 신경을 거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문고리를 틀어쥐어 열자, 갈색 단발에 가까운 머리칼과 매서운 갈색 눈을 지닌 삼십 대 초반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영지의 상권을 쥔 길드장답게 화려한 복장을 차려입은 서아리노는 태연하게 손을 들어 올리며 정중히 가슴에 얹었다."오늘 귀한 마정석을 가져다주신 고객님께 직접 인사를 드리고자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서아리노 드리히 백작입니다."아처린은 하- 하고 차가운 한숨을 뱉어내며 서아리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짙은 초록빛 눈동자에는 서늘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백작이라면 꽤 높은 고위 귀족인데. 아마 캔돔 대공가가 황가가 되면서 자작이나 남작이었다가 백작 작위를 받은 상인이 아닌가 싶었다."이 늦은 시각에 예고도 없이 찾아오다니."낮게 가라앉은 한마디였으나 그 안에 담긴 압도적인 분노에 서아리노의 눈빛이 순간 크게 흔들렸다. 사내는 흠칫하더니 이내 천천히 고개를 조아렸다."여기 최고급 럼주와 육포, 그리고 모험을 다니시는 분이라 들었기에 미늘 방어복을 선물로 드리고 싶어 무례를 무릅쓰고 왔습니다."뒤이어 하인들이 들고 온 고급 방어복을 확인한 순간, 아처린의 일그러졌던 눈썹이 그나마 조금 풀어졌다.가녀리기 짝이 없는 마리가 마물이나 야적의 공격이라도 받으면 어쩌나 내심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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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잠 못 이루는 사내와 사내]

서아리노는 상점 맨 끝 4층, 오직 자신만이 머물 수 있도록 미리 선점해 둔 전용 숙소로 들어섰다.방 안에는 길드 카운터를 담당하는 시녀 레나가 이미 몸을 단정히 씻은 채 기다리고 있었다. 은은하게 몸선이 비쳐 보이는 얇은 레이스 튜닉 차림의 그녀가 침대 끝에 앉아 몽환적인 눈빛으로 그를 맞이했다."오셨어요, 서아리노 님?""그래. 와, 그 붉은 머리 사내 보통이 아니야. 기가 다 빨려 나가는 줄 알았네."서아리노가 지친 기색으로 실크 로브의 끈을 풀자, 레나가 동그란 눈을 반짝이며 배시시 웃었다."어머! 그 잘생긴 손님 말씀이시죠? 세상에, 저도 따라가 볼걸 그랬네요!"부길드장인 리노도 그렇고, 저녁 서빙을 하던 시에라까지 계속 그 사내 이야기만 하느라 귀에 딱지가 얹힐 지경이었다. 남성인 자신이 보아도 방금 만난 사내는 압도적으로 잘생긴 데다 높은 기품과 야성미가 동시에 흘렀기에 서아리노는 미간을 자국 나게 찌푸렸다.눈부신 붉은 머리칼에 깊은 초록색 눈동자. 게다가 상대의 뼈를 때리는 거만한 말투까지. 사냥이나 전쟁으로 다부지게 단련된 견고한 체구였지만, 고위 귀족 특유의 매끈한 피부결과 백작인 자신이 작위를 밝혀도 눈 하나 찌푸리지 않는 도도함은 그가 정통 고위 귀족이라는 확실한 증거였다."서아리노 님, 일단 침대로 오세요."서아리노는 긴 한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는 오감을 정신없이 흔드는 육체적 쾌락에 빠지는 게 상책이었다.은은한 촛불 아래, 얇은 시트 위로 두 사람의 부드럽고 뜨거운 체온이 얽혀 들었다. 레나는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입을 맞추며 간지러운 숨을 내뱉었지만, 서아리노의 갈색 눈동자는 공중의 한 지점에 고정된 채 굳어 있었다. 손길은 습관처럼 여인의 부드러운 허벅지와 허리를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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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질척한 밤과 열린 아침]

"나는 아린을 책임지는 방법 따위는 모르는데."생전 남자의 품에 안겨 밤을 청해본 역사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내에게서 풍겨오는 짙고 기분 좋은 향기와 살갗을 타고 직조되듯 전해지는 아늑하고 뜨거운 온기는 감당하기조차 힘들었다."머릿속엔 아무 기억도 없는데, 몸이 난리야."귀엽다고 해야 할지, 너무 노골적이라고 해야 할지.하지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고, 이런 행위는 서로 깊이 사랑해야만 나누는 게 아닌가 싶었다. 과연 내가 아처린을 사랑할 수나 있을까. 그가 황태자이자 집안의 원수일지도 모르는 처지였으나, 나를 찌르던 뾰족한 경계심은 이미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진 상태였다.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하지만 이 사내는 지독하게 근사한 데다 나를 살려주기까지 했고, 생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아름답다'는 찬사를 연발하고 있었다. 그러니 한 명의 여인으로서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은밀하게 손끝을 움직여 내 감각을 건드릴 때마다 전신이 타들어 가듯 짜릿해서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아린,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우리 똑바로 누워서 자야 할 것 같아."이대로 기분 좋은 야릇함에 삼켜졌다간 정말 밤을 꼬박 지새울 것만 같았다."날 죽일 셈이야? 이리 아름다운 레이디를 곁에 두고 안지 않을 수 있다니, 그건 고문이라고."이 밤, 나는 아처린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당이 되지 않았다."나는 평생 남자를 옆에 두고 자 본 적이 없어. 내가 방해되면 바닥에서 잘게."그때 아처린의 낮고 뜨거운 한숨 소리가 귓가를 붉게 파고들었다."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귀한 내 레이디를 무슨 바닥에서 자게 해."그렇다고 귀하기 짝이 없는 사내를 바닥에서 재우는 것 역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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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흔적을 쫓는 매서운 눈동자

4층에서 내려온 서아리노는 상점 1층 카운터 뒤에 서서 짐짓 소식지를 펼쳐 들었다.원래대로라면 바아르 황태자가 기다리는 캔돔 영주의 저택으로 즉시 향해야 했으나, 확인해야 할 위험천만한 단서가 있었기에 그는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그리고 잠시 뒤, 서아리노는 허파 깊숙이 숨을 억누르며 집어삼켰다.예상대로 붉은 머리 사내와 갈색 머리 여인이 계단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서아리노는 멀찍이 서서 시녀 레나와 함께 물건을 정리하는 척 소식지에 시선을 꿰매 두었으나, 오감은 온통 그 두 사람의 움직임에 날카롭게 쏠려 있었다.어제는 굳게 닫힌 욕실 문 너머에 숨어 있어 확인하지 못했던 갈색 머리 여인도 사내의 곁에 착 붙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평범하고 수수한 여행자 차림이었으나, 옷감의 재질만큼은 제국 최상위 고위 귀족들이나 겨우 재단해 입는 최상급 비단과 모직이었다.함부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가는 사내의 서늘한 귀기와 경계심을 자극할 게 분명했기에, 서아리노는 눈빛을 은밀히 낮춘 채 그들의 대화를 숨죽여 주시했다."아린, 되게 부지런하네? 아린 덕분에 매일 꼬박꼬박 식사를 잘 챙겨 먹게 된 것 같아.""네 몸이 완벽하게 건강을 찾은 건 아니니까."여인은 입가를 부드럽게 가린 채 쿡쿡 웃으며 가볍게 어깨를 움츠렸다. 그 섬세한 손짓과 걷는 모양새가 서아리노의 매서운 눈에 들어왔다. 하위 계층의 노예나 하녀에게서 나올 수 있는 천박함은 전혀 없었다. 허리를 바짝 펴고 곧게 걷는 태도나 당당한 표정은, 최소한 부유한 귀족가의 깊은 뜰에서 귀한 분들을 가까이 모셨거나, 나름 하위 귀족이라도 일말의 품격 있는 예의를 몸에 익힌 기품이었다."진짜 봐도 봐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네요····&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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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오만한 사내의 사소한 취향]

내 입에서 예고도 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나조차 깜짝 놀라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옆을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아처린의 깊은 초록빛 눈동자가 굶주린 야수처럼 번들거리고 있었다. "누구야, 전하는?"아처린이 턱 끝을 느릿하게 낮추며 귓가에 닿을 듯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낮고 긁히는 음성이 목덜미를 따라 흘러내리자 등골에는 소름이 돋아 버렸다.원래대로라면 대공가의 시녀였으니 과거에 모셨던 고귀한 분이라고 적당히 둘러대면 그만이었다.하지만 지금 '할 로드'라는 이름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캔돔 대공저의 로드 부부가 운영하던 빵집의 양아들이었다가 기사가 된 이야기부터 현재 도르하르 황국의 황태자라는 화려한 서사까지 구구절절 읊어야 했다.그렇게 되면 캔돔가의 시녀에서 도르하르의 시녀로 연결되는 내 과거까지 끌려 나올 터였다. 레투니카 황태자와 황제를 감옥에 집어넣은 장본인이라는 지독하게 숨겨둔 진실까지, 고구마 줄기처럼 얽히고설켜 터져 나올까 봐 덜컥 두려움이 밀려왔다.위험천만한 과거를 들춰내어 좋을 게 하나도 없었기에 나는 슬그머니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뭐, 다 의미 없는 과거인데 미안, 아린."내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눈치를 살피자, 아처린은 기가 막힌다는 듯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나지막하게 콧방귀를 뀌었다."무슨 빵집 아들놈한테 전하래? 마리, 농담도 잘하네."그때, 아처린이 내 단단한 손목을 턱 감싸 쥐더니 망설임 없이 그 빵집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닿아오는 그의 체온이 살갗을 타들어가게 만들었다."어?""그 대단하신 '전하'가 만드는 빵 맛이나 좀 보게.""어, 어? 잠시만, 아린!"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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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위험한 착각, 달콤한 족쇄]

"아린, 말을 타고 싶다고?"나는 순간 손에 쥐고 있던 붉은 사과를 바닥에 놓칠 뻔했다.말이라니. 그 지극히 평범한 단어가 그 오만한 붉은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머릿속에서 아련히 잊고 있던 소문 하나가 벼락처럼 스쳐 지나갔다. 과거 끔찍한 낙마 사고로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평생 은둔해 살아야 했던 여동생, 에스메 황녀의 비극적인 서사가 뇌리를 날카롭게 할퀴었다.그리고 그 불운한 사고의 원인을 제공한 인물이 다름 아닌 붉은 머리의 황태자, 아처린 본인이라는 잔혹한 소문까지.물론 작년에 뛰어난 마법력을 지닌 라이신이 에스메의 다리를 깨끗이 고쳐주었다는 사실은 세실리에를 통해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전까지 무려 5년이라는 세월 동안 어린 동생을 참혹한 지옥 속에 살게 한 주범이 바로 아처린이었기에, 순간 등골로 서늘한 소름이 바짝 돋아버렸다.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이 사내는, 자신이 그런 처참하고 비극적인 과거를 지녔다는 사실조차 모른 채 장난기 가득한 아이처럼 천진하게 말을 타고 싶다 말하고 있었다."그래. 온몸이 근질거려."기억은 깔끔하게 잃었으면서, 몸을 쓰는 야성적인 감각만큼은 제국의 폭군답게 선명하게 살아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떨리는 숨을 은밀히 삼키며, 애써 태연하고 다정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었다."우리, 멀리 이동하려면 말이 필요할 수도 있지. 하지만 말은 먹이도 챙겨야 하고 관리하기가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잖아? 편하게 돈을 주고 마차를 타고 다니는 게 어때?""마차?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사실 나도 네 그 순간이동을 빨리 익혀서 마리와 더 많은 곳을 다녀보고도 싶어."아처린이 제법 합리적인 제안이라는 듯 초록빛 눈동자를 반짝였다.그때 아처린이 짙은 눈썹을 슬쩍 올리며 내 허리를 바짝 끌어당겼다. 억센 팔에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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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폭군의 스위치가 눌러져 버린 건가?]

내가 캔돔 대공가에서 하녀로 일하던 시절, 나를 가장 많이 찾고 마주쳤던 인물이었다. 그곳의 그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기에 마른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나는 그녀가 얼른 이 골목을 스쳐 지나가기만을 간절히 바랐다.캔돔 대공가에서 오랫동안 하녀들을 총괄하며 매섭고 까다롭게 일을 처리하던 마리나 시녀장이었다. 그녀는 여러 명의 어린 하녀들을 이끌고 식솔들의 장을 보러 나온 모양이었다.나는 얼른 아처린의 팔을 붙잡고 그를 그늘진 벽 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판초 후드 역시 얼굴이 완전히 가려지도록 깊숙이 눌러썼다. 귓가에서 심장이 쿵쿵 뛰어대는 소리가 방아질을 하듯 미친 듯이 울려 퍼졌다. 정체가 탄로 나는 순간, 나뿐만 아니라 옆에 있는 이 위험천만한 사내까지 모조리 사지에 몰릴 것이 분명했다.하지만 마리나 시녀장은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면서도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시선 한 번 주지 않은 채, 하녀들에게 오늘 사야 할 물품 목록을 까다롭게 지시하며 스르륵 지나쳐 갈 뿐이었다.'어? 판초 덕분인가?'하긴 붉은 머리 아처린도 황태자임을 금방 알겠지만, 모자를 눌러썼기에 다행히 눈에 띄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안도의 긴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리려던 바로 그 순간, 스쳐 지나가는 하녀들의 나지막한 수다가 내 귓가를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왔다."근데 말이야, 라이신 전하께서는 왜 황궁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고 계속 저희 캔돔 저택에 머무르시는 걸까요?"아! 라이신이 다행히 살아 있다니. 그리고 대공비가 아니라 황태자비라고?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딱 멈추며 흠칫했다. 라이신은 내 어린 시절 몇 안 되는 소중한 친구이자 예쁘고 당당하고 영특한 하인이었다가 마력도 대단해지고, 여인이라는 것도 드러나 바아르 각하의 눈에 들어 행복한 인생을 살았는데.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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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죽이려 했지만, 잊지는 말아줘]

그날 밤 우리가 묵게 된 곳은 서아리노 상점의 숙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초라하고 좁다란 여관이었다.방 안에는 삐걱거리는 낡은 침대 하나와 작은 목재 탁자뿐이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시작된 아처린의 발작을 급히 가라앉히는 게 우선이었기에, 그를 부축한 채 더 멀리 이동하는 것은 도저히 무리였다.여관 아래층에 딸린 식당의 음식 역시 보잘것없고 가짓수도 몇 되지 않았다. 둔탁한 목재 접시 위에 놓인 것은 미지근하게 식은 삶은 감자 몇 덩이와, 베이컨은커녕 소금에 바짝 절여져 퀴퀴한 냄새가 나는 딱딱한 육포 몇 조각이 전부였다. 작은 그릇에 담긴 묽은 수프 역시 고기 한 점 없이 성의 없이 썰어 넣은 당근과 양파 조각만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아처린은 포크를 들고 수프를 몇 번 휘적거리기만 할 뿐, 선뜻 입에 대지도 않더니 숟가락과 포크를 내려놓았다."아린, 괜찮아? 입맛이 안 좋은가 보네."내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으며 그의 얼굴을 살피자, 아처린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여기 음식은 별로야."하긴,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척박한 서민들의 음식을 접해보지 못했을 테니 그의 입맛에 맞을 리가 없었다. 억지로 먹이다간 탈이라도 날 것 같아 마음이 짠해졌다."내일은 서아리노 상점에 다시 가자." "그래, 거기가 차라리 나았어. 마리, 나 좀 잘게."제국 최고의 검사이자 오만했던 황태자가 이토록 무기력하게 피곤해하다니. 조금 전에 들었던 '바아르'라는 이름이 그에게 얼마나 커다란 정신적 충격을 주었는지 새삼 실감이 나 가슴 한구석이 서늘하게 저려왔다. *** 식당에서 올라온 뒤, 차라리 키요리타 산맥 오두막에서 가져온 말린 고기와 물을 그에게 주고 난 뒤 대충 씻고 그를 침대에 눕혔다. 어제보다 아처린이 훨씬 더 깊고 편안하게 잠들 수 있도록, 나는 그의 이마에 손을 얹고 은빛 마력을 한층 더 깊고 따스하게 불어넣어 주었다.따스한 치유의 마력이 온몸에 감돌자, 거칠었던 그의 숨소리가 이내 규칙적이고 깊은 호흡으로
last update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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