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빙의자는 억울한 죽음을 거부한다: Chapter 81 - Chapter 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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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화: 짧은 휴식과 첩보 1

"왔다! 대장님이 오셨다!"망루에서 보초를 서던 최가의 고함 소리가 담양 바닥을 울렸다.객주 대문이 활짝 열리고, 미령이와 나대용이 한달음에 달려 나왔다. 그들 뒤로 익호군 병사들과 마을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나는 현무 1호기 지붕 위에 앉아 손을 흔들었다.내 뒤로는 쌀과 화약, 쇠붙이가 가득 실린 수레 수십 대가 줄을 잇고 있었다. 전주성을 털어... 아니, 후원받아 온 전리품들이었다.나는 현무에서 뛰어내렸다. 착지하는 순간 다리가 살짝 후들거렸다. 며칠 동안 긴장하고 힘을 썼더니 피로가 몰려온 모양이었다."괜찮으세요?"미령이가 얼른 달려와 물바가지를 내밀었다."대장님! 물 드세요! 목 마르시죠?""어, 고맙다."그때 서백설이 쟁반을 들고 나왔다. 시원한 오미자차였다. 얼음이 동동 띄워진, 귀한 차였다."이거 마셔요. 머리 쓰는 데는 이게 최고라니까.""고맙다."차를 들이키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나대용 형씨! 선물 가져왔습니다!"내가 소리치자, 나대용이 수레 쪽으로 달려갔다. 그는 쌀에는 눈길도 안 주고, 오로지 쇠붙이와 화약 상자에만 매달렸다."오오! 이것은 정제된 유황 아니오! 게다가 이 쇠들은... 관아 대장간에서나 쓰는 상급 정철이구먼!"그는 쇠덩이를 볼에 비비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이거면 현무 4호기는 물론이고, 수류탄도 백 개는 더 만들겠소! 아니, 거북선 포신도 주조할 수 있겠어!""맘껏 쓰십쇼. 부족하면 또 뜯어오면 되니까."객주 마당은 다시 축제 분위기가 되었다.전주성에서 가져온 쌀로 밥을 짓고, 고기를 볶았다.나는 오랜만에 갑옷(누빔옷)을 벗고 편한 베옷으로 갈아입었다. 평상에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니, 이곳이 전쟁터라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평화롭네.'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이 평화는 내가, 그리고 우리 익호군이 목숨 걸고 지켜낸 결과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제 깨질지 모르는 유리조각 같은 것이라는 것을.-"아저씨."미령이가 쟁반을 들고 왔다.삼계탕이었다. 닭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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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짧은 휴식과 첩보 2

그날 밤.모두가 잠든 시각.객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쾅, 쾅, 쾅.급박하면서도 절제된 리듬.나는 미숙이를 챙겨 들고 나갔다."누구냐.""나주에서 왔소. 귀한 분의 심부름이오."나주?나대용의 고향이다.빗장을 풀자, 삿갓을 쓴 사내가 들어왔다. 옷차림은 평범한 보부상 같았지만, 허리춤에 숨겨진 단도와 단단한 몸놀림은 그가 훈련받은 군인임을 말해주고 있었다."김덕령 장사 되십니까?""그렇소만.""저는 전라좌수영 군관 송희립이라 합니다."좌수영? 이순신 장군의 부하?이 시점에 무슨 볼일로?갑작스런 방문으로 잠시 멍해졌다."어서 오십시오. 근데 여긴 어인 일로 오셨습니까. 혹여... 나대용 형씨를 찾아오신 겁니까?"송희립이 삿갓을 벗고 땀을 닦으며 말했다."예, 그렇습니다. 나대용 나으리를 뵈러 나주 본가에 갔더니 안 계시더군요.""아, 여기 와 계신 지 좀 됐습니다.""수소문 끝에 담양 산골짜기에서 쇠로 만든 거북이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장군께서 '대용이가 거기서 귀선(龜船) 연구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시며 급히 저를 보내셨습니다."역시. 이순신 장군은 다 알고 있었구나. 나대용이 거북선에 미쳐 있다는 걸. 그리고 '쇠 거북이' 소문만 듣고도 나대용이 여기 있다는 걸 간파하신 거다."잘 찾아오셨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나는 그를 나대용의 방으로 안내했다. 나대용은 늦은 밤까지 모형을 깎고 있었다."누구요? 이 밤중에.""손님이 왔습니다. 형씨를 보러."송희립이 정중하게 인사했다."나대용 나으리. 좌수사 영감의 밀명을 받고 왔습니다.""송 군관 아닌가! 자네가 여길 어떻게..."나대용이 벌떡 일어났다. 구면인 듯했다."장군께서 나으리를 찾으십니다."송희립은 품속 깊은 곳에서 비단 보자기에 싸인 서찰을 꺼냈다. 봉인에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라는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나대용이 떨리는 손으로 서찰을 받아 펼쳤다.그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읽어 내려갈수록 그의 표정이 진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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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화: 쌍룡(雙龍), 주인을 찾다 1

​날이 밝았다.밤새 내리던 이슬이 걷히고, 대장간의 화덕에는 다시 붉은 불이 붙었다.​나는 아침밥으로 멧돼지 뒷다리 하나를 뜯으며 마당으로 나갔다.​"서 행수!"​내가 부르자 서백설이 부스스한 얼굴로 안채에서 나왔다. 늦게까지 장부를 보느라 잠을 설친 모양이었다.​"아침부터 왜 소리를 질러요? 고막 떨어지겠네."​"짐 싸라. 배달 갈 데가 있다."​"배달? 어디로요?"​"여수. 전라좌수영."​서백설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이 확 달아난 모양이었다.​"이순신 장군님한테요? 설마 빈손으로 갈 건 아니죠?"​"당연하지. 우리가 누군데. 체면이 있지."​나는 창고를 가리켰다.​"저번에 전주성에서 이광 감사한테 뜯어온 거 있지? 쇠붙이랑 화약, 그리고 군량미 절반."​"네? 그걸 다요?"​"어. 싹 다 실어. 가는 김에 아주 생색을 제대로 내야지. 발신인은 '담양 의병장 김덕령'으로 대문짝만하게 쓰고."​"아니... 그게 얼마친데..."​서백설이 울상을 지었다. 장사꾼 입장에서 밑천을 통째로 내주는 건 살점을 떼어내는 고통일 것이다.​하지만 나는 단호했다.​"아까워하지 마. 그게 다 우리 목숨값이야. 바다가 뚫리면 우리 돈도 휴지 조각 되는 거 알잖아? 장군님이 든든하게 버텨주셔야 우리도 여기서 땅 파고 장사하는 거야."​"알죠, 아는데... 내 피 같은 쌀... 저거면 우리 애들 한 달은 먹일 텐데..."​그녀는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결국 익호군들에게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야! 1조부터 5조까지! 창고 열어! 수레에 짐 실어라! 깨지기 쉬운 건 짚단 깔고! 쌀가마니 터진 거 있나 확인해!"​역시 일머리 하나는 기가 막혔다. 순식간에 수레 십여 대에 물자가 차곡차곡 쌓였다. 이광 감사가 알면 뒷목 잡고 쓰러질 노릇이지만, 알 게 뭐람. 어차피 그 양반 물건으로 생색내는 건데. 이게 바로 창조 경제지.​물자 준비는 끝났다.이제 남은 건, 가장 중요한 '메인 선물'이었다.-​대장간.열기가 후끈했다. 나대용이 쇳덩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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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화: 쌍룡(雙龍), 주인을 찾다 2

​"미령아!"​내가 부르자 미령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녀석은 이미 붓과 먹물, 그리고 붉은 주사(朱砂) 가루를 챙겨 들고 있었다. 눈치가 빤하다.​"너, 글씨 좀 써야겠다. 이번엔 아주 중요한 거야. 장군님께 드릴 거니까 틀리면 안 돼."​"걱정 마세요. 제가 한 명필 하거든요. 훈장님 딸이잖아요."​미령이가 종이를 펼치고 붓을 들었다.​"이게 본검(本劍)이다. 여기엔 이렇게 써라."​나는 전생에서 봤던 쌍룡검의 실제 문구를 떠올렸다. 역사가 기억하는 그 문구.​"주득쌍룡검(鑄得雙龍劍) 천추기장(千秋氣丈)."​"쌍룡검을 얻으니 천추의 기상이 웅장하다... 와, 정말 멋진 말이에요."​미령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종이에 일필휘지로 글씨를 써 내려갔다. 단아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필체였다.​나대용이 그 종이를 검신 위에 대고 밑그림을 떴다. 그리고 작은 정을 대고 망치로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땅, 땅, 땅.​쇠를 파내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렸다. 글자 모양대로 홈이 파였다. 음각(凹刻)이었다.​"좋아. 그리고 보조검."​나는 나머지 한 자루를 가리켰다.​"여기엔 내 마음을 좀 담아야겠어. 한쪽 면엔 '겸양지덕(謙讓之德)'."​"겸양지덕이요? 겸손하게 양보하는 덕... 좋은 말이네요."​"그리고 반대쪽 면엔 '안분지족(安分知足)'."​미령이가 갸웃거렸다.​"겸손과 만족이라... 장군님 인품에는 어울리지만, 검에 새기기엔 좀 얌전하지 않나요?"​나대용도 정을 멈추고 거들었다.​"내 말이 그 말이오. '필사즉생'이나 '일격필살' 같은 게 낫지 않겠소?"​나는 피식 웃었다.​"형씨. 이건 이중적인 의미입니다."​"이중적?"​"겸양지덕.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죠. 이건 왜놈들한테 하는 말입니다. '내 앞에서 고개 숙여라. 안 숙이면 목을 베어주마'."​나대용의 눈이 동그라졌다.​"그리고 안분지족. '네 분수를 알아라. 감히 남의 땅 넘보지 말고 네 섬나라에나 처박혀 있어라'. 그런 뜻이죠."​"허... 허허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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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화: 쌍룡(雙龍), 주인을 찾다 3

​나대용 형씨를 떠나보낸 지 닷새가 지났다.​담양 객주는 여전히 바쁘게 돌아갔다.현무 4호기의 뼈대가 올라가고, 익호군 신병들의 기합 소리가 담장을 넘었다.​나는 평상에 누워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몸은 여기 있는데, 마음은 저 멀리 여수 앞바다에 가 있는 기분이었다.​'잘 도착했을까?'​전라좌수영.이순신 장군이 있는 곳.​내가 보낸 물자, 그리고 쌍룡검.과연 장군님 마음에 드셨을까? 혹시 '이게 뭐야, 장난해?' 하고 던져버리신 건 아니겠지?​"에이, 설마. 우리 겸 양이를 내가 얼마나 예쁘게 만들었는데."​나는 흑단목 방망이 미숙이를 쓰다듬으며 혼잣말을 했다.미숙이도 친구가 떠나서 심심한지 묵직하게 손에 감겨왔다.​그때였다.​"대장님! 오셨습니다! 나대용 나으리가 오셨습니다!"​망루에서 최가의 목소리가 터졌다.​나는 벌떡 일어났다. 짚신을 구겨 신을 새도 없이 대문으로 달려나갔다.​저 멀리, 흙먼지를 뒤집어쓴 행렬이 보였다.갈 때는 짐이 가득했는데, 올 때는 빈 수레였다. 하지만 맨 앞 말 위에 앉은 나대용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듯 밝았다.​"형씨!"​"대장! 나 왔소!"​나대용이 말에서 뛰어내렸다.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를 으스러져라 껴안았다. 땀 냄새와 흙냄새, 그리고 옅은 바다 내음이 났다.​"어떻게 됐습니까? 장군님은요? 칼은요?"​내가 속사포처럼 묻자, 나대용이 껄껄 웃었다.​"숨 좀 쉬게 해주시오. 물 한 잔 마시고 썰을 풀어드릴 테니."​서백설과 미령이, 익호군 간부들까지 모두 안채로 모였다. 다들 눈을 반짝이며 나대용의 입만 쳐다봤다. 마치 옛날이야기 듣는 아이들 같았다.​나대용이 냉수 한 사발을 들이켜고는, 비장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그날, 여수 앞바다는 안개가 자욱했소..."마치 안개를 그려내듯 나대용의 팔다리가 파닥이며 춤을 추고.-​(나대용의 회상)​전라좌수영의 경계는 삼엄했다.옥포 해전의 승리 이후, 왜적의 보복을 대비해 진영 전체가 칼날처럼 곤두서 있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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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화: 쌍룡(雙龍), 주인을 찾다 4

잠시 후, 송희립이 긴 자루 하나를 들고 왔다.검은 옻칠이 된 활(弓)과, 화살이 가득 든 전통(箭筒)이었다.​"이것은..."​나대용이 놀라 물었다.​"내가 무과에 급제할 때 썼던 활일세. 전장에서도 내 목숨을 여러 번 구해준 녀석이지."​이순신 장군의 애궁(愛弓).단순한 무기가 아니라, 그의 영혼이 담긴 물건이었다.​장군은 활을 나대용에게 건네려다 말고 멈칫했다.그는 활몸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잠시 기다려보게."​장군은 허리춤에서 작은 단도를 꺼냈다.​"그 친구가 '겸양'을 보냈으니, 나도 답가를 보내야 예의겠지."​사각, 사각.​장군은 망설임 없이 활몸(활채)에 칼끝을 댔다.검은 옻칠이 벗겨지며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글자였다.즉석에서 새겨넣는 장군의 친필.​나대용은 숨을 죽이고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한 획, 한 획에 힘이 실려 있었다.​"다 됐네."​장군이 활을 들어 보였다.​自高自大 (자고자대).自取滅亡 (자취멸망).​"이건... 무슨 뜻입니까?"​나대용이 묻자, 이순신 장군이 빙긋 웃었다.​"그 친구의 '겸양지덕'에 대한 답일세. '자고자대'. 스스로 높다고 잘난 척하는 놈들에게는."​장군의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자취멸망'. 스스로 멸망을 부르게 될 것 이라는 경고일세."​나대용은 전율했다.겸손을 강요하는 덕령의 칼과, 오만을 응징하는 순신의 활.두 영웅의 철학이 완벽하게 대구를 이루고 있었다.​"이걸 김덕령 의병장에게 전해주게."​"하오나 장군님, 이건 너무 귀한 물건이라..."​"그만한 자격이 있는 자일세. 호랑이를 잡는 장사라면, 이 정도 활은 당겨야지 않겠나."​장군은 그제야 활을 나대용에게 건넸다.​"전하게. 바다는 내가 지킬 테니, 육지는 자네가 맡아달라고. 이 활로 왜적의 심장을, 아니 '그곳'을 꿰뚫어 달라고."​"그곳이라 하시면...?"​"자고로 사내는 '그곳'을 맞으면 억 하고 고개를 숙이게 되어있지 않느냐. 자연히 겸손해지는 법이지."​장군이 껄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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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화: 영웅들의 무기 교환 1

팽팽했다.마치 쇠줄을 당기는 것 같은 장력.이순신 장군님이 보낸 활, '고삐리'는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일반 병졸들은 시위를 걸기 위해 배를 깔고 낑낑거려야 겨우 구부러지는 강궁(強弓) 중의 강궁.하지만 내 손안에서는 얌전한 강아지였다."후우..."나는 숨을 골랐다.객주 마당, 200보(약 150m) 밖에는 짚으로 만든 왜군 허수아비가 서 있었다. 머리에는 놈들이 쓰고 다니는 뾰족한 투구를 씌워 놓았고, 다리 사이에는... 짚단을 두툼하게 뭉쳐놓았다.주변에는 익호군 300명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었다.'보여준다.'대장이 몽둥이질만 잘하는 게 아니라, 정밀 타격도 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 활의 이름이 왜 '고초필중시(苦草必中矢)'인지.나는 활을 들어 올렸다.왼손은 태산처럼 버티고, 오른손은 깃털처럼 가볍게 시위를 당겼다. 깍지 낀 엄지손가락에 엄청난 힘이 걸렸다.근육이 기억하고 있었다.바람의 세기, 습도, 화살의 무게. 전생의 강철민은 몰라도, 현생의 김덕령은 본능적으로 계산을 끝냈다.'고초필중. 매운맛을 보여주마.'팅!맑고 날카로운 파공음이 고막을 때렸다.쉬이익-!화살이 보이지 않는 속도로 공간을 갈랐다.퍽!!둔탁하면서도 끔찍한 파열음이 났다.200보 밖, 허수아비의 머리가 아니었다. 가슴도 아니었다.화살은 정확하게 허수아비의 다리 사이, 두툼하게 뭉쳐놓은 짚단 정중앙을 관통했다.우지끈!관통된 힘이 어찌나 센지, 허수아비를 지탱하던 나무 기둥의 하단부가 박살이 나며 허수아비가 반으로 접혀버렸다. 말 그대로 '거기'가 터져버린 것이다."......!!"정적.그리고 동시에 터져 나오는 외마디 비명."흐억!""큭...!"구경하던 익호군 300명이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몸을 움츠렸다.최가는 두 손으로 자신의 사타구니를 감싸 쥐며 안색이 파랗게 질렸고, 춘식이는 아예 다리를 엑스자로 꼬고 주저앉았다.남자라면 누구나 느낄 수밖에 없는, 시각적 통각(痛覺)의 전이."대, 대장님... 너무 잔인하십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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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화: 영웅들의 무기 교환 2

"대장님, 방금 뭐 지나갔습니까? 아무것도 안 보였는데요?""안 보이는 게 정상이야. 보이면 피하니까."나는 통아를 내려놓으며 전율했다.이건 활이 아니다.저격총이다. 소음기 달린 저격총."끝내주네요. 이걸로 적장 머리통을 노리면, 놈들은 억 소리도 못 내고 가겠는데요.""그렇소. 사거리도 길고 탄속도 빨라서 갑옷도 뚫소. 다만..."나대용이 씩 웃었다."익히기가 어려워 아무나 못 쓴다는 게 단점이지. 허나 자네라면 문제없겠구려."나는 편전 한 발을 더 장전했다."감 좀 잡아봐야겠습니다. 최가야! 저기 허수아비 10개 더 세워라! 이번엔 350보 뒤로 물려!"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되었다.나는 미친 듯이 편전을 날렸다.피융! 피융! 피융!백발백중.허수아비의 급소란 급소는 모조리 꿰뚫렸다. 머리, 심장, 그리고... 사타구니.한 시간쯤 쏘고 나니 어깨가 뻐근했다. 하지만 감각은 완벽하게 돌아왔다."좋아. 이 정도면 실전 투입 가능해."나는 활과 통아를 내려놓았다.나대용이 다가와 품에서 또 다른 종이 뭉치를 꺼냈다."활 연습은 끝났소? 그럼 이것도 보시오.""설계도입니까?""현무 개량안이오. 자네가 가져온 화약과 쇠 덕분에 발상이 떠올랐소."그가 펼친 도면에는 현무의 지붕 위에 낯선 장치가 그려져 있었다."이게 뭡니까? 솥단지?""비격진천뢰 투석기요.""투석기?""손으로 던지는 건 한계가 있지 않소. 현무 내부의 장력을 이용해서 진천뢰를 더 멀리, 더 정확하게 날려 보내는 장치요. 움직이는 포대(砲臺)가 되는 거지."미쳤다.이 양반은 진짜 시대를 잘못 태어난 천재다. 탱크에 박격포까지 달겠다는 소리였다."형씨. 형씨 머릿속엔 뭐가 들어있는 겁니까?""뭐긴. 왜놈들 박살 낼 생각뿐이지."우리는 마주 보고 낄낄거렸다.든든했다. 최고의 무기, 최고의 기술자, 그리고 최고의 동료들.하지만 이 평화로운 훈련도 잠시였다."대장님."미령이가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장난기 어린 모습은 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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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화: 영웅들의 무기 교환 3

그날 밤.나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마당에 나와 활을 닦았다.검은 옻칠 위로 달빛이 흐르며 '자고자대 자취멸망' 글귀가 빛났다."아저씨."미령이가 다가왔다. 손에는 작은 호리병이 들려 있었다."이거... 약주예요. 잠 안 오시면 한 잔 드세요.""고맙다. 넌 안 자고?""걱정돼서요... 꼭 이기셔야 해요. 그리고 꼭 돌아오셔야 해요.""당연하지. 우리 식구들 두고 어딜 가냐."나는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미령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미령아. 너도 가서 자라. 내일 부상자 나오면 네가 바빠질 거야.""네... 아저씨도 빨리 주무세요."미령이가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나는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피식 웃었다가, 이내 씁쓸한 표정으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임진왜란.교과서에서 볼 때는 그냥 활자 몇 줄이었지만, 현실은 지옥이었다.이 전쟁통에 아무런 죄도 없이 부모를 잃고 길바닥에서 굶어 죽거나, 칼에 찔려 죽은 아이들이 산을 이뤘을 것이다. 셀 수도 없는 어린 생명들이 피워보지도 못하고 짓밟혔을 것이다.미령이는 그나마 운이 좋아서 나를 만난 거고, 구해진 거다.'살릴 수 있다면, 내 팔이 닿는 곳에 있는 아이들은 무조건 살린다.'그게 어른이 할 일이고, 힘 있는 놈이 해야 할 의무니까.미령이뿐만 아니라, 내 뒤에 숨은 모든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이겨야 했다.나는 미령이가 주고 간 호리병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싸한 술기운이 돌았다."이것도 먹으면서 마셔요."등 뒤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깜짝 놀라 돌아보니,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객주 기둥 뒤에서 서백설이 작은 소반을 들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어? 안 자고 있었어?""몰라요. 그냥... 잠이 안오네요."그녀는 내 앞 평상에 소반을 내려놓았다.소반 위에는 먹기 좋게 찢어놓은 육포와, 하얀 분이 곱게 핀 곶감, 그리고 따뜻한 꿀물이 담긴 대접이 놓여 있었다."이게 뭐야?""안주예요. 미령이가 술 챙겨가는 거 봤거든요. 깡술 마시지 말고 이거랑 같이 먹어요."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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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화: 학익진의 그림자 1

​1592년 7월.조선의 여름은 지독하게 뜨거웠다.​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날씨에, 솜을 누벼 만든 두꺼운 방탄조끼(누빔옷)를 입고 있으려니 죽을 맛이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이 엉덩이 골까지 적시는 기분은 정말이지 최악이었다.​"더워 죽겠습니다, 대장님. 꼭 이렇게까지 입어야 합니까? 쪄 죽겠습니다요."​옆에 엎드려 있던 최가가 혀를 내밀며 헐떡거렸다. 녀석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죽기 싫으면 입어. 왜놈들 조총은 더위보다 뜨거우니까."​나는 나직하게 대꾸하며 시선을 전방으로 고정했다.​이곳은 경상도 거제도와 통영 사이, 견내량(見乃梁)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해안가 절벽 숲속이었다. 매미 소리가 귀청을 찢을 듯 울려 퍼지는 가운데, 익호군 정예 100명이 숨을 죽이고 매복해 있었다.​우리가 왜 금산이 아닌, 이곳 남해안 끝자락까지 왔느냐고?​이유는 하나였다.오늘 이곳에서, 조선의 운명을 가를 거대한 판이 벌어지기 때문이다.​며칠 전, 미령이가 가져온 첩보는 충격적이었다.​"아저씨, 큰일 났어요. 왜군 함대가 견내량 쪽에 집결하고 있대요. 규모가... 어마어마하다고 해요."​와키자카 야스하루.용인 전투에서 조선군 5만을 1,600명으로 갈아버렸던 일본의 명장. 그가 이끄는 최정예 수군 70여 척이 한산도 앞바다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었다.​'저놈이다. 이광 감사가 5만 대군을 말아먹게 만든 장본인.'​전라감사 이광이 나에게 조방장 자리를 제안하며 같이 북상하자고 했을 때,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미래를 아는 나로서는 뻔히 보이는 불구덩이에 내 정예병들을 밀어 넣을 수 없었으니까.​'덕분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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