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은 여전히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몽롱했다.과거의 기억도, 자신이 정확히 누구였는지조차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흐릿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생각보다 말과 행동이 먼저 저절로 툭툭 흘러나왔다. 마치 오랫동안 숙련된 본능이 몸에 깊게 베여 있는 것처럼.침상 위에 옷가지를 내려놓고 마침내 나신으로 선 마리를 바라보자, 가슴 깊은 곳에서 아련하게 심장이 욱신거려 왔다.자신의 지난 삶이 어떠했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으나, 어렴풋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은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해 본 적도, 타인을 위해 희생 따위를 해본 적도 없는 냉혹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세상 모든 것에 심드렁하고 무덤덤했던 자신이, 이 작고 고운 여자를 보는 순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살리고 싶어 안달이 났었다. 마음속에 대체 언제부터 이런 간절함이 들어차 있었던 걸까.모험자의 허름한 옷차림, 굳은살이 박인 거친 손.하지만 그 속에서 드러나는 마리의 행동은 올곧았고, 눈빛은 그 어떤 제국의 오만한 귀족보다 당당하고 대단했다. 갓 스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이 가녀린 몸집을 하고서도, 때로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를 홀로 누벼온 노련한 장수의 눈을 하기도 했고, 때로는 세상 꼭대기에서 만물을 내려다보는 나이 지긋한 대마법사의 눈을 하기도 했다.이렇게나 곱고 여린 몸을 하고서, 대체 그동안 어떤 가혹한 인생을 살아온 걸까."호기심이 생겼어, 마리라는 여자에게."낮게 속삭이는 묵직한 음성이 은은한 촛불이 넘실거리는 방 안의 정적을 깼다.설령 그녀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라 해도, 심지어 훗날 지독하게 배신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지금만큼은 이 여자를 탐색하고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미칠 듯이 터져
Dernière mise à jour : 2026-09-28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