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폐위된 황후가 새 황제를 고른다: Chapter 71 - Chapter 80

138 Chapters

제73화. 남겨 둔 몫

이긴 날 서련은 자기편과 싸워야 했다.“윤가한테 줄 게 뭐가 있소! 열 해를 우리 등에서 빨아먹었는데.”젊은 일꾼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뒤에서 대여섯이 따라 외쳤다.“내 아비가 이 마당에서 그 끈 묶는 걸 봤소. 그때 나는 이만했고.”젊은 일꾼이 손으로 제 허리께를 가리켰다. 송 노인은 외치지 않았다. 대신 붉은 꼬리표를 오래 보았다.“그 열 해는 갚게 할 겁니다.”서련이 말했다. 환호가 잦아들었다.“그런데 저 붉은 꼬리표는 그것과 다릅니다.”“뭐가 다르오?”“저건 받은 돈입니다.”일꾼들이 서로를 보았다. 서련은 창고 문 옆에 세워 둔 판자를 마당 가운데로 옮겼다. 단비가 숯을 가져왔다.“지난가을에 윤태선이 선납금을 냈습니다. 그 돈으로 씨앗을 사고 연장을 고쳤습니다. 여러분 손에는 안 왔지만 이 장원에는 왔습니다.”“우리 손에 안 왔으면 우리 빚이 아니오!”“여러분 빚이 아닙니다. 장원 빚입니다. 그리고 장원은 제 것입니다.”“주인이 빚을 갚겠다는데 왜 우리가 말리오?”한 아낙이 물었다. 팔에 어린애를 안고 있었다.“우리 애 약값도 저 붉은 것 안에 있어서 그렇소.”“약값은 흰 꼬리표에서 나옵니다. 오늘 판 것으로요. 붉은 것을 안 줘야 나오는 돈이 아닙니다.”아낙이 애를 고쳐 안았다. 서련이 판자 왼쪽에 줄을 그었다.“이쪽은 돌려줄 것. 선납금만큼의 쌀. 저 붉은 꼬리표입니다.”오른쪽에 줄을 그었다.“이쪽은 안 돌려줄 것. 일한 날을 빚으로 적은 것. 고갯길 통행세. 도구값. 밥값. 저울 빌린 값. 이건 한 푼도 안 줍니다. 오히려 받아 낼 겁니다.”오른쪽 줄이 왼쪽 줄보다 길었다. 일꾼들이 그것을 보았다.“그래도 왼쪽은 왜 줍니까.”송 노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낮았다.“서련 님은 우리 편 아니오?”“편이니까 빚을 남기지 않는 겁니다.”노인이 눈을 껌뻑였다.“빚을 남기면 어찌 되오?”“오늘 저울 다섯이 왔습니다. 왜 왔겠습니까? 이 장원이 약속을 지킨다고 믿어서입니다. 저 붉은 꼬리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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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공주의 시장

공주의 서신에는 인사가 없었다.서련은 그 종이를 소매에 넣고 새벽 수레에 올랐다. 강무가 고삐를 잡았고 단비가 뒤에 탔다. 길은 진창이었다. 밤사이 봄비가 지나간 것이었다.“뭐라고 하실 거예요?”“아니요, 라고.”“…그게 다예요?”“그다음은 공주마마가 물으실 거야.”백연전에 닿았을 때 명선은 벌써 마루에 나와 있었다. 앞에 장부가 펼쳐져 있었고 찻잔은 비어 있었다.“왔군. 답은 들고 왔소?”“답은 종이에 적을 수 없어서 왔습니다.”“그럼 말로 하오. 내 장원이 손해를 보면 함께 질 것이오?”“아니요.”명선의 눈썹이 올라갔다. 시종이 붓을 떨어뜨릴 뻔했다.“객사 손님이 대답 한번 빠르군.”“공주마마의 손해를 제가 같이 지겠다고 하면, 그건 공주마마의 이름으로 제 싸움을 하겠다는 말이 됩니다. 그 이름은 빌리지 않겠습니다.”“빌려 달라 하면 줄 생각이었소.”“빌리면 갚아야 하니까요.”명선이 찻잔을 들었다가 빈 것을 보고 도로 놓았다.“그럼 무얼 하겠다는 것이오. 윤가는 벌써 내 장원의 봄 채소를 궁에 안 들이겠다고 통지했소. 뽕잎도, 산나물도. 밭에서 썩으라는 게지.”“바꾸겠습니다.”“무엇과 무엇을.”서련이 소매에서 종이를 꺼냈다. 이번에는 명선의 서신이 아니었다. 밤새 쓴 것이었다.“공주마마의 채소는 궁에 안 들어가도 됩니다. 군영이 먹고, 절이 먹고, 시장이 먹습니다. 복례의 노새가 나릅니다. 어제 장원에 저울을 들고 온 다섯이 다 살 사람입니다.”“내 채소를 시장 바닥에 내놓으라는 말이오?”“궁에 파는 값보다 쌉니다. 그건 손해입니다. 그 손해는 공주마마 것입니다.”“솔직하기도 하지. 그럼 그대는 무얼 내놓소.”“창고입니다.”명선이 종이를 당겨 읽었다.“윤태선의 관리인이 아직 제 장원 창고를 쥐고 있습니다. 선납금이 정리될 때까지요. 제 장원의 다음 물량을 공주마마의 창고에 두겠습니다. 창고 값은 정가로 치릅니다. 대신 공주마마의 채소는 제 운송망으로 나갑니다. 운송료도 정가입니다.”“노새 두 마리로 내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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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가장 싼 제안

가장 싼 제안이 가장 비쌌다.대리인은 답을 내일 아침에 받겠다고 하고 바깥채로 물러갔다. 종이는 탁자 위에 남았다. 손실 전액 보전. 젖은 장작, 통행세, 저울 없는 아침, 물러선 구매자들. 다 갚겠다는 것이었다. 다음 계절 선납금 면제. 수확을 미리 묶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 대신 한 줄. 장원의 물건은 윤태선을 통해서만 나간다.“좋은 조건이잖아요.”단비가 말하고는 제 입을 막았다.“아니, 제 말은요, 나쁜 사람이 좋은 조건을 내는 게 이상하다고요.”“이상한 게 아니야. 정확한 거지.”단비가 무릎을 꿇고 화로에 숯을 넣었다. 그때 서련은 단비의 신발 바닥을 보았다. 뒤축이 닳아 발꿈치 살이 비쳤다. 장원과 궁을 오간 길이 거기 다 있었다.“신발이 그게 뭐야.”“아직 신을 만해요.”“벗어 봐.”“싫어요.”“단비야.”단비가 신을 벗었다. 발꿈치에 굳은살이 앉아 있었고 그 옆이 터져 있었다. 서련은 그 발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단비가 얼른 신을 도로 신었다.“…다음 급료에 살게요.”정온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 약 봉지를 들고 있었다. 봉지가 얇았다.“서진 님 약재가 열흘치 남았습니다. 다음 것은 값이 올랐습니다. 봄이라 귀하답니다.”“얼마나요?”“지난달의 갑절입니다.”뒤에서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열흘 뒤엔 나을 겁니다. 안 먹어도—”“먹습니다.”정온이 돌아보지도 않고 말했다. 서진이 입을 다물었다.저녁에 궁에서도 사람이 왔다. 황제의 전갈이었다. 내수고가 장원의 쌀을 전량, 시장 값의 갑절로 사겠다는 것이었다. 서련은 종이를 뒤집어 뒷면에 썼다. 정가로 사시려거든 입찰 문서에 이름을 적으시라고. 폐하의 이름이 아니라 내수고의 이름으로.“이것도 돌려보내십니까?”단비가 물었다. 목소리가 작았다.“이것도 같은 제안이야. 종이만 다르지.”“폐하께서는 그래도… 갑절이면…”“갑절로 사는 사람은 쌀을 사는 게 아니야. 쌀 판 사람을 사는 거지.”밤이 되자 서련은 종이를 폈다. 왼쪽에 받으면 얻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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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돌아오는 수레

수레가 무거운 것은 짐이 아니라 은자였다.복례가 노새를 세우고 거적을 걷었다. 자루 둘과 작은 궤짝 하나, 헝겊 뭉치 하나. 자루에는 군영의 도장이 찍혀 있었고 궤짝에는 절의 봉인이 붙어 있었다. 헝겊은 쌀집 노인 것이었다.“군영에서는 자루째 주더군요. 세어 보라기에 세 번 셌습니다. 절에서는 죽 한 그릇 먹고 왔고요. 죽이 맛있었습니다.”“영수는요?”“여기요. 다 손도장 받았습니다. 서련 님이 그러라 하셔서요.”서련은 영수부터 읽었다. 그리고 자루를 열기 전에 복례에게 물었다.“운송료가 얼마지요.”“지금요?”“지금요. 나른 사람이 제일 먼저입니다.”복례가 값을 말했다. 서련이 그 자리에서 세어 주었다. 복례는 돈을 받고도 한동안 손을 펴지 않았다.“세어 보지 않으십니까.”“여태는 물건 값에서 떼어 받았습니다. 따로 받는 건 처음이라… 펴면 없어질 것 같아서요.”“없어지면 다시 드리지요. 영수가 있으니까요.”복례가 손을 폈다. 값이 맞았다.“다음에도 먼저입니까.”“나른 사람이 먼저입니다.”그날 오후 수레는 장원으로 갔다. 마당에 탁자가 놓였고 그 위에 종이 마흔 장이 쌓였다. 각자의 이름과 일한 날과 값을 서진이 사흘에 나누어 쓴 것이었다.일꾼들은 탁자에서 멀찍이 서서 다가오지 못했다.“왜들 안 오십니까.”젊은 일꾼이 흙바닥을 보며 답했다.“열 해 동안 저 탁자는 떼는 자리였습니다. 가까이 가면 뭘 뗄지 몰라서요.”“오늘은 떼는 것이 없습니다. 있으면 제 몫에서 뗍니다.”오 서방이 제일 먼저 다가왔다.“관리인 몫은 원래 한 할입니다. 열 해 동안 그랬습니다.”“열 해 동안 그랬으니 열 해 동안 틀렸던 것이지요.”“서련 님, 제가 없었으면—”“있었지요. 그래서 있은 만큼 드립니다.”서련이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관리인의 급료가 적혀 있었다. 일꾼 것보다 많았고 한 할보다 훨씬 적었다. 그 아래에 한 줄이 더 있었다.“떼어 가신 것은 석 달에 나눠 갚기로 하셨지요. 오늘이 첫 달입니다.”오 서방의 귀가 붉어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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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붉은 끈을 푸는 날

붉은 끈은 손가락 굵기였고 열 해를 묶었다.“열 해 전 봄이었소. 내가 이 마당에서 봤소.”송 노인이 말했다.“도장은 서련 님이 찍은 게 아니었지.”“장원은 그때도 제 것이었습니다.”저울은 이튿날 아침에 돌아왔다. 관리인이 붉은 꼬리표 가마를 하나 들어 올렸다. 명선의 시종은 창고 약정 때문에, 복례는 운송 때문에 아침부터 와 있었다.“모자라오.”관리인이 말했다. 눈금이 꼬리표보다 한 근 아래였다.“한 가마에 한 근씩 모자라면 전부 얼마요? 선납금이 다 상계되지 않소. 끈은 그대로요.”서련은 저울 눈금을 보지 않았다. 마당 끝을 보았다.“복례 님, 저울을요.”복례가 검인 저울을 내렸다. 명선의 시종이 객사 저울을 들고 옆에 섰다. 같은 가마가 두 번째 저울에 올랐다. 시종이 읽었다.“꼬리표와 같습니다.”“저울 둘이 다르군요.”서련이 말했다.“저울이 서로 다르면 둘 다 관아에 보내는 것이 법입니다. 검인이 있는 저울과 없는 저울 중 어느 쪽이 틀렸다고 하겠습니까.”윤태선의 부채가 멈췄다. 관리인이 그를 보았다.“관아까지 갈 일은 아니지요.”윤태선이 말했다.“관리인, 검인 저울로 재라.”“나리, 그 저울은 저쪽 것입니다.”“관아 것이다. 관아 것으로 틀리면 관아가 틀린 것이지.”가마가 하나씩 올랐다. 시종이 읽고 관리인이 받아 적었다. 마지막 가마에서 관리인의 붓이 멈췄다.“…한 가마도 모자라지 않습니다.”서련이 계약서를 폈다. 열 해 전의 종이였다. 마지막 줄을 소리 내어 읽었다.“선납금이 상계되면 납품 독점과 상주 관리는 그날로 끝난다.”윤태선은 대답하지 않았다.“오늘입니다.”“계약서를 잘도 간수하셨군요.”“장원에 남아 있던 것입니다. 나리 글씨지요.”그는 끈을 풀지 않았다. 부채로 관리인을 가리켰다.“풀어라.”관리인의 손이 매듭을 더듬었다. 열 해 동안 아무도 풀지 않은 매듭이라 단단했다. 손이 떨렸다. 마당의 일꾼 마흔이 그 손을 보고 있었다.“뭘 꾸물대느냐.”매듭이 풀렸다. 끈이 문고리에서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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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약값을 남기는 저녁

첫 수입으로 모두가 선물을 사자고 했다. 서련은 종이를 꺼냈다.“엿이요. 아이들한테 엿 한 줌씩요.”단비가 먼저 말했다.“술 한 독은 있어야지. 마흔이 마실 건데.”송 노인이 말했다. 오 서방은 새 저울을 사자고 했고, 젊은 일꾼은 대문에 새 문패를 달자고 했다. 서련의 문패.“문패는 나중에요. 이름을 걸면 이름값을 물어야 합니다.”“누가 물립니까.”“궁에서요. 걸린 이름은 찾기 쉬우니까요.”서련은 종이를 탁자에 펴고 붓을 들었다.“다음 급료.”한 줄.“서진의 약값. 창고 지붕. 씨앗. 복례 님 다음 운송료. 객사에 맡길 보증금.”다섯 줄. 그리고 남은 것을 적었다. 작았다.“엿은 됩니다. 술은 한 독 말고 한 병요.”송 노인이 혀를 찼다. 그러나 웃고 있었다.“저울은요.”오 서방이 물었다.“저울은 다섯이 빌려준답니다. 빌리는 동안은 안 삽니다.”“빌린 저울로 장원을 합니까.”“빌린 저울이 제 저울보다 믿을 만합니다. 남의 눈이 붙어 있으니까요.”단비가 엿 값을 받아 들고 뛰어나갔다.해가 기울 때 서련은 창고 지붕에 올라갔다. 봄비가 오기 전에 기와 틈을 보아야 했다. 사다리가 흔들렸다. 지붕 마루에 앉으니 장원이 다 보였다. 밭과 움과 마당의 탁자. 그리고 사람들.사다리가 다시 흔들렸다. 이현이 올라왔다. 손에 서련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이걸 두고 갔소.”“거기서 보면 됩니다.”“여섯 줄이더군.”그가 옆에 앉았다. 지붕 마루가 좁아 어깨가 가까웠다.“다음 급료, 약값, 지붕, 씨앗, 운송료, 보증금. 그런데 그대 이름은 없소.”“제 몫은 이 장원입니다.”“장원은 그대를 먹이지 않소. 그대가 장원을 먹이지.”서련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현이 종이의 마지막 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보증금은 무엇이오.”“저울을 가져온 다섯에게 약속한 것입니다. 물건에 흠이 있으면 품삯이 아니라 제 몫에서 먼저 뺀다고요.”“그럼 그대 몫이 있긴 있군.”“있다가 없어지는 몫입니다.”“없어지지 않으면.”“그때는 다음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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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석 달의 자리

명선이 내민 것은 방 열쇠였다.작은 쇠 열쇠였고 끈이 새것이었다. 서련은 받지 않았다.“먼저 무슨 방인지 듣겠습니다.”“객사 손님이 열쇠도 그냥은 안 받는군.”명선이 열쇠를 탁자에 놓았다. 아침 햇살이 마루에 길게 들어와 있었다. 그 뒤에 시종이 종이 뭉치를 안고 서 있었다.“석 달이오. 내 관할의 고충을 받으시오. 객사 사람, 장원 사람, 내 이름으로 움직이는 사람들. 접수하고, 정리하고, 내게 올리시오. 처분은 내가 하오.”“고충이 무엇까지입니까.”“급료, 물품, 사람 배치. 그대가 지난 넉 달 동안 한 일이 다 그것 아니오?”“그것을 이름 없이 했지요. 이름을 붙이면 청구서가 따라옵니다.”“그래서?”“범위를 먼저 적겠습니다.”서련이 시종에게서 붓을 받았다. 명선은 말리지 않았다. 서련이 적는 동안 마루는 조용했다.접수하는 것과 접수하지 않는 것. 체포와 형벌은 관아. 궁 안 처소의 일은 그 처소 상궁. 공주의 관할이 아닌 것은 돌려보낸다. 보수는 석 달치를 미리 정한다. 종이와 등불과 심부름 값은 따로. 그리고 마지막 줄.“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 공주께서도 언제든 거둘 수 있다.”명선이 종이를 당겨 읽었다. 눈이 한 줄에서 멈췄다.“궁 안 처소 일은 안 받겠다?”“공주마마의 관할이 아닙니다.”“내가 받으라 하면?”“그때는 공주마마께서 그 처소 상궁과 먼저 다투셔야 합니다. 저는 그 뒤에 갑니다.”명선이 시종을 보았다. 시종이 고개를 끄덕였다.“보수는 얼마를 적었소.”“객사 방값과 같게 적었습니다. 그 이상이면 제가 공주마마께 빚지고, 그 이하면 공주마마께서 제게 빚지십니다.”“방값을 방값으로 갚는군.”“빚이 안 남는 값이 그것뿐이라서요.”“권한을 더 달라 하지 않소? 그대라면 궁 전체 고충을 받겠다고 할 줄 알았는데.”“권한은 청구서와 함께 옵니다. 지금은 받을 만큼만.”“받을 만큼이 왜 이만큼이오.”“그 권한을 받으면 그 권한이 저를 씁니다.”“석 달 뒤에는.”“석 달 뒤에 다시 적습니다. 그때 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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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첫 번째 바느질

보늬의 손가락에는 바늘 자국보다 매 자국이 먼저 있었다.손등에 가는 줄 셋. 오래된 것과 새것. 바늘 자국은 그 아래에 있었다. 서련은 아이의 손을 잡아 뒤집어 보았다.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었다. 바늘을 잡은 지 얼마 안 된 손이었다.“매는 왜 맞았습니까.”“실을 늦게 꿰어서요. 그리고 한 번은… 이유를 못 들었습니다.”“바늘 자국은요.”“밤에 연습하다가요. 낮에는 찔리면 안 됩니다. 피가 옷감에 묻으면 그것도 맞습니다.”단비가 헝겊을 가져와 아이의 손가락을 하나씩 쌌다. 아이는 손을 빼지 않았다. 남이 제 손을 싸 주는 것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제례복은 어떻게 찢어졌습니까.”“모릅니다. 제가 마지막에 갰습니다. 갤 때는 멀쩡했습니다. 아침에 펴니까 안감이…”보늬가 말을 멈췄다. 단비가 물을 가져다주었다. 아이는 물을 받아 들고 마시지 않았다.“누가 보늬 이름을 말했습니까.”“민유정 마마님이요. 마지막에 만진 사람이 책임진다고요. 그게 침방 법이랍니다.”“내일 매를 맞는 것도 그분이 정하셨고요.”“…예.”서련은 붓을 놓았다. 아이의 눈이 그 붓을 따라갔다.“보늬. 저는 매를 멈추게 할 수 없습니다.”아이의 얼굴에서 무언가 빠져나갔다.“침방은 공주마마의 관할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무슨 종이를 써도 침방 문은 안 열립니다.”“그럼… 왜 오라고…”“누가 오라고 했습니까.”“채운 언니가요. 여기 가면 적어도 듣기는 한다고요.”서련은 그 말을 오래 두었다.“들었습니다. 그리고 매를 멈추는 것과 매를 맞을 이유를 보는 것은 다릅니다. 이유는 볼 수 있습니다.”“어떻게요?”“찢어진 것이 제례복이니까요.”보늬가 문턱에서 돌아섰다.“헝겊은 풀지 마세요. 내일 아침에 옷을 보러 갈 겁니다. 보늬가 아니라 옷을요.”“…옷을요.”“옷은 거짓말을 못 합니다.”명선은 저녁상 앞에 있었다.“종친 제례복이 찢어졌다? 처음 듣소.”“종친 쪽 제례 준비를 공주마마께서 살피신다 들었습니다.”“살피지. 옷이 다 되면 보러 가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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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1화. 옷을 뒤집어 보는 사람

옷을 뒤집으면 만든 사람이 보인다.서련은 여섯 해 동안 중궁에 앉아 그것을 배웠다. 겉은 입는 사람의 것이고 안은 지은 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소매 끝을 다 보기도 전에 태후전 내관이 민서경을 불러 갔다. 연회 옷감 일이라 했다. 민서경은 문턱에서 한 번 더 말했다. 겉만이오. 남은 것은 옷걸이의 자줏빛 제례복과, 지켜보라고 남겨진 침방 궁인 하나와, 문틀에 기댄 채운이었다.“이 옷은 누구 이름으로 되어 있습니까?”침방 궁인이 장부를 넘기지도 않고 답했다.“보늬입니다.”“그럼 보늬에게 묻지요.”서련은 구석에 서 있던 아이를 불렀다. 열여섯. 어제 사무방에서 손가락을 내밀던 아이는 오늘 두 손을 소매 속에 감추고 있었다.“보늬 이름으로 된 옷입니다. 뒤집어 봐도 되겠습니까?”보늬가 침방 궁인을 보았다. 궁인은 눈을 피했다.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민서경은 침방의 일이라 했지만, 옷에는 보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상궁께서 겉만 보라 하셨는데요.”침방 궁인이 말했다.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상궁께서는 제게 하신 말씀이지요. 저는 옷 임자에게 물었습니다.”채운이 옷걸이에서 옷을 내려 탁자에 놓고 뒤집었다. 단비가 등불을 안감 쪽으로 옮겼다. 안감이 드러났다. 왼쪽 옆솔기, 찢어진 자리는 손바닥 길이였다. 그 위로 급하게 꿰맨 땀이 굵은 실로 지나가 있었다. 한 땀이 보리알만 했다.“이게 찢어진 이유입니다.”채운이 손가락으로 땀을 짚었다.“땀이 크면 실 하나가 버티는 폭이 넓어집니다. 그 상태로 당기면 여기부터 갑니다. 제례복은 절을 할 때 옆이 당겨집니다.”“보늬가 꿰맨 건가요?”“아닙니다.”채운은 대답을 망설이지 않았다. 서련이 아이를 돌아보았다.“보늬가 한 곳은 어디입니까?”보늬가 소맷단을 가리켰다. 소맷단의 땀은 촘촘했다. 조금 비스듬하게, 그러나 간격이 흐트러지지 않았다. 아이의 손은 아직 어렸지만 손의 버릇은 이미 생겨 있었다.“찢어진 뒤에 누가 손을 댔습니까?”침방 궁인이 입을 다물었다. 채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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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2화. 상궁의 조카

민유정은 바늘을 잡아 본 지 삼 년이 넘었다고 채운이 말했다.“책임자가 되고부터입니다. 장부를 잡으면 바늘은 놓는 법이라고요.”“누가 그러던가요?”“책임자가요.”사무방 창틀에서 단비의 종이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채운은 내보내겠다는 말을 듣고도 침방에 돌아가 낮일을 마쳤다. 내보낸다는 말과 내보냈다는 말은 다르니까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서련은 그 말을 오래 기억해 두기로 했다.민서경은 해 질 무렵에 왔다. 태후전에서 바로 온 옷차림 그대로였다.“조카가 소란을 겪었다더군요.”“채운이 소란을 겪었습니다. 조카분은 명을 내리셨고요.”“같은 말이오.”“매를 맞는 쪽에서는 다릅니다.”민서경은 앉지 않았다. 앉으면 이야기가 길어진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다.“서련 님. 침방의 인사는 내 소관이오. 공주께서 맡기신 건 제례 준비지 침방 살림이 아니지 않소.”“그렇습니다. 그래서 인사를 말하지 않겠습니다. 순서를 말하지요.”서련은 종이를 한 장 밀었다. 이름은 없었다. 날짜와 작업 단계만 있었다. 재단, 안감, 옆솔기, 소맷단, 마무리.“제례복 여덟 벌이 이 순서로 지어졌습니다. 옆솔기가 누구 손에 있었는지는 침방 장부에 있겠지요. 저는 그 장부를 보자고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찢어진 옷이 보늬 손에 간 것이 소맷단 차례였다는 것은 장부에도 그렇게 적혀 있을 겁니다.”“그래서.”“혈연은 제가 따질 일이 아닙니다. 순서는 따질 수 있습니다.”민서경의 입가가 움직였다. 웃음은 아니었다.“말씀은 잘하시오. 그런데 서련 님, 말로 옷이 지어지오?”“아니지요.”“그럼 지어 보이시오.”민서경이 조건을 내놓았다. 내일 새벽부터 하루. 같은 옷감, 같은 본. 채운이 한 벌, 민유정이 고른 사람들이 한 벌. 예관이 입회하고 명선공주가 원한다면 보아도 좋다. 채운의 옷이 낫다면 보늬의 매는 없던 일로 하고 채운도 침방에 남는다.“조카분은 사람을 빌려도 됩니까?”“태후전에서 둘 빌리겠소.”“빌리십시오. 이름을 적으시고요.”“채운의 옷이 못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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