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내를 다시 탐하기 시작했다: Chapter 161 - Chapter 170

211 Chapters

162. 화려하고 도도한

집으로 돌아온 미래는 곧장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성웅의 갑작스러운 호출로 마음이 급했다. 조금 전 들려온 성웅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를 맴돌았다.'오늘 저녁에 부부 동반 모임 있어. 시그니엘에서 식사할 거니까 시간 맞춰서 준비해.'그 말을 떠올리는 순간, 미래의 내면은 순식간에 현실의 톱니바퀴로 전환되었다. 화장을 지우고 다시 공들여 색을 입히는 손길, 헝클어진 머리를 정갈하게 빗어 넘기는 동작 하나하나에 긴장감이 서렸다.그녀는 옷장에서 파란색 원피스를 꺼내 들었다. 지난번 성웅이 미국 출장길에 선물한 것이었다. 민소매 라인을 따라 가슴부터 힙 라인까지 우아하게 잡힌 셔링은 입는 순간 그녀를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게 만들었다.거울 앞에 선 미래는 같은 계열의 쨍한 블루 버킨백을 집어 들었다.'미래야, 넌 파란색 같아. 화려하면서도 도도해 보이거든.'성웅이 무심결에 던졌던 칭찬이 기억났다. 거울 속 여자는 정말이지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성웅의 아내였다.구두는 은색 지미추로 마무리했다. 준비를 거의 마쳤을 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준비 다 됐니? 회사 차 보냈으니까 주차장으로 내려와.""네, 바로 내려갈게요."전화를 끊은 미래는 낮에 사둔 화장품 세트를 챙겨 들고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그 짧은 시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하지만 그 완벽한 장막 아래, 그녀는 여전히 진희의 온기를 품고 있었다.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올라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몸은 진희의 품 안에서 가장 뜨겁게 요동치고 있었다. 그의 체온과 목소리, 그가 남긴 짙은 여운이 아직 피부 깊숙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차가 매끄럽게 도로 위로 미끄러져 나갔다. 미래는 창밖으로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풍경 속에, 오늘 하루 그 찬란했던 시간의 온기를 조금이라도 더 붙잡아두고 싶다는 듯이.시그니엘로 향하는 길 위에서, 미래는 그렇게 두 세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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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두개의 거울

"어머, 언니! 오늘 너무 멋져요!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에요?"수연이 반갑게 말을 걸며 다가왔고, 성웅 역시 여유로운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안녕하세요, 원장님."그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들. 하지만 그 자리에 서 있던 진수의 세상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는 성웅의 품에 다정히 안긴 미래가 있었다. 완벽한 메이크업, 우아한 드레스, 그리고 남편에게 헌신적인 아내의 미소.몇 시간 전, 스크린룸의 흔들리는 조명 아래서 보았던 그 얼굴과 지금 이 얼굴이 머릿속에서 정확히 포개졌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하지만 성웅의 품에 안긴 미래를 눈앞에서 마주하는 순간, 그것은 비로소 끔찍한 현실이 되었다.수연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진수에게는 그저 먼 곳에서 들리는 소음 같았다. 성웅의 다정한 손길이 미래의 어깨를 감싸고 있는 그 모든 장면이 진수에게는 마치 잔인한 슬로 모션처럼 다가왔다.진수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진공 상태에 빠져 있었다. 오직 동생의 그 뜨거운 숨소리와, 지금 눈앞의 우아한 미래가 겹쳐지며 숨이 막혀 왔다.엘리베이터가 조용히 위층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닫힌 철문 사이로, 겉으로는 더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운 부부의 모습 뒤에 숨겨진 서늘한 그림자가 그들의 발치에서부터 조용히 차오르고 있었다.미래와 성웅이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적막함 속에 스며든 흐느낌 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에서 울고 있는 서윤이었다. 때마침 거실에 있던 정례가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다가왔다."다녀오셨어요... 사모님, 서윤이가..."정례가 말끝을 흐리며 서윤의 방 쪽을 가리켰다. 성웅과 미래는 서둘러 서윤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을 열자 책상 앞에 앉아 어깨를 들썩이며 울고 있는 서윤이 보였다."서윤아, 무슨 일이야?"성웅의 물음에 서윤이 울먹이며 털어놓았다. 내일이 한국사 시험이라 직전 보충 수업을 다녀왔는데, 마지막 모의 테스트에서 무려 세 문제나 틀렸다는 것이었다. 친구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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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 새장 안의 새

"……응? 뭐?"잠에 취한 성웅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낮게 울렸다."진…… 뭐라고?"성웅이 졸린 듯 웅얼거렸다."……진원이? 진원이 꿈 꿨구나"성웅은 피식 웃으며 미래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이내 다시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곧 그의 고른 숨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하지만 미래는 성웅의 인기척에 깨어났지만 잠에서 깬 척을 할 수 없었다. 성웅의 팔에 안긴 채, 어둠 속에서 눈을 뜬 그녀는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6시를 가리키자, 미래는 성웅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팔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로 밤새 뒤엉킨 꿈의 파편들을 씻어내고 나오자, 거실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서윤이었다. 밤을 꼬박 새우며 공부한 딸의 눈가는 퀭했지만, 표정만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빛나고 있었다."엄마! 나 아빠랑 다 끝냈어!"서윤이 들뜬 목소리로 시험지를 흔들어 보였다."학원에서 준 직보 자료 다 풀었는데, 이제 하나도 헷갈리는 게 없어. 엄마, 아빠 진짜 한국사 박사인가 봐. 우리 학원 선생님들보다 훨씬 더 쉽게 잘 가르쳐줘!"서윤은 피로가 극에 달해 눈도 제대로 뜨기 힘들 정도였지만, 아빠 덕분에 공부가 완벽하게 마무리되었다는 사실에 신이 나 있었다. 딸의 입에서 나오는 '아빠'에 대한 찬사와 그 순수한 기쁨을 바라보던 미래의 가슴 한편이 찌릿하게 아려왔다.성웅은 서윤에게 더없이 든든하고 완벽한 아빠였다. 그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미래는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면서도 동시에 차가운 얼음 조각을 품은 듯 시려왔다. 자신이 밤새 진희의 꿈을 꾸는 동안, 성웅은 묵묵히 서윤의 곁을 지키며 아버지의 역할을 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미래는 딸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며 애써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그래, 우리 서윤이 고생 많았어. 아빠가 정말 큰 힘이 되어줬네."그녀의 말끝에 실린 묘한 감정을 서윤은 눈치채지 못했다. 아침 햇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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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 조용한 주문

성웅은 옷장 쪽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넌지시 말했다."미래야, 새로 사준 옷 다른거 입어봐."그의 말투는 부탁이 아니라 명령에 가까웠다. 미래는 조용히 드레스룸으로 들어가 최근 성웅이 사준 샤넬 티셔츠와 무릎 위로 올라오는 화려한 트위드 스커트를 꺼내 입었다. 크루즈 컬렉션 특유의 밝고 화사한 패턴이 미래의 가녀린 체구 위로 내려앉자, 평소의 차분한 분위기와는 전혀 다른 이미지가 연출되었다.화려한 디자인과 선명한 색감 때문일까. 거울 속의 미래는 두 아이의 엄마라기보다는, 연애 시절의 풋풋함이 묻어나는 30대 미혼 여성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이질적인 젊음이 오히려 미래의 어두운 표정을 도드라지게 할 뿐이었다. 미래가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오자, 청소를 하던 정례가 멈춰 서서 감탄했다."아이고, 사모님! 정말 너무 예쁘시네요. 이번에 제주도에서 사장님이 사주신 거예요?"정례는 칭찬을 건넸지만, 이내 미래의 얼굴에서 멈칫했다. 입가엔 억지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고, 눈빛은 어디를 향하는지 모르게 텅 비어 있었다.'요즘 사장님이 부쩍 살갑게 잘해주시는데…… 우리 사모님은 왜 더 기운이 없어 보일까.'정례는 30대 미혼처럼 화사한 옷을 입고도 마치 껍데기만 서 있는 것 같은 미래의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깊은 걱정을 삼켰다. 성웅은 그런 미래의 속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옷매무새를 확인하듯 미래를 훑어보며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성웅의 차가운 만족감이 거실을 채웠고, 미래는 그 화려한 옷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채 그저 작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성웅은 평소 드라이브를 즐길 때 타는 포르쉐 911이 주차된 곳으로 미래를 이끌었다. 그가 젠틀하게 조수석 문을 열어주자, 미래는 화려한 트위드 스커트 자락을 매만지며 차에 올라탔다. 목적지를 묻지 말라는 듯, 성웅은 묵묵히 시동을 걸었다. 엔진이 낮게 으르렁거리며 좁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차는 매봉터널을 지나 한남동 방향으로 거침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성웅은 도심의 복잡한 도로를 빠져나와 탁 트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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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 문 하나 너머

"그냥… 친하다는 느낌 그 이상? 뭐랄까, 분위기가 되게 달콤하달까? 하여튼 되게 묘해요."유진 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다가, 이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아이구, 민서 맘. 진원 엄마 정도면 거의 연예인 급 미모잖아. 유진희 원장도 뭐 어디 내놔도 안 밀리는 얼굴이고. 원래 비주얼끼리 같이 있으면 뭔 짓을 안 해도 그냥 그렇게 보이는 거야.""그런가요?""그럼! 생각해 봐. 만약 유진희 원장이 우리 반 회장 엄마랑 같이 서서 친하게 이야기하고 있다고 쳐봐. 그런 생각이 들겠어?"민서 맘은 잠시 상상하더니, 곧바로 "아~!" 하고 무릎을 탁 쳤다."그러네요! 맞네요, 맞아! 회장 엄마랑 서 있으면 그냥 '둘이 무슨 상담하나 보다' 싶지, 절대 묘하다는 생각은 안 들겠네요!"파리크라상 창가에 앉아 있던 두 여자는 서로 눈을 마주치며 동시에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성웅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브런치 접시를 앞에 두고 깔깔대며 담소를 이어갔다.그들이 방금 나눈 대화는 미래의 위태로운 비밀을 날카롭게 꿰뚫고 지나가는 듯했으나, 결국 두 사람의 엉뚱한 결론 덕분에 그 예리한 바늘은 허공을 맴돌다 사라져버렸다. 소문이 퍼지기는커녕, 도리어 '완벽한 연예인급 부부'라는 칭송 속에 진실은 더욱 견고하게 감춰지고 있었다.두 여자는 자신들이 내뱉은 웃음소리가 미래의 발등에 놓인 시한폭탄을 잠시 더 미뤄두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다시 브런치를 즐기며 평온한 오후를 만끽하고 있었다.성웅과 함께한 브런치는 화려했지만, 미래의 마음은 내내 공허했다. 주차장에 들어와 가장 먼저 확인한 핸드폰은 고요했다. 미래는 자신이 집에서 연락을 받는 것이 곤란할까 봐 먼저 연락하지 못하는 진희의 그 배려 깊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오히려 미래의 가슴을 찌르듯 아프게 했다.참을 수 없을 만큼 진희가 그리워졌다. 성웅의 차를 주차장에 세워둔 미래는, 마치 이끌리듯 진희가 있는 피부과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어깨 화상 치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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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 쓴맛

미래의 몸이 순간 미세하게 떨리자, 진희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평온한 의사의 가면을 쓰고 레이저 팁을 미래의 피부 위로 부드럽게 움직였다.그는 어깨의 붉은 기를 세심하게 살피며 치료에 집중했다. 화려한 옷을 입고 왔지만, 그 아래 감춰진 상처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은 더없이 경건하고도 뜨거웠다. 다정한 연인과 차가운 의사,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드는 진희의 태도에 미래는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치료가 끝난 후, 진희는 미래의 얼굴을 조심스럽고도 확신에 찬 두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마치 세상에 미래와 자신 단둘뿐이라는 듯, 강렬하고도 깊은 눈빛이 그녀의 시선을 붙들었다."치료받은 부위는 오늘 하루 물이 닿지 않게 해주세요. 재생 크림은 제가 처방해 드린 걸로, 아침저녁으로 얇게 펴 바르시고요."그는 말을 잇다 말고, 느릿한 손길로 미래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었다. 그의 손끝이 미래의 귓가를 지나 쇄골 부근을 길게 스치고 지나가자, 미래의 숨결이 가쁘게 흩어졌다."그리고…… 당분간은 그 어깨, 다른 손길 닿지 않게 조심해요."의학적 조언이라는 명분 뒤에 숨겨진, 오직 미래만을 향한 독점욕 어린 질투였다. 그는 그녀의 얼굴을 잡은 손을 천천히 거두었다. 그리고 의사로서의 말을 모두 마친 뒤에야, 아주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벌써부터 또 보고 싶어지네요."진희는 미래의 머리카락을 한 번 더, 아주 천천히 쓰다듬었다. 그 짧은 손길에 담긴 아쉬움이 미래의 가슴에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진료실 밖은 여전히 환자들로 북적이고 있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그들만이 아는 위험하고도 밀도 높은 정적이 흐르고 있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서윤이가 상기된 얼굴로 미래를 맞이했다."엄마! 나 진짜 대박 났어! 오늘 한국사 시험 진짜 '헬'이었거든? 단순 암기 문제는 거의 안 나오고 전체적인 흐름이랑 시대별 비교 문제가 대부분이라 애들 다 멘붕 왔는데, 어제 아빠가 딱 그 부분을 위주로 짚어준 거 있지? 덕분에 나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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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 얼어붙은 한 모금

"아빠, 다른 애들은 에너지 음료 마셔. 커피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리고 난 이거 맛있단 말이야."서윤이 생긋 웃으며 아빠를 향해 잔을 내밀었다."아빠도 한 번 마셔봐."커피를 한 모금 머금은 성웅이 눈을 크게 뜨며 감탄했다."어? 이거 생각보다 맛있네. 미래야, 나도 한 잔 줘봐."식탁 위의 공기가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미래는 조용히 일어나 성웅의 잔을 채웠다. 그런데 잔을 내려놓고 돌아서려던 그때, 성웅이 무심한 듯 미래의 눈을 빤히 보며 낮게 물었다."근데 미래야, 아까 점심 먹고 주차는 잘했어? 오후엔 뭐 했어?"순간 미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아…… 아까 잠시 피부과에 들렀다 왔어요. 어깨 화상 입은 곳이 좀 신경 쓰여서요."미래는 최대한 덤덤하게 대답하려 애썼다. 다행히 성웅은 의심하는 기색 없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잘했어. 병원은 제때 다녀야지."성웅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시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참, 나 다음 주에 피부과 예약이던데. 저번에 했던 거 2회차더라고. 다음 주에 우리 같이 갈까?"성웅의 지극히 평범한 제안이, 미래에겐 날카로운 비수처럼 날아와 꽂혔다. 진희의 병원을, 성웅과 함께 가야 한다니."……네, 알겠어요."미래는 간신히 대답을 뱉어내며 고개를 숙였다.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지만, 얼굴 근육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알 수 없을 만큼 굳어버렸다. 서윤과 성웅의 화기애애한 대화 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지는 가운데, 미래는 잔을 쥔 손을 잘게 떨며 차가운 오렌지 커피를 내려다볼 뿐이었다.그 시각, 진희의 휴대폰이 진동하며 화면에 '진수 형'이라는 세 글자가 떠올랐다."진희야, 어디야? 나 지금 너희 집 앞인데.""집이에요, 형."잠시 정적이 흐른 뒤, 진수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그럼 나 잠깐 올라갈게."진희는 의아하면서도 반가운 마음으로 답했다. "형, 맥주 할래요, 와인 할래요?""아무거나."진수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건조했다. 그는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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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 65층의 불빛

진수는 한참 동안 말을 고르듯 바닥을 응시하다가,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진희가 숨을 멈추자, 진수는 차마 동생의 민낯을 직시하지 못하겠다는 듯 시선을 돌린 채 말을 이었다."네 차가 주차되어 있어서 네가 온 줄 알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지하에서 문이 열려 있어서, 영화 소리가 크게 들리더라. 그래서 내려갔는데…… 네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보게 됐어."진수는 형으로서의 체면과 매너를 지키며 구체적인 장면까지는 입에 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짧은 몇 마디만으로도, 진희가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형이 얼마나 많은 것을 알고 있는지 설명하기엔 충분했다.진희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듯한 충격과 함께 눈앞이 아득해졌다. 순간적으로 모든 것을 숨기고 부인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게 얽혔다. 하지만 진희는 이내 파르르 떨리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차갑게 식어가는 맥주캔을 두 손으로 꽉 움켜쥐었다.거짓말로 치졸하게 빠져나가기엔, 진수는 진희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형이었다. 게다가 정신과 전문의로서 자신의 모든 내면을 꿰뚫어 보는 형 앞에서 얄팍한 핑계는 통하지도 않을뿐더러, 스스로의 치부를 감추겠다고 형과의 신뢰를 저버리는 것은 진희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진희는 붉어진 눈시울을 숨기지 않은 채,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천천히 진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에는 도망치려는 기색 대신, 모든 것을 마주하겠다는 참담하지만 단단한 결연함이 서려 있었다."형……."진희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 속에는 거짓 없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미안해. 형한테 그런 모습 보여서…… 정말 미안해."거짓말을 덧붙이는 비겁한 선택 대신, 진희는 모든 사실을 정면으로 인정하고 형 앞에 자신의 진심을 털어놓기로 마음먹었다. 그런 동생을 바라보는 진수의 깊은 눈빛은, 안타까움과 복잡한 탄식으로 짙게 물들어갔다.진수는 동생을 향한 무거운 눈빛을 거두지 않은 채, 천천히 맥주캔을 내려놓으며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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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 목줄

아무도 듣지 못할 그 이름을 허공에 흘려보내며, 진희는 쓰린 속을 움켜쥔 채 소파에 무력하게 주저앉았다. 독한 술기운이 온몸을 잠식하고 정신이 아득해져 가는 그 찰나의 순간까지도,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직 하나뿐이었다.끝이 정해져 있는 비극이라 할지라도, 내일이면 다시 숨 막히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를 너무나도 품고 싶다는 애절한 그리움. 진희는 밀려오는 고통과 슬픔을 고스란히 삼킨 채, 위스키의 서늘한 취기 속에 위태로운 잠 속으로 깊이 가라앉아 갔다.깊은 새벽 4시. 고요한 침실 안으로 성웅의 묵직한 발소리가 스며들었다. 침대에서 선잠을 자던 미래는 인기척에 눈을 파르르 뜨며 깨어났다. 이틀 전 청평에서 진희와 나눴던 뜨겁고도 아슬아슬했던 온기가 아직 피부에 남아 있는 것만 같은 지금, 남편인 성웅의 존재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거북하고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왔다.미래는 급히 이불을 추스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지금까지 하셨어요? 지금 몇 시예요……? 이제 제가 서윤이 옆에 있어줄게요."성웅은 피곤에 붉어진 눈을 깜빡이며 미래의 팔목을 가볍게 잡아 다시 침대에 눕혔다."아냐, 서윤이 공부 다 끝내고 방금 겨우 잠들었어. 잠깐 눈 좀 붙이고 6시 30분에 일어난다고 알람까지 세 개나 맞춰놨더라고. 안 가도 돼."도망치듯 벗어나려는 미래를, 성웅은 그대로 품에 가두듯 침대에 도로 눕혔다. 미래는 온몸이 굳어가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성웅 씨…… 밤새셨는데, 쉬세요."성웅은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켜 미래의 위로 다가왔다.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묘한 소유욕과 애정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는 헝클어진 미래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넘기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미래의 턱 끝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난 너 안고 싶은데."나직하게 속삭인 성웅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미래의 입술을 향해 다가왔다. 입술이 닿기 직전, 미래는 참을 수 없는 배덕감과 거부감에 사로잡혀 급히 고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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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손대지 마

그는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그저 지친 듯 미래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오늘은 진짜 몸이 부서질 것 같네…… 그냥 이렇게 자자."성웅은 말 그대로 너무나 피곤하다는 듯 미래를 품에 꼭 안은 채 눈을 감았다. 따뜻하고 거대한 체온이 미래를 옥죄어 왔다. 진희와의 뜨겁고 아슬아슬했던 시간의 기억과, 성웅의 품 안에서 숨이 막혀오는 현실의 무게가 교차하며, 미래의 눈가로 차가운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전날 밤, 형과 나눈 무거운 대화와 알코올의 독한 취기가 겨우 가신 아침. 진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며 눈을 떴다.하지만 눈을 뜨자마자 의식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은 형의 경고도, 현실의 죄책감도 아니었다. 머릿속은 온통 오직 한 사람,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형이 자신 때문에 얼마나 가슴 아파하는지, 그 눈빛에 담긴 애틋한 만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형의 그 아픈 마음을 헤아려 당장이라도 이 위태로운 인연을 끊어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이 통제되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끊어내려 할수록 심장은 오히려 더 거세게 아려왔다.아침부터 미래에게 안부 문자 한 통, 목소리 한 번 들을 수 있다면 이 미칠 듯한 그리움이 조금은 숨 쉴 틈을 찾을 텐데. 대치동이라는 거대한 울타리 속에서 완벽한 아내이자 엄마로 살아가야 하는 미래에게, 먼저 연락을 취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닿을 수 없기에, 참아야만 하기에, 보고 싶은 감정은 몇 배, 아니 몇십 배로 불어나 진희의 숨통을 사정없이 조여왔다.아침 햇살이 창가를 두드릴 무렵, 미래는 일찍 일어나 서윤의 등교를 조용히 도왔다. 시험 기간이라 아침을 거르기 쉬운 아이를 위해, 정례는 말없이 서윤이 가장 좋아하는 따뜻한 쇠고기뭇국을 끓여 식탁에 올렸다. 그 묵묵한 배려 속에서 정례가 건네는 무언의 응원을 느낀 미래는 가슴 한켠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새벽 4시까지 서윤의 공부를 봐주던 성웅은 오전 8시가 되자 눈을 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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