جميع فصول : الفصل -الفصل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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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화: 바다를 건너 온 불청객 3

​일본도(와키자시).​"대업(전쟁)을 앞두고 조선의 숨은 싹들을 자르라는 명을 받고 돌아다니던 중이었지. 시골 구석에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는 미친놈이 있다기에 와봤는데... 과연, 헛소문은 아니었군."​놈이 자세를 잡았다. 무게중심을 낮추고 칼을 얼굴 옆으로 세웠다. 전형적인 왜구의 검술 자세.​"이름이 뭐냐?"​"알 필요 없다. 어차피 죽을 목숨."​팟!​말이 끝나기도 전에 놈이 사라졌다.아니, 내 눈앞에서 시야가 흐려진 것 같았다. 연막탄? 아니, 순수하게 속도로 시야를 교란하는 보법이었다.​'빠르다.'​흑산채 두목과는 차원이 달랐다. 살기를 숨기고 접근하는 은밀함.​쉭!​등 뒤에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서걱.​옷깃이 베였다. 살짝만 늦었어도 목덜미가 날아갈 뻔했다.​"호오, 이걸 피해?"​놈의 목소리가 왼쪽에서 들렸다.​나는 방망이를 휘둘렀다.​붕-!​허공을 갈랐다. 놈은 이미 낮은 자세로 내 다리 사이를 파고들고 있었다.​'닌자(忍者)인가.'​정규군 무사가 아니다. 첩보와 암살에 특화된 놈이다.​놈의 칼이 내 아킬레스건을 노리고 들어왔다.​나는 피하지 않았다.피하면 말린다. 놈의 속도를 따라잡으려 하면 안 된다. 내 장점은 속도가 아니라 내구력이다.​깡!​칼날이 내 발목을 때렸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 대신, 맑은 쇳소리가 났다.​"......?"​놈의 움직임이 멈췄다. 칼날이 튕겨 나간 충격에 손목이 저린 듯했다.​"뭐냐, 네놈 몸뚱이는."​"통뼈라서."​나는 놈의 머리채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놈이 기겁하며 백덤블링으로 거리를 벌렸다.​"쇠를 두른 것 같군. 과연, 그 전차도 네놈이 만든 것인가?"​"말 많네. 조선말은 어디서 배웠냐? 학원 다녔어?"​나는 어깨를 돌렸다.​"근데 그거 아냐? 기교가 아무리 좋아도, 체급 깡패한테는 안 된다는 거."​"오만하군!"​놈이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별 모양의 쇠붙이. 수리검이었다.​슈슈슉!​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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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심문과 결단 1

​치이익-​찬물을 끼얹자 놈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눈을 떴다.​이곳은 객주 뒷마당에 있는 쌀 창고. 쌀가마니를 다 들어내고 임시 취조실로 만들었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의자에 묶인 사내. 아까 숲속에서 날아다니던 그 닌자 놈이었다.​"정신이 좀 드냐?"​나는 의자를 끌어다가 놈의 코앞에 앉았다. 내 손에는 육모방망이 '미숙이'가 들려 있었다.​놈은 눈을 뜨자마자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손발은 밧줄로 꽁꽁 묶였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읍! 으읍!"​놈이 몸부림쳤지만, 의자는 바닥에 못 박혀 꿈쩍도 하지 않았다.​"조용히 해. 여기 방음 안 되니까."​나는 놈의 입에 물린 재갈을 풀어주었다.​"퉤! 비겁한 놈! 무사를 이렇게 대우하다니!"​재갈이 풀리자마자 놈이 독기를 뿜어냈다. 서툰 조선말이었지만 욕설만큼은 찰졌다.​"무사? 숨어서 뒤통수나 치는 놈들이 무슨 무사야. 넌 그냥 간첩이야."​나는 미숙이로 놈의 어깨를 툭툭 쳤다.​"자, 시간 없으니까 본론으로 가자. 이름이 뭐냐?"​"......죽여라."​놈은 고개를 돌렸다. 전형적인 레퍼토리였다. 훈련받은 첩자들은 쉽게 입을 열지 않는다. 고문을 해도 혀를 깨물고 죽으려 들지.​하지만 나는 놈을 고문할 생각이 없었다.아프게 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건, 희망을 줬다가 뺏는 거니까.​"죽여달라고? 그래, 원하면 죽여주지. 근데 그냥은 안 죽여."​나는 놈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네놈 시체를 잘게 다져서, 돼지 여물통에 섞어버릴 거야. 그럼 넌 돼지 똥이 돼서 조선 땅에 거름으로 뿌려지겠지. 너희 사무라이들이 제일 싫어하는 게 그런 개죽음 아니냐? 명예도 뭣도 없는."​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사무라이, 혹은 닌자들에게 죽음보다 두려운 건 불명예다. 영혼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더러운 땅에 섞인다는 공포.​"하지만."​나는 어조를 바꿨다.​"네가 협조하면 살려줄 수도 있어. 전쟁 끝나면 배 태워서 고향으로 보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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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심문과 결단 2

​"부산이 뚫리면 놈들은 세 갈래로 올라올 겁니다. 그중 한 갈래는 반드시 호남을 노릴 겁니다. 곡창 지대니까요."​나는 담양과 전주, 그리고 남해안 일대를 손가락으로 짚었다.​"우리는 여기를 지킵니다. 조정이 도망가든 말든, 우리는 우리 땅을 사수합니다."​"하지만 대장님."​최가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우리 병력은 고작 50명입니다. 15만 대군이랑 싸우기엔 너무 적습니다."​"알아. 그래서 지금부터 판을 키울 거다."​나는 서백설을 바라보았다.​"서 행수. 돈 아끼지 마. 창고에 있는 거 다 풀어."​"다... 다요?"​"쌀을 사. 무조건 많이. 전쟁 나면 쌀값이 금값이 될 거야. 지금 사두지 않으면 나중에 우리 애들 굶겨야 해."​서백설이 입술을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인근 고을 쌀은 제가 다 쓸어올게요. 창고가 터지도록 채워놓을게요."​그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상인의 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난세일수록 물자 확보가 생존의 열쇠라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나대용 형씨."​"말하시오."​"현무 2호기, 3호기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화약. 지금보다 10배는 더 필요합니다."​"10배라... 똥지게를 짊어지고 살아야겠구려."​나대용이 씁쓸하게 웃었지만, 눈빛은 결의에 차 있었다.​"걱정 마시오. 내 손가락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만들어보리다. 그리고 거북선 설계도도 거의 마무리됐소. 여차하면 좌수영(이순신) 쪽에 보낼 생각이오."​"좋습니다. 그건 나중에 제가 직접 전달하겠습니다."​나는 마지막으로 최가와 익호군 간부들을 보았다.​"너희는 내일부터 '징병'에 들어간다."​"징병이라니요?"​"동네 건달, 백수, 산적, 유민... 닥치는 대로 긁어모아. 밥 주고 재워준다고 하면 올 놈들 천지다."​"아무나 다 받습니까?"​"아니. 면접은 내가 본다. 깡다구 있는 놈들만 추려서 정예병으로 만든다. 목표는 300명이다."​300명.스파르타? 아니, 익호군이다.잘 훈련된 300명이면 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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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폭풍이 오고 있다 1

시간은 화살처럼, 아니 조총 탄환처럼 빠르게 지나갔다.어느새 찬 바람이 잦아들고, 메마른 가지에 물이 올랐다. 담양천 변에는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피었고, 추월산 자락에는 진달래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1592년, 임진년(壬辰年)의 봄.조선 역사상 가장 잔인했던, 그리고 가장 뜨거웠던 봄이 왔다.객주 뒷마당.대장간의 열기는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어이! 3호기 왼쪽 바퀴 축이 좀 뻑뻑하다! 기름칠 더 해!"나대용의 호통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는 이제 선비라기보단 완벽한 현장 소장이었다. 기름때 묻은 도포를 걷어붙이고 망치를 든 모습이, 붓을 든 모습보다 백 배는 더 잘 어울렸다.그의 시선 끝에는 세 대의 검은 괴물이 웅크리고 있었다.현무(玄武) 1호, 2호, 3호.초기작이었던 1호기는 덩치만 컸지 투박했지만, 개량을 거듭한 2호기와 3호기는 세련된 살인 병기로 진화해 있었다.두꺼운 정철 장갑 위에는 적병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쇠못을 촘촘히 박았고, 전면부에는 도깨비 형상의 충각을 달아 파괴력을 높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는 '화력'이었다."화포 장착 완료했습니다!"최가가 2호기 전면부 해치를 열고 소리쳤다.용머리 형상의 포문 안쪽에는, 나대용이 심혈을 기울여 주조한 '현자총통(玄字銃筒)'이 거치되어 있었다. 대형 화포인 천자총통보다는 작지만, 기동성과 파괴력을 갖춘 중형 화포.이걸 수레에 싣고 쏜다고?조선 수군도 배가 뒤집힐까 봐 조심하는 물건을?하지만 나대용은 해냈다. 수레바닥에 충격 흡수용 판스프링(대나무와 쇠를 겹쳐 만든)을 설치하고, 무게 중심을 낮춰 반동을 잡은 것이다. 역시 천재는 다르다."좋아. 이 정도면 왜놈들 진형을 볼링핀처럼 쓰러뜨릴 수 있겠어."나는 3호기의 장갑을 두드려보았다. 텅, 하고 묵직한 소리가 났다."대장님, 볼링핀이 뭡니까?""있어, 그런 게. 둥근 공 굴려서 다 넘어뜨리는 거.""아, 격구 같은 겁니까?""비슷해. 이번엔 공 대신 이 쇳덩이를 굴려서 왜놈들을 넘어뜨릴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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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폭풍이 오고 있다 2

"놈들이 상륙하면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올 거다. 경상도 방어선? 미안하지만 기대하지 마라. 순식간에 뚫릴 거다.""관군이 그렇게 약합니까?"최가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약한 게 아니라, 준비가 안 됐어. 반면 놈들은 백 년 동안 지들끼리 칼부림만 하던 전쟁광들이야. 정면 승부로는 안 돼."나는 손가락을 서쪽으로 옮겼다. 경상도와 전라도의 경계."놈들의 1차 목표는 한양이지만, 보급을 위해서는 반드시 호남을 노릴 거다. 곡창 지대니까."내 손가락이 험준한 산맥을 가로질러 두 지점에 멈췄다."이치(梨峙)와 웅치(熊峙)."진산과 금산을 넘어 전주로 들어오는 길목.역사 속에서 권율 장군과 황진 장군이 목숨을 걸고 지켜냈던 그곳."우리는 여기로 간다.""네? 담양을 비우고요?"서백설이 놀라서 물었다."담양에서 기다리면 늦어. 놈들이 전주성을 넘게 두면 호남 전체가 먹혀. 그전에 산속 좁은 길목에서 틀어막아야 해."나는 나대용을 바라보았다."형씨. 현무들, 산길 기동 가능합니까?""바퀴를 보강해서 험지 주파도 문제없소. 다만 끄는 놈들이 죽어나겠지.""그건 우리 애들이 알아서 할 겁니다. 밥값 해야죠."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내일 새벽에 출발한다.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 식량, 무기, 화약. 남기지 말고 싹 다.""객주는요? 우리 가게는 어떡하고요?"서백설이 울상을 지었다. 그녀에게 이곳은 단순한 가게가 아니라, 피땀 흘려 일군 터전이었다."가게가 중요해, 목숨이 중요해? 전쟁 끝나면 더 크고 좋은 기와집으로 지어줄게. 약속한다.""......진짜죠? 딴소리하면 그땐 대장님이고 뭐고 없어요.""그래. 이 김덕령 이름 걸고 맹세한다."그때, 서백설이 눈매를 매섭게 하며 말했다."그럼 저도 갑니다.""뭐? 넌 왜?""군자금 관리 누가 해요? 쌀은 누가 배급하고요? 당신들끼리 보내면 흥청망청 다 써버리고 굶어 죽기 딱 좋잖아요. 내 돈은 내가 지켜요."그녀의 말이 맞았다. 보급관이 없으면 군대는 유지가 안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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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폭풍이 오고 있다 3

최가는 현무 3호기의 바퀴살을 점검하며 굵은 땀을 훔치고 있었다.내일이면 당장 출정이다. 동네 양아치가 이제는 나라를 지키러 전장으로 나간다니, 스스로 생각해도 기가 찰 노릇이었다.'죽지나 말아야 할 텐데.'투박한 손으로 칼집을 매만지는데, 등 뒤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누구냐?"도끼눈을 뜨고 돌아보자, 담벼락 그림자 뒤에서 웬 조그만 그림자가 흠칫 놀라더니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미령이었다."어라? 꼬맹이 너 아직 안 자고 뭐 하냐?""꼬, 꼬맹이라고 부르지 말라니까요..."미령이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최가 앞으로 다가왔다. 두 손을 등 뒤로 감춘 채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발끝으로 애꿎은 흙바닥만 툭툭 차댔다."왜 그래? 어디 아프냐? 의무대 짐 쌀 거 남았어?"최가가 퉁명스레 물으며 흙 묻은 바지를 툭툭 털었다.미령이는 대답 대신 등 뒤에서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조잡하지만 정성껏 꿰맨 티가 역력한 붉은 헝겊 주머니였다."이거요.""이게 뭔데? 개똥참외냐?"최가가 퉁명스레 묻자, 눈앞에 붉은 헝겊 주머니를 내밀고 서 있던 미령이가 발끈하며 주먹으로 그의 옆구리를 콩 쥐어박았다."부적이에요, 부적! 절에 가서 받아온 거란 말이에요! 칼이랑 화살 비껴가게 해주는 거니까 꼭 지니고 계세요!""이 녀석 보게... 난 또 뭐라고.""다치지 말고... 꼭 살아야 해요. 알았죠?"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미령이가 후다닥 안채로 도망치듯 사라졌다. 최가는 제 허리춤에 매달린 삐뚤빼뚤한 주머니를 내려다보며 헛기침을 삼켰다.---다음 날 새벽.여명이 밝아오기도 전, 익호군은 움직이기 시작했다."전군, 출발!"내 고함과 함께 거대한 행렬이 움직였다.선두에는 내가 섰다. 붉은 누빔옷을 입고, 허리에는 미숙이(방망이)를 차고, 등에는 활을 멘 채.그 뒤로 육지 거북선 현무 세 대가 굉음을 내며 굴러갔다. 익호군 300명이 대오를 맞춰 행군했다.그리고 그 뒤를 이어, 서백설과 미령이가 이끄는 보급 수레 행렬이 따랐다. 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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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4월 13일, 지옥문이 열리다 1

​산세가 험했다.깎아지른 절벽과 울창한 숲. 사람이 다니라고 만든 길이라기보단, 짐승이나 다닐 법한 좁은 오솔길이 뱀처럼 굽이쳐 있었다.​이치(梨峙). 배티재.전라도 진산에서 금산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자, 호남을 지키는 천혜의 요새.​역사대로라면 이곳은 훗날 권율 장군과 황진 장군이 1,500명의 병력으로 왜군 1만 명을 막아내는 전설적인 전장이다. 하지만 지금은 주인이 없다. 관군은 아직 사태 파악도 못 하고 있을 테니까.​"멈춰라! 진지 구축한다!"​내 고함에 행군하던 익호군 300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현무 1호기, 좌측 언덕! 2호기는 우측! 3호기는 길 한가운데 박아!"​우르릉- 쿵!​거대한 쇳덩어리들이 자리를 잡았다. 좁은 산길을 현무 세 대가 틀어막으니, 그야말로 철벽(鐵壁)이 따로 없었다.​"최가야."​"예, 대장님!"​최가가 달려왔다. 녀석의 얼굴은 땀범벅이었지만 눈빛은 살아있었다.​"저 앞쪽 길목에 목책 세우고, 좌우 숲속에는 함정 파라. 멧돼지 잡을 때 쓰던 거 알지? 대나무 깎아서 박아놔."​"알겠습니다! 놈들 발바닥에 구멍을 내주겠습니다!"​병사들이 톱과 삽을 들고 흩어졌다.​나는 바위 위에 걸터앉아 물을 마셨다.바람이 시원했다. 산 아래로는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꽃이 붉은 바다를 이루고 있었다.​너무나 아름다운 풍경이었다.하지만 내 눈에는 저 붉은 꽃들이 마치 선혈(鮮血)처럼 보였다.​'오늘이 며칠이지?'​음력 4월 14일.어제가 13일이었다. 역사대로라면 어제 오후, 부산진 첨사 정발 장군이 전사하고 부산포가 함락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늘쯤이면 동래성 부사 송상현이 결사항전하다 순절했을 테고.​지옥문이 열렸다.1592년의 그 지독한 전쟁이 기어이 시작된 것이다.​"대장님, 저기 좀 보십시오."​보초를 서던 춘식이가 산 아래를 가리켰다.​멀리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군대의 행렬인가 싶어 긴장했지만,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피난민들이었다.보따리를 머리에 인 아낙네, 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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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4월 13일, 지옥문이 열리다 2

​"게다가 우리한테는 이 괴물들이 있다. 조총? 쏴보라고 해. 이빨도 안 박힐 테니까."​나는 숨을 고르고, 목소리를 낮췄다. 가장 진솔한 톤으로.​"도망가고 싶으면 가라. 안 말린다."​"......"​"근데, 너희가 도망가면 저 뒤에 있는 백성들은 누가 지키냐? 너희 가족들은? 집에 가서 '나 무서워서 도망왔어' 하고 처자식 볼 낯이 있냐?"​최가가 주먹을 꽉 쥐었다. 춘식이도 고개를 들었다.​"나는 안 간다. 여기서 죽으면 죽었지, 비겁하게 등 보이고 도망가서 평생 쪽팔리게 살기는 싫다."​나는 씨익 웃었다.​"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있잖아."​나는 상의를 찢어발기듯 벗어 던졌다.서백설이 만들어준 붉은 누빔옷 아래로, 바위처럼 단단한 근육이 드러났다.​"칼도 안 들어가는 금강불괴 대장이 맨 앞에서 싸워주겠다는데, 뭐가 무섭냐? 너희는 내 뒤에서 밥값이나 해라. 알겠냐!"​정적.그리고 폭발.​"와아아아!""까짓거 한번 해봅시다!""왜놈들 다 죽여버려!"​사기가 다시 타올랐다. 공포가 투기(鬪氣)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단순한 선동이 아니다. '믿을 구석(대장, 무기)'이 있다는 확신이 그들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좋아. 위치로!"​병사들이 각자 위치로 달려갔다. 현무 뒤에 숨어 조총과 활을 겨누고, 숲속 매복조가 몸을 숨겼다.-​해 질 녘.붉은 노을이 산마루에 걸렸다.​멀리 고갯길 아래쪽에서 흙먼지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의 행렬과는 달랐다. 질서 정연하고, 빠르고, 무엇보다 살기가 느껴지는 움직임.​깃발이 보였다.등에 꽂은 깃발(사시모노)이 바람에 펄럭였다. 조선군의 깃발이 아니었다.​세 개의 둥근 원이 그려진 깃발.그리고 선두에 선 무사들의 기괴한 투구.​왔다.왜군 선봉대다.​"전원, 전투 준비."​내 명령이 떨어지자, 찰그락거리는 무기 소리와 함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했다.​나는 현무 1호기 앞, 길 한가운데에 평상을 깔아놓고 앉았다.옆에는 술병 하나와 미숙이가 놓여 있었다.​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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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첫 번째 손님 1

​콰아아앙-!​세상은 하얀 연기와 붉은 불꽃, 그리고 찢어지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현무 3대의 아가리에서 뿜어져 나온 조란탄(鳥卵彈).새알만 한 쇠구슬과 날카로운 철편 수백 개가 부채꼴로 퍼져나가며 좁은 산길을 덮쳤다. 그것은 말 그대로 '강철의 비'였다. 피할 곳도, 숨을 곳도 없는 죽음의 소나기.​"갸아아악!""메, 메가...!(내 눈이...!)"​선두에 섰던 조총수들은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으깨졌다. 뒤따르던 창병들은 팔다리가 잘려나가거나 벌집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화약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고갯길.매캐한 유황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뒤섞여 코를 찔렀다.​나는 평상 위에 앉아 그 아비규환을 지켜보았다.손에 든 술잔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거참, 화력 한번 화끈하네."​나대용, 이 양반. 물건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들었다. 조선의 화포 기술에 현대의 산탄 개념을 섞었더니 이런 괴물이 탄생했다.​연기가 서서히 걷히자, 살아남은 자들의 모습이 드러났다.100여 명의 선봉대 중 서 있는 자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도 성한 놈은 거의 없었다.​"바, 바카나...(말도 안 돼...)"​왜군 장수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쥐고 있었다. 투구는 벗겨져 나갔고, 갑옷 여기저기에는 쇠구슬이 박혀 있었다. 운 좋게 직격탄을 피한 모양이다.​그의 눈동자는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고 있었다.조선의 오합지졸 군대를 예상하고 왔을 텐데, 눈앞에 나타난 건 괴물 같은 전차와 총알을 튕겨내는 거인, 그리고 지옥불이었으니 멘탈이 나갈 만도 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삐걱거리는 평상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어때? 조선의 환영 인사가 마음에 드냐?"​내가 일본어로 묻자, 장수가 흠칫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네놈...! 오니냐? 사람이냐?"​"글쎄다. 네놈들한테는 오니보다 더 무서운 존재일걸."​나는 육모방망이 '미숙이'를 어깨에 툭툭 쳤다.​"자, 1차 코스는 끝났고. 이제 2차 가야지?"​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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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첫 번째 손님 2

선봉대장.​그는 부상을 입었으면서도 뛰어난 검술로 익호군 두어 명을 베어 넘기며 저항하고 있었다.​"오너라! 조선의 오니야!"​장수가 나를 발견하고 칼끝을 겨눴다. 눈이 피로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죽여주마! 내 이름은..."​"관심 없어."​나는 말을 자랐다. 죽을 놈 이름 따위 외워서 뭐 하나.​나는 뚜벅뚜벅 걸어갔다.장수가 기합을 지르며 달려들었다.​"이야압!"​발도술(拔刀術).칼집에서 칼을 뽑는 동시에 베는 기술.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빨랐다. 목을 노린 일격.​하지만 내 눈에는 보였다.​나는 피하지 않았다.대신 왼팔을 들어 올렸다.​챙-!​맑은 쇳소리가 났다.장수의 칼이 내 팔뚝에 박히는 대신, 튕겨 나갔다. 옷감이 찢어지고 불꽃이 튀었지만, 내 피부는 멀쩡했다.​"뭐, 뭐야...?"​장수의 표정이 멍청해졌다.사람의 팔을 베었는데 쇠기둥을 친 것 같은 반동이 돌아왔으니 그럴 만도 했다.​"칼 좋네. 근데 주인이 좀 약하다."​나는 놈의 멱살을 잡았다.​"이거 놔라! 이 괴물!"​놈이 발버둥 치며 칼로 내 옆구리를 찔렀다. 퍽, 퍽. 하지만 이쑤시개로 코끼리 가죽을 찌르는 격이었다.​"아프진 않은데, 옷이 망가지잖아. 이거 우리 마누라... 아니, 동업자가 만들어준 건데."​서백설이 밤새워 만들어준 붉은 누빔옷. 구멍이 숭숭 뚫린 걸 보니 등짝 맞을 각오를 해야 할 것 같았다.​화가 났다.​"변상은 네놈 목숨으로 해라."​나는 오른손에 든 미숙이를 들어 올렸다.​"잘 가라. 조선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크으윽... 도요토미 님께서 복수를..."​퍼억!​놈의 머리통이 수박처럼 터졌다. 더 이상의 유언은 없었다.​나는 놈을 바닥에 던져버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전투는 끝나가고 있었다.살아남은 왜군은 없었다. 도망치려던 놈들은 함정에 빠져 대나무 창에 꿰뚫렸거나, 매복조에게 덜미를 잡혔다.​"대장님! 상황 종료입니다!"​최가가 피 묻은 낫을 닦으며 달려왔다. 얼굴에 튀긴 피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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