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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6화. 청첩장

Author: 6jay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03 08:01:21

오전 11시, 샤토 드 로젠버그 별채 마스터 베드룸.

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전면 유리창으로 레만 호수의 눈부신 햇살이 침대 시트를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시후의 조각 같은 맨가슴에 얼굴을 묻은 은서의 얼굴에는 수줍은 홍조가 번져 있었다. 한동안 옥죄었던 백금 앵클릿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은서의 매끄러운 발목.

시후는 아침에 한 서약을 소리 내어 다시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은서가 일어나려 하면 이유부터 묻던 버릇을 참았다. 그녀가 물을 가지러 갔다 돌아오는 동안 자리를 그대로 비워 두었다.

은서는 돌아와 그의 옆에 앉았다. 그가 안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해 조금 웃었다.

“물 마시러 간 것뿐이에요.”

“알고 있다.”

“알면서도 힘들죠?”

시후는 잠시 생각하다 그렇다고 했다. 은서는 그 솔직한 대답이 좋았다. 어렵지 않은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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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98화. 부탁

    오후 2시,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프라이빗 웨딩 살롱.드레스가 여러 벌 걸려 있었다. 은서는 가장 화려한 것부터 보라는 권유에 바로 고르지 않았다. 옷걸이에서 한 벌씩 내려 달라고 한 뒤 실제로 입고 앉아 보았다.거울 앞에서 예쁜 옷과 오래 입어도 편한 옷은 달랐다. 허리를 조이는 것을 조금 풀어 달라고 하자 담당자가 전체 선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은서는 괜찮다고 했다.“제가 편하게 숨 쉬는 쪽이 더 예쁠 것 같아요.”핀을 다시 꽂은 뒤 은서는 의자에서 일어나 걸었다. 거울 앞에서 돌아설 때 치맛자락이 따라왔다. 멈춰 선 모습뿐 아니라 움직이는 자기 모습도 마음에 들어야 했다.담당자가 웃으며 치맛자락을 살폈다. 조금 전 풀어 달라고 했던 허리 부분도 다시 확인했다. 은서는 한 번 더 숨을 들이쉬었다. 옷에 맞춰 몸을 움츠리지 않아도 가슴이 편하게 부풀었다.시후는 피팅룸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이든 직접 확인하겠다고 안에 들어오려던 사람이, 이제는 불러 줄 때까지 앉아 있었다. 은서는 담당자에게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전해 달라며 웃었다. 하루쯤은 그를 기다리게 하고 싶기도 했다.각국 왕실 관계자와 글로벌 명품 그룹 주요 인사들의 축하 화환이 영빈관 전체를 뒤덮은 가운데, 은서의 본식 웨딩드레스가 정해졌다.사락-파리 오트쿠튀르에서 은서의 체형과 임신 8주 차의 곡선을 고려해 한 땀 한 땀 특수 직조한 순백의 실크 머메이드 드레스. 은서는 거울 앞에 서서, 어머니 서혜진 여사의 유품인 ‘200캐럿 페어컷 에메랄드 웨딩 티아라’를 머리에 조심스럽게 얹었다. 영롱하고 짙푸른 초록빛 광채가 거울 속 은서의 청초하고 단아한 얼굴을 성스럽게 비추었다.티아라를 얹은 은서는 화장대에 놓아둔 어머니의 편지를 다시 펼쳤다. 거울 속에 신부 차림의 자신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그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97화. 파리 오픈

    프랑스 파리 방돔 광장(Place Vendôme). 하이엔드 주얼리 매장들이 늘어선 거리를 따라 손님들이 오갔다. 광장 안쪽, 내부 공사를 마친 4층 석조 건물 외벽에 찬란한 금빛 로고가 걸렸다.은서는 현장 책임자가 보내 준 사진으로 이 건물을 수없이 봤다. 바닥재를 고르고 진열장 위치를 바꿀 때도 화면 너머로 이야기했다.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오자 사진에서 놓쳤던 것들이 보였다.오전의 빛이 안쪽 진열장까지 닿지 않았다. 안내대와 출입문 사이도 생각보다 좁았다. 은서는 직원들이 자리를 잡기 전에 그 부분부터 확인했다. 임시 안내판을 한 걸음 옮기는 것만으로 손님이 돌아설 공간이 생겼다.“대표님은 오늘 인사만 하시면 됩니다.”현장 직원이 걱정하듯 말하자 은서는 의자를 부탁했다.“그럼 앉아서 볼게요. 처음 오는 손님 눈높이로요.”직원이 접이식 의자를 펴줬다. 은서는 앉은 채 입구를 봤다. 열린 문으로 사람들이 지나갔다. 누군가는 걸음을 늦췄다가 그대로 갔고, 누군가는 유리에 붙은 이름을 읽었다.그 작은 차이가 신기해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이곳에서는 서경의 딸이라는 설명이 먼저 따라오지 않았다. 이름을 모르는 손님에게 작품부터 보여줄 수 있었다.은서는 옆에 둔 수첩을 폈다. 더 고칠 곳이 생각났지만 오늘 전부 바꾸지는 않기로 했다. 직원들이 실제로 손님을 만나며 알게 될 것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이 가게는 문을 열어야 했다.앉아 보니 높은 장식보다 낮은 진열대가 먼저 들어왔다. 그녀는 가장 보고 싶은 작품 하나만 그쪽에 놓자고 했다. 모든 것을 한꺼번에 보여 주려다 아무것도 기억에 남지 않을 수 있었다.간판의 덮개를 내릴 시간이 되자 은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로 쓰기로 한 이름이 마침내 파리의 벽에 걸렸다.[EUN: High Je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96화. 청첩장

    오전 11시, 샤토 드 로젠버그 별채 마스터 베드룸.천장부터 바닥까지 이어진 전면 유리창으로 레만 호수의 눈부신 햇살이 침대 시트를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시후의 조각 같은 맨가슴에 얼굴을 묻은 은서의 얼굴에는 수줍은 홍조가 번져 있었다. 한동안 옥죄었던 백금 앵클릿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진 은서의 매끄러운 발목.시후는 아침에 한 서약을 소리 내어 다시 확인하지 않았다. 대신 은서가 일어나려 하면 이유부터 묻던 버릇을 참았다. 그녀가 물을 가지러 갔다 돌아오는 동안 자리를 그대로 비워 두었다.은서는 돌아와 그의 옆에 앉았다. 그가 안도한 표정을 감추지 못해 조금 웃었다.“물 마시러 간 것뿐이에요.”“알고 있다.”“알면서도 힘들죠?”시후는 잠시 생각하다 그렇다고 했다. 은서는 그 솔직한 대답이 좋았다. 어렵지 않은 척하다가 어느 날 다시 문을 잠그는 것보다, 어렵다고 말하고 기다려 주는 편이 나았다.시후의 단단하고 거친 손가락이 은서의 종아리를 쓸어 올리며 허벅지 안쪽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남자가 은서의 아랫배에 제 뜨거운 귀를 가만히 대며 속삭였다.그의 목소리가 이불 위로 작게 내려앉았다.“안녕, 내 아이들아.”시후의 입술이 은서의 배 위로 다정하게 닿았다 떨어지자 은서가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아직 너무 일러요, 시후 씨.”“매 순간 네 안에서 우리 아이들이 자라는 걸 느끼고 싶어.”시후의 검은 눈동자가 맹렬한 애정으로 타오르며, 은서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아 제 몸 위로 안아 올렸다. 남자의 뜨거운 혀끝이 은서의 새하얀 목덜미와 쇄골을 깊게 탐닉하며, 벌어진 입술에 길게 입을 맞췄다.은서가 그의 어깨를 짚자 시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95화. 청혼

    이른 아침 7시, 스위스 몽트뢰 레만 호숫가 프라이빗 요트 선착장.잔잔한 수면 위로 엷은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알프스 만년설 봉우리를 뚫고 쏟아진 투명한 아침 햇살이 은빛 보석처럼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순백의 실크 롱 드레스를 차려입은 한은서가 선착장 끝에 서서 호수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은서는 일찍 깼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짐작하면서도 기다리는 동안 손이 차가워졌다. 어제 용서한다고 했는데 그가 다시 무슨 대답을 원할까.선착장에는 손님도 카메라도 없었다. 멀리 떨어진 경호원들은 호수 쪽을 보고 있었다. 은서는 빈 의자 하나와 놓여 있는 물병을 봤다. 오래 서 있기 힘들면 앉으라는 배려가 먼저 마련돼 있었다.난간을 잡고 물결을 내려다보니 쫓기던 밤이 떠올랐다. 은서는 손에 힘을 주었다가 천천히 풀었다. 오늘은 누군가를 피해 배에 오를 필요가 없었다. 시후가 걸어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면 됐다.뒤에서 발소리가 들려도 바로 놀라지 않았다. 시후의 걸음이라는 것을 알았다. 은서는 천천히 돌아섰다.사각, 사각.단단한 구두 소리와 함께 흐트러짐 없는 블랙 수트를 차려입은 강시후가 다가왔다. 큰 체격, 세상을 짓밟던 오만한 시후의 눈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남자의 짙은 눈동자 속에는 오직 제 목숨보다 소중한 여자를 향한 숭고한 사랑과 애절함만이 차오르고 있었다.시후는 은서의 앞에 멈추어 섰다.그리고 그 순간.탁.세상을 호령하던 서경그룹의 단독 회장이자 냉혹한 지배자가, 차가운 나무 데크 위에 천천히 두 무릎을 완전히 꿇었다.“……!”은서의 숨결이 멎었다.시후는 은서의 떨리는 두 손을 제 뜨거운 심장 위에 얹으며 눈물을 떨구었다.“널 감시하고, 끝내 방에 가두며 족쇄까지 채웠던 날 용서해라, 은서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94화. 용서

    오후 5시, 스위스 몽트뢰 레만 호숫가 프라이빗 정원.만년설이 덮인 알프스 영봉 위로 붉은 노을이 내려앉으며, 잔잔한 호수 수면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은서는 정원 벤치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자신의 아랫배를 가만히 어루만졌다.정원에 나오기 전 시후는 누구와 함께 갈 것인지 묻지 않았다. 바람이 차가우니 겉옷을 챙기라는 말만 했다. 은서는 혼자 걸어 나와 가장 가까운 벤치에 앉았다.꽃의 이름을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보석을 디자인할 때 참고했던 모양도 실제로 보니 달랐다. 잎이 완벽하게 대칭인 꽃은 드물었다. 은서는 구겨진 꽃잎 하나를 보며 어머니가 일부러 남긴 세공 자국을 떠올렸다.시후가 어제는 기다려 줬어도 오늘은 또 불안해할 수 있었다. 은서 자신도 열린 문 앞에서 자꾸 멈췄다. 꽃잎에서 눈을 뗀 뒤에도, 문손잡이를 잡고 망설였던 아침 일이 떠올랐다.그럴 때마다 어디가 불편한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은서는 벤치에 등을 기대고 숨을 쉬었다. 혼자 나와 앉아 있어도, 집으로 돌아오라는 소리가 뒤따라 들리지는 않았다.임신 6주 차.심했던 입덧이 가라앉고, 두 개의 작은 심장이 뛰고 있는 기적 같은 온기가 손끝을 타고 전해졌다.사각, 사각.잔디를 밟는 발소리와 함께, 시후가 따스한 캐시미어 숄을 들고 다가와 은서의 어깨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남자의 손에 들려 있는 작은 검은색 벨벳 상자. 시후가 상자를 열자, 마터호른 백금으로 정교하게 깎아낸 한 송이 순백의 백합 브로치가 모습을 드러냈다.시후가 열린 상자를 은서의 앞으로 내밀었다.은서는 브로치를 손에 올려놓았다. 잠금 장치를 만지며 시후를 봤다.“이번에는 제가 달아 볼게요.”브로치 뒤의 핀이 손끝에 닿았다. 은서는 옷감을 접어 뒷면을 받쳤다. 시후의 손이 잠깐 움직였지만 그녀가 해낼 때까지

  •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제93화. 장부

    오전 10시, 샤토 드 로젠버그 별채 서재.스위스 연방 검찰 특수수사관과 국제공조 수사관들이 테이블 위에 故 서혜진 여사의 사망 당시 조수현과 태강그룹이 조성했던 300억 원대 무기명 채권 및 해외 비밀 계좌 장부를 펼쳐놓았다. 그러나 복잡한 금융 은어와 고대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암호화된 장부 앞에서 수사관들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때, 은서가 서재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은서는 바로 원본을 만지지 않았다. 담당자가 건넨 사본을 받아 한 장씩 펼쳤다. 줄마다 반복되는 표기가 눈에 걸렸다. 숫자 자체보다 자릿수가 끊기는 방식이 익숙했다.“이 부분의 앞뒤 페이지도 있을까요?”세 장을 나란히 놓자 잘린 기호가 서로 이어졌다. 은서는 자신의 작업 수첩을 가져와 옛 보석 거래 기록을 옆에 뒀다. 비슷해 보인다고 같은 방식일 거라 단정할 수는 없었다.카일이 무엇을 찾았느냐고 물었다. 은서는 아직 모른다고 답했다. 먼저 일치하는 부분을 세 군데 더 찾아야 했다. 시후가 뒤에서 보고 있었지만 재촉하지 않았다.하나가 맞자 다음 줄도 풀렸다. 은서는 연필로 밑줄을 그었다. 보석의 무게와 컷을 표기하던 관습을 돈의 흐름에 얹어 놓은 형태였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숫자와 글자가 뒤섞인 장식처럼 보일 수 있었다.순백의 실크 셔츠 차림의 은서가 장부에 몸을 숙였다. 손가락으로 숫자의 배열을 짚으며 읽다가, 같은 자릿수에서 되풀이되는 표식을 찾았다.“이건 금융 코드가 아니에요. 18세기 앤틱 다이아몬드 캐럿 중량과 브릴리언트 컷 단면 비율을 대입한 보석 세탁 환치기 암호예요.”은서가 장부 옆에 풀이를 적기 시작하자 수사관들도 고개를 숙였다. 은서는 연필을 쥐고 단 10분 만에 1조 원이 흘러 들어간 스위스 비밀 금고 번호와, 태강그룹 전·현직 회장들이 수수한 뇌물 계좌의 실명을 완벽하게 복원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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