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Chapter 61 - Chapter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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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화: 붉은 옷의 사나이 1

​"대장님! 붉은 옷을 입고 백마를 탄 장수가 나타나서 왜놈들 목을 베고 다닌답니다!"​장터 국밥집.피난민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은 흉흉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신비로웠다.​"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던가? 신출귀몰해서 왜놈들이 귀신이라 부른다네요.""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번개를 내리꽂는다던데?"​나는 국밥을 말아먹으며 피식 웃었다.살이 붙어서 과장된 면이 있긴 하지만, 누군지 알 것 같았다.​곽재우(郭再祐).임진왜란 최초의 의병장이자, 게릴라 전술의 천재.​전생의 역사 지식으로 보면 그는 의령 사람이다. 자기 재산을 털어 의병을 일으키고, 붉은 비단옷을 입고 전장을 누비며 왜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인물.​'관종... 아니, 스타성이 있는 양반이지.'​전쟁터에서 빨간 옷을 입는다니. 나 죽여줍쇼 하고 광고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걸 입고도 살아남았다는 건 실력이 진짜라는 뜻이다.​"대장님, 저 얘기 들으셨습니까?"​최가가 깍두기를 씹으며 물었다.​"어. 홍의장군 얘기?"​"예. 경상도 쪽은 쑥대밭이 됐다던데, 그 양반 혼자서 버티고 있답니다. 우리랑 비슷하지 않습니까?"​"비슷하긴. 우린 이렇게 잘 먹고 잘사는데."​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근데 그쪽 상황이 궁금하긴 하네. 왜놈들 보급로가 그쪽을 지나갈 텐데."​왜군의 주력은 한양으로 올라갔지만, 후발대와 보급 부대는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로 진입하려 할 것이다. 곽재우가 그 길목을 막아주고 있다면, 우리 입장에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그때, 객주 입구 쪽이 소란스러워졌다.​"게 누구냐! 신분을 밝혀라!"​보초를 서던 익호군 녀석들의 고함 소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손님이 왔나 보군."​마당으로 나가니, 웬 꾀죄죄한 몰골의 사내가 병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거지꼴을 하고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했다.​"나는 의령에서 온 전령이다! 김덕령 대장을 뵙고자 한다!"​사내가 품에서 서신을 꺼내 들었다. 붉은색 인장이 찍힌 서신이었다.​"들여보내."​내 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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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화: 붉은 옷의 사나이 2

​"그거 좋네요. 만들 수 있습니까?"​"원리는 아오. 둥근 쇠통 안에 화약과 쇳조각을 넣고, 목곡(목제 신관)을 감아서 폭발 시간을 조절하는 거지. 헌데 그게 쏘기가 영 까다로워서 말이오. 대완구(박격포)가 있어야 날릴 수 있는데, 휴대하기엔 너무 무겁소."​"그럼 손으로 던지게 만들면 되잖습니까."​"손으로? 그 무거운 걸?"​나대용이 어이없다는 듯 쳐다봤다. 비격진천뢰는 쇳덩어리다. 무게가 꽤 나간다.​"제가 던질 건데요. 멀리."​나는 어깨를 돌려 보였다.​"아... 자네라면 가능하겠군."​나대용이 피식 웃었다.​"좋소. 내 자네 악력에 맞춰서 개량형을 만들어보리다. 크기는 줄이고, 대신 화약은 고농축으로 채워서."​그는 즉시 작업에 들어갔다.쇳물을 녹여 틀에 붓고, 식혀서 둥근 표주박 형태의 쇠통을 만들었다. 그 안에 우리가 똥지게로 만든 흑색화약과 날카로운 철편(마름쇠)을 가득 채워 넣었다.​그리고 핵심인 신관.나대용은 대나무 통에 심지를 꼬아 넣고, 톱니바퀴처럼 생긴 나무 뚜껑을 달았다.​"이걸 돌리면 심지 길이를 조절할 수 있소. 많이 감으면 늦게 터지고, 적게 감으면 빨리 터지지."​"타이머네요."​"타... 뭐?"​"아닙니다. 아주 훌륭합니다."​나는 완성된 진천뢰를 들어보았다. 묵직했다. 볼링공 정도의 무게감. 내 손에는 딱 맞았다.​"이거 이름은 뭘로 할까요?"​"자네가 던지는 거니... '비격덕령뢰' 어떻소?"​"에이, 촌스럽게. 그냥 '수류탄'이라고 하죠."​"수류탄(手榴彈)? 손으로 던지는 석류라... 단순하군."​어쨌든 선물은 준비되었다.서백설에게는 며칠 다녀오겠다고 말해두었다. 그녀는 "또 어딜 쏘다니냐"며 잔소리를 했지만, 챙겨줄 건 다 챙겨줬다. 육포며 주먹밥이며, 혹시 모를 비상금까지.​"다치지 말고 와요. 객주 비우면 불안하니까."​"걱정 마. 미숙이도 챙겼으니까.""으이그, 미숙이, 미숙이,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마누란 줄 알겠네."​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이내 허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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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화: 붉은 옷의 사나이 3

​나는 손을 탁탁 털며 돌아왔다.​"이 정도면 증명이 됐습니까?"​"허... 허허허! 괴물 맞구먼! 진짜 괴물이야!"​곽재우가 박수를 치며 웃었다.​"좋아! 합격일세! 자네 같은 장사가 호남을 지키고 있다니, 내 마음이 아주 든든해!"​그는 호탕하게 내 어깨를 두드렸다.​"앉게. 술이나 한잔하지."​우리는 강가에 멍석을 깔고 마주 앉았다. 곽재우가 호리병을 꺼내 술을 따랐다.​"그래, 영남 상황은 어떻습니까?"​"지옥이지. 관군은 다 도망갔고, 고을마다 왜놈들이 깃발을 꽂았네. 백성들은 산으로 숨어들었고."​곽재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하지만 우리는 산속에 숨어서 놈들을 괴롭히고 있네. 놈들이 밥 먹을 때 불을 지르고, 똥 쌀 때 화살을 쏘지. 잠 한숨 편히 못 자게 만드는 게 내 전술이야."​게릴라전의 정석.정규전으로는 안 되니, 심리전과 기습으로 놈들을 말려 죽이는 것이다.​"훌륭하십니다."​"헌데, 문제가 하나 있어. 화력이 부족해."​곽재우가 한숨을 쉬었다.​"활이나 창으로는 한계가 있네. 놈들은 조총을 쏘는데 우리는 돌맹이나 던지고 있으니... 혹여 묘수가 없겠나?"​"있죠. 그래서 가져왔습니다."​나는 봇짐을 풀었다.둥근 쇠공들이 굴러나왔다.​"이게 뭔가? 쇠공인가?"​"수류탄(手榴彈)입니다."​"수...류탄?"​"손으로 던지는 석류라는 뜻이죠. 비격진천뢰를 개량해서 휴대용으로 만든 겁니다."​"진천뢰? 그 대완구로 쏘는 거 말인가? 그걸 손으로 던진다고?"​"제가 던지면 가능하니까요."​나는 하나를 집어 들었다.​"시범을 보여드리죠."​나는 톱니바퀴를 돌려 신관을 조절했다.'5초.'​부싯돌로 심지에 불을 붙였다.치이익-​"피하십시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강 건너편 절벽을 향해 도움닫기를 했다.​"가랏!"​팔을 뻗어 던졌다.내 손을 떠난 쇠공이 까마득하게 날아갔다. 포물선을 그리며 강을 건너 절벽 중턱에 꽂혔다.​꽝-!!​엄청난 폭발음.절벽의 바위가 무너져 내리고, 흙먼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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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화: 왜군의 보급을 털어라 1

​습했다.장마철도 아닌데 숲속 공기는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다.​나는 풀숲에 납작 엎드린 채 숨을 골랐다. 등 뒤로 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지만, 닦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지금 움직이면 녀석들이 눈치챌 수도 있다.​이곳은 전라도 진산과 금산 사이의 좁은 협곡.양옆으로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그사이로 사람 서넛이 겨우 지나갈 만한 오솔길이 나 있는 곳. 병법에서 말하는 사지(死地)이자, 매복의 명당이었다.​"대장님. 다리에 쥐 날 것 같습니다."​옆에 엎드려 있던 최가가 울상을 지으며 속삭였다. 덩치 큰 녀석이 풀숲에 구겨져 있으려니 좀이 쑤시는 모양이었다.​"참아. 쥐 나면 네가 쥐포 되는 수가 있어."​나는 나직하게 으름장을 놓았다.​"곽재우 장군 정보가 확실하겠죠? 오늘 지나가는 거 맞습니까?"​"그 양반은 헛소리할 위인이 아니야. 그리고 놈들이 전주로 넘어가려면 이 길밖에 없어. 큰길은 이미 우리가 막아놨으니까."​나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협곡 아래는 고요했다. 바람이 갈대숲을 스치는 소리만 들려왔다.​하지만 내 감각은 다른 소리를 잡고 있었다.미세한 진동. 그리고 바람에 실려 오는 낯선 냄새.​말똥 냄새, 그리고 땀 냄새.​"온다."​내 말에 최가와 주변에 매복해 있던 익호군 녀석들의 눈빛이 변했다. 장난기는 사라지고,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빛만이 남았다.​저벅, 저벅.​발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둘이 아니었다. 수백, 아니 수천 개의 발소리가 협곡의 정적을 깨뜨렸다.​선두가 모습을 드러냈다.푸른색 갑옷을 입은 왜군 정찰조. 그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경계하고 있었지만, 시선은 주로 앞쪽 길에만 머물러 있었다. 설마 이 험한 절벽 위에 사람이 매달려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정찰조가 지나가고, 본대가 모습을 드러냈다.​"워메..."​최가가 숨을 삼켰다.​길었다.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행렬이었다. 소와 말이 끄는 수레에는 쌀가마니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등짐을 진 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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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화: 왜군의 보급을 털어라 2

​"이쪽은 '흑(黑)누님'이야."​왜군들이 멍하니 나를 쳐다보자, 나는 친절하게 덧붙였다.​"감히 너희들 따위가 미숙이 본명을 입에 올릴 순 없지. 흑누님이라 불러라. 갈 때 가더라도 예의는 지켜야지?"​"이, 이야압!"​창병 하나가 기겁하며 창을 질러왔다.​나는 피하지 않았다."미숙이는!"미숙이를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불의를!"​빠각!​창대가 썩은 나뭇가지처럼 부러졌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놈의 턱을 올려쳤다."참지 않아!"​퍼억!​놈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턱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내 귀에까지 생생하게 들렸다.​"새끼가 예의가 없네. 누님 앞에 쇠꼬챙이를 들이대?"​나는 빙글 돌며 옆에 있던 놈의 옆구리를 후려쳤다.갑옷? 소용없었다. 내 괴력과 흑단목의 중량이 합쳐지면 쇠 갑옷도 종잇장이다. 갈비뼈와 함께 갑옷이 찌그러지며 놈이 꼬꾸라졌다.​"괴, 괴물이다!""도망쳐!"​왜군들이 나를 보고 뒷걸음질 쳤다.이치 전투에서 살아남아 도망친 놈들이 퍼뜨린 소문이 있었을 것이다. 조선에 쇠가죽을 두른 3미터 거인 오니가 산다고. 그게 바로 나다.​"어딜 가려고. 밥값은 하고 가야지."​나는 도망가는 놈의 뒷덜미를 잡았다. 그리고 인간 몽둥이처럼 휘둘러 다가오던 다른 놈들을 쳐냈다.​쿠당탕!​볼링핀이 쓰러지듯 왜군들이 와르르 무너졌다.​전황은 일방적이었다.이미 지형지물과 기습으로 놈들의 전의를 꺾어놓은 상태였다. 익호군 녀석들은 신이 나서 몽둥이찜질을 해댔다.​"죽어! 이 도둑놈들아!""내 쌀 내놔! 우리 엄니 쌀 내놓으라고!"​녀석들의 분노는 정당했다.자신들의 가족이 굶고 있을 때, 놈들이 훔쳐 가는 쌀을 보니 눈이 뒤집힐 수밖에 없었다.​나는 전장 한복판을 가로질러 갔다.내 목표는 쌀가마니가 아니라, 놈들의 대장이었다.​수레 행렬 중간쯤, 지휘용 말을 탄 장수가 보였다. 그는 당황하지 않고 부하들을 독려하며 방어진을 짜고 있었다.​'저놈이군.'​나는 놈을 향해 달렸다.​"막아라! 저 무식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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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왜군의 보급을 털어라 3

​"그렇네. 아주 질기네. 이빨도 안 들어가겠어."​나는 놈을 향해 서늘하게 웃었다.​"들었지? 흑누님은 질긴 고기를 싫어해. 그래서 먹기 좋게 좀 다져야겠대."​"뭐, 뭐라?!"​"질긴 고기는 두들겨 패야 부드러워지거든. 너, 이빨 꽉 물어라. 혀 깨문다?"​내가 방망이를 높이 들자, 장수의 눈에 공포가 서렸다.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된 모양이었다.​"자, 잠깐! 나는 무사다! 포로로서의 대우를..."​"어. 그래. 대우. 이게 내 대우다."​퍼억!​나는 놈의 허벅지를 내려쳤다.​"끄아아악!""어이구, 대우를 받으니 기뻐서 몸둘 바를 모르는구나?"​뼈가 으스러지는 소리와 비명이 섞였다.​"이건 납치당한 쌀값."​퍼억!​반대쪽 허벅지.​"아악! 사, 살려줘!"​"이건 내 땅 밟은 통행료."​나는 놈의 팔을 밟고 방망이로 어깨를 쳤다.​우지끈!​"어참. 혀 깨문데도. 입 꽉 다물어."​장수는 바닥을 구르며 오줌을 지렸다. 바지춤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갔다. 천하를 호령한다던 왜군 장수의 위엄은 온데간데없었다.​"아이고... 아이고... 제발..."​놈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빌었다.​"어때? 이제 좀 살코기가 부드러워진 것 같지 않아?"​나는 미숙이를 놈의 뺨에 툭툭 쳤다.​"기절하지 마라. 아직 다질 곳 많으니까."​결국 놈은 거품을 물고 기절했다. 사지는 멀쩡한 곳이 없었지만, 목숨은 붙어 있었다.​"쳇. 약골이네."​나는 놈을 짐짝처럼 묶어버렸다. 나중에 포로 교환용으로 쓰든, 정보를 캐내든 쓸모가 있을 것이다.​"상황 종료! 다 챙겨!"​내 외침에 익호군들이 환호성을 질렀다.​전투는 끝났다.남은 건 즐거운 전리품 수거 시간이었다.​"우와! 대장님! 이거 보십시오! 쌀이 끝도 없습니다!""여긴 비단도 있습니다! 명나라 비단 같습니다!""술이다! 왜놈들 술이다!"​수레 덮개를 벗길 때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군량미 1,000석.조총 100정.화약통 수십 개.그리고 놈들이 약탈한 은금 보화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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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화: 바다의 소식 1

"이게 뭡니까?"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나대용이 의기양양하게 가리킨 것은 현무 3호기의 등판이었다. 원래는 매끈한 철갑이어야 할 그곳에, 벌집처럼 구멍이 숭숭 뚫린 사각 나무상자가 달려 있었다."화차(火車)요.""화차요? 신기전 쏘는 그거요?""그렇소. 자네가 가져온 흑색화약 힘이 워낙 좋아서 말이오. 대형 화살(신기전) 뒤에 화약통을 매달아 날려보내면 사거리가 족히 2리(1km)는 나오겠더군."나대용은 쇳조각을 만지작거렸다."현무가 돌격할 때, 원거리에서 미리 화살 비를 퍼붓고 들어가는 거지. 놈들이 정신 못 차릴 때 밀어버리는 거요. 어떻소?""미쳤네요. 아주 훌륭한 의미로."나는 엄지를 치켜세웠다.이동식 미사일 발사대. 탱크에 로켓포를 단 격이다. 이 양반, 놔두면 대륙간 탄도 미사일도 만들 기세다."탄약은 충분합니까?""서 행수가 구해온 대나무와 종이로 밤새 만들고 있소. 미령이가 화약 정량을 아주 기가 막히게 재더구먼."객주 한쪽에서는 여인들이 화약통을 만들고 있었다. 화약 냄새가 진동했지만,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이것이 자신들을 지켜줄 힘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모든 준비는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하지만, 객주의 공기는 무거웠다.화약을 만드는 손길은 분주했지만, 사람들의 입은 굳게 닫혀 있었다. 가끔 들리는 건 깊은 한숨 소리뿐.'분위기가 안 좋아.'이치 전투와 보급 부대 습격으로 승리를 거뒀지만, 세상 돌아가는 꼴은 암울하기 짝이 없었다. 한양이 뚫리고 임금이 도망쳤다는 소식은 이미 예전에 들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들었어? 임금님이 아예 요동(명나라)으로 건너가신다더라.""나라를 버리고 남의 나라로 간다고? 그럼 우리는? 버려진겨?"흉흉한 소문.선조가 국경을 넘어 망명 신청을 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백성들에게 '왕이 도망친 것'과 '왕이 나라를 버린 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후자는 곧 '국가의 소멸'을 의미했다.게다가 더 안 좋은 소문도 들려왔다."남해안도 뚫렸대. 왜놈 배가 수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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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화: 바다의 소식 2

그때였다."길 비켜라! 급보다! 급보!"마을 입구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파발마 소리였다. 말발굽 소리가 요란했다.마당에 있던 익호군들이 긴장해서 무기를 들었다. 서백설과 미령이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또 무슨 소식이야.'나도 미숙이를 챙겨 들고 마당으로 나갔다.말 한 필이 거품을 물고 객주 앞마당으로 들어왔다. 말 위에 탄 전령은 온몸이 흙투성이였고, 얼굴은 탈진해서 반쪽이 되어 있었다."허억... 허억..."전령이 말에서 굴러떨어지듯 내렸다.그의 복장은... 전라좌수영 수군 복장이었다.좌수영?여수?이순신 장군이 있는 곳이다.사람들이 웅성거렸다."수군이래.""바다도 뚫린 거야? 그럼 진짜 끝인데...""아이고, 이제 갈 데도 없는데 어쩌나..."다들 최악을 상상했다. 육지가 쑥대밭이 됐는데 바다라고 온전하겠는가. 패전 소식을 전하러 온 거라 생각한 사람들의 표정에 절망이 드리웠다.나대용이 작업하다 말고 뛰쳐나왔다."여보게! 무슨 일인가! 좌수영은 무사한가!"전령은 숨을 헐떡이며 품에서 서신을 꺼냈다.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그는 마른침을 삼키더니, 있는 힘껏 소리쳤다."이겼습니다!!""......뭐?""우리 수군이... 이순신 장군께서! 왜놈들을 박살 냈습니다!"순간, 정적이 흘렀다.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다들 자기 귀를 의심했다. 지금까지 들려온 건 '함락', '패배', '도주' 같은 단어들뿐이었으니까."오, 옥포 앞바다에서! 왜선 26척을 격침하고! 놈들을 모조리 수장시켰습니다!"전령이 울먹이며 외쳤다."우리 측 피해는... 부상자 한 명뿐입니다! 완벽한 승리입니다!"26 대 0.기적 같은 스코어.임진왜란 첫 승리이자, 조선을 구한 옥포 해전의 승전보였다."와아아아아!!"함성이 터졌다.누군가는 만세를 불렀고, 누군가는 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이겼대! 우리가 이겼대!""아이고, 하나님 부처님! 감사합니다!"서백설이 내 팔을 잡고 방방 뛰었다."들었어요? 이겼대요! 바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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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화: 고바야카와의 분노 1

​"바카나!(말도 안 돼!)"​와장창!​고급 청자가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산산조각이 났다. 파편이 튀어 무릎을 꿇고 있던 부장의 뺨을 스쳤지만, 그는 미동도 하지 못했다.​천막 안의 공기는 무거웠다. 숨소리조차 내기 힘들 정도로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일본군 제6군 사령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백전노장인 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목에 핏대가 서고, 쥐고 있는 부채가 으스러질 듯 떨렸다.​"보급대가 전멸했다고? 그 많은 쌀과 무기가 증발했다는 말이냐!"​"하, 하이! 살아돌아온 자의 말로는..."​부장이 식은땀을 흘리며 말을 더듬었다.​"쿠로온나(黒女 - 검은 여자)... 그 검은 여자가 하늘에서 벼락을 내리고, 쇠가죽을 두른 오니(鬼)가 나타나 다 때려죽였다고..."​"쿠로온나? 오니? 이 멍청한 놈들이 전쟁터에서 괴담 타령이나 하고 있어!"​고바야카와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 탁자를 내리쳤다.​콰직!​두꺼운 나무 탁자가 단번에 반으로 갈라졌다. 날카로운 검기가 천막을 찢어발길 듯했다.​"핑계 대지 마라! 조선군 따위에게 패배한 책임을 여자 귀신과 오니에게 돌리려 하다니, 사무라이의 수치다! 할복해라! 당장 배를 갈라 사죄해라!"​그는 길길이 날뛰었다.상황이 좋지 않았다. 아니,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개전 초기, 파죽지세로 한양을 점령할 때까지만 해도 기세등등했다. 조선은 약했고, 왕은 도망쳤다. 이대로 명나라까지 진격하는 건 시간문제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보급이 발목을 잡았다.​남해안을 돌아 서해로 진입하려던 수군이 조선의 이순신이라는 자에게 박살 났다는 비보가 들려왔다. 바닷길이 막히면 육로로 보급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금산 쪽 산악 지대에서 누군가에게 끊겼다. 그것도 요괴같은 정체불명의 존재들에게.​"굶주린 병사로는 싸울 수 없다. 하루빨리 전라도를 먹어야 한다. 전주성을 함락시키고 호남의 곡창 지대를 손에 넣어야만 한다."​고바야카와는 씩씩거리며 지도를 노려보았다.​전주로 가는 길목.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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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화: 고바야카와의 분노 2

나라를 지키지 못한 무장의 최후. 비참했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저승에 가서 선왕들을 뵐 면목이 없구나.​그때였다.​쿠오오오오-!​지축을 울리는 굉음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천둥소리? 아니, 산사태 소리인가?​땅이 흔들렸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진동이 예사롭지 않았다.​전투를 벌이던 양측 병사들이 동시에 동작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았다. 칼을 휘두르던 왜군도, 창을 찌르던 관군도, 모두가 얼어붙었다.​이치 고개 정상, 관군 진영의 뒤편 언덕.하늘을 가리는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거대한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검은 철갑을 두른 세 대의 괴물.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수백 명의 장정들.​"저, 저게 뭐냐?""아군인가? 적군인가?"​관군들은 웅성거렸다. 조선군 복장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왜군도 아니었다. 허름한 베옷을 입었지만, 그 기세만큼은 정규군보다 더 살벌한 무리.​맨 앞에 선 거대한 사내가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붉은 누빔옷을 입고, 등에는 활을 메고, 허리에는 검은 몽둥이를 찬 사내.​김덕령이었다.​그는 전장을 쓱 훑어보았다. 피와 시체로 뒤덮인 아비규환. 하지만 그의 눈빛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처럼 번들거렸다.​그는 멍하니 서 있는 권율 장군에게 다가왔다.​"수고하셨습니다, 영감님."​그가 씩 웃었다.​"많이 지치신 것 같은데, 이제 좀 쉬시죠."​"자, 자네는 누구인가? 지원군인가?"​권율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담양 사는 김덕령입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짐 챙겨 오느라 좀 걸렸네요."​덕령이 뒤를 돌아보며 손짓했다.​"비키십쇼. 주전 선수 입장하십니다."​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에 있던 괴물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끼기기기긱-​육중한 쇳소리와 함께 바퀴가 굴러갔다.현무(玄武).육지 거북선 3대가 전열을 갖추고 내리막길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뭐, 뭐냐 저건! 쇠로 만든 수레?"​고개 아래쪽에 있던 일본군들이 술렁거렸다. 난생처음 보는 비주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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