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Chapter 71 - Chapter 80

135 Chapters

71화: 웅치·이치의 철벽 1

​적장의 머리통이 깨지는 소리가 신호탄이었다.​잠시 멈칫했던 왜군들이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지휘관을 잃은 분노보다는, 눈앞의 괴물을 죽이지 않으면 자신들이 죽는다는 공포가 그들을 움직였다.​"죽여라! 다구리쳐!"​일본어가 아닌 조선말 비명이 들리는 것 같았다. 놈들은 사방에서 칼과 창을 들이밀었다.​나는 미숙이를 고쳐 잡았다.흑단목의 묵직한 중량감이 손바닥에 전해졌다.​"오냐. 다 덤벼라."​나는 제자리에서 빙글 돌았다.허리의 탄력을 이용해 원심력을 극대화한, 인간 팽이 그 자체였다.​부웅-!​공기를 찢는 파열음이 고막을 때렸다.​퍼억! 우지끈!​내 주변을 에워쌌던 왜군 넷이 동시에 날아갔다. 갑옷이 구겨지고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화음처럼 울렸다.​"뭐, 뭐야! 저거!"​뒤에 있던 놈들이 기겁하며 멈춰 섰다.​이전의 참나무 방망이였다면 부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백설이 구해준 흑단목은 달랐다. 쇠보다 단단하면서도 특유의 탄성이 있어 충격을 고스란히 적에게 되돌려 주었다.​"역시 흑미숙이. 타격감이 다르네."​나는 피 묻은 미숙이를 어깨에 걸치고 씨익 웃었다.​"자, 다음 타자."​하지만 놈들은 나에게 덤비는 대신,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더 거대한 절망이 다가오고 있었다.​쿠르릉- 쿵! 쿵!​육지 거북선, 현무(玄武) 세 대가 내리막길을 타고 속도를 높이고 있었다.​"막아! 저 수레를 막아!"​왜군 조총수들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타타타탕!​수백 발의 납탄이 빗발쳤다. 하지만 현무는 멈추지 않았다. 두꺼운 정철 장갑에 맞은 탄환들은 힘없이 찌그러져 바닥으로 떨어질 뿐이었다.​팅! 채앵!​"안 통해! 쇠가죽이야!"​공포에 질린 왜군들이 창을 들고 현무 앞으로 달려들었다. 바퀴 틈에 창을 꽂아 멈추려는 심산이었다.​하지만 현무는 단순한 수레가 아니었다.나대용이 설계하고, 내가 감수한 '살상 병기'였다.​"고슴도치 전개!"​현무 2호기 안에서 최가의 목소리가 들렸다.​철컥.​현무의 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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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웅치·이치의 철벽 2

거리는 10보.​노장은 칼을 뽑아 들고 나를 노려보았다.두려움보다는 호기심, 그리고 전율이 섞인 눈빛이었다.​"네놈이냐. 내 보급대를 털고 벼락을 내린다는 자가."​"그래. 담양의 김덕령이다. 기억해 둬라."​"훌륭하군. 조선에 이런 무인이 있을 줄이야."​고바야카와가 말 배를 걷어찼다.정면 승부. 피하지 않겠다는 기백이었다.​하지만 나는 놈과 칼을 섞을 생각이 없었다.시간이 아까우니까.​나는 품에서 마지막 남은 수류탄 하나를 꺼냈다.​"선물이다. 가져가라."​심지에 불을 붙여 놈의 말발굽 아래로 던졌다.​"뭐, 뭐냐?"​고바야카와가 바닥을 보는 순간.​꽝!​말이 비명을 지르며 펄쩍 뛰었다. 폭발의 충격으로 고바야카와가 말에서 떨어져 흙바닥에 굴렀다.​"크윽!"​노장이 신음을 흘리며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내 그림자가 그를 덮고 있었다.​나는 미숙이를 들어 올렸다.​"항복해라. 노인 공격하긴 싫으니까."​고바야카와는 피 묻은 입술을 닦으며 헛웃음을 지었다.​"항복? 사무라이에게 항복은 없다. 목을 쳐라."​그는 눈을 감고 목을 내밀었다.기개 하나는 인정해 줄 만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목을 칠 생각이 없었다. 죽은 적장보다는 산 포로가 더 비싼 법이니까.​"목은 됐고, 잠이나 자쇼."​퍼억!​나는 놈의 턱주가리를 날렸다. 고바야카와가 기절하며 널브러졌다.​"적장을 잡았...!"​내가 소리치며 놈을 묶으려는 찰나였다.​"주군을 지켜라! 막아라!!"​어디선가 시뻘건 눈을 한 무사 수십 명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고바야카와의 친위대였다. 그들은 칼을 휘두르는 대신, 맨몸으로 나에게 몸을 던졌다.​"이거 안 놔?!"​한 놈을 쳐내면 두 놈이 달라붙고, 두 놈을 떼어내면 세 놈이 내 팔다리를 잡고 늘어졌다.​"어서! 주군을 모셔라! 빨리!"​친위대장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그 사이 부관들이 기절한 고바야카와를 말에 태우고 엉덩이를 찔러대며 도망쳤다.​"이 독한 놈들이!"​나는 몸을 털어 녀석들을 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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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화: 꼰대와 괴물 1

​"밀어! 바퀴 빠졌다!"​진흙탕에 빠진 현무 2호기를 꺼내느라 익호군 녀석들이 끙끙거렸다.​이치 고개에서 금산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산 넘고 물 건너는 강행군. 전투 직후라 다들 녹초가 되어 있었지만, 쉴 틈이 없었다.​나대용이 땀을 뻘뻘 흘리며 바퀴 축을 살폈다.​"대장, 무리요. 현무들이 한계에 다다랐소. 바퀴 살이 휘고 축이 틀어져서, 이 속도로는 금산까지 하루 꼬박 걸릴 거요."​"하루면 늦습니다. 그 영감님 성격에 벌써 들이받았을지도 모릅니다."​나는 초조하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조헌(趙憲).호는 중봉(重峯).임진왜란 의병장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지만, 동시에 조선 최고의 '꼰대'로도 유명했다.​그는 도끼를 들고 대궐 앞에 엎드려 상소를 올리던(지부상소) 강성 인물이었다. 타협이란 걸 모르는 불같은 성격. 그런 양반이 7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금산성에 틀어박힌 왜군을 치러 갔다.​역사대로라면, 그는 내일 아침 전멸한다.함께 간 승병장 영규 대사도, 이름 없는 의병들도 모조리.​그 아까운 목숨들을 역사책의 한 줄로 남게 할 순 없었다.​"최가야."​"예, 대장님. 헉헉."​최가가 혀를 빼물고 달려왔다.​"현무는 천천히 오라고 해. 나대용 형씨한테 맡기고, 우린 정예 요원만 추려서 먼저 뛴다."​"뛰어서 말입니까? 여기서 금산까지요?"​"그래. 다리 튼튼하잖아. PT 체조로 단련된 허벅지를 믿어라."​나는 미숙이를 허리춤에 단단히 묶었다.​"늦으면 다 죽는다. 살리고 싶으면 뛰어."​우리는 산길을 달렸다.전생의 나는 5분만 뛰어도 숨이 찼을 테지만, 지금의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에너자이저였다. 산을 타고 계곡을 넘었다.​한밤중이 되어서야 금산성 인근, 눈벌(연곤평)이 내려다보이는 야산에 도착할 수 있었다.​"허억... 허억... 대장님... 도착했습니다..."​최가와 병사들이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하지만 나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금산성.성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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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화: 꼰대와 괴물 2

전쟁에서 이기는 게 장땡이지, 방식이 뭐가 중요한가. 이 양반은 전쟁을 무슨 예법 대결로 착각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영감님. 전쟁은 소꿉장난이 아닙니다. 이기면 충신이고 지면 역적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적을 죽이는 게 군인의 본분 아닙니까?"​"말버릇 보게!"​조헌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군인에게 중요한 건 기개와 명분이다! 오랑캐 놈들처럼 비열한 술수를 쓰느니, 차라리 떳떳하게 죽어서 이름을 남기는 게 낫다!"​전형적인 꼰대 논리.죽어서 이름을 남기면 뭐 하나. 내 가족, 내 백성은 다 죽어나가는데.​"그래서, 저 수많은 백성을 데리고 죽으러 가시겠다는 겁니까?"​나는 밖을 가리켰다.​"저기 있는 700명.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입니다. 영감님 명예 챙기자고 다 죽이실 겁니까?"​"이, 이 무식한 놈이! 죽으러 가는 게 아니다! 의(義)를 보이러 가는 것이다!"​조헌이 지팡이를 바닥에 쾅 찍었다.​"우리가 여기서 피를 뿌려야, 잠자고 있는 조선의 선비들이 깨어날 것이다! 조정이 정신을 차릴 것이다! 우리는 불쏘시개가 되러 온 것이다!"​말이 안 통한다.이 사람은 군사적 승리가 목적이 아니었다. '순국(殉國)'이라는 거대한 퍼포먼스를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이다.​숭고하다. 인정한다.하지만 나는 그 꼴 못 본다.살아서 싸울 수 있는 700명의 병력을, 고작 불쏘시개로 태워버리는 건 낭비다. 그것도 내 눈앞에서.​"영감님."​나는 목소리를 깔았다.​"저는 장사꾼입니다.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합니다. 저 아까운 인력을 잿더미로 만드는 꼴은 도저히 못 보겠습니다."​"네놈이 못 보면 어쩔 텐가? 썩 물러가라! 내일 날이 밝으면 우리는 진격한다!"​조헌은 완고했다. 벽창호가 따로 없었다.옆에 있던 영규 대사가 나직하게 거들었다.​"젊은이. 뜻은 고마우나, 우리 대장의 고집은 황소도 못 꺾네. 그냥 돌아가게."​황소?황소라.​내가 제일 잘 다루는 게 황소인데.​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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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화: 물리적 설득 1

​"이거 놓지 못하겠느냐! 이 무식한 놈! 상놈! 도적놈!"​등 뒤에서 찰진 욕설이 랩처럼 쏟아졌다.조헌 영감님. 연세도 지긋하신 분이 폐활량 하나는 기가 막혔다. 산을 오르는 내내 쉬지도 않고 소리를 질러대는 통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영감님. 혀 깨무십니다. 좀 조용히 가시죠."​나는 짐짝처럼 둘러멘 조헌을 추스르며 산길을 올랐다.​내 왼쪽 겨드랑이에는 기절한 영규 대사가 끼여 있었다. 덩치 큰 스님이 축 늘어져 있으니 무게가 꽤 나갔지만, 내게는 솜이불 정도였다.​"네놈이 감히 의병장을 능멸하고도 무사할 줄 아느냐! 내 당장 내려가서 왜적과 싸우다 죽을 것이다! 그게 선비의 도리거늘!"​조헌이 내 등짝을 주먹으로 퍽퍽 쳤다. 안마받는 기분이었다.​"도리 좋아하시네. 개죽음 당하는 게 도리입니까?"​나는 씩씩거리며 걸음을 재촉했다.​뒤를 돌아보니 가관이었다.700명의 의병들이 쭈뼛거리며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대장이 납치되어 가니 구해야 할 것 같긴 한데, 납치범(나)이 너무 강력해 보여서 덤비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도망가자니 의리가 없고.​그야말로 오리 떼가 어미 오리 따라오듯 줄줄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빨리 가자! 밥 줄 테니까!"​최가가 맨 뒤에서 양치기 개처럼 의병들을 몰았다.​우리가 도착한 곳은 금산성 맞은편, 험준한 산봉우리였다.아래로는 조헌이 원래 진을 쳤던 연곤평(눈벌)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자리였다.​"도착했습니다."​나는 조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영규 대사도 옆에 뉘었다. 스님은 아직도 드르렁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내가 급소를 너무 정확하게 쳤나 보다.​"쿨럭! 이, 이 괘씸한..."​조헌은 땅에 발을 딛자마자 지팡이를 찾았다. 없으니까 주변에 있던 나뭇가지를 주워 들고 나를 겨눴다.​"네놈이 나를 욕보였어! 내 오늘 너를 죽이고 저승에 가겠다!"​독기 어린 눈빛.진짜로 찌를 기세였다.​나는 피하지 않고 그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죽이려면 죽이쇼. 근데 그전에 구경이나 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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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화: 물리적 설득 2

붉은 불기둥이 치솟고, 바위 파편들이 사방으로 튀었다. 폭심지 근처에 있던 일본군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주변에 있던 놈들은 충격파에 휩쓸려 낙엽처럼 날아갔다.​"끄아아악!""화산이 터졌다!"​아비규환.정돈되었던 일본군 진형이 순식간에 붕괴되었다. 조총수들은 총을 버리고 도망쳤고, 승병들은 염불을 욀 새도 없이 불타올랐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었다.​"보셨습니까, 영감님."​나는 넋이 나간 조헌을 내려다보았다.​"저게 제가 싸우는 방식입니다. 내 피는 한 방울도 안 흘리고, 놈들의 피로 강을 만드는 거."​"......"​"의(義)요? 좋습니다. 훌륭하죠. 근데 죽어서 지키는 의가 무슨 소용입니까? 살아서 놈들 목 하나라도 더 베는 게 진짜 의 아닙니까?"​조헌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는 불타오르는 적진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평생 믿어왔던 '죽음의 미학'이, '압도적인 화력' 앞에서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그때, 옆에서 "으음..." 하는 소리가 들렸다.영규 대사가 깨어났다.​그는 부스스 일어나 앉더니, 산 아래의 불바다를 보고 눈을 비볐다.​"허... 내가 지옥에 온 것인가? 염라대왕이 불놀이를 하는구먼."​"아직 이승입니다, 스님."​내가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그리고 저 불놀이는 제가 한 겁니다."​영규 대사는 상황을 파악하고는 너털웃음을 터뜨렸다.​"허허허! 대단하군. 자네가 우리를 살렸어."​그는 조헌의 어깨를 짚었다.​"중봉(조헌의 호). 고집 그만 피우시게. 부처님도 개죽음은 원치 않으실 걸세. 저 젊은이 말이 맞아. 이기는 게 중요해."​조헌이 입술을 깨물었다. 자존심이 강한 노인이었지만, 눈앞의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그의 눈빛에서 독기가 빠져나가 있었다. 대신 그 자리에 새로운 감정이 들어차고 있었다. 인정. 그리고 전율.​"네놈... 이름이 뭐라고 했지?"​"김덕령입니다."​"덕령이라..."​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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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화: 금산의 반격 1

​콰직!​내 손에 들린 미숙이가 왜병의 투구를 강타했다. 쇠가 찌그러지는 소리와 두개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끔찍한 화음을 이뤘다.​손끝에 전해지는 묵직한 진동.역시 흑단목이다. 참나무였다면 벌써 부러졌을 텐데, 이놈은 쇠몽둥이마냥 짱짱했다.​"비켜!"​나는 쓰러지는 놈을 발로 차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내 앞을 막아선 왜군 창병들이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당연하겠지.멀쩡하던 진영이 갑자기 폭발하고, 하늘에서 바위가 떨어지더니, 산 위에서 괴물들이 쏟아져 내려왔으니까. 놈들의 지휘 체계는 이미 박살이 난 상태였다.​"죽여라!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최가가 낫을 휘두르며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익호군 녀석들은 신이 나서 날뛰었다. 훈련 때 흘린 땀방울이 전장에서의 생존율로 보상받고 있었다. 놈들은 3인 1조로 움직이며 당황한 왜군들을 하나씩 각개격파하고 있었다.​그뿐만이 아니었다.​"이놈들! 네놈들이 조선 땅을 더럽히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백발을 휘날리며 칼을 휘두르는 노인. 조헌이었다.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죽으러 가겠다며 고집을 피우던 꼰대 영감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 그의 눈에는 살기가 등등했다. 늙은 호랑이가 이빨을 드러낸 것 같았다.​서걱!​조헌의 칼이 왜병의 어깨를 깊숙이 베었다. 문신(文臣) 출신이라 무시했는데, 칼솜씨가 제법이었다. 악과 깡으로 싸운다는 게 저런 거구나 싶었다.​"나무아미타불! 지옥으로 가거라!"​그 옆에서는 영규 대사가 거대한 철장(쇠지팡이)을 풍차처럼 돌리고 있었다. 스님의 쇠지팡이에 맞은 왜군들은 허수아비처럼 날아갔다. 살생을 금하는 불가(佛家)의 제자라기엔 타격감이 너무 찰졌다.​전황은 우리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하지만 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놈들의 지휘관은 안코쿠지 에케이(安国寺恵瓊). 승려 출신의 다이묘였다. 그래서인지 적들 중에는 머리를 깎고 기괴한 승복에 갑옷을 걸친 승병들이 섞여 있었다.​"조센징! 죽어라!"​승병 하나가 나기나타(월도)를 휘두르며 내게 덤벼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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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화: 금산의 반격 2

나는 땅을 박차고 놈들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회전 회오리 슛... 이 아니라, 회전 방망이질.​부웅- 퍽! 억!​360도 회전하며 휘두른 미숙이에 놈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갑옷이 찌그러지고 뼈가 나가는 소리가 연달아 터졌다.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꺾인 놈들이 사방으로 날아갔다.​"괴물이다! 도망쳐!"​놈들의 전의가 완전히 꺾였다.안코쿠지 에케이는 이미 상황이 글렀다는 걸 파악했는지, 본대를 이끌고 금산성 쪽으로 꽁무니를 빼고 있었다.​"쫓지 마라! 성 안으로 들어가면 못 잡는다!"​나는 흥분해서 쫓아가려는 익호군들을 말렸다.금산성은 견고하다. 공성 장비 없이 들이닥쳤다가는 위에서 쏘아대는 조총과 화살에 역관광 당하기 딱 좋다. 궁지에 몰린 쥐를 너무 몰아붙이면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여기서 만족해야 했다.적의 기습 부대를 섬멸하고, 700 의병을 살려낸 것. 그것만으로도 대성공이었다.​"상황 종료!"​내 외침에 전투가 멈췄다. 전장에는 신음 소리와 피 냄새만이 남았다.​나는 미숙이에 묻은 피를 풀밭에 쓱쓱 닦고 조헌에게 다가갔다.영규 대사는 의병들의 부축을 받고 지혈 중이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조헌은 멍하니 불타버린 왜군 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영감님. 다치신 데는 없습니까?"​내가 묻자, 조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그의 눈가는 젖어 있었다.​"이겼어... 우리가... 이겼어..."​"네. 이겼습니다. 아주 압도적으로요."​나는 씨익 웃었다.​"제가 말했잖습니까. 죽는 것보다 이기는 게 낫다고. 죽어서 이름 남기면 뭐합니까? 살아서 승전보 울리는 게 진짜 애국이지."​조헌의 어깨가 들썩였다.평생을 성리학적 명분에 갇혀 살았던 늙은 선비. 그에게 전쟁은 곧 '충(忠)을 위한 희생'이었다. 하지만 오늘, 그는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화약과 전술, 그리고 압도적인 무력이 만들어낸 승리의 쾌감을. 그리고 살아남은 부하들의 안도하는 표정을.​"살아서... 내 병사들이 살아서 돌아가는구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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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화: 전라감영의 호출 1

​"장군님! 감사합니다! 익호장군 으뜸이오!"​담양으로 돌아오는 길은 꽃길이었다.진짜 꽃을 뿌려주는 건 아니었지만, 길가에 늘어선 백성들의 환호는 그 어떤 꽃보다 화려했다.​금산에서 700 의병을 구하고 왜군을 섬멸했다는 소식은 이미 바람을 타고 호남 전역으로 퍼졌다. 나는 더 이상 동네 힘센 형이 아니었다. 호남을 지키는 수호신, '익호장군(翼虎將軍)'이었다.​"어깨 펴라. 너희가 영웅이다."​내가 말하자 흙투성이가 된 익호군 녀석들이 가슴을 쫙 폈다. 최가는 아예 코가 하늘을 찌를 기세였다.​"봤냐? 내가 바로 그 익호군 조장 최가다!"​객주에 도착하자 서백설이 달려 나왔다.​"왔어요? 다친 데는요?"​"멀쩡해. 밥이나 줘. 배고파 죽겠다."​"하여간... 밥 타령은."​서백설은 눈을 흘기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다. 그녀도 알 것이다. 내가 이기고 돌아올 때마다 그녀의 상단(주식회사 익호)의 가치도 천정부지로 솟고 있다는 것을.​며칠간은 평화로웠다.참전했던 이들은 전투의 피로를 풀고, 영규 대사는 요양을, 망가진 무기들은 수리를 하고, 논공행상을 했다.​​조헌 영감님과 영규 대사는 담양에 며칠 머물며 전열을 정비했다. 그리고 떠나는 날, 두 사람은 비장한 얼굴로 내게 왔다.​"호남은 자네가 지키게. 나는 충청도로 가야겠네."​"충청도요? 거긴 이미 왜놈들 천지 아닙니까?"​"그렇기에 가야지. 놈들이 청주성을 점거하고 충청도를 유린하고 있다네. 내 그곳을 탈환하고, 더 많은 의병을 모아 한양으로 올라갈 것일세."​조헌의 눈빛은 확고했다. 단순한 고집이 아니었다. 나라의 허리를 끊고, 임금이 계신 곳으로 길을 뚫겠다는 우국지사의 결의였다.​나는 옆에 서 있던 영규 대사를 바라보았다.​"스님도 가십니까?"​영규 대사가 껄껄 웃으며 육중한 철장을 들어 올렸다.​"바늘 가는 데 실이 가야지 않겠나. 그리고 자네가 금산에서 구해준 이 목숨, 부처님을 위해, 그리고 이 땅의 백성을 위해 써야 하지 않겠는가."​"두 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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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화: 전라감영의 호출 2

끼이익- 쿵.​성문이 열렸다.우리는 당당하게 입성했다.​전주 백성들이 길가로 쏟아져 나왔다."저게 그 호랑이 잡은 장수가 타는 수레래!""왜놈들도 저거 보고 오줌을 지렸다던데?"​현무가 지나갈 때마다 바닥이 울렸다. 쇳덩어리의 육중함이 백성들에게는 든든함으로, 관군들에게는 위협으로 다가왔다.​감영 앞마당.이미 수백 명의 관군이 창을 들고 도열해 있었다. 기선 제압용이겠지. 하지만 현무 세 대가 마당으로 들어오자, 그들의 기세는 순식간에 쭈그러들었다.​"주차해."​내 명령에 현무들이 관아 건물 정면을 향해 멈춰 섰다. 포구가 정확히 감사가 앉아 있는 대청마루를 겨누고 있었다.​나는 미숙이를 어깨에 걸치고 현무에서 뛰어내렸다.​"담양 의병장 김덕령! 감사 영감을 뵙습니다!"​목소리에 힘을 실었다.​대청마루 문이 열리고, 이광이 모습을 드러냈다.창백한 얼굴. 깡마른 체구. 눈동자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마당을 가득 채운 철갑 전차들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자, 자네가 덕령인가?"​"예. 부르셔서 왔습니다."​"오느라 수고했다. 헌데... 저 흉물스러운 쇳덩어리들은 무엇이냐?"​"흉물이라뇨. 왜놈들 때려잡은 일등 공신입니다. 영감님께 구경도 시켜드리고, 혹시나 오해하실까 봐 보여드리러 왔습니다."​"오해?"​"네. 제가 이걸로 딴맘 품으면 큰일 나겠다, 뭐 그런 오해요."​나는 빙긋 웃었다.말은 공손했지만, 속뜻은 '나 건드리면 이걸로 밀어버린다'였다.​이광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그는 알았다. 저 전차들이 맘만 먹으면 여기 있는 관군들을 뚫고 자신을 짓밟을 수 있다는 것을.​"크, 크흠! 그럴 리가 있나. 자네의 충심은 익히 들어 알고 있네."​이광이 억지 미소를 지었다.​"내 자네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그 뛰어난 무용을 높이 사서 관직을 내리고자 함일세."​"관직요?"​"그렇네. 내 휘하의 조방장(助防將) 자리를 주겠네. 관군과 합류하여 내 명을 받들라."​역시.예상대로다. 벼슬 하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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