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폐위된 황후가 새 황제를 고른다: Chapter 91 - Chapter 100

138 Chapters

제93화. 잃은 권한의 모양

민서경은 모든 것을 잃을까 봐 모든 것을 걸었다.“무례라 하셨습니까.”“시연장에서 책임자를 두고 바늘 잡은 지 삼 년이 넘었다고 했소. 작업자들이 다 들었지.”“사실이 아닙니까.”“사실이라도 무례는 무례요.”채운은 문가에 서 있었다. 무릎을 꿇지도, 변명하지도 않았다. 서련은 인사 기록 옆의 젖은 붓자국을 보았다. 방금 쓴 글씨였다. 명선의 도장이 찍힌 뒤에.“상궁께서 이 기록을 담당관께 올리시면 담당관은 무엇을 보실까요.”“무례한 작업자 하나요.”“아닙니다. 제례를 사흘 앞두고 재단 담당을 내보낸 상궁을 보실 겁니다. 오늘 아침 태후전에서 옷이 제때 되겠느냐고 물으셨다지요. 그 물음에 상궁께서 답을 드리시는 셈이 됩니다. 안 된다고.”민서경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덮개 무늬 일로 이미 한 번 잘못을 인정하셨습니다. 이번이 두 번째가 되면, 그다음은 상궁께서 제일 잘 아시겠지요. 물건 하나 잘못 센 상궁과 사람을 두 번 잘못 다룬 상궁 중 어느 쪽이 먼저 나갑니까.”“나를 협박하시오?”“상궁께서 저를 협박하실 때 쓰시던 말을 빌렸습니다.”민서경이 붓을 쥔 채 웃었다. 웃음이 아니라 숨을 뱉는 소리에 가까웠다.“태후전이 나를 버리면 나는 하루도 못 버티오. 아시오?”“압니다. 그래서 두 번째 잘못을 만들지 마시라는 겁니다. 태후전은 한 번 틀린 사람은 쓰고, 두 번 틀린 사람은 버립니다. 마마께서 사람을 쓰시는 법을 상궁께서 저보다 잘 아시지요.”방 안이 조용해졌다. 바깥에서 인두 놓는 소리가 났다. 민서경이 붓을 물그릇에 담갔다. 젖은 글씨 위로 물방울이 떨어져 번졌다.“그래서 원하는 게 뭐요. 내 자리요?”“아닙니다.”서련이 앉았다. 처음으로.“상궁께서 물건을 잘 세시는 건 압니다. 비단 한 필이 어디로 갔는지 상궁만큼 빨리 찾는 사람을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사람을 세는 일만 내려놓으십시오.”“사람을 세는 일.”“누구를 책임자로 올리고 누구를 내보낼지 추천하시는 일입니다. 그 일은 이번에 담당관과 공주마마께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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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화. 문턱의 신발

출입증이 없으면 옷도 문턱을 못 넘는다.“공주마마 시종 옷을 입고 들어가면요. 마마 시종은 명단에 있잖아요.”단비의 말에 옥분이 먼저 고개를 저었다.“나는 시종 걸음을 못 해. 눈이 이래서 계단에서 넘어져.”“그럼 옷 상자 속에…”“단비.”서련이 붓을 들었다.“몰래 들어가면 몰래 나와야 해. 옷을 입혀 놓고 몰래 나온 사람의 이름은 아무 데도 안 남아.”“그럼요?”“정문으로 들어가야지. 이름을 적고.”서련은 밤새 종이 한 장을 만들었다. 아침에 단비가 그것을 소리 내어 읽었다.“종친 제례복 여섯, 후궁 넷, 상궁 셋, 공주 한 벌, 숙비 위패 덮개 하나. 입을 사람, 입힐 시각, 입힐 사람. 손에 들 것, 바늘함, 인두, 예비 실 세 타래, 시침핀 한 갑.”“빠진 게 있어?”“없어요. 인두까지 적으세요?”“인두를 든 사람이 왜 들어오느냐고 물으면 대답해야 하니까.”“그런 걸 누가 물어요.”“오늘 물을 거야.”담당관실은 제례 준비로 어수선했다. 담당관은 쉰 살쯤 된 사람으로, 종이를 앞에 두면 사람보다 종이를 먼저 보는 얼굴이었다. 서련은 그 얼굴을 알았다. 종이가 맞으면 통하는 사람이었다.“출입 명단에서 객사 인력이 빠졌습니다.”“객사는 제례 관할이 아니오.”“옷은 객사 관할입니다. 공주마마의 도장을 보셨을 겁니다.”“보았소. 그러니 옷은 들이겠소. 사람은 별개요.”“옷이 스스로 입혀진다면 그렇겠지요.”담당관이 처음으로 서련을 보았다.“객사 사람이 제례에 왜 필요하오?”“옷이 스스로 입혀지지 않아서요.”서련이 종이를 폈다. 담당관이 읽었다. 한 줄, 두 줄. 손가락이 인두 줄에서 멈췄다.“인두는 왜.”“절을 하시면 옷자락이 접힙니다. 다음 순서 전에 펴야 합니다. 자리에서 바로.”“침방에서 하면 되지 않소.”“침방 인력 여덟은 종친과 후궁 열 분을 맡습니다. 공주마마와 위패 덮개는 객사가 맡기로 했고요. 여기, 상궁께서 나눈 배치입니다.”민서경의 글씨였다. 담당관이 그것을 알아보았다.“민 상궁이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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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5화. 먼저 일어나는 사람

위패는 밤사이에 다시 뒤로 갔다.이현이 먼저 움직였다. 서련은 그의 손을 보았다. 칼자루에 가지 않았다. 종친 자리에서 내려와 제단 앞으로 갔고, 위패를 옮긴 것이 분명한 어린 시종 앞에 섰다. 시종은 열일곱쯤 되어 보였다. 무릎이 이미 반쯤 꺾여 있었다.“네가 놓았느냐.”“예, 예, 전하.”“종이대로 놓았느냐.”“종이는… 종이는 어제 것이고, 밤에 바뀌었다고…”“누가 그러더냐.”시종이 대답을 못 했다. 이현이 더 묻지 않았다. 대신 예관에게 몸을 돌렸다.“종이를 다시 보여 주시오.”예관이 종이를 내밀었다. 이현이 읽고, 제단을 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종친 자리에서 제단까지, 절하는 자리까지. 세 걸음을 옆으로 옮겨 섰다.“내가 여기 서면 종이의 자리와 마주 보오. 지금 놓인 자리와는 어긋나고.”“그렇습니다, 전하.”“그럼 위패가 틀린 거요, 내가 틀린 거요.”예관이 대답하지 못했다. 서련이 그때 앞으로 나갔다.“둘 다 아닙니다. 지시가 틀렸습니다.”“지시요?”서련이 시종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이의 눈높이였다.“밤에 누가 왔어. 그렇지.”“…예.”“어느 전 사람이야.”“태후전… 시종 나리셨습니다. 밤에 오셔서, 순서가 바뀌었으니 처음대로 놓으라고.”“종이를 주셨어?”“말로만요.”“그 사람 이름은 알아?”“…모릅니다. 태후전 사람인 것만요.”“됐어. 얼굴은 기억해 둬.”“네 잘못은 말로 들은 것을 종이보다 믿은 거야. 그건 내일부터 고치면 돼. 그런데 종이 없이 순서를 바꾼 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그 사람 것이지.”시종이 울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서련이 일어났다.“예관께서는 어젯밤 태후전에서 순서 변경 문서를 받으셨습니까.”“…받지 않았소.”“그럼 예관의 종이가 지금도 유효합니다. 종이대로 놓아 주십시오. 태후전에서 바꾸시려면 문서로 오시겠지요. 제례 전에요.”예관이 잠깐 망설였다.“태후전에서 아시면…”“이미 아십니다. 밤에 사람을 보내셨으니까요. 문서를 안 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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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접어 둔 예복

태후는 서련에게 황후 예복을 선물했다.“선물이다.”태후전 안뜰에는 모란이 지고 있었다. 방 안은 서늘했다. 조태후는 찻잔을 들고 있었고 그 앞 탁자에 붉은 보자기가 놓여 있었다. 상궁이 보자기를 풀었다. 금실 봉황이 드러났다. 서련이 여섯 해 동안 어깨에 얹었던 무게였다.“새로 지은 것이다. 옛것은 폐하께서 예행에 보내셨다가 도로 거두셨다더군. 그래서 새로 지었다.”“황송합니다.”“황송할 것 없다. 조건이 있으니.”태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폐하께서도 이 옷을 보셨다.”“그럼 폐하께서 직접 주셨겠지요. 마마께서 주시는 것은 다른 뜻입니다.”“말이 빠르구나. 그래서 더 듣기 싫다.”“내일 제례에 이 옷을 입고 중궁의 자리에 서든지, 아니면 제례에서 물러나든지. 둘 중 하나다.”“둘 중 하나입니까.”“전 황후가 재봉사 차림으로 제단 옆을 오가면 종친들이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른다. 혼란스럽다. 왕실의 안녕을 위해 하는 말이다.”서련은 예복을 보았다. 봉황의 눈에 박힌 검은 실. 소매 끝의 구름 무늬. 자기 손으로 몇 번이나 매만졌던 자리들. 숨이 잠깐 얕아졌다. 서련은 그것을 들키지 않았다.“입으면 어떻게 됩니까.”“자리를 받는 거지.”“황후가 아닌 사람이 황후 예복을 입고 중궁 자리에 서면, 그것을 뭐라 부릅니까.”태후가 잠깐 말이 없었다.“폐하께서 허락하시면 문제 될 것 없다.”“폐하께서 허락하시면 폐하의 사람이 되는 것이고, 허락 없이 입으면 참월이 되는 것이지요. 어느 쪽이든 내일 저는 제 이름으로 서 있지 못합니다.”“그래서 재봉사 옷을 고르겠다는 말이냐.”“예.”“황후였던 자가 재봉사 옷을 입는가.”“황후였던 자라 어느 옷이 제 것인지 압니다.”서련이 예복을 들었다. 무거웠다. 그것을 한 번 접고, 두 번 접어 보자기 위에 도로 놓았다. 매듭은 묶지 않았다. 상궁이 대신 묶을 수 있게.“선물은 받겠습니다. 입지는 않겠습니다. 물러나지도 않겠습니다.”“세 번째는 없다고 했다.”“마마께서 두 개를 주셨고,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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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7화. 제례가 시작될 때

종이 울릴 때 옷은 모두 제자리에 있었다.예관은 새벽에 종이를 들고 먼저 와 있었다. 어린 시종이 그 옆에서 종이를 받쳐 들고 있었다. 위패는 종이대로 놓였고, 덮개는 예비로 만든 것이 씌워졌다. 아무도 그것이 두 번째 덮개라는 것을 몰랐다. 채운과 서련과 단비만 알았다.이현이 동트기 전에 왔다. 덮개를 오래 보았다. 그리고 채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채운이 당황해서 두 걸음 물러났다.“전하께 말씀드릴까요. 어젯밤 일을.”단비가 속삭였다.“오늘은 아니야. 오늘 전하가 하실 일은 하나뿐이야.”“그래도요.”“칼자국은 내일 보여 드려도 늦지 않아. 절은 오늘뿐이고.”단비가 소매를 당기며 다시 속삭였다.“괜찮으세요?”“괜찮아. 옷자락 봐.”제례는 조용했다. 향이 피어오르고 종이 세 번 울리고, 종친들이 순서대로 제단 앞으로 나갔다. 서련은 제단 옆 회랑 그늘에 서 있었다. 회색 실무복. 소매를 걷어 끈으로 묶고 바늘함을 허리에 찼다. 옥분은 발치에 앉아 옷자락을 폈다. 소례는 실을 들고 뒤에 섰다.이겸이 제단에 올랐다. 서련은 그가 절을 올리는 것을 보았고, 그가 몸을 일으키며 회랑 쪽을 보는 것을 보았다. 시선이 회색 옷에 닿았다. 잠깐 머물렀다. 서련은 눈을 내리지 않았다. 피하지도 않았다. 다음 옷자락을 보았을 뿐이었다.“폐하께서 보셨어요.”“보시라고 서 있는 거야.”명선이 상석 옆에서 부채로 입을 가렸다. 웃는 것인지 하품인지 알 수 없었다.첫 번째 종친이 절을 마치고 물러날 때 문제가 생겼다. 나이 든 종친의 옷깃이 절하는 사이 등 쪽에서 갈라졌다. 오래된 옷이었다. 침방이 맡은 옷이었다.침방 궁인이 얼굴이 하얘져서 민서경을 보았다. 민서경이 서련 쪽을 보았다. 아주 짧게. 서련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소례를 보았다. 소례가 실을 들고 민서경 앞으로 갔다.“상궁마마, 실을 빌려드릴까요.”민서경이 실을 받았다. 그리고 자기 궁인에게 넘겼다.“뒤에서 꿰매라. 다음 순서 전에.”궁인이 종친의 등 뒤로 돌아갔다. 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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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화. 호명되는 손

예관이 두 번째 이름을 읽기 전에 서련이 종이를 내밀었다.“공주마마의 확인 문서입니다. 담당관께서 봉하신 명단에 첨부되어 있을 것입니다.”예관이 두루마리를 넘겼다. 뒤에 한 장이 더 붙어 있었다. 명선의 도장. 그 아래 작업표. 예관이 담당관을 보았다. 담당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관이 명선을 보았다.“내 도장이다. 읽어라.”명선이 팔짱을 풀지 않고 말했다.예관이 헛기침을 하고 다시 읽었다.“침방 상궁 민서경, 물품 및 배치. 침방 궁인 민유정, 마무리. 침방 궁인 채운, 재단 및 위패 덮개 자수…”채운이 고개를 들었다.“객사 궁인 소례, 겉감 솔기. 객사 궁인 옥분, 안감. 객사 시녀 단비, 착장 및 운반. 침방 수습 보늬, 위패 덮개 자수 보조 및 착장.”보늬는 회랑 기둥 뒤에 있었다. 이름이 불리자 기둥을 잡았다.“야간 운반 복례의 조카. 이상.”예관이 두루마리를 내렸다. 종친들 사이에서 낮은 소리가 났다. 수습의 이름이 공로에 오른 적은 없었다. 옥분이 자기 이름을 듣고 눈을 비볐다. 소례가 옥분의 소매를 잡았다.담당관이 한 걸음 나왔다.“덧붙입니다. 제례복 손상 건으로 침방 수습 보늬에게 내려졌던 처벌은, 손상이 본인의 작업이 아님이 확인되어 취소합니다. 기록에서 지웁니다.”보늬가 기둥에 이마를 댔다. 채운이 손을 뻗어 아이의 어깨를 잡았다.이겸이 그때 일어섰다.제단 앞이 조용해졌다. 그는 회랑을 보고 있었다. 회색 옷을.“서련.”“예, 폐하.”“그 명단에 네 이름이 없다.”“예.”“짐이 그대의 이름도 올리겠다. 제작 감독으로.”서련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들었다.“폐하, 제 이름은 이미 제 것입니다.”“무슨 말이냐.”“폐하께서 올려 주시면 폐하께서 내리실 수도 있는 이름이 됩니다. 저는 그런 이름을 한 번 가져 보았습니다.”“짐이 주는 것은 다 돌려보내는구나.”“받은 것은 돌려드리고, 받지 않은 것은 받지 않습니다. 오늘은 후자입니다.”이겸의 턱이 굳었다. 그는 무어라 말하려다 명선을 보았고, 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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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9화. 당신의 반대

저녁상은 소박했고 두 사람은 오래 앉았다.보리밥, 나물 세 가지, 된장국. 그리고 술병 하나. 강무가 상을 들여놓고 말없이 나갔다.“강무가 지었소. 칼보다 밥이 낫다더군.”“강무가 말을 합니까.”“밥 얘기는 하오.” 진왕의 처소는 궁 외곽 동쪽, 군영으로 나가는 문 안쪽에 있었다. 방은 넓었고 물건은 적었다. 활 하나, 책 몇 권, 화로 자리는 비어 있었다.“화로가 없습니다.”“백연전에 있소.”“돌려드려야 하는데.”“문턱과 함께 가져오라 하지 않았소.”서련이 국을 떴다. 이현이 술병을 들었다가 서련의 잔이 아니라 자기 잔에만 따랐다.“약값은 남기셨소?”“오늘 지급까지 다 남겼습니다.”“그럼 한 잔은 되겠군.”그가 이번에는 서련의 잔에 따랐다. 서련은 마시지 않고 잔을 들고만 있었다.“오늘 어머니 위패 앞에 섰을 때.”이현이 말을 시작했다가 멈췄다. 서련은 기다렸다. 그는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고, 적은 말을 고르는 데 시간을 쓰는 사람이었다.“열두 살 이후로 처음이었소. 덮개 아래 이름을 보는 게.”“예.”“채운이 그러더군. 덮개를 씌울 때 그대 손이 떨렸다고.”“채운은 말이 많습니다.”“채운은 말이 적소. 그래서 믿었지.”서련이 국을 한 술 더 떴다. 대답 대신이었다.“나는 그날 밤 재작업을 시키려 했소. 그대가 안 된다 했고, 나는 그대에게 내 편이 아니냐고 했지.”“기억합니다.”“그때 그대가 그냥 알았다고 했으면, 나는 그대를 믿지 않았을 거요.”서련이 잔을 내려놓았다.“무슨 말씀이십니까.”“내 말을 다 들어주는 사람은 많소. 변방에서도, 여기서도. 내가 진왕이니까. 그런데 그 사람들이 나를 위해 그러는 건지 자기를 위해 그러는 건지, 나는 한 번도 확신한 적이 없소.”“….”“그대는 내 앞에서 안 된다고 했소. 내 어머니 일이었는데도.”“전하 어머니 일이라서요.”“그러니까 말이오.”그가 술을 마셨다. 서련은 그제야 한 모금 마셨다. 쓴 술이었다.“쓰지요.”“군영 술이오. 단 술은 변방에 없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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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0화. 남겨진 한 자리

황후의 자리가 아닌 자리가 서련의 이름으로 생겼다.담당관실 큰 방에 좌석표대로 자리가 놓였다. 상석에 태후. 그 아래 이겸. 명선. 종친 넷과 담당관, 예관. 침방 쪽에 민서경. 그리고 문 가까운 끝, 다른 자리와 한 칸 떨어져서 방석 하나.서련은 회색 옷 그대로 그 자리에 앉았다. 앉기 전에 방석 옆의 작은 나무패를 보았다. 업무 책임자 서련. 명선의 글씨였다.“그 자리가 뭐냐.”이겸이 물었다. 명선에게가 아니라 서련에게. 서련이 대답하기 전에 명선이 대답했다.“제 객사 관할 인력의 급료와 공로와 고충을 맡은 사람의 자리입니다. 제가 위임했고, 이번 제례로 범위가 정해졌습니다. 침방도 아니고 태후전도 아니고 제 시종도 아닙니다. 그래서 따로 놓았습니다.”“공주의 사람이란 말이냐.”“제 사람이면 제 뒤에 앉혔겠지요. 저 자리는 제 뒤가 아닙니다.”태후가 찻잔을 들었다.“전 황후가 자꾸 새 자리를 만드는군.”“마마, 자리는 제가 만들었습니다. 서씨는 앉았을 뿐이고요.”“공주가 그 사람을 위해 참 부지런하다.”“객사가 손해를 안 보게 하려고 부지런한 겁니다. 그 사람 덕에 어제 옷이 제때 나갔으니까요.”태후가 더 말하지 않았다. 담당관이 두루마리를 폈다.“제례 성과를 아룁니다. 제례복 열넷, 위패 덮개 하나. 손상 없이 착장 및 회수. 공로 지급 완료. 침방 인사에 관하여, 책임자 추천과 징계 추천은 담당관실과 공주 객사가 나누어 맡고, 물품과 배치는 침방 상궁이 맡습니다. 객사 업무 책임자는 객사 관할 인력의 급료와 계약과 고충을 맡되, 체포와 처벌은 각 담당 권한자에게 남습니다.”“그것뿐이냐.”이겸이었다.“그것뿐입니다, 폐하. 서련 님이 그 이상은 받지 않겠다 하셨습니다.”“왜.”서련이 대답했다.“그 이상을 받으면 그 이상이 저를 씁니다.”민서경이 고개를 숙였다. 표정이 없었다. 서련은 그녀를 보지 않았다. 볼 필요가 없었다.“이상입니다.”“이상이 아닙니다.”문 쪽에서 목소리가 났다. 매향이었다. 두 손에 문서를 받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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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1화. 두 번째 약상

백연전의 약상이 비어 있었다.뚜껑을 연 정온이 한동안 말이 없었다. 봉투 부스러기가 함 바닥 귀퉁이에 몰려 있을 뿐, 어제까지 가지런하던 약재 봉지는 한 개도 남지 않았다.“누가 가져갔습니까?”“연화전이요.”단비가 문간에서 숨을 고르며 답했다. 새벽에 연화전 시종 둘이 와서 약상을 들고 갔고, 어약방에는 귀비의 태기를 우선 살피라는 명이 내려와 있었다는 것이다.“의녀도요. 오후에 오기로 한 어약방 의녀가 연화전으로 갔대요.”정온은 빈 함을 닫았다. 대청에는 벌써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제례 뒤로 손가락에 붕대를 감은 침방 궁인, 허리를 못 펴는 늙은 시종, 그리고 서진.“누나, 나는 괜찮습니다. 이제 기침도 안 하고.”“어젯밤에 했어.”“그건 누나 잠 깨우려고요.”서진이 웃었다. 정온은 웃지 않고 그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었다. 그리고 소매 안에서 작은 봉지 하나를 꺼냈다.“어제 남겨 둔 것입니다. 오늘 몫은 됩니다.”“내일은요?”“내일은 서련 님께서 가져오시겠지요.”정온이 서련을 보았다. 서련은 이미 겉옷을 걸치고 있었다.명선은 사무방 옆 뜰에서 모란을 보고 있었다. 서련이 종이를 내밀자 공주는 꽃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받았다.“연화전의 청구서입니다. 의녀 둘, 약재, 유모 식비. 그리고 공주마마의 이름이 있습니다.”“내 이름?”“공주께서 경사를 기뻐하시어 객사 몫을 양보하신다고요.”명선이 그제야 종이를 보았다. 한참 읽더니 짧게 웃었다.“기뻐하기는 했지. 양보한 기억은 없는데.”“그 말씀을 그대로 적어 주시면 됩니다.”“누구에게?”“청한 사람에게요. 누가, 무엇을, 왜 청하는지부터 적게 하겠습니다.”명선이 꽃가지를 놓았다.“그대는 늘 종이를 한 장 더 만들게 하는군.”“한 장이 없으면 사람이 빠집니다.”명선이 서련을 흘끗 보았다.“그대 새 자리의 첫 손님이 연화전 상궁이겠군.”“손님이면 차를 내겠습니다.”“차 값은 적지 마라. 그건 내가 낸다.”오후에 매향이 왔다. 사무방 문턱을 넘으며 먼저 웃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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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2화. 닫힌 휘장

휘장 안은 향이 너무 진했다.아픈 사람의 방이 아니라 아픈 척하는 사람의 방에서 나는 냄새였다. 서련은 문턱에서 한 번 숨을 참았다가 들어갔다.문 앞 뜰에는 화분이 줄지어 있었다. 밖의 가지에는 아직 꽃이 드문데 방 안에서 먼저 피워 낸 모란들이었다. 단비는 뜰에 남았다. 정온은 약낭을 가져오겠다며 백연전으로 되돌아갔다. 서련 혼자 들어가는 것이 오늘의 조건이었다.휘장 밖에는 사람이 많았다. 후궁 둘이 방석에 앉아 있었고, 태후전 상궁이 문 옆에 서 있었다. 시녀들이 벽을 따라 늘어섰다. 휘장 안쪽에서는 숨소리 하나 새어 나오지 않았다.“언니, 오셨어요?”목소리가 먼저 나왔다. 가늘고 지친 소리였다.“일어나지 못해서 죄송해요. 의원이 움직이지 말라고 해서.”“누워 계십시오.”서련은 가져온 작은 함을 시녀에게 건넸다. 부드러운 무명 손수건 두 장. 사비로 산 것이었고 객사의 도장은 없었다.“안부로 드립니다.”“손수건이요?”휘장 너머에서 웃음이 났다.“황손에게 손수건이라니. 언니답네요. 저더러 값을 적으라 하셨다면서요. 다섯 달 된 아이한테요.”“축하는 물건으로 하는 게 아니라서요.”“언니가 여섯 해 동안 못 하신 일을 제가 다섯 달 만에 했는데, 축하가 손수건 두 장이에요?”서련의 손이 함 뚜껑 위에서 잠깐 멈췄다. 그리고 놓았다.“여섯 해 동안 제가 못 한 일이 많습니다. 값을 세는 일도 그중 하나였고요.”후궁 하나가 찻잔으로 입을 가렸다. 태후전 상궁이 한 걸음 나섰다.“태후마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전 황후가 태중 아이에게 인색하다는 말이 궁에 돌면 왕실의 안녕에 좋지 않다고요.”“인색한 적 없습니다. 축하는 지금 드렸습니다.”서련은 휘장을 향해 예를 갖췄다.“무탈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건 제 뜻입니다. 청구서는 공주의 관할이고, 거기에 적힌 건 청한 사람의 이름과 쓰임뿐입니다.”“언니는 늘 그렇게 나누시네요. 마음이랑 돈이랑.”“나누지 않으면 마음이 돈으로 바뀝니다. 귀비께서도 아시지요.”“공주마마도 요즘 인색해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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