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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제121화 알고 난 뒤

"아니요."시혁의 대답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분명했다."처음 만났을 때는 예원 씨가 누구인지 몰랐습니다."예원은 시혁을 마주 보았다.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첫 만남이 계획된 일이 아니라는 말을 믿고 싶었다.하지만 그날 이후의 일은 별개였다."그럼 언제 알았어요?""그날 만난 뒤입니다.""그 말은 전에도 들었어요."예원의 목소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었다.과거에 들었던 반쪽짜리 진실이 아니라, 그가 의도적으로 잘라냈던 이면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예원 씨가 차재헌의 아내라는 걸 그 이후에 확인했습니다.""그것도 알아요.시혁 씨가 차재헌과 관련된 과거 사건을 쫓고 있었다는 것도요."예원은 시혁을 향해 한 걸음 다가서며 날카롭게 물었다."그래서 제 이름까지 함께 확인해서 적어둔 거예요?""……네.""그럼 그 기록은 루센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만든 업무 자료가 아니네요.""아닙니다.""제 개인적인 조사 자료입니다."그의 확고한 대답에 예원의 가슴 속에서 차가운 불씨가 타올랐다."누가 지시하거나 부탁해서 제 이름을 적어 넣은 건 아니죠?""아닙니다.""시혁 씨가 직접 판단해서 남긴 거잖아요.""맞습니다."시혁은 피하지 않고 예원의 시선을 온전히 받아냈다."그럼 그 판단에 대해서도 저한테 제대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시혁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그는 입술을 뗐지만, 당장 예원이 원하는 그럴듯한 변명을 쏟아내지는 않았다."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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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2화 생각한 순간

"제가 어떤 생각까지 했는지, 예원 씨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습니다."시혁은 예원의 눈을 마주했다."말했어야 한다는 건 압니다.그런데 그때는 제 판단이 어떤 의미였는지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어떤 판단이었는데요?""예원 씨를 만나고 나서, 차재헌과의 관계를 확인했을 때 했던 생각입니다."예원은 숨을 죽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시혁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가장 불리한 진실을 꺼내놓았다."예원 씨가 차재헌의 아내라는 걸 알고 나서……."시혁이 말을 골랐다."예원 씨를 통해 그 사람에게 닿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문서에 적혀 있던 활자의 의미가 비로소 명확해지는 순간이었다.예원의 손끝이 멈췄다."저를 통해서요?""네.""차재헌에게 접근하려고요?""그럴 가능성을 생각했습니다."머릿속이 기분 나쁘게 윙윙거렸다.그가 남긴 기록의 틈새로 짐작만 하던 불안이 완벽한 실체가 되어 날아들었다."그래서 저한테 가까워진 거예요?""아닙니다.""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시혁은 책상에서 손을 떼었다."그 가능성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습니다. 예원 씨에게 차재헌의 정보를 요구한 적도 없고, 우리 관계를 이용해서 그 사람에게 접근한 일도 없습니다.""그건 저도 알아요. 적어도 제가 아는 동안에는요.""믿기 어렵다는 것도 압니다.""지금 제가 알고 싶은 건 그 말을 믿어달라는 건지, 사실을 인정하는 건지예요."시혁은 실제로 이용하지 않았다고 말했다.예원이 확인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그러나 그런 가능성을 생각했다는 고백만큼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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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3화. 찾지 않았다면

시혁은 더 이상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지 않았다.예원은 그가 서 있는 자리와 자신 사이의 거리를 바라보았다.처음부터 자신을 복수의 도구로 삼으려고 다가온 것은 아니라는 그의 말을 믿고 싶었다.생각했던 것과 실제로 행동한 것이 다르다는 사실도 이해했다.그러나 한 가지는 아직 묻지 못했다.과연 자신이 그 기록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그래서 이 문을 열고 직접 묻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시혁 씨.""말씀하세요.""저는 오늘 자료실에 갔어요. 그리고 제 이름이 적힌 기록을 봤죠.""……네.""그래서 여기까지 와서 물었어요."예원은 잠시 말을 멈췄다."시혁 씨가 먼저 얘기한 건 아니잖아요.""맞습니다.""예전에 제가 더 알아본 게 있느냐고 물었을 때도 말하지 않았죠.""그랬습니다.""그때는 제가 더 묻지 않아서 멈췄어요."예원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런데 오늘은 제가 기록을 직접 찾아냈기 때문에 들은 거예요."예원은 더는 지난 일을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남은 질문은 하나였다."내가 안 찾았으면 말했어요?"시혁은 입을 열었다.그러나 대답은 나오지 않았다.예원은 시선을 피하지 않고 기다렸다.예전에 질문을 접었던 때와 달리, 이번에는 먼저 물러서지 않았다.긴 침묵이 대표실의 공기를 무겁게 내리눌렀다.끝내 그의 입에서 대답은 흘러나오지 않았다.예원은 그 침묵을 자백으로 단정하지 않았다.언젠가는 시혁이 스스로 진실을 털어놓았을지도 몰랐다.그러나 그렇게 했으리라고 믿을 근거는 없었다.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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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4화 넘지 않는 선

예원의 단호한 선언이 대표실의 무거운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시혁은 예원을 바라보았다.그녀가 말을 마친 뒤에도 한동안 조금의 미동조차 없었다."예원 씨."언제나 다정했던 익숙한 목소리였다.예원은 그가 사소하게 이름을 부르는 깊고 나직한 방식까지 모두 알고 있었다.하지만 이번에는 그 목소리의 온기에 흔들리거나 기대고 싶지 않았다."제 말, 들었죠?""들었습니다."담담하지만 묵직한 대답이었다.그는 웃어넘기거나 말을 돌리지 않았다."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예원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그를 마주했다."알고 있습니다.""나중에 제 감정이 가라앉고 괜찮아지면,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약속도 아니고요.""예원 씨가 그런 약속을 한 적 없다는 것도 압니다.""그러니까 저한테 기다려달라고 말씀드릴 수도 없어요."시혁은 다시 묻지 않았다.예원은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이 아니었다.두 사람이 이어 온 사적인 관계를 오늘 끝내겠다는 뜻이었다."앞으로 개인적으로 연락하지 않았으면 해요."시혁은 예원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업무 때문에 연락할 일이 생겨도 제 개인 번호로는 하지 말아주세요. 필요한 일이라면 회사의 공식적인 경로로 전달해 주세요.""그렇게 하겠습니다."예원은 쥐고 있던 손을 내려다보았다.언제든 시혁에게 사소한 안부를 전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그 연락을 멈출 차례였다.그녀는 손을 천천히 펴고 책상 위의 서류를 바라보았다."루센에 관한 일은 제 자리로 돌아가서 판단할게요. 지금 감정적인 상태에서 여기서 결정할 문제는 아니니까요.""예원 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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