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를 다시 탐하기 시작했다: Chapter 141 - Chapter 150

211 Chapters

142. 미래 씨가 처음이에요

수화기 너머의 진희는 미래의 다급하고도 위태로운 기색을 단번에 알아챈 듯했다."……무슨 일 있어요, 미래 씨?"진희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조심스러운 배려가 묻어 있었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미래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자신을 찾는지, 그 깊이를 짐작한 듯했다."일단, 조심히 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전화가 끊긴 뒤, 미래는 핸들을 꽉 쥐었다. 엄마의 칼날 같은 독설도, 세상의 멸시도 이제는 두렵지 않았다. 오직 진희가 있는 그곳으로,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어둠을 뚫고 달려가고 있었다.진희는 탕에서 나와 가운을 걸치고 대충 물기를 닦아냈다. 그가 와인을 마시며 미래를 기다리는 동안, 제주의 밤은 깊어갔다. 진희는 시계를 힐끗 보며 초조함과 설렘이 뒤섞인 채 거실에 머물렀다.얼마 지나지 않아, 정적을 깨는 맑은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띵동.'진희가 서둘러 문을 열자, 그곳에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한 미래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문이 열리자마자 마치 부서지기 쉬운 꽃잎이라도 된 듯, 진희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미래 씨……."진희는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부르며, 떨리는 그녀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미래는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는 소리 죽여 흐느꼈다. 긴장이 풀리면서, 참았던 울음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진희는 그녀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조심스럽게 쓸어 넘기며, 그녀가 안고 온 슬픔과 불안까지 온전히 자신의 품 안으로 받아냈다.그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그가 얼마나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온몸으로 말해주듯 묵묵히 그녀를 안고 있을 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엄마와 겪었던 그 숨 막히는 대립도, 세상으로부터 도망쳐온 이 절박한 순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오직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이 공간에서, 미래는 비로소 긴 호흡을 내뱉으며 진희의 품 안에서 안정을 찾아가고 있었다.미래의 울음이 잦아들고, 헐떡이던 숨소리가 조금씩 고요해졌다. 진희는 품에서 그녀를 살며시 떼어내어 얼굴을 살폈다. 젖은 눈가와 발그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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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마지막인 것처럼

진희는 매듭이 풀린 가운의 양 끝을 조심스럽게 펼쳤다.하얀 가운 사이로 미래의 가슴이 드러났다. 은은한 조명 아래, 그 하얀 곡선은 숨을 쉴 때마다 가늘게 오르내렸다. 진희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미래의 눈을 마주했다.미래도 그 눈을 피하지 않았다. 부끄러움과 설렘이 뒤섞인 눈빛이 그의 시선 끝에서 떨렸다.진희는 몸을 기울여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이어서 감긴 눈꺼풀 위에, 한쪽 눈에 한 번, 다른 쪽 눈에 또 한 번.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녀의 입술 위에 오래 머물렀다. 서두르지 않는, 하나하나 새겨 넣듯 다정한 입맞춤이었다.입술을 뗀 진희가 다시 미래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을 놓지 않은 채, 그의 손이 그녀의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손바닥 안에서 따뜻한 곡선을 천천히 어루만지던 그가 고개를 숙여, 그 정점을 입술로 머금었다.미래의 입에서 옅은 숨이 새어 나왔다. 진희는 입술과 혀끝으로 그녀를 천천히 애무하다가, 중간중간 고개를 들어 그녀의 얼굴을 확인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미래의 볼이 더 붉게 달아올랐고, 그럴 때마다 진희는 더 깊이, 더 정성스럽게 그녀를 머금었다.이윽고 그의 입술이 가슴을 떠나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명치를 지나, 떨리는 배를 지나, 더 아래로. 미래가 숨을 삼키며 그를 내려다보았지만, 진희는 멈추지 않았다.처음이었다. 그가 그녀의 가장 은밀한 곳에 입술을 내린 것은.닿는 순간, 미래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 그녀는 양손으로 침대 시트를 움켜쥐었다. 서두르지 않는, 그러나 한 치도 물러서지 않는 그의 입맞춤이 그녀를 끝없이 밀어 올렸다."아…… 헉…… 진희 씨……."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마저 끊어질 듯 떨렸다. 아득한 파도가 몇 번이고 그녀를 덮쳤다가 더 높이 들어 올렸다. 숨이 막혔다. 너무 좋아서, 이대로 정신을 놓아버릴 것만 같았다."진희 씨…… 잠깐만…… 나, 더는……."미래는 헐떡이며 그의 머리를 살며시 끌어올렸다. 더 받아낼 수가 없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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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다 아는 엄마에게, 남편과 함께

오전 7시, 뒤늦게 잠에서 깬 미래는 빈자리의 서늘함에 눈을 떴다. 옆에 놓인 메모를 발견한 순간, 그녀는 꾹 참아왔던 현실을 받아들였다. 엄마가 경고했던 그 차가운 현실로,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녀는 고통스럽게 다짐했다.무거운 몸을 이끌고 들어간 욕실에서 미래는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진희의 다정한 손길로 미래가 사용하기 편하도록 가지런히 정리된 샴푸와 바디 용품들, 그 사소한 흔적들이 그녀의 마음을 난도질했다.그녀는 샤워기를 틀어 따뜻한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았다. 쏟아지는 물방울이 그녀의 가느다란 목선을 타고 흘러내렸다. 물기를 머금어 투명하게 빛나는 그녀의 살결은 더없이 고귀했다. 물방울이 맺혀 톡 떨어질 듯 풍만하게 솟아오른 가슴과 그 아래로 이어지는 잘록한 허리, 그리고 부드럽게 굴곡진 골반과 탄탄한 힙라인은 마치 빚어놓은 조각상처럼 완벽하고도 아름다웠다.흐르는 물과 뒤섞인 눈물로 범벅이 된 미래의 얼굴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빛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마지막 밤을 뒤로하고 이별을 감내해야 하는 여자의 비극적인 아름다움이, 욕실을 가득 채운 수증기 속에서 서글프게 피어나고 있었다.이 사람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과, 이 사랑을 계속 이어갈 수 없다는 것.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진실이라는 걸, 미래는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미래는 씻고 나와 마지막으로 방을 한번 둘러본 뒤, 호텔을 나섰다. 아난티까지는 차로 한 시간 반 남짓 걸렸다. 섬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그 길 내내, 미래는 아무 말 없이 운전대만 잡고 있었다.콘도에 도착해 문을 열자, 성웅과 진원의 짐이 여기저기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골프화, 젖은 수건, 아무렇게나 벗어둔 옷가지들.미래는 조용히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성웅의 것, 진원의 것, 자신의 것을 하나씩 구분해 캐리어에 챙겨 넣었다. 씻고 갈아입고 바로 나갈 수 있도록, 흐트러짐 없이 완벽하게.정리를 마친 뒤, 미래는 옷장에서 성웅이 사준 새 원피스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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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너 똑바로 해

모든 걸 꿰뚫어 본 듯한 그 눈앞에, 성웅과 나란히 서야 한다니. 하지만 성웅은 이미 장모님께 드릴 것까지 다 준비해 둔 뒤였다. 거절할 명분은 어디에도 없었다."네, 알겠어요."방으로 들어가 전화를 걸었다."엄마.""미래야, 잘 도착했니?" 엄마의 목소리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태연했다. 성웅과 함께 있을 시간대라는 걸 눈치챈 듯, 어젯밤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엄마, 그이가 엄마네 집에 잠깐 들르자고 하는데, 시간 돼?""그럼, 이따 몇 시쯤 올 건데?""서너 시쯤 될 것 같아. 출발할 때 전화할게."전화를 끊으려는 찰나, 옆에 있던 진원이 불쑥 소리쳤다."할머니!""그래, 진원아. 우리 새끼, 이따 와~" 엄마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다정해졌다.전화를 끊고 나오자, 성웅이 미안한 얼굴로 다가왔다."미래야, 미안한데 점심은 진원이랑 둘이 먹어야 할 것 같아. 수요일 미팅 있다고 했잖아, 그거 점심 미팅으로 잠깐 보고만 받으면 되는데 같이 식사하기로 했거든. 지금 12시 반쯤이니까, 2시 반쯤엔 끝날 것 같고. 장모님댁 가면 4시쯤 될 거야. 괜찮지?""네, 알겠어요."성웅이 그제야 미래를 새삼 훑어보며 웃었다."어? 새 옷 입었네?"그가 다가와 미래를 꼭 안았다. 그러고는 장난스럽게 볼을 살짝 꼬집었다.미래는 순간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어젯밤 진희의 품에 안겨 있던 감각이 아직 몸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녀는 서둘러 그의 품에서 몸을 빼냈다."저, 짐 마저 확인할게요."미래는 진원과 둘이 점심을 먹었다. 진원은 그동안 아빠와 골프 치며 있었던 일들을 끊임없이 조잘거렸다."엄마, 아빠가 그러는데 스윙할 때 힘을 빼는 게 제일 어렵대. 근데 아빠는 진짜 자연스럽게 하더라? 나도 그렇게 하고 싶은데 자꾸 힘이 들어가."미래는 머릿속이 다른 생각으로 가득했지만, 열심히 듣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그랬어? 그래서 어떻게 했어?""아빠가 계속 알려줬어. 근데 진짜 신기한 게, 아빠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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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얼어붙은 엘리베이터

미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진원아, 아빠! 그만 가야지!" 엄마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우아한 목소리로 마당을 향해 외쳤다.세 사람은 그렇게 인사를 나누고 차에 올랐다. 백미러로 비친 엄마는, 마지막까지 우아하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김포공항에 도착하자, 박기사가 미리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싣고 차에 오르자, 성웅이 문득 물었다."참, 서윤이 시험은 잘 보고 있대?""잘 보고 있어요." 미래가 대답했다. "지금 수학이랑 국어 봤고, 오늘은 과학 봤을 거예요. 수학이랑 국어는 잘 봐서 1등급은 무난할 것 같은데, 봐야죠.""작년에 보낼걸 그랬나." 성웅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서윤이 여기서 중간, 기말 다 보게 하느라 너무 고생시켰네.""서윤이가 여기서 중간, 기말 경험해보고 싶다고 해서 그랬죠, 뭐.""그래, 우리 서윤이는 좀 고생을 즐기는 편이라." 성웅이 기특하다는 듯 웃었다. "미국 가면 적응 잘할 거야."뒷좌석에서 쿨쿨 자던 진원이 코를 골기 시작했다. 성웅과 미래는 동시에 그 소리에 웃음을 터뜨렸다."완전히 뻗었네." 성웅이 웃으며 말했다.미래도 웃었다. 하지만 그 웃음도 잠시, 그녀는 이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서울의 야경을 바라보며, 미래의 머릿속엔 어제 진희의 품에 안겨 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의 체온, 그의 목소리. 그리고 그 위로 곧바로 엄마의 말들이 겹쳐졌다. '너 이렇게 잘난 남편을 두고.' '네 그 잘난 사모님 자리.'두 개의 기억이 동시에 밀려오자, 미래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그녀는 창문에 이마를 살짝 기댄 채, 애써 눈을 깜빡였다. 눈물이 차오르는 걸 성웅에게 들키지 않으려, 미래는 그저 창밖의 불빛들만 오래도록 바라봤다.어느덧 차가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박기사의 도움으로 골프채 두 세트와 캐리어 세 개, 그리고 샤넬 쇼핑백까지 가득 실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띵, 로비층에서 문이 열렸다.수연과 진희가 타려고 서 있었다.미래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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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 형의 눈

집에 도착하자, 정례가 반갑게 맞았다."어머, 잘 다녀오셨어요!""이모!" 진원이 냉큼 정례 품에 안겼다. "이모, 애플망고로 빙수 해줘요!""진원아." 성웅이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아들을 불렀다. "네 짐 정리는 네가 다 해야 해. 이모한테 부탁하지 말고. 빨래 다 내놓고, 알겠지?""응, 알겠어!""이모가 빨리 만들어줄게." 정례가 웃으며 진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유 얼린 거 없으니까, 요거트 아이스크림으로 해도 되지?""좋아요!"정례와 진원이 주방으로 향하는 동안, 미래는 성웅의 캐리어를 열어 빨랫감을 꺼내 바구니에 담았다. 성웅은 거실 한쪽에서 골프채를 정리하고 있었다.집으로 돌아온 것뿐인데, 모든 게 다시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성웅 씨, 뭐 드릴까요?" 미래가 물었다. "우리 저녁으로 햄버거만 먹었는데, 괜찮겠어요?""집에 라면 있어?" 성웅이 골프채를 세우며 물었다. "오랜만에 라면이나 먹을까."그 말을 들은 진원이 안방으로 뛰어 들어왔다."와, 아빠! 나 신라면 먹을래!""진원아." 성웅이 조용히 아들을 불렀다. "안방 들어올 때 뭐 하라고 했지?""어? 근데 문이 열려 있었잖아." 진원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문이 열려 있어도 노크하는 거야." 성웅이 자상하게 알려줬다. "누가 안에 있을지 모르니까, 열려 있어도 꼭 노크하고 들어와야 해.""아, 알겠어!" 진원이 밝게 대답하고는 다시 뛰쳐나갔다. "이모! 신라면 있어요?"성웅이 그런 진원의 뒷모습을 보며 웃다가, 짐을 정리하던 미래에게 다가와 뒤에서 가만히 안았다."집이 제일 좋다."그 순간, 미래는 제주에서의 시간들이 마치 거품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집에 왔고, 짐을 풀었고, 성웅의 익숙한 손길이 다시 닿아 있었다.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미래는 문득 궁금해졌다. 드레스룸 거울 앞에 섰다.거울 속 얼굴은 낯설 만큼 평온해 보였다.미래는 그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며,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엄마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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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등 뒤로 맞잡은 손

밥그릇이 다 비워질 때쯤, 수연이 냉장고 쪽을 흘깃 보며 물었다."자기야, 맥주 있어?"진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야채 칸까지 뒤적여봤지만 손에 잡히는 건 없었다."없네. 어제 마신 게 마지막이었나 보다.""아, 진짜?" 수연이 아쉬운 듯 입을 삐죽였다. "나 오늘 하루 종일 서서 진료 봤더니 맥주 한 캔이 그렇게 간절하네.""내가 다녀올게." 진수가 말했다."아니야, 자기야." 수연이 손사래를 치며 먼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가 다녀올게. 내가 마시고 싶은 걸로 골라야지."규리가 그 말을 듣자마자 식탁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엄마! 나도! 나도 아이스크림 내가 고를래!""어이구, 그래그래." 수연이 규리 손을 잡으며 웃었다. "그럼 같이 가자."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집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식탁에는 진희와 진수, 둘만 남았다.진수가 다시 자리에 앉아 규리의 문제집을 덮으며, 별일 아니라는 듯 툭 물었다."진희야. 너 요즘 고민스러운 일 있어?""별일 없는데?" 진희가 물컵을 들며 대답했다. 목소리는 평소와 다르지 않았지만, 물을 마시는 타이밍이 미묘하게 한 박자 빨랐다."아까 그 아가씨." 진수가 아무렇지 않은 투로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이야? 나이는? 뭐 하는 사람이고?"질문을 던지면서도 진수의 눈은 진희의 표정을 놓치지 않고 살피고 있었다. 오랜 직업병이었다. 말보다 먼저 반응이 나온다는 걸, 그는 매일 진료실에서 확인하는 사람이었다."그냥…… 좋은 사람이에요." 진희가 컵을 내려놓으며 살짝 웃었다.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웃음이었다. 나이도, 직업도, 이름도, 그 입에서 끝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흐음." 진수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거면, 한번 데리고 와. 나도 얼굴 보고 싶다.""아직 그 정도는 아니에요." 진희가 시선을 살짝 내리며 답했다.진수는 동생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여섯 살 터울, 늘 형이라기보다 보호자에 가까운 마음으로 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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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내일 11시

미래는 본능적으로, 그리고 번개처럼 진희의 손을 낚아채듯 놓아버리고는 엘리베이터 문 쪽으로 성큼 걸어 나왔다.민서맘은 엘리베이터 안쪽의 진희를 미처 확인하기 전, 환하게 웃으며 미래에게 인사를 건넸다."어머, 진원 어머니?"미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숨기며 입꼬리를 올렸다."안녕하세요, 민서 어머니."그제야 민서맘의 시선이 미래의 뒤에 서 있는 진희에게로 향했다. 민서맘의 눈이 미세하게 가늘어졌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지난번 호텔 수영장에서 목격했던 두 사람의 묘하게 다정했던 분위기가 스쳐 지나갔다. '어? 저번에도 둘이 같이 있더니, 오늘도?' 라는 의심의 불씨가 그녀의 눈동자에서 일렁였다.민서맘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그러나 뼈가 있는 목소리로 진희에게 눈을 맞췄다."어머, 유 원장님도 안녕하세요~?"진희는 조금의 당황함도 없이, 마치 진료실에서 환자를 대하는 듯 완벽하고 정중한 가면을 썼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낮고 정돈된 목소리로 답했다."안녕하세요."민서맘의 의심은 좀처럼 가시지 않는 듯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면서도, 진희를 향해 툭 던지듯 물었다."어머, 근데 두 분이 같이 타고 내려오신 거예요?" 민서맘은 애써 별생각 없다는 듯 물었지만, 그 말투 안에는 은근한 호기심이 섞여 있었다. "저번에 수영장에서도 그렇고, 두 분 자주 마주치시나 봐요?"그 짧은 순간, 미래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진희의 대답 하나에 이 모든 비밀이 탄로 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진희는 태연했다."아, 여기에는 가족이 살고 있어서요."그의 대답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매끄러웠다. 가족이 산다는 말 한마디에 민서맘의 의심 가득했던 눈빛에서 긴장이 툭 풀렸다."아~~ 그러시구나! 저는 또 두 분이 어떻게 또 같이 계시나 했죠~."민서맘은 하하 웃으며 층 버튼을 눌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찰나, 그녀는 미래를 향해 가벼운 목례를 건넸다."그럼 들어가세요~!"문이 완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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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 그 엄마의 그 딸

진희가 조수석에서 내리고, 미래는 서윤을 데리러 대치사거리로 향했다. 빽빽하게 늘어선 학원가 차량들 사이에서 미래는 멍하니 핸들을 잡았다. 방금 전 진희가 자신의 눈가에 입을 맞추던 그 아찔하고도 서늘한 감각이 뺨 위를 맴돌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진희와의 만남이 너무나 비현실적인 환상처럼 느껴지는 동안, 현실의 미래는 대치사거리 한복판에 멈춰 선, 딸의 픽업을 기다리는 평범한 엄마였다.잠시 후, 학원 문을 열고 나온 서윤이 피곤에 찌든 얼굴로 조수석에 올라탔다."엄마, 나 오늘도 밤새야 해. 오늘 과학은 그저 그랬는데 내일 영어 지문이 무려 100개거든. 아, 진짜 기본 실력으로 봐야 하나? 지금 80개 외웠는데 남은 거 생각하면 벌써 토 나올 것 같아."서윤은 쉴 새 없이 징징거렸다. 하지만 미래는 그 투정이 서윤만의 치열한 삶의 방식임을 잘 알았다. 서윤은 늘 불안해하면서도 막상 시험대에 서면 평상시보다 훨씬 뛰어난 성적을 거두곤 했다. 미래는 딸의 고단함을 묵묵히 껴안으며 다정하게 공감해주었다.집에 도착하자 성웅이 현관까지 나와 반겼다."우리 딸, 엄마 아빠 없이 사흘 동안 혼자 기말고사 치르느라 정말 고생 많았어."성웅은 서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러나 서윤은 피곤한 듯 고개를 저었다."아빠, 나 오늘도 밤새야 해. 제주도 이야기는 나중에 해줘. 엄마, 나 아이스커피 한 잔만 해줘."미래는 말없이 주방으로 가 정성껏 얼음을 채운 아이스커피를 챙겨 서윤의 방으로 들어갔다."서윤아, 엄마가 옆에 있어줄까?"서윤은 공부에 집중하려다 말고 엄마를 올려다보았다."엄마, 나 혼자 해도 되는데... 엄마 안 피곤해?"미래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했다. 엄마 없이 혼자 사흘 밤을 지새우게 한 미안함이 밀려왔다."아니야, 엄마 오늘은 잠을 자더라도 네 옆에 있어 줄게.""그래, 엄마..."서윤은 다시 문제집으로 고개를 돌렸다. 미래는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마쳤다. 향기로운 바디크림을 바르고 부드러운 슬립에 로브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차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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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소름

엄마는 진희를 모른다. 설령 알게 된다 해도, 엄마의 선택은 지금과 다를 리 없었을 것이다. 그 속물 같은 말들이, 끔찍하게도 틀린 구석이 하나 없다는 사실이 미래를 더 절망케 했다.진희라는 사람은 엄마의 세상에선 존재할 이유가 없는 꿈같은 환상일 뿐이다. 엄마의 말대로, 이 견고한 성 안에서 누리는 것들이 곧 자신의 현실이고 정답이다.미래는 눈을 감고 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벽을 향해 돌아누운 그녀의 눈동자 위로, 조금 전 진희가 조수석에서 자신의 눈가를 닦아주던 떨리는 손길이 잔상처럼 맺혔다.미래는 가슴 한가운데서 울컥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억눌렀다. 단순히 자신이 있어야 할 '사모님'이라는 자리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내가 진정으로 두려운 건, 그 사람의 시간을 갉아먹는 일이야.'진희는 이제 막 무르익어가는, 찬란하고 귀한 30대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다. 무엇을 해도 눈부시고 누구를 만나도 당당할 수 있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아름다운 그 계절. 미래는 그 찬란한 시간을 감히 자신이 가질 자격이 없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았다.자신의 옆에 머무는 순간, 진희의 그 빛나던 30대는 오갈 데 없는 그림자가 되어버릴 것이었다. 미래는 그게 더없이 미안하고 아팠다. 진희가 자신을 사랑해주어 얻는 짧은 환희보다, 그가 짊어져야 할 차가운 세상의 시선과 보이지 않는 굴레가 더 무겁게 느껴졌다.'내 욕심 때문에, 당신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을 어둠 속에 가둘 수는 없어.'미래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물을 삼켰다. 진희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진희의 눈부신 내일을 위해서라도 자신은 기꺼이 다시 평범한, 하지만 숨 막히는 일상으로 숨어들어야 했다.서윤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미래는 심장 근처에 맺힌 눈물을 벽면으로 닦아냈다. 진희의 사랑이 너무나 커서 오히려 이별이 그를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 될 것임을, 미래는 온몸이 찢기는 아픔 속에서도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었다.그것은 이기심이 아니었다. 사랑하기에 선택하는, 가장 고독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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