بيت / 로맨스 / 남편이 허락한 바람 / Chapter 71 -الفصل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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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1화 잃어버린 게 아니야

건물 로비의 차가운 공기 위로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재헌의 굳은 시선은 예원의 비어 있는 왼손 약지에서 좀처럼 떨어질 줄 몰랐다.예원은 코트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지도, 당황한 기색으로 빈 손가락을 등 뒤로 감추지도 않았다.그저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의 손끝에 꽂힌 재헌의 시선을 마주 안고 서 있을 뿐이었다.손가락을 무겁게 짓누르던 금속 고리가 사라진 자리는 가벼웠지만, 그 빈자리를 바라보는 재헌의 눈빛에는 무언가 거대한 것을 상실한 듯한 노골적인 충격이 묻어 있었다.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간신히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뗀 재헌의 입에서 낮고 억눌린 음성이 흘러나왔다."결혼반지는, 어디 갔어."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더 가라앉아 있었다.당장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날이 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대답을 듣는 것을 두려워하는 듯한 묘한 모순이 배어 있었다.예원은 자신의 텅 빈 왼손을 한 번 내려다본 뒤, 다시 재헌의 굳은 얼굴로 시선을 올렸다."없어."너무도 짧고 건조한 대답에 재헌의 미간이 좁혀졌다.그는 이 상황을 전혀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듯 예원을 향해 한 걸음 다가왔다.늘 여유롭고 오만하게 예원을 내려다보던 평소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갑자기 반지가 왜 없냐고 묻잖아.""보면 알잖아.없다는 거."예원의 무심한 반응에 재헌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그 짧은 문장 속에 담긴 냉랭한 거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그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과거의 예원이라면 그의 이런 서늘한 추궁 앞에서 어떻게든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으려 애썼을 것이다.세수를 하다 잠시 빼두었다거나, 손가락이 부어서 며칠만 빼기로 했다는 식의 적당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관계의 파열음을 피하려 했을지도 모른다.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것이 평화로운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었던 시절의 비참한 습관이었다.하지만 지금의 예원에게는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이해시켜야 할 그 어떤 의무감도, 필요성도 남아 있지 않았다."언제부터 안 낀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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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그대로 둔 것들

그날의 서늘했던 대치 이후로도 예원의 일상은 흔들림 없이 이어졌다.오히려 며칠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예원의 동선에는 차재헌과의 마찰음 대신 새롭고 단정한 일탈의 조각들이 하나둘 자연스럽게 스며들기 시작했다.퇴근 후 다시 찾은 시혁의 집.현관을 들어선 예원은 지난번처럼 어색하게 거실을 맴돌거나 시혁이 안내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았다.코트를 벗어 걸어둔 예원은 소파 한쪽에 가방을 내려놓고는 아주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주방을 향했다.냉장고 문을 열어 익숙하게 생수병을 꺼내 들고 돌아서자, 거실 창가에 서 있던 시혁과 눈이 마주쳤다.시혁은 예원이 냉장고 문을 열고 물을 꺼내는 동안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그저 거실 창가에 기대 선 채, 옅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예원의 움직임을 가만히 좇았다.물을 마신 뒤 컵을 내려놓던 예원의 시선이 아일랜드 식탁 한구석에 멈췄다.작은 컵받침 옆에, 얇은 검은색 고무줄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예원의 머리끈이었다.언제 풀어두었는지조차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지난번 이곳에서 밤을 보낸 다음 날 아침, 씻기 위해 머리를 묶었다가 무심코 아무 데나 풀어두었던 모양이었다.버려지거나 서랍 구석에 대충 처박혀 있을 줄 알았던 보잘것없는 물건이 보란 듯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예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머리끈을 집어 들었다."이게 아직 여기 있었네요."창가에 서 있던 시혁이 예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그의 시선이 예원의 손끝에 들린 머리끈에 닿았다가 다시 예원의 얼굴로 향했다."왜 버립니까."너무나 담담하고 당연한 투의 대답이었다.예원은 손목에 걸린 머리끈을 한 번 만져보았다.아주 사소한 물건 하나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오래 마음에 걸렸다.불편하거나 거슬려서가 아니라, 이상하리만큼 기분 좋고 안도감이 드는 낯선 감각이었다.예원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번졌다.굳이 그가 남긴 대답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감정을 과장하려 들지는 않았다.예원은 머리끈을 손목에 대충 걸어둔 채 소파로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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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잠들지 못하는 사람

그날 이후로도 예원의 저녁 동선은 꽤 자주 시혁의 집을 향해 이어졌다.특별한 약속을 잡거나 거창한 데이트를 계획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아주 당연한 수순처럼 함께 시간을 보냈다.거실 소파에는 예원이 훑어보던 루센 관련 자료들이 무심하게 놓여 있었고, 늦은 밤 마시던 찻잔은 싱크대 한쪽에 나란히 포개어져 있었다.예원의 아주 작은 생활의 흔적들은 이미 권시혁이라는 남자의 단정하고 고요한 공간에 이질감 없이 녹아들어 평범한 일상의 일부가 되어가고 있었다.그날 밤도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지극히 평범한 저녁의 연장이었다.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 거실 조명을 끄고 침실로 들어왔지만 시혁은 예원이 잠들 준비를 마친 뒤에도 쉽게 눈을 붙이지 않았다.예원은 이불을 끌어당기며 그의 단정한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그는 그저 생각이 많은 듯 보였고, 예원 역시 그 침묵을 굳이 방해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눈을 감았다.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얕은 잠에 빠졌던 예원은 이불 속에서 느껴지는 서늘한 새벽 공기에 무심코 눈을 떴다.옆자리는 비어 있었다.예원은 눈을 비비며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굳게 닫히지 않은 침실 문틈 사이로 옅은 불빛이 길게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아주 늦은 새벽 시간이었다.마른 목을 축일 겸 침실을 나서 거실로 걸음을 옮기던 예원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거실 한가운데, 시혁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메인 조명은 꺼진 채 희미한 간접 조명만이 그의 넓은 어깨를 간신히 비추고 있었다.예원은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했다.새벽 세 시가 훌쩍 가까워진 시간이었다.시혁의 앞이나 소파 옆에는 그 흔한 서류 더미도, 손에 든 휴대전화도 보이지 않았다.남은 업무를 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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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말하고 싶을 때

"……아버지."잠결에 새어 나온 그 짧고 무거운 단어 하나가 어두운 거실의 공기를 가르고 예원의 귓가에 닿았다.예원의 호흡이 순간적으로 멈췄다.잠시 굳어 있던 예원은 가만히 숨을 고르며 시혁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희미하게 잡혀 있던 미간의 주름은 조금 전보다 한결 옅어져 있었다.어둠 속에 홀로 앉아 텅 빈 허공을 응시하던 그의 모습과 귓가를 때리던 그 서늘한 단어 하나.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예원은 그 한 단어가 그의 지독한 불면증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직감을 본능적으로 느꼈다.지금 당장 그의 어깨를 흔들어 깨우고 싶었다.그를 괴롭히는 그 이름이 무엇인지, 잠 못 드는 밤마다 어떤 기억들이 그를 이 어두운 거실로 밀어 넣는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어떤 상처가 고여 있는지 묻고 싶었다.하지만 예원은 끝내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자신이 무심코 던진 질문 하나가 간신히 잠든 그를 다시 서늘한 불면의 늪으로 끌어내릴지도 모를 일이었다.무엇보다 누군가의 깊고 오래된 상처는, 그것을 발견했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들춰내고 캐물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예원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그리고 얇은 담요 하나를 들고나와 소파에 기대어 잠든 시혁의 어깨 위로 조심스럽게 덮어주었다.너무 밝은 듯했던 간접 조명 하나도 가장 낮은 조도로 낮췄다.거창한 간호나 특별한 위로는 아니었다.그저 무방비하게 드러난 그의 취약한 틈새가 너무 차갑게 식지 않도록 하는 아주 작은 보폭의 행동뿐이었다.예원은 다시 소파 반대편에 조용히 몸을 뉘었다.혼자 침실로 돌아가 편히 누울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가 있는 공간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다.그저 이렇게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그가 온전히 휴식할 수 있기를 바랐다.어느덧 고르게 이어지는 시혁의 숨소리를 들으며, 예원 역시 그 고요한 리듬에 맞춰 천천히 눈을 감았다.창밖으로 옅은 아침빛이 스며들기 시작할 무렵, 예원은 얕은 잠에서 깨어났다.천천히 눈을 뜨자 헝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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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그 남자 때문이야?

휴대전화 화면 위로 짧게 떠올랐던 메시지를 확인한 지 불과 몇 시간이 지나 있었다.예원은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의 온기를 손끝으로 느끼며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회사 근처에서 조금 떨어진, 인적이 드문 조용한 라운지 카페.차재헌과 마주 앉은 이 낯선 공간에는 두 사람의 과거를 상기시킬 낡은 추억도, 부부라는 이름의 끈적한 흔적도 묻어 있지 않았다.그저 완벽하게 건조하고 중립적인 공기만이 두 사람 사이를 차갑게 채우고 있을 뿐이었다.전날 밤 그 단정한 남자의 공간에서 느꼈던 고요하고 안전한 온기와는 너무도 선명하게 대비되는 온도였다.맞은편에 앉은 재헌은 예원이 도착해 자리에 앉은 순간부터 꽤 오랜 시간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녀의 얼굴을 집요하게 관찰하고 있었다.예원은 그 불편하고 무거운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면서도 굳이 먼저 입을 열어 침묵의 무게를 덜어내려 하지 않았다.과거의 예원이라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예전 같았다면 그의 미간이 조금만 좁혀져도 혹시 자신이 무언가 거슬리는 행동을 한 것은 아닌지 불안해하며 먼저 대화의 물꼬를 트려 애썼을 것이다.차재헌의 차가운 표정과 침묵은 언제나 예원의 숨을 틀어막는 보이지 않는 족쇄와 같았다.하지만 지금의 예원은 완벽하게 달랐다.그의 굳은 표정을 눈앞에 두고도 심장이 덜컥거리거나 손끝이 차가워지는 초조함은 이제 한 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먼저 팽팽한 긴장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연 쪽은 오히려 재헌이었다."왜 보자고 했어."예원의 무덤덤한 물음에 질책하듯 쏟아내는 재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결 거칠었다."당신 요즘 왜 그래.""뭐가.""모르는 척하지 마.왜 이렇게 달라졌어."재헌의 시선이 예원의 얼굴에서 미끄러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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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못 놓은 것 같아요

차재헌이 쏟아낸 마지막 질문 위로 무거운 정적이 오간 뒤, 예원은 그가 원하는 어떤 답도 쥐여주지 않은 채 자리를 일어섰다.재헌의 날 선 질투와 초조함이 허공을 맴돌았지만, 그 서늘한 대치가 예원의 일상을 뒤흔들지는 못했다.오히려 그날 이후 예원의 고요한 일상에 작은 파문을 던진 것은 재헌이 아니라 진혜린이었다.[시간 되면 잠깐 볼 수 있을까요?]혜린이 먼저 보내온 연락이었다.굳이 만남을 피할 이유가 없었던 예원은 퇴근 후 조용한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도심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한적한 공간.두 사람이 다른 누구의 개입 없이 단독으로 마주 앉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처음 만났을 때 두 사람 사이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던 묘한 경계심은 전보다 조금 옅어져 있었지만, 그렇다고 사적인 친밀감이 생긴 것은 결코 아니었다.예원은 맞은편에 앉은 혜린을 가만히 응시했다.이 여자를 미워하거나 원망하는 감정은 이미 예원의 안에서 깨끗하게 증발한 지 오래였다.그저 같은 남자에게 얽혀 있으면서도 더 이상 서로를 감정적으로 적대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기묘한 거리감이 넓은 테이블 위를 채웠다.예원은 지금 이 자리가 진혜린이 자신을 몰아내기 위해 억지로 꾸며낸 질투의 장이 아니라는 것쯤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혜린은 주문한 차가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탁자 위의 찻잔만 가만히 응시했다.무언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서도 선뜻 입을 떼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길어지는 정적을 깬 것은 혜린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요즘 재헌 씨가, 당신 얘기를 해요."예원은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혜린을 마주 보았다.혜린이 예원의 눈치를 살피며 그녀를 도발하려는 투는 아니었다.그저 자신이 마주한 현실의 낯선 조각을 예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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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당신이 서명했잖아

며칠 전 예원이 끝내 대답하지 않고 일어섰던 그 질문을 재헌은 다시 꺼내 들었다.연락은 예상보다 훨씬 빨랐고, 만나자는 문장은 아주 짧았지만 재촉하듯 두 번이나 거듭 이어졌다.예원은 그가 다시 만남을 요구해왔을 때 굳이 핑계를 대며 피하거나 회피하지 않았다.재헌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이제는 그 질투와 감정의 소용돌이 바깥에 명확한 현실의 선을 그어야 할 때였기 때문이다.다시 마주 앉은 재헌의 얼굴은 전보다 한층 더 굳어 있었다.자리에 앉자마자 그가 서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먼저 입을 열었다."그때 내 질문, 아직 대답 안 했어."명백한 추궁이었다.그러나 예원은 예전처럼 그의 기세에 밀려 변명을 찾거나 시선을 내리깔지 않았다."알아."예원의 너무도 담담한 긍정에 재헌의 미간이 일그러졌다."그런데?"예원은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가방 안쪽에서 얇은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 위로 밀어 놓았다.안에서 나온 것은 두 사람이 결혼 생활의 휴지기를 두고 합의했던 계약서의 사본이었다.익숙한 서류의 형태를 확인한 재헌의 시선이 빠르게 차가워졌다."이게 뭐 하는 짓이야.""당신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이걸 다시 확인하는 게 먼저인 것 같아서."예원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에 재헌은 굳은 얼굴로 테이블 위의 계약서를 노려보았다.예원은 천천히 손을 뻗어 첫 장의 중간쯤에 자리한 조항 하나를 손끝으로 짚었다."제3조. 상대방의 사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재헌의 턱 근육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예원의 손끝이 아주 조금 아래로 내려갔다."제4조. 상호 외부 교제를 제한하지 않는다."그리고 마침내 가장 아래에 적힌 조항 위에 예원의 손끝이 멈췄다."제5조. 교제 상대를 조사하거나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예원은 계약서 위에 손끝을 그대로 둔 채 잠시 숨을 골랐다.이 종이 한 장이 두 사람의 혼인 자체를 끝낸 것은 아니었다.법적으로는 아직 부부였다.그렇다고 해서 별거 기간 동안 서로의 사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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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만나지 않는 대신

구겨진 계약서 위에 재헌의 커다란 손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팽팽하게 당겨진 정적 속에서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한동안 서명란 위를 짓누르듯 손끝에 힘을 주고 있던 그가 마침내 낮고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권시혁 연락처 줘."당장이라도 무언가를 부숴버릴 듯 위태로웠던 조금 전과는 달리, 이상하리만큼 차분하게 가라앉은 음성이었다.예원의 눈썹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왜.""직접 만나서 확인할 게 있으니까.""방금 당신 눈으로 읽었잖아.""뭘.""제5조.교제 상대를 조사하거나 직접 접촉하지 않는다."재헌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흉하게 구겨져 있는 계약서의 끝자락으로 다시금 툭 떨어졌다.이 얄팍한 종이 한 장이 자신을 가로막고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다는 듯 그의 턱 근육이 팽팽하게 굳어졌다.그가 천천히 품 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재헌의 엄지손가락이 주소록 위를 배회하다 허공에서 멈췄다.그의 시야 가장자리에는 여전히 구겨진 계약서가, 그리고 자신이 직접 썼던 서명이 노골적으로 자리하고 있었다.재헌의 턱이 다시 한번 굳어졌다 풀리기를 반복했다.그가 마침내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로 거칠게 내려놓았다.화면은 아직 주소록 첫 화면에 머물러 있었다.재헌은 손을 떼고도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봤다.손끝이 테이블 위를 두어 번 불규칙하게 두드렸다.그러다 구겨진 계약서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제5조의 문장은 종이의 주름 사이에서도 어렵지 않게 읽혔다."연락만 안 하면 되는 건가."예원의 시선이 즉시 재헌에게 꽂혔다."조사도 안 된다고 적혀 있어.""알아."짧게 대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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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어디까지 갔어?

화면 위로 떠오른 권시혁의 경력과 프로젝트 목록들은 더없이 건조하고 공적이었다.두 사람 사이의 사적인 틈새를 증명할 만한 단서나 파편 같은 것은 당연히 그 안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재헌의 손가락이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몇 번 더 화면을 쓸어내렸다.그러나 이내 그 의미 없는 움직임마저 완전히 멈춰 섰다.재헌은 더 이상 화면을 보지 않았다.꺼진 휴대전화 대신 예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한 채, 이전보다 짧아진 질문을 던졌다."루센 때문에 처음 알게 된 거야?""아니."재헌의 미간이 눈에 띄게 일그러졌다.방금까지 테이블 위에 엎어 두었던 휴대전화 쪽으로 그의 시선이 잠깐 흘렀다가 다시 예원에게 돌아왔다."그전부터 알았다고?""응.""처음부터 사적으로 만난 거야?"예원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재헌을 응시했다."처음이 언제였는지가 그렇게 중요해?""중요해.""왜."재헌의 입술이 굳었다.곧바로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업무 때문이 아니어도, 따로 만났어?"예원은 굳이 거짓말을 하거나 말을 돌리지 않았다."그래.""……지금도 계속 만나?""응."아주 짧고 간결한 긍정이 떨어질 때마다 재헌이 고개를 아주 조금 뒤로 젖혔다.짧은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그의 입술이 얇게 굳어졌다."얼마나 자주.""그것까지 말해야 해?""문예원.""내가 몇 번 만났는지 세어서 당신한테 보고할 생각은 없어."예원은 재헌의 얼굴을 잠시 바라봤다.질문은 하나씩 짧아지고 있었지만, 그가 알고 싶어 하는 것은 오히려 점점 선명해지고
last updateآخر تحديث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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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정확히 물어

"그 남자랑 어디까지 갔어?"재헌의 질문이 무겁게 떨어지고 난 뒤에도 예원은 곧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어디까지.'그 애매하고도 방어적인 단어 하나가 팽팽한 정적이 내려앉은 두 사람 사이에 오래도록 걸려 있었다.예원에게는 그 애매한 표현이 도피처럼 들렸다.조금 전까지 그렇게 집요하게 답을 요구하던 사람이 정작 마지막 질문만큼은 정확한 말로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예원은 그 흐릿한 표현을 대신 해석해주거나, 재헌이 듣기 편한 형태로 답을 내어줄 생각이 없었다."어디까지라는 게 무슨 뜻이야.""무슨 뜻인지 알잖아."재헌이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예원의 눈빛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아니.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정확히 물어."예원의 요구가 떨어지자 재헌의 입술이 순간 굳어졌다.예원은 물러서지 않았다.애매한 표현으로 시작한 질문이라면, 끝까지 그가 직접 책임져야 했다.방금 전까지는 질문이 거의 끊기지 않았다.언제 알았는지, 따로 만났는지, 지금도 만나는지.재헌은 답을 얻을 때마다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그런데 정작 마지막 한 문장 앞에서는 입을 열지 못했다.예원은 그 침묵을 대신 채워주지 않았다.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둔 채 그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다.이번만큼은 재헌 자신이 무엇을 알고 싶은지 정확히 말해야 했다.재헌의 목울대가 한 차례 크게 움직였다.그의 시선이 예원의 얼굴에서 잠시 떨어졌다가, 이내 고통스럽게 돌아왔다.테이블 가장자리를 짚은 그의 손끝에 하얗게 피가 가실 정도로 강한 힘이 들어갔다.무언가를 말하려다 숨을 삼키기를 몇 번.마침내 재헌의 입술이 열렸다.지금까지의 어떤 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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