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콰앙-!
펜트하우스 45층의 육중한 티타늄 방탄문이 부서질 듯 열리며, 블랙 롱 코트를 휘날리는 강시후가 스튜디오 안으로 벼락처럼 들이닥쳤다.
그 순간.
은서는 완성된 더미 에메랄드 브로치를 세공 테이블 하부 철제 프레임의 자석 틈새 안쪽으로 소리 없이 밀어 넣었다.
탁.
작업대 위에는 오직 에메랄드 원석 가루와 제도용 컴퍼스만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은서는 허리를 펴면서도 아래를 보지 않았다. 발목 바로 옆에 숨긴 물건이 있다는 생각 때문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시후의 눈은 그녀의 얼굴보다 먼저 작업대의 전원 표시를 훑었다.
“아직 뜨겁군.”
그가 장비 옆면에 손을 대며 말했다. 은서는 실제로 만들고 있던 티아라의 연결 부품을 집어 들었다. 거짓말에 쓸 핑계를 새로 떠올리는 것보다 눈앞에 있는 작업을 설명하는 편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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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 한남동 ‘EUN’ 글로벌 타워 그랜드 볼룸.해외 주요 방송사와 디지털 스트리밍을 통해 동시 생중계되는 글로벌 갈라. 웅장한 오케스트라 선율과 함께 메인 레드카펫의 문이 열렸다. 순백의 실크 오프숄더 드레스 위에 ‘에메랄드-핑크 다이아몬드 그랜드 티아라’를 얹은 한은서와, 흐트러짐 없는 블랙 턱시도를 차려입은 강시후가 손을 맞잡고 입장했다.수천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일제히 폭발하며 장내에 기립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단상 중앙에 오른 시후가 은서의 손을 쥐고 마이크 앞에 섰다. 남자의 서늘하고 묵직한 중저음이 해외 시청자들의 귓전을 울렸다.시후는 준비해 둔 축사를 접었다. 대기실에서 은서에게 물었던 말이 떠올랐다. 남들 앞에서 과거를 어디까지 이야기해도 괜찮겠느냐고. 그녀는 자기에게도 대답할 마이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시후는 단상 양쪽의 마이크를 확인했다. 회사의 규모와 작품 소개가 끝났는데도 준비한 축사를 다시 펴지 않았다. 은서에게 눈길을 주고서야 마이크 앞으로 다가섰다.객석에는 은서와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그들 앞에서 자신을 사랑의 구원자로 소개할 생각이 없었다. 은서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시후는 손을 더 세게 잡지 않고 그녀 쪽으로 몸을 조금 돌렸다.“한때, 내 방에는 창문이 없었습니다. 어둠 속에서 오직 이 여인을 새장에 가두려 했던 오만한 사내였습니다. 하지만 은서는 스스로 빛이 되어 내 심장의 창문을 열어주었고, 날 구원했습니다.”순간, 시후가 해외가 지켜보는 카메라 앞에서 은서를 향해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장내의 모든 귀빈이 숨을 들이켰다.“각국 앞에 엄숙히 서약합니다. 강시후의 모든 심장과 서경의 모든 사업은, 영원히 한은서 당신의 것입니다.”시후가 은서의 손등과 입술에 성스러운 키스를 바쳤
서울 용산구 한남동 ‘EUN’ 글로벌 하이 주얼리 본사 타워 3층, 프라이빗 마스터 살롱. 내일 저녁, 해외 120개국 국가수반과 글로벌 명품 하우스 총수 수백 명이 집결할 ‘EUN-서경 글로벌 10대 지주사 도약 및 글로벌 갈라’를 앞두고, 은서는 쇼케이스 메인 피스인 ‘에메랄드-핑크 다이아몬드 그랜드 티아라’의 최종 세팅을 점검하고 있었다.은서는 루페에 눈을 가까이 댔다. 보석 세팅의 0.01mm 틈을 확인하려고 티아라를 기울이자, 조명이 결합부 안쪽까지 들어왔다.그랜드 티아라의 중심석은 빅터 첸에게서 인수해 청혼반지로 세팅했던 그 핑크 다이아몬드였다. 은서는 이번 전시 기간에만 분리형 구조를 이용해 중심석을 새 프레임으로 옮겼다. 반지의 빈 프레임은 금고 안의 해당 칸에 따로 두었다. 박물관의 옛 티아라에는 전시용 재현석이 남아 있었다.은서는 이동 장부의 날짜를 확인하고 담당 세공사에게 빈칸을 채워달라고 했다. 자신의 보석이라도 직원들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면 안 됐다. 장부에 적힌 위치와 실제 보관 칸이 같은지 직원도 확인했다. 다음 작업자가 열어 봤을 때 헤매지 않아야 했다.갈라의 조명과 같은 빛 아래에서 티아라를 돌리자 중심석 옆이 거슬렸다. 완성한 뒤에도 한쪽 그림자가 무거웠다. 은서는 처음 스케치와 실물을 나란히 놓았다.“오늘 끝낼 수 있겠습니까?”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새로 깎는 건 아니에요. 자리만 조정해볼게요. 안 되면 지금 상태로 무리해서 올리지 않고요.”직원은 원래 위치의 사진을 남긴 뒤 공구를 건넸다. 은서는 받침천이 밀리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작은 이동 하나가 옆의 빛을 바꾸었다.도면을 펼쳐놓고 비교하자 고칠 곳이 생각보다 적었다. 은서는 마음이 급해서 전부 뜯어고칠 뻔했다고 웃었다. 직원도 긴
다음 날 오후 3시, 알프스 만년설 봉우리가 포근히 감싸 안은 몽트뢰 호반 프라이빗 별채.초록빛 잔디밭 위로 맑고 따스한 가을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은서는 잔디 위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얇은 돗자리를 깔아주려는 시후에게 오늘은 그냥 이렇게 있고 싶다고 했다. 아이들이 일어서다 넘어지면 흙과 풀이 손에 묻을 것이다. 그것까지 미리 없애둘 수는 없었다.도윤은 낮은 의자를 잡고 몸을 세웠다가 무릎을 굽혔다. 시후가 손을 뻗으려 하자 은서는 잠깐 기다려 보자는 눈짓을 했다. 아이가 다시 제 발에 힘을 주었다.“보셨죠? 어제보다 오래 서 있어요.”“들어주면 편할 텐데.”“도윤이도 자기가 해보고 싶은가 봐요.”시후는 내밀었던 손을 무릎 위에 얹었다. 무릎에 얹은 손가락이 도윤의 움직임을 따라 조금씩 들렸다. 금방이라도 받쳐 줄 듯하다가도 아이가 서 있으면 다시 내려갔다. 은서는 남자의 초조한 얼굴을 보며 웃음을 참았다. 아이가 고개를 들었을 때 두 팔을 벌렸다.“도윤아, 서아야. 엄마한테 와볼까?”은서가 잔디밭에 웅크려 앉아 두 팔을 벌렸다. 이제 갓 돌을 넘긴 아들 도윤이 통통한 다리에 힘을 주며 아장아장 잔디를 딛고 은서의 품으로 걸어 들어왔다.“우와-! 우리 도윤이 첫걸음마 뗐네!”도윤은 은서의 무릎에 이마를 부딪히고 잠시 울상을 지었다. 그녀가 안아 올리자 금세 손으로 머리칼을 잡았다. 시후가 다가와 어디 다친 곳이 없는지 살폈다.“세 걸음이었어요.”“내가 봤을 땐 네 걸음인데.”두 사람이 영상을 확인하려 했지만 카메라는 잔디를 향해 있었다. 시후가 아이에게 손을 뻗으며 휴대폰을 내려버린 탓이었다. 은서는
스위스 제네바, UN 유럽 본부 팔레 데 나시옹(Palais des Nations) 그랜드 아셈블리 홀. 해외 주요 국가 외교사절과 문화유산 최고위원 수백 명이 운집한 가운데, 2026 유네스코(UNESCO) ‘세계 평화 문화유산 특별 대상 헌정식’이 장엄하게 거행되었다.은서는 연설문보다 먼저 전시장에 놓인 작은 암석 표본을 들여다보았다. 보석으로 쓸 수 없는 부분까지 그대로 남겨둔 표본이었다. 빛나는 조각만 꺼내 팔았다면 사라졌을 흔적들이 안쪽에 이어져 있었다.카일이 옆에서 말했다.“혜진 여사는 쓸모없다는 돌을 버리지 못했습니다.”은서는 표본의 잘린 면을 봤다. 상품 사진에 쓰기에는 거친 부분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작업 수첩의 그림과 맞춰보면 어느 조각을 왜 남겼는지 알 수 있었다.카일이 같은 면을 가리키자 은서는 그가 들고 있는 설명판을 받아 읽었다. 어머니가 생전에 물었던 질문이 짧게 적혀 있었다. 답을 다 얻지 못했어도 질문까지 남길 수는 있었다. 그녀는 그 문장을 연설 원고 끝에 덧붙였다.“언젠가 필요하다고 하셨죠.”“그렇지. 나는 금고가 부족하다고 불평했고.”은서는 웃으며 장갑 낀 손을 거뒀다. 어머니의 수첩에는 남은 원석의 위치와 작업하다 멈춘 면의 그림이 함께 있었다. 생전의 고집이 이제는 다음 사람이 공부할 자료가 되어 있었다.故 서혜진 여사의 알프스 마터호른 에메랄드 보존 광산과, 한은서 회장의 ‘마터호른 글로벌 공익재단’이 인류 문화유산 보존과 평화 기여 공로로 만장일치 특별 대상에 정식 등재되었다. 에메랄드 그린 실크 드레이프 드레스를 우아하게 차려입은 은서가 시후와 나란히 단상에 올랐다.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황금 헌정패를 수여하자 장내에 폭풍 같은 기립 박수가 터져 나왔다.연설을 시작
서울 귀환 후, 밤 11시.서울 용산구 한남동 서경 펜트하우스 45층 마스터 스튜디오. 두 아이는 성북동 별채에서 편안히 잠들었고, 시후와 은서는 단 하루 동안 모든 대외 업무를 내려놓고 둘만의 공간으로 들어섰다. 10억 사기 덫에 걸려 벼랑 끝에 몰렸던 26살의 은서가 찾아왔던 칠흑 같은 ‘창문 없는 방’.그러나 오늘, 그 방은 전면 특수 스마트글래스 통유리창으로 한강의 황금빛 물결과 서울의 별빛 야경을 온전히 담아내는 찬란한 빛의 궁전이 되어 있었다. 은서가 얇은 실크 셔츠만을 걸친 채 창가에 기대어 한강을 바라보았다. 그 뒤로 다가온 시후의 큰 손이 은서의 발목에 채워진 핑크 다이아몬드 발찌를 부드럽게 쓸어 올렸다.은서는 들어올 때 벽의 이음새를 한 번 만졌다. 원래 창이 없던 집무실과 바깥쪽 공간을 나누던 벽의 자리였다. 새로 마감한 면은 매끈했지만 그녀의 기억 속에는 문이 있던 방향이 남아 있었다.“남겨둔 물건이 있나?”시후가 물었다. 은서는 작은 서랍을 열었다. 당시 사용하던 스탠드의 교체 전구가 포장째 들어 있었다. 사소한 물건 하나가 오래전의 냄새를 끌고 왔다. 젖은 코트와 종이, 어두운 방에서 처음 맡은 시더우드 향.은서는 서랍을 닫고 문으로 걸어갔다. 잠금쇠를 만지지 않아도 손잡이가 돌아갔다. 문을 잠깐 열었다가 제 손으로 닫았다. 시후가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이유를 묻지 않았다.“오늘은 제가 여기 오자고 했죠.”“그래.”“한 번 해보고 싶었어요. 돌아갈 때도 제가 먼저 문을 여는 거.”시후의 눈이 손잡이에 머물렀다. 은서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바로 묻지 않았다. 자신이 만질 때마다 떠올리는 감각을 남자도 잠깐 생각해봤으면 했다.문밖에서 엘리베이터 도착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미국 뉴욕 맨해튼 록펠러 센터 65층, 레인보우 룸(Rainbow Room). 해외 100대 글로벌 기업 총수들과 월스트리트의 거물들이 운집한 가운데, 2026 포브스(Forbes) 글로벌 어워드가 해외에 생중계되고 있었다.대기실에서 받은 공동 소개문에는 시후의 이름 다음에 ‘그의 아내’라는 표현이 이어져 있었다. 은서는 줄을 그어 자신의 직책으로 고쳤다. 통합 자산이라는 숫자도 회사 가치와 개인 보유 재산을 나누어 설명하도록 요청했다.“둘이 같이 받는 상인데 너무 따지는 것 같나요?”시후는 수정한 종이를 받았다.“네 이름이 빠진 쪽이 잘못 쓴 거지.”시후는 그녀가 그은 선을 지우지 않았다. 두 사람의 이름이 같은 크기로 적힌 시안을 나란히 놓았다.은서는 수정한 소개문을 한 번 더 읽었다. 문장이 늘어나지는 않았다. 누구의 아내라는 말 대신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적혔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차이가 무대에 오를 마음을 가볍게 했다.담당자가 다시 인쇄해 가져온 종이를 시후가 그녀에게 먼저 건넸다. 은서는 자기 부분을 읽은 뒤 이번에는 맞다고 했다. 시후도 자신의 이름 아래 내용을 확인했다. 서로의 이름이 지워지지 않았는지 확인하고 나란히 종이를 내려놓았다.그가 담당자에게 직접 돌려주었다. 은서는 그 모습을 보며 어깨에서 힘을 뺐다. 수정된 소개문에는 EUN에서 해온 일이 제자리를 찾았다. 은서는 그 짧은 문장 뒤에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지 떠올렸다. 무대에서 질문을 받으면 그 이야기도 하고 싶었다.무대 입장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시후의 소매 단추가 의자 틈에 걸렸다. 은서가 손을 뻗어 빼주었다. 거울 앞에서 자세를 고치던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봤다.“방금 표정은 찍히지 않았으면 좋겠군.”“왜요? 세상에서 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