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심문이 끝난 뒤, 세 사람은 다시 명부를 펼쳐놓고 앉았다.
"명부는 계속 맞춰보고 있습니다만,"
백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가려낼 실마리가 마땅치 않습니다. 안에서 길을 내주는 자가 있다는 것 말고는."
"그자를 어떻게 가려낼 겁니까."
서리가 물었다.
"동선이 겹치는 자들부터 하나씩 줄여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백우가 답했다.
"다만 그러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시간을 줄일 방법이 있다면."
이겸이 말했다.
"누가 흘렸는지보다, 누가 알아낼 수 있었는지부터 좁혀야겠지."
서리는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사람을 바꿔 끼우는 수법이, 조금 낯익습니다."
이겸의 시선이 서리에게로 향했다.
"이런 건 살림을 아는 자의 솜씨예요. 어느 시각에 누가 어디를 지나는지, 그건 경비를 서는 자보다 안살림을 도는 사람이 더 잘 압니다."
서리가 손끝으로 상 위에 선을 그어 보였다.
"교대를 하나 비우려면 그 자리에 누가 있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고, 물을 나르는 자를 바꿔 끼우려면 그날 누가 그 일을 맡았는지를 알아야 하지요. 그 둘은 다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호위 쪽이 아니라는 말씀입니까."
"호위 쪽이면 제 조가 아닌 곳의 물 담당까지는 모릅니다."
서리가 답했다.
"사람을 붙이고 빼는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자리여야 합니다. 그런 자리는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백우가 명부를 다시 끌어당겼다.
"안살림 쪽 전갈을 내려보내는 자리라면……"
"명부를 고친 자부터 다시 짚어라."
이겸이 말했다.
"그자는 전갈을 받고 적었을 뿐이다. 그 전갈이 어디서 왔는지를 따라 올라가."
—
전갈은 사람을 거쳐 왔다고 했다. 그 사람을 찾는 데 하루가 걸렸다. 찾고 보니 그자 역시 전달만 했다. 그 위로 한 번 더 올라갔다.
거기서 이름이 하나 나왔다.
"손영달입니다."
백우가 이겸 앞에 기록을 펼쳤다.
"영안궁에서 삼 년 가까이 일했습니다. 안살림 쪽 일을 봤고, 사람 오가는 것을 정리하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교대가 바뀌는 전갈을 내려보낼 만한 자리입니다."
서리가 그 기록을 들여다봤다.
"물 담당을 정하는 것도 그 자리에서 합니까."
"합니다."
백우가 답했다.
"근무 기록은."
"그날도 정상적으로 나왔습니다. 그다음 날은 원래 쉬는 날이었고요."
백우가 다음 장을 넘겼다.
"급료도 받아 갔습니다. 그 뒤로 나오지 않았습니다."
"거처는."
"가봤습니다."
—
손영달의 방은 저자 뒷골목의 셋집이었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안에는 이불이 개어져 있었고, 그릇 몇 개가 시렁에 올라 있었다. 옷가지도 몇 벌 남아 있었다.
뒤엎은 흔적은 없었다.
"급히 나간 사람 방은 이렇지 않습니다."
백우가 말했다.
"이건 나갈 자리를 미리 알고 나간 방입니다."
"가족은."
"없습니다. 혼자 살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동료들은."
"얼굴은 다들 압니다. 말수가 적었고, 일은 꼼꼼했다고요. 어디로 갔느냐고 물으니 아무도 모릅니다."
이겸이 방 안을 한 번 더 둘러보았다.
차복이라는 이름은 처음부터 없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손영달은 있었다. 이름이 있었고, 얼굴을 아는 자들이 있었고, 급료를 받아 간 기록이 있었다.
거기까지는 다 남아 있었다.
그다음이 끊겼다.
"우리가 쫓기 시작해서 사라진 게 아니군요."
서리가 그렇게 말했다.
"처음부터 빠져나갈 자리까지 잡아둔 겁니다."
—
그날 밤, 서리는 자신의 처소에서 종이 한 장을 펼쳤다.
기억이 흐려지기 전에 옮겨둘 생각이었다. 포로가 허공에 그려 보였던 표식이었다.
붓을 들었다가, 한 획을 긋고 멈췄다.
그때 사내의 손끝이 어느 쪽으로 돌았는지가 잘 잡히지 않았다. 서리는 종이를 옆으로 밀어두고 새 장을 폈다.
두 번째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 번째에 이르러서야 눈에 익은 모양이 나왔다.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래도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알아볼 만은 했다.
서리는 그 종이를 접어 서안 아래에 넣었다.
어느 가문의 것인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다만 이런 것은 아무 데서나 쓰는 물건이 아니었다.
누군가는 이 모양을 알고 있을 터였다.
—
별채의 좁은 방에서, 사내는 물그릇이 놓여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저쪽이 절 버렸으니,"
사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음 값은, 비쌉니다."
—
왕후전에는 향 하나가 옅게 타고 있었다.
"포로는 살아 있다 합니다."
상궁이 낮게 고했다.
"물에 손을 썼으나 실패했고, 영안궁에서 명부를 조이기 시작했다 합니다. 영안공이 직접 움직이고 있다고—"
왕후의 바늘이 아주 잠깐 멈췄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뒤로 서리는 도성에 오지 않았다.소식은 간간이 들려왔다. 좋은 것은 없었다.장군을 따르던 이들이 하나씩 자리를 떠났다더라.북방의 거래처가 다른 집으로 옮겨 갔다더라.서가에서 사람을 보내도 예전처럼 셈을 치러주지 않는다더라.열일곱짜리 여식이 아무리 적통이라 한들,오래도록 장군의 이름으로 굴러가던 것을 하루아침에 붙들 수는 없는 일이었다.이헌은 그 이야기들을 지나가듯 들었다.딱하다 싶기는 했다.다만 그뿐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다시 도성으로 올 사람이었고,그때가 되면 왕실이 뒤에 있을 터였다.—다시 마주친 것은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난 뒤였다.스무 살이 되어 있었다.키는 크게 자라지 않았는데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예를 올리는 몸짓에 군더더기가 없었고, 묻는 말에 답하는 목소리도 낮아져 있었다.무엇보다 웃지 않았다.아주 웃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예전처럼 얼굴이 먼저 밝아지는 일이 없었다.이헌은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나이를 먹으면 다들 그리되는 것이었다.어릴 적처럼 뛰어다니고 나무에 올라가는 여식은 없었다.그러려니 했다.그리고 그해, 연택례가 열리게 되었다.서가에 닥친 비극 뒤에 마련된 자리였다.삼 년 전까지만 해도 없던 절차가, 이제는 서리에게 낭군을 고르게 하기 위해 정전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이헌은 그것이 왜 그런 방식으로 정해졌는지까지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어차피 불릴 이름은 하나라고 여겼다.—그런데 그때, 아주 짧게 무언가가 스쳤다.*서리는 영안공의 부인인데.*이헌이 걸음을 멈췄다.무슨 소리지.숙부께는 부인이 없다. 병상에 누워 계신 지 오래고, 혼인한 적도 없다.게다가 서리는—서리는 내 신부인데.왜 그런 생각이 들었지.이헌은 미간을 좁혔다.어디서 들은 말인지, 아니면 잘못 떠오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였다.곧 잊었다.—연택례는 봄에 있었다.정전에 명패가 늘어섰고, 이헌의 이름이 가장 앞에 걸렸다.서리가 들어섰다.이헌은 그 얼굴을 보았다.
한번은 다른 집 여식들과 마주친 적이 있었다.서리가 북방 이야기를 하자 그중 하나가 소매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군영에도 가신다니, 참 씩씩하십니다."말은 칭찬인데 소리가 그렇지 않았다.서리는 그것을 알아들었다. 알아듣고도 곧바로 답하지 않았다.다만 입을 다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이헌이 그때 끼어들었다."나는 그 이야기가 재미있던데."여식들이 조용해졌다."북방에서 강이 언다는 이야기는 나도 처음 들었다. 여기서는 못 듣지 않느냐."그러고는 서리 쪽을 보았다."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해보아라."서리가 고개를 들었다.이헌에게는 그것이 별일이 아니었다.자기 앞에서 누가 누구를 비웃는 것이 보기 싫었을 뿐이었다.그런데 그날 이후로 서리는 이헌을 조금 다르게 보았다.—서리가 열넷이 되던 해였다.그해에는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왔다.가을에 왔을 때 서리가 물었다."전하.""말하여라.""제가 지난봄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하십니까."이헌이 잠시 생각했다."북쪽 고을에 눈이 늦게까지 남는다는 이야기 아니었느냐."서리가 그 자리에서 웃었다.그냥 웃는 것이 아니라, 참으려다 실패한 얼굴로 웃었다."왜 그러느냐.""아닙니다.""말하여라.""……전하께서 제 말을 다 기억하고 계셔서요."이헌은 그 말이 이상했다.기억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어려운 이야기도 아니었고,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었다.그런데 서리는 그것을 굉장한 일처럼 여겼다.—열여섯이 되던 해부터 혼담 이야기가 오갔다.정확히는, 오갈 것도 없었다.서가와 왕실 사이의 일은 오래전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고,어머니는 그것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그 아이는 장차 네 곁에 설 사람이다."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이헌은 고개를 끄덕였다.그 말에 놀라지 않았다.반가워하지도, 싫어하지도 않았다.그저 그렇겠거니 했다.—그 무렵의 서리는 예뻐졌다.키가 자랐고, 머리 땋은 모양이 달라졌고, 옷차림도 예전 같지 않았다.그런데 웃는 것은 그대
그날 밤, 이헌은 오래 잠들지 못했다.골목에서 있었던 일이 자꾸 되돌아왔다.서리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눈길 한 번 돌아오지 않았다.먼저 그곳에 닿은 것은 자신이었다.사람을 풀어 그것들을 물린 것도 자신이었다.그런데 이겸이 도착하자 서리는 그쪽으로 갔다.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였다.그 몇 걸음을 걷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이헌은 그 몇 걸음을 몇 번이나 다시 떠올렸다.값을 치르라는 것이 아니었다.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그 골목에 들어선 것도 아니었다.다만 이상했다.예전에는 무슨 말을 하든 먼저 이쪽을 보던 아이였다.답을 하기도 전에 얼굴부터 밝아지던 아이였다.그런데 오늘은 돌아보지 않았다.돌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얼굴이었다.자신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는 것이 아예 셈에 들어 있지 않았다.언제부터 그랬는지 알 수 없었다.이헌은 오래 그것을 붙들고 있다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다.—"오늘 서가에서 사람이 온다."어머니가 그렇게 말했다.이헌은 서안 앞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아홉 살이었다."서가라 하면.""북방을 지키는 집안이다. 그 집 딸이 함께 온다 했다."어머니가 이헌의 옷깃을 바로잡아 주었다."잘 대해주어라.""어째서요.""장차 네 곁에 설 아이니까."이헌은 그 말을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어머니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었다.—아이는 생각보다 작았다.일곱 살이라 했다. 예를 올리는 몸짓은 배운 대로였는데, 고개를 들자마자 눈이 사방으로 돌아갔다.기둥을 보고, 천장을 보고, 창밖을 보았다."저기 물이 있습니까."첫마디가 그것이었다.곁에 선 유모가 당황해 아이의 소매를 잡아당겼다.아이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지만, 눈은 여전히 그쪽을 보고 있었다.이헌이 물었다."연못을 말하는 것이냐.""예.""보고 싶으냐.""예!"대답이 너무 커서 유모가 다시 소매를 잡아당겼다.—연못에는 잉어가 많았다.아이는 난간에 배를 대고 몸을 절반쯤 내밀어 물속을 들여다
서리는 단도를 앞으로 세운 채, 등을 담 쪽으로 붙였다.이것으로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다만 들어오는 칼이 한 번 멈칫하면, 그것이 곧 시간이었다.감씨가 큰길까지 가는 데 얼마나 걸릴지를 셈했다.한 걸음이라도 늦추면 그만큼이었다.말발굽 소리가 난 것은 그때였다.한 무리가 좁은 길로 들이닥쳤다. 앞선 자가 말에서 뛰어내리며 칼을 뽑았다.호위 차림이었다. 그 뒤로 몇이 더 내려섰다."어느 놈들이냐!"앞선 자가 소리쳤다.골목을 막고 있던 자들 사이에서 짧은 욕이 튀어나왔다.가려진 자 하나가 낮게 뱉었다."태자궁이다."그 말이 떨어지자 움직임이 한꺼번에 멈췄다.이헌이 말 위에서 내려온 것은 그다음이었다.궁에서 나온 길이었다. 같은 자리에서 나와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앞쪽이 소란한 것을 보고 걸음을 돌린 것뿐이었다.돌린 뒤에야 그 안에 누가 있는지 보였다."저것들을 잡아라."이헌의 명이 떨어졌다.수는 이쪽이 많았다. 가려진 얼굴들이 서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곧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몇 걸음 물러난 뒤에는 그대로 흩어져 달아났다.이헌이 서리 앞에 섰다.서리는 아직 단도를 쥐고 있었다. 손등에 남의 피가 묻어 있었다."다치셨습니까.""아닙니다.""그 손은.""제 것이 아닙니다."이헌이 잠시 그 손을 내려다보았다.서리는 그제야 단도 끝을 조금 내렸다.숨이 아직 고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먼저 나온 말은 다른 것이었다."영안궁에 사람을 보내주십시오."이헌의 눈이 들렸다."지금 말입니까.""예. 지금."이겸이 도착한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말을 몰아 온 소리가 골목 밖에서부터 들렸다.내리는 것과 걸어 들어오는 것이 거의 이어져 있었다.넘어진 가마, 바닥에 남은 자국, 아직 치우지 못한 사람들.그가 그것들을 지나오는 동안 아무도 말을 걸지 못했다.그 뒤로 백우와 영안궁 사람들이 따라 들어왔다.그가 서리를 보았다.서리도 그를 보았다.그 자리에서 걸음이 한 번 멈췄다가,
자리는 보름 뒤에 열렸다.궁의 후원 한쪽을 비우고 자리를 깔았다.왕후가 주재했고, 종친의 부인들과 나이 든 상궁 몇이 곁에 앉았다.가문의 어른들도 먼발치에 자리해 있었다.영애들이 넷 들어왔다.넷 다 눈에 띄었다.색을 아끼지 않은 옷과, 볕을 받으면 한 번씩 번쩍이는 장신구들.걸음걸이며 앉는 자세까지 여러 번 익힌 티가 났다.한 영애가 잔을 받으며 소매를 접는 손이 지나치게 곱게 움직였다.다른 영애가 그것을 보고 제 소매를 한 번 고쳐 잡았다.왕후가 하나씩 앞으로 불렀다.무엇을 배웠느냐, 집에서 무엇을 맡아 보았느냐 하는 물음이 오갔다.답은 대개 비슷했다. 글과 바느질을 익혔고, 어머니를 도와 살림을 보았다는 것.한 영애가 시문 이야기를 꺼내며 대답을 길게 끌었다.말을 마치고 나서 옆자리를 한 번 살폈다.그 옆의 영애가 곧 자세를 고쳐 앉았다.왕후는 답의 내용에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다만 답하는 동안 손이 어디에 놓여 있는지, 물음이 끝난 뒤 눈이 어디로 가는지를 보고 있었다.서리는 영안공의 부인이자 태자의 작은어머니 되는 사람으로 부름을 받아,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있었다.부인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을 들으며, 서리는 그 자리를 눈으로 훑었다.목연은 가장 안쪽에 앉아 있었다.옷은 넷 중 가장 옅었다.장신구도 귀에 하나, 머리에 하나뿐이었다.그런데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았다.잔을 받을 때도, 왕후가 물을 때도, 다른 영애가 웃을 때도 같은 높이였다.애써 눈에 들려 하지 않는 사람의 자세였다.차례가 오자 목연이 앞으로 나갔다."집에서는 무엇을 보았느냐.""어머니를 도와 안살림을 보았습니다.""그뿐이냐.""손님 치르는 일을 몇 해 맡았습니다." 목연이 답했다. "다만 아직 배우는 중이라, 내세울 만한 것은 못 됩니다."짧은 답이었다. 자리에 있던 몇이 그 답에 고개를 끄덕였다.목연은 물러나 앉은 뒤로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다만 한 번, 아버지가 앉아 있는 쪽으로 시선이 갔다가 곧 돌아왔다.그쪽에서
부인들과 영애들이 연못 쪽으로 옮겨간 것은 밤이 더 깊어진 뒤였다.수각 주변에 등불이 촘촘히 걸려 있었다.물 위로 불빛이 흔들리며 길게 늘어졌다가 깨졌다.사람이 많았다. 좁은 길로 여럿이 몰려 걸음이 자주 엉켰다.목연은 서리보다 몇 걸음 앞에 있었다.뒤에서 오던 이가 지나가려 하자, 목연이 자리를 내주려고 몸을 뒤로 물렸다.연못 가장자리에 낮은 돌턱이 있었다.목연의 발이 그 위를 제대로 밟지 못했다.몸이 물 쪽으로 기울었다.서리는 생각하기 전에 손을 뻗었다.목연의 손목이 잡혔다.당겼다.그런데 목연의 몸은 이미 가장자리 밖으로 넘어가 있었다.끌어당기는 힘보다 끌려가는 무게가 컸다.서리는 손을 놓지 않았다.버티는 사이 제 발도 돌턱을 벗어났다.두 사람이 서로를 붙잡은 채 물로 떨어졌다.—소리가 한꺼번에 터졌다.물이 크게 튀었고, 등불 그림자가 사방으로 깨졌다.비명이 났고, 사람들이 동시에 가장자리로 몰렸다.목연은 가장자리에 가까웠다.궁인들과 호위가 곧바로 팔을 뻗어 끌어올렸다.서리는 아니었다.당기던 힘과 넘어가던 반동이 겹쳐, 몸이 더 안쪽으로 밀려나 있었다.물이 옷을 먹었다. 예복이 무거워졌고,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이겸이 그 소리를 들은 것은 회랑 반대편에서였다.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전에 이미 뛰고 있었다.가장자리에 닿았을 때, 사람들이 한쪽으로 몰려 있었다.깨진 등불 그림자 사이로 흰 것이 하나 떠 있었다.저자에서 산 부채였다. 펼쳐진 채로 물 위에 얹혀 천천히 돌고 있었다.그 너머 안쪽에서 젖은 옷자락이 보였다.이겸은 겉옷을 벗지도 않고 그대로 들어갔다.몇 걸음 만에 발이 바닥을 놓쳤다.그대로 헤엄쳐 들어가 서리에게 닿았고, 팔을 등 뒤로 넣어 끌어올렸다.서리가 물 밖으로 나온 순간, 기침이 먼저 나왔다.젖어 내려앉은 머리 사이로 홍옥이 붉게 드러났다.—이겸의 팔에 매달린 채 숨을 고르면서, 서리가 먼저 물은 것은 다른 것이었다."목 영애는요.""올라왔습니다."가장자리 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