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오빠의 방에는 창문이 없다: Chapter 71 - Chapter 80

150 Chapters

제71화. 발각

콰앙-!펜트하우스 45층의 육중한 티타늄 방탄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블랙 롱 코트를 휘날리는 강시후가 스튜디오 안으로 벼락처럼 들이닥쳤다.그 순간.은서는 완성된 더미 에메랄드 브로치를 세공 테이블 하부 철제 프레임의 자석 틈새 안쪽으로 소리 없이 밀어 넣었다.탁.작업대 위에는 오직 에메랄드 원석 가루와 제도용 컴퍼스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은서는 허리를 펴면서도 아래를 보지 않았다. 발목 바로 옆에 숨긴 물건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시후의 눈은 그녀의 얼굴보다 먼저 작업대의 전원 표시를 훑었다.“아직 뜨겁군.”그가 장비 옆면에 손을 대며 말했다. 은서는 실제로 만들고 있던 티아라의 연결 부품을 집어 들었다. 거짓말에 쓸 핑계를 새로 떠올리는 것보다 눈앞에 있는 작업을 설명하는 편이 나았다.“이 부분을 다시 맞췄어요. 크기가 달라서요.”시후는 받지 않았다. 은서는 손을 내린 뒤 장비를 껐다. 문간에 선 윤 실장이 두 사람을 보고 고개를 낮췄다. 그가 들고 온 기록에는 아직 이상 신호의 원인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표시가 있었다.“어떤 것이 문제인지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윤 실장이 조심스럽게 말했지만 시후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서는 그때 알았다. 그는 원인이 무엇인지 듣기 전에 자신이 무언가 숨긴다는 생각부터 하고 있었다.벅, 벅.구두 소리가 작업대 앞으로 가까워졌다. 장신을 마주한 은서가 턱을 들었다. 시후가 휴대용 정밀 전파 탐지기를 작업대에 내리찍자 공구들이 들썩였다. 은서는 다리를 움직이지 않은 채 그 손을 지켜봤다.“이 방에서 마이크로 레이저 세공 주파수가 감지됐다.”시후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서랍부터 열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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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2화. 전야

이틀이 흘렀다. 은서는 작업을 마친 브로치를 소도구 상자 안에 넣어 두었다. 준비는 끝났는데 안심이 되지 않았다. 지난 이틀처럼 남은 시간도 이 물건을 들키지 않고 보내야 했다.시후는 그동안 평소보다 자주 방에 들어왔다. 급한 보고도 옆에서 받았고, 식사가 늦으면 직접 문밖에 물었다. 잘해 주려는 것인지 감시하는 것인지 은서는 구별할 수 없었다.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고 있었다.행사 전날에는 드레스가 도착했다. 수선 담당자가 허리 치수를 재는 동안 시후는 방 한쪽에 서서 기다렸다. 은서는 거울을 통해 그의 얼굴을 봤다. 정말로 내일을 기대하는 얼굴이었다.그 기대를 자신이 깨뜨릴 것이라고 생각하자 숨이 막혔다. 그러나 기대를 지켜 주기 위해 또 하나의 거짓말 속에서 살아갈 수는 없었다. 은서는 고개를 들고 치마 길이를 확인했다. 자기 발로 움직일 수 있는지부터 보았다.수선 담당자가 남은 시침핀을 빼냈다. 은서는 옷자락이 매끄러워진 것을 손으로 쓸었다. 내일 이 옷을 입고 어느 문을 나설지, 이 방에서 알고 있는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시후가 거울 속에서 웃을 때 그녀는 바로 따라 웃지 못했다.서경그룹 창립 40주년 기념 VVIP 글로벌 리셉션 D-1.오후 3시, 펜트하우스 45층 마스터 드레스룸.시후가 은서의 앞에 파리 오트쿠튀르에서 특수 공수한 짙은 에메랄드 그린 실크 이브닝드레스와 500억 핑크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내려놓았다.“내일 밤, 국내외 주요 투자자와 하이주얼리 업계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다.”시후는 내일 일을 말하며 은서를 바라봤다. 이미 그 자리에 함께 서 있는 것처럼, 먼저 웃고 있었다.“그곳에서 넌 내 유일한 아내이자 서경의 대표 디자이너로 세상 앞에 공표될 거다.”“법적인 일은 아직 남아 있잖아요.&rdq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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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3화. 마지막 춤

오후 8시, 서울 장충동 신라호텔 다이너스티 볼룸.차에서 내리자 여러 방향에서 이름을 불렀다. 은서는 순간 어느 쪽을 보아야 할지 몰랐다. 시후가 손을 잡고 멈춰 서자 카메라의 불빛이 한꺼번에 터졌다.드레스 안감에 숨긴 브로치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다리에 닿았다. 겉으로는 움직임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은서는 대신 시후의 팔에 손을 얹었다.“춥나.”“아니요. 조금 긴장돼요.”시후는 손을 놓지 않았다. 은서는 그 손의 무게를 기억하려 했다. 나중에 돌이켜도 전부 거짓된 시간이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그가 그녀의 손등을 감쌌다. 온기가 전해지자 오히려 마음이 흔들렸다. 지금 차에 돌아가 함께 집으로 가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후는 기뻐할 것이고, 자신은 다시 잠긴 방에서 다음 기회를 기다릴 것이다.은서는 정면을 봤다. 줄지어 선 사람들이 자신에게 인사했다. 아틀리에에서 함께 일했던 직원도 멀리 보였다. 웃으며 손을 들자 그 직원의 얼굴이 환해졌다. 보고서의 이름으로만 만나던 사람이 실제로 눈앞에 있었다.은서는 그 반가움에 마음을 다잡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직접 인사할 수 있는 생활로 돌아가고 싶었다.국내외 주요 투자자와 글로벌 명품 하우스 관계자 1,500여 명이 운집한 가운데, 서경그룹 창립 40주년 VVIP 리셉션의 막이 올랐다. 웅장한 팡파르와 함께, 메인 단상으로 이어지는 붉은 카펫 위로 강시후와 한은서가 나란히 걸어 들어왔다.블랙 턱시도를 입은 시후가 단상으로 올라갔다. 장신 곁으로, 짙은 에메랄드 실크 드레스에 500억 핑크 다이아몬드 티아라를 얹은 은서가 섰다. 수천 대의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시후는 단상 중앙의 마이크를 쥐었다.“오늘 이 자리를 빌려 공식 발표합니다.&rd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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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4화. 잠적

암전된 볼룸 한가운데, 시후의 손목에 차인 티타늄 스마트워치가 미세한 진동을 울렸다.[GPS 추적: 한은서 — 호텔 1층 프라이빗 드레스룸 내 정지 중. 심박수 정상.]“윤 실장, 비상 발전기 가동하고 1층 드레스룸 경호선 강화해라.”시후는 침착하게 지시를 내리며 1층 드레스룸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그 시각, 1층 프라이빗 드레스룸 안. 은서는 드레스 안감에서 떼어낸 ‘더미 주파수 에메랄드 브로치’를 실내 마네킹의 발목에 단단히 고정해 둔 상태였다.불이 꺼지자 은서는 먼저 드레스룸으로 들어왔다. 문을 닫고 잠깐 벽을 짚었다. 숨이 너무 커서 복도에 들릴 것 같았다.안감에서 브로치를 떼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다. 손이 떨려 실밥을 한 번에 잡지 못했다. 매끈한 장신구가 손바닥에 들어오자 곧바로 마네킹 아래에 내려놓았다.아직 돌아갈 수 있었다. 이 물건을 다시 숨기고 시후를 기다리면 정전 때문에 놀랐다고 말할 수 있었다. 은서는 고개를 들었다. 거울 속 얼굴이 창백했다.그러나 돌아가면 그 얼굴로 또 몇 달을 살아야 할지 몰랐다. 은서는 마네킹의 받침을 눌러 흔들리지 않는지 확인했다. 머리의 티아라는 벨벳 보관함에 넣어 남겨 두었다. 이곳을 떠나는 데 보석을 가져갈 필요는 없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은 제 몸과, 진실을 확인할 기회였다.브로치에서 뿜어져 나오는 미세 공진 주파수가 백금 앵클릿의 위장 신호를 서버로 완벽히 송출하고 있었다. 은서는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스커트 자락을 단숨에 찢어내어 기동성을 확보하고, 하이힐을 벗어 던진 채 맨발로 비상계단을 질주했다.타닥, 타닥!차디찬 콘크리트 계단을 밟으며 단 2분 만에 지하 3층 기계실 방화벽 앞에 도달했다.철컥-육중한 철문이 열리자, 헤드라이트를 끈 채 대기하고 있던 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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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5화. 추적

우르릉- 쾅!자정 무렵, 인천국제공항 제2계류장 활주로 위로 폭우와 천둥 번개가 사납게 내리꽂혔다.은서는 대기 차량에서 내려 코트를 여몄다. 요원이 신분 확인을 마치는 동안 좁은 통로에 서서 기다렸다. 발바닥에 붙인 거즈가 신발 안에서 조금씩 움직였다.휴대폰은 없었다. 시후에게 연락하려면 다른 사람의 것을 빌려야 했다. 은서는 요원을 부르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가 달려오는 목소리를 듣고도 자신이 출발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출발 여부를 다시 확인하겠습니다.”승무원이 다가와 말했다. 일정은 준비되어 있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탑승하지 않아도 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은서는 그 말을 끝까지 들었다. 억지로 데려가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결정의 무게를 더 크게 만들었다.“갈게요.”자기 대답이 엔진 소리에 묻혔을까 봐 은서는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승무원이 길을 비켜줬다. 누가 등을 떠미는 대신 자신이 발을 떼기를 기다렸다.대답하고 나서야 계단을 밟았다. 여권은 자신의 가방에 직접 넣었다. 다른 사람에게 맡긴 채로 또 한 나라를 건너고 싶지 않았다. 트랩 위에서 돌아보니 빗줄기 때문에 주차 구역의 불빛이 번져 있었다. 서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목이 잠겼다.스위스 연방 외교 전용기 걸프스트림 G650의 쌍발 제트 엔진이 굉음을 토해내며 계류장에서 출발을 준비하고 있었다.그 순간.콰아아앙-!계류장 외곽 방탄 철제 게이트가 굉음과 함께 박살 나며 날아갔다. 헤드라이트를 하얗게 밝힌 강시후의 블랙 마이바흐와 특수 방탄 SUV 5대가 빗속 활주로를 가로지르며 번개처럼 돌입했다.끼이이익-!차가 활주로 바닥을 긁으며 멈추자 강시후가 뛰쳐나왔다. 턱시도 셔츠가 금세 빗물에 젖었다. 장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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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화. 유언

12시간의 비행 끝에 스위스 제네바에 도착한 지도 사흘째였다. 레만 호수가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알프스 설산 절벽 위의 외딴 프라이빗 고성 빌라. 은서는 벽난로 불빛 아래, 킹사이즈 침대 끝에 앉아 자신의 발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드레스는 찢겨나갔지만, 복사뼈에 감겨 있는 차가운 백금 앵클릿은 여전히 남자의 족쇄처럼 서늘한 무게감을 내뿜고 있었다.카일이 준비해 둔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발찌는 그대로였다. 전문 기술자를 부르겠다는 말에 은서는 원본 확인을 먼저 하고 싶다고 했다. 물건 하나를 푸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있어서였다.지난 이틀은 신탁 서류와 열람 자격을 대조하는 데 쓰였다. 은서는 답답해도 절차를 재촉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누군가가 좋다는 말을 믿고 따라온 것으로 끝내지 않으려 했다.침대 옆에는 카일의 직원이 준비해 놓은 새 구두가 있었다. 서울 호텔의 비상계단 앞에서 벗어 버린 하이힐과는 달리 굽이 낮았다. 은서는 맨발로 계단을 달리던 감각을 떠올리며 발을 넣었다. 발바닥이 닿는 자리에 아직 조그만 통증이 남아, 끈을 매는 동안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창밖으로 호수의 아침이 밝았다. 혼자 일어나 시간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아직 낯설었다. 식사하러 내려갈지, 방에 더 있을지도 자신이 정했다. 작은 결정마다 이상할 만큼 오래 망설였다. 시후가 새겨놓은 쇄골의 붉은 키스마크와, 허락으로 맞은 첫날밤의 성난 체온이 온몸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그 시각, 서울 광화문 서경그룹 본사 40층 회장실. 사흘 동안 불이 꺼지지 않은 암흑의 집무실 한가운데, 시후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벽면 전체의 글로벌 위성 모니터를 응시하고 있었다.윤 실장은 같은 보고서를 다시 펼쳤다. 은서의 입국은 확인됐지만 카일의 여러 거처 가운데 어디에 있는지 확정하지 못했다. 은서가 무사하다는 연락도 전달했으나 시후는 본인 목소리가 아니면 믿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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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7화. 고성

헬기 소리를 듣자 은서는 창가에서 물러났다. 직원이 안전한 안쪽 방으로 안내하겠다고 손을 내밀었다. 은서는 그 손을 잡으려다 홀 쪽에서 들린 소리에 멈췄다.아래층 문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카일이 경호팀에게 맞서 싸우기 전에 자신이 이야기하겠다고 지시했다. 그러나 문밖의 사람들은 기다리지 않았다.“저 때문에 다치는 사람이 생기면 안 돼요.”직원은 그녀를 보다가 아래층 무전에 귀를 기울였다. 은서는 더 말해도 그가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양쪽에서 다른 명령이 내려오는 가운데, 이 사람도 누군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제가 내려간다는 것만 전해 주세요.”은서는 그 말만 남겼다. 진실이 담긴 물건을 갖고 왔으니 보여주면 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시후는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자신을 데려가려 하고 있었다. 코트 안의 단단한 모서리를 짚으며, 먼저 그의 이름을 부를 준비를 했다.은서는 복도 끝으로 나갔다. 카일의 직원이 따라오며 코트를 가져다줬다. 옷을 입는 동안 원본 녹음이 제자리에 있는지 확인했다. 자신이 여기까지 온 이유였다. 그것을 들려줄 사람이 마침내 왔다.그런데 반가움보다 두려움이 앞섰다. 목소리 한 번 듣기 전에 문을 부수고 들어오려는 사람이었다. 녹음의 진실을 알게 된 뒤에도 자신의 말은 듣지 않을지 몰랐다.은서는 계단 앞에서 잠깐 발을 멈췄다. 시후를 만나겠다는 결정과, 그를 따라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은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 말을 반드시 해야 했다.***두두두두-!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스위스 레만 호수 절벽 위. 고성 진입로로 검은 차량 여러 대가 올라왔다. 강시후 측 현지 로펌 직원과 사설 보안요원들이었지만, 로젠버그 측은 사유지 출입을 허가하지 않았다.서로가 경찰을 부르겠다고 맞서며 입구가 소란스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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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8화. 유품

시후는 은서를 안아 올려 고성 최상층 테라스 룸으로 거칠게 밀고 들어와 문을 쾅 닫아 잠갔다. 창밖의 눈보라가 차단된 둘만의 숨 막히는 밀실. 남자의 넓은 몸이 은서의 전신을 부서져라 짓눌렀다.“마네킹에 브로치를 달아두고 내 손을 벗어나?”은서는 코트 안쪽을 짚었다. 녹음이 아직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들었다. 시후의 눈은 분노보다 훨씬 지쳐 보였다. 그래서 더 쉽게 물러날 수 없었다.“오빠가 제 말을 들었으면 이러지 않았어요.”“떠날 수 있게 허락했어야 한다는 건가.”“허락을 받겠다는 말이 아니에요.”그가 고개를 숙이자 은서는 얼굴을 돌렸다. 지금은 가까워지는 것으로 끝낼 수 없는 이야기였다. 시후가 놓치지 않으려고 잡을수록, 준비해 온 문장들은 더 짧아졌다.“먼저 들어요. 그다음에 저한테 화를 내요.”은서는 숨을 고르고 그를 기다렸다. 화가 풀릴 때까지 얌전히 있으면 정작 녹음을 들려줄 기회가 사라질 것이다. 시후가 시선을 내리자 그녀는 그 아래로 몸을 낮추지 않고 고개를 더 들었다.시후는 녹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녀의 손만 보았다. 며칠 전 공항에서 제 손을 잡지 않았던 손이었다.시후의 짙은 눈동자가 핏발 선 분노로 타올랐다. 남자의 거친 손가락이 은서의 셔츠 단추를 뜯어내듯 풀어헤치며, 쇄골에 남아 있던 붉은 낙인 위를 거칠게 물어뜯듯 빨아올렸다.“읏…… 하아…… 오빠……!”“나를 속이고 떠날 생각까지 했군. 돌아가면 그 방에서 한 발도 못 나가.”시후의 입술이 은서의 벌어진 입술을 깊게 입을 맞추려던 그때였다. 은서가 눈물을 흘리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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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9화. 도주

비상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찬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은서는 직원이 건넨 구명조끼를 코트 위에 입었다. 버클을 채우는 손이 떨려 한 번에 맞물리지 않았다.“서두르셔야 합니다.”그 말에 은서는 먼저 원본을 확인하려다 멈췄다. 플레이어와 테이프는 시후에게 두고 왔다. 그가 다시 들을 수 있도록. 복제 자료는 카일 쪽에 남아 있었다.빈손으로 떠나는 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이번에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가져온 이유대로 그의 손에 남겨 놓은 것이었다.카일 쪽 직원이 잘 타고 있느냐고 물었다. 은서는 대답한 뒤 젖은 난간에서 손을 옮겼다. 손바닥에 남은 차가움보다 방에 두고 온 시후의 표정이 오래 떨어지지 않았다.보트에 오르자 바닥이 흔들렸다. 은서는 난간을 잡고 뒤를 돌아봤다. 고성의 불빛이 높이 떠 있었다. 시후가 그 방에 남아 녹음을 다시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끝까지 듣고, 곧바로 쫓아오기 전에 한 번만 자신의 말을 생각해 주면 좋겠다고.조종사가 자리를 안내했다. 은서는 낮은 의자에 앉아 안전 손잡이를 붙잡았다. 바람이 세져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출발한다는 손짓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부아아앙-!영하 10도의 혹한과 눈보라가 몰아치는 스위스 레만 호수의 밤. 은서를 태운 카일 백작의 고속 모터보트가 칠흑 같은 수면을 가르며 프랑스 국경을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차가운 호숫물이 뺨을 때리는 가운데, 뒤편에서 뻗어온 서치라이트가 호수 위를 훑었다. 백색 광선이 배 가까이 다가왔다.두두두두-!뒤편에서 강한 엔진음이 따라붙었다. 고성 선착장에서 출발한 검은 모터보트였다. 키를 쥐고 있는 것은 블랙 셔츠가 젖어 몸에 달라붙은 강시후였다.거리는 빠르게 좁혀졌다.시후는 앞선 보트에 시선을 박고 키를 잡았다. 거리를 더 좁힐 수 있을까 그것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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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0화. 동굴

쾅-!동굴 입구를 막은 얼음 바위 너머로 눈폭풍이 쏟아졌다. 수 미터 두께로 쌓인 눈이 나갈 길을 가렸다. 알프스 자락, 레만 호반 절벽 안에 파인 천연 빙하 동굴이었다.시후는 입구 안쪽에서 바람이 덜 드는 자리를 찾았다. 동굴 바닥에도 얼음이 얇게 남아 있었다. 은서를 내려놓으려다 그대로 안은 채 앉았다.주머니의 전화기는 화면이 깜빡이다 꺼졌다. 은서의 코트에 붙은 구조용 조끼를 벗겨 한쪽에 두자 작은 표시등이 여전히 들어와 있었다. 시후는 그 빛이 보이도록 입구 가까이에 놓았다. 누군가 자신들을 찾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찾아 나설 수도 없었다.은서는 몸을 조금 움직이다가 이를 부딪쳤다. 시후가 이름을 부르면 눈을 뜨기는 했지만 대답이 점점 짧아졌다. 그는 평소처럼 괜찮다고 명령할 수 없었다. 물에서 꺼낸 것이 자신의 손이라고 해서, 물에 빠뜨린 일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나를 봐.”은서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속눈썹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시후는 그 얼굴을 보는 것이 두려워졌다. 자신을 피하려고 달아난 사람이, 자신 때문에 다시 다쳤다.“하…… 읏, 추워……요…….”얼음물에 흠뻑 젖은 은서가 사시나무 떨듯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신음했다. 입술은 파랗게 질려 있었고 체온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시후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젖은 블랙 셔츠를 단숨에 뜯어내듯 벗어던졌다.조각 같은 남자의 가슴 근육과 넓은 어깨 위로 성난 체온의 뜨거운 김이 피어올랐다. 남자의 차갑지만 단단한 손가락이 은서의 얼어붙은 코트와 젖은 옷들을 거침없이 벗겨내어 바닥에 던졌다. 어둠 속에서 드러난 은서의 가녀린 나신.시후가 은서의 전신을 제 불덩이 같은 맨가슴으로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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