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인은 아직 영안궁에 있고.""그렇습니다. 나가셨다는 말은 없습니다.""둘이 함께 사람을 만난다고 했나.""어제도 그리 들었습니다."이헌은 그 대답을 곱씹었다. 서리의 지목은 애초에 진심일 리 없었다. 저를 향한 시위, 혹은 순간의 치기. 죽어가는 자를 고른 것도 그래서라 여겼다. 오래 갈 것 없는 혼인— 한때의 시위로 끝날 일이었다.그런데 그자가 깨어났다. 그렇다면 이제라도 서둘러 물리겠다는 청이 와야 했다. 영안공 쪽에서도, 제 뜻과 무관하게 맺어진 혼인을 붙들 이유가 없었다.하지만 둘 다 움직이지 않았다.'체면 때문이겠지.' 이헌은 그렇게 생각했다가, 곧 스스로 그 생각을 지웠다. 체면만으로 왕실의 연락까지 함께 가려 받을 이유는 없었다.'영안공이 서가의 것을 탐내는 건가.'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겸은 왕의 아우이자, 전공만으로도 이미 제 몫의 권세를 가진 자였다. 왕위를 넘볼 뜻이라도 품지 않은 이상, 굳이 서가의 재산과 가신까지 탐낼 이유가 없었다.'그렇다면 왕실이 결정을 미루고 있는 건가.'그것도 아니었다. 물릴 뜻이 없다는 건, 최소한 서리 쪽에서는 분명한 태도였다.이헌은 붓을 다시 종이에 대었다. 어느 쪽으로 갖다 붙여도 앞뒤가 맞지 않았다. 결국 붓끝에 힘이 들어갔고, 얇은 종이 한 귀퉁이가 먹물에 젖어 찢어졌다.내관을 물린 뒤, 이헌은 낮게 혼잣말을 했다."병상에서 맺어진 혼인이, 오래갈 리 없다."누구에게랄 것도 없는 말이었다.그 말을 뱉고 나서야, 서리가 이겸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그 순간, 아주 짧은 잔상 하나가 스쳤다. 계단 위, 돌아서는 여인의 뒷모습.이헌은 짜증스럽게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잔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요즘 잠을 잘못 자서 그런가.'이헌은 그렇게 넘기고, 다시 붓을 들었다.—백종길이 영안궁에 든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외부인의 출입이 드러나지 않도록, 백우가 직접 뒷문으로 그를 들였다. 후원 쪽 별당으로 드는 동안 노인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Última actualización : 2026-09-24 Leer má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