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Chapter 41 - Chapter 50

68 Chapters

41화

수진은 그녀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테이블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야구 중계가 나오고 있었고, 옆 테이블에서는 누군가 맥주잔을 부딪쳤다. 정우는 치킨 뼈를 접시 한쪽으로 밀어놓고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잘 지냈어?” 그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수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기억은 나나 봐? 난 완전히 잊은 줄 알았네.” “어떻게 잊어.” 정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어?” “혜진이 앞이잖아.” “그래서?” “뭐라고 해야 하는데.” 수진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글쎄. 오랜만이라고 반가운 척이라도 하든가.” “그랬다가 혜진이가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으면?” “아는 사이라고 하면 되지.” “어떻게 아는데?” 정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그 웃음이 얄미웠다. 수진은 팔짱을 꼈다. “원래 이렇게 계산적이었나?” “계산적인 게 아니라 조심하는 거지.” “뭘 그렇게 조심해? 우리 무슨 사이였다고.” 정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수진은 일부러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잖아. 하룻밤 잔 게 전부인데.” 정우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목소리 좀 낮춰.” 수진은 웃었다. “왜? 들킬까 봐?” “혜진이한테 굳이 알릴 일은 아니잖아.” “굳이.” 수진은 그 말을 작게 되뇌었다.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수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길고 손등의 뼈가 도드라진 손이었다. “혜진이한테 잘해.” 정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럴 거야.” “울리지 말고.” “응.” 수진은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때 혜진이 돌아왔다. “무슨 얘기 해?”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남자친구한테 너 울리지 말라고 협박했어.” “진짜?” 혜진이 웃으며 정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뭐래?” “안 울리겠다고 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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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정우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늦게 도착했다. 평소와 달리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미안. 회의가 길어졌어.” “괜찮아.” 수진은 그가 앉자마자 서류를 내밀었다. “지금 자금 얼마나 부족해?” “우리 회사가 위험하다고 생각해?” “응.” 수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정우는 목이 탄다는 듯이 물을 벌컥 들이켰다. “이 상태로는 계약을 진행하기 어려워.”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거야?” “아니.” 수진은 준비해 온 서류 봉투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계약을 진행할 방법이 있어서.” 정우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수진이 직접 작성한 사업 검토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장기 공급계약을 전제로 한 선급금 지급 방안과 단계별 납품 조건, 위험을 줄이기 위한 보증 방안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정우는 몇 장을 넘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걸 네가 만들었어?” “응.” “회사에서 승인한 거야?” “아직.” 수진은 다리를 고쳐 꼬았다. “네가 먼저 검토해 봐.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정우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한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정우의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그가 얼마나 오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혜진이는 알아?” 정우의 손이 멈췄다. “뭘?” “회사 사정.” “아니.” “왜?” “얘기해 봐야 걱정만 하지.” 수진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아내잖아.” “알아.” 정우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근데 혜진이는 이런 얘기 별로 안 좋아해.” “왜?”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그냥 좀 쉬라고 해.” 수진은 가만히 들었다. “일이 너무 많으면 줄이고, 회사가 그렇게 힘들면 사람을 더 쓰라고 하고, 아니면 회사 정리하라고 하고. 자기가 벌면 된다고.” 정우는 웃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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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가끔, 때때로 자주 곱새겨 보는 밤이었다. 정우는 한결 부드러웠다. 클럽룸에서는 다소 급하고 거칠었지만, 그날밤만큼은 달랐다. 혜진에게조차 온전히 설명하지 못했던 자신의 세계를 수진은 이해했다. 사업을 일으키고 지키는 데 쏟아부은 시간과, 그 과정에서 감당해야 했던 두려움까지. 정우는 그녀에게 한없이 무방비하고 관대했다. 그리고 수진은 그런 정우를 달아오르기에 충분할 만큼 교태로웠다. 수진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정우가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수진은 그의 뒷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제야 알았다. 혜진이 결혼할 사람이라며 그를 소개했던 날부터, 자신은 줄곧 이 남자를 다시 원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뒤로 했던 연애 상대들은 정우의 대체품이었을 뿐이라는 걸. 정우가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하나씩 풀면서 지그시 가슴을 누를 떄 수진의 아래는 이미 정우의 것을 욕망하는 액체로 젖어들었다. “으응… 왜……했어…” “응?” 수진의 목덜미를 한참 핥던 정우가 고개를 들어 그녀와 눈을 맞췄다. 반쯤 감긴 그녀의 눈은 일렁이고 있었다. “그 때 말이야, 그렇게 가고 나서 왜 연락안했어?” 살짝 헐떡이는 그녀의 목소리에 정우는 불쑥 욕망이 치솟았다. 아직 풀지 못한 단추가 두어개 남은 블라우스를 위로 끌어올려 벗겨버리고는 그대로 침대로 수진을 안고 갔다. 희미한 달빛에 비친 정우의 몸은 헬스로 다져져 있었다. 수진의 허벅지를 정우의 다리 사이로 고정시켜놓고는 벨트를 풀며 수진을 내려다 봤다. “하룻밤 욕정이라고 생각했어, 너나 나나.” 그대로 허벅지를 자신쪽으로 끌어당기고는 치마를 배꼽까지 걷어올리고는 스타킹 가운데를 찢었다. 이미 젖을 대로 젖은 속옷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정우는 얼굴을 가까이 대고 속옷째 빨아들였다. ”아…흐…” 수진은 정우의 목덜미를 그러쥐었다. 자꾸만 오므려지는 다리를 정우가 무릎으로 압박해 활짝 벌렸다. 검은 스타킹 사이로 살색 꽃이 음란한 향기를 뿜어냈다. 팬티를 제끼자 진한 즙이 이미 멍울져 있었다. 정우는 벗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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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오븐이 놓인 카운터 뒤편의 주방이었다. 상체만 가릴 높이의 커튼이 쳐져 있어, 영업이 끝난 뒤라도 누군가 유리문 안쪽을 유심히 들여다본다면 두 사람의 실루엣쯤은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는 공간이었다. “왜 왔……?” 미처 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태오가 그녀를 끌어안았다. 커튼이 두 사람의 어깨에 스쳤다가 제자리로 돌아갔다. 혜진의 니트 안으로 손을 넣어 급격히 브래지어 안으로 손가락이 밀고 들어왔다. ”왜 그러느…?“ 한마디도 새어나오지 못하게 하겠다는 듯이, 태오가 그녀의 혀를 자신의 입안으로 끌어들였다. 비로소 숨을 토해낸 것은, 태오가 그녀를 뒤돌려 세워 테이블위에 엎드리게 하고, 그녀의 안에 들어가고 나서였다. 태오의 숨결에 그녀의 귀 뒤가 달아올랐다. 귓망울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두 손으로는 혜진의 양가슴을 덥석 주물렀다. 각도때문인지 뒤에서 들어올때면 유난히 태오의 존재감을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 평소에는 선호하지 않는 자세였다. 자궁 바로 끝까지 닿는 그 아찔한 통증때문에 그녀는 보통 정신 잃기 직전까지 가니까. 하지만 그날은 태오의 달라진 태도에 평소보다 흥분도가 높아졌다. 덩치에 알맞지 않게 관계할 땐 의외로 섬세하고 다정했던 그였다. 마치 미식축구 선수가 탁구치는 걸 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이렇게 육중하게 자신을 거침없이 다루는 손길과 평소 혜진이 좋아하지 않는 체위를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몸으로 명령하듯이 하는 태도가 혜진의 안쪽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 평소보다 넓어진 질 안과 더 흥건한 애액은 태오의 사정없는 각도와 세기, 속도에도 전혀 아프지 않고, 오히려 더 안을 채워달라는 듯이 그의 것이 나갈때마다 자꾸만 붙잡았다. 찬장에서 그릇들이 달그락거렸다. 저러다 하나쯤 떨어져 깨지는 건 아닐까. 그런 걱정마저 아득해질 무렵, 태오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멎었다. 혜진은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헉헉…“ 마치 터치 라인에 다다른 것처럼 태오와 혜진의 숨이 섞여들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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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태오가 육포를 하나 집어 먹으며 말했다. “없어.” “좋아하는 사람은?”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있어.” 지유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응.” “누군데?” “말 안 할래.” “왜? 내가 아는 사람이야?” “그런 거 묻지 마.” “우리 가게 사람? 아니면 학교?” 지유의 머릿 속에는 차 안에서 태오가 키스하는 장면이 떠올랐지만 자꾸만 변죽만 울려댄다. 태오는 대답없이 지유만 빤히 볼 뿐이었다. “알았어. 안 물어볼게.” 지유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그러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사람도 너 좋아해?” “응.” 이번에는 지유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럼 사귀는 거네.” “그런 건 아니야.” “서로 좋아하는데 왜 안 사귀어?” 태오는 맥주를 마셨다. “사정이 있어.” “무슨 사정?” 지유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유부녀야?” 태오의 손이 멈췄다. 정말 찰나였다. 그런데 지유는 그 짧은 정적을 놓치지 않았다. “농담이야.” 그녀가 웃으며 덧붙였다. “왜 그렇게 놀라?” “안 놀랐어.” “표정이 완전 굳었는데.” “술이나 마셔.” 지유는 더 캐묻지 않고, 대신 의자를 끌어 태오의 옆으로 옮겼다. “뭐 해?” “여기 앉으면 안 돼?” “맞은편에 앉아.” “왜? 내가 잡아먹기라도 해?” 지유는 앉아서 맞은 편의 과자 봉지를 끌어당겼다. 식탁이 넓지 않은 탓에 그녀의 무릎이 태오의 다리에 가볍게 닿았다. “너 되게 이상해. 사람을 이렇게 경계하면서 집에는 들여보내 주고.” “술 마시자며.” “내가 너 좋다고 하면?” 태오는 지유를 돌아봤다. 그녀는 웃고 있지 않았다. “지유야.” “응.” “그런 말 하지 마.” “왜?” “네가 상처받을 일 만들고 싶지 않아.” 지유는 그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이미 조금 받았는데.” 지유가 빈 캔을 손가락으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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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안쪽에서 혜진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수진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혜진이 황급히 남자에게서 떨어졌다. 무어라 속삭이더니 니트의 옷자락을 바로잡았다. 남자는 그녀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유리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잠시 후 혜진이 문을 열었다. “영업 끝났..어,? 수진이?” 수진은 문을 열며,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지나는 길에 들렀어, 마감 중이었어?“ ”아, 응, 미리 연락이라도 하지.“ 혜진이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수진은 그녀의 어깨 너머를 살폈다. 카운터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돌아섰다. 젊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녕하세요.” 남자가 공손하게 인사했다. 수진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안녕하세요.” 누구냐는 듯이 혜진을 보려는 수진의 시선을 잡아챈 건 태오의 낮은 음성이었다. “한태오라고 합니다.” 수진의 눈썹이 올라갔다. —아, 그 입양한 아들?? “네, 얘기는 들었어요. 처음 뵈요. 혜진이랑 정우 둘다 아는 친구에요.” “네, 반갑습니다.” 수진은 그를 다시 살폈다. 얼굴이 반듯했다. 체격도 좋았고, 말투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침착함이 있었다. 조금 전 유리창 너머에서 혜진을 끌어안고 있던 남자라니. 오늘은 자신이 혜진에게 의심 하나를 심어주러 온 길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혜진이 수진에게 커다란 물음표를 던져주었다. — 윤혜진, 너 정말 재밌는 애네. “마침 뭐 좀 마시려던 참이었는데, 뭐 마실래?” “난 따뜻한 카페모카.” “그래. 잠깐 앉아 있어.” 혜진이 커피 머신 쪽으로 돌아서려는데 태오가 먼저 나섰다. “제가 할게요. 두 분 이야기 나누세요.” 어느새 앞치마까지 두른 태오가 능숙하게 커피 머신 앞으로 걸어갔다. “고마워요.” 수진은 웃으며 창가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곧 이어 태오가 쟁반에 커피 세 잔을 올려 가져왔다. 태오는 수진 앞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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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지유가 태준에게서 전화를 받은 건 일요일 늦은 아침이었다. 침대 머리맡에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지유는 눈도 뜨지 않은 채 손을 뻗었다. 알림이겠거니 하고 화면을 눌렀는데, 통화 버튼이었다. “지금 통화 괜찮아?” “누구세요?” 수화기 너머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거 같다. “나야, 오늘 저녁에 시간 돼?” 태준이다. 지유는 살짝 몸을 일으킨다. “왜요?” “재미있는 자리가 하나 있어서.” “무슨 자리인데요?” “프랑스에서 셰프가 한 명 와. 한국에서 작은 디너 모임을 열거든.” “누군데요?” “에티엔 모로.” 지유는 잠시 생각했다. “파리에서 레스토랑 하는 그 에티엔 모로요?” “알아?” “당연히 알죠.” “역시.” 무려 10년 연속 미슐랭 3스타를 유지해 온 실력파 셰프였다. 작년에 엄마와 파리에 갔을 때도 온갖 연줄을 동원해 예약을 시도했지만, 끝내 가지 못했었는데. 한국에 온다고? “오늘 소수만 초대하는 비공개 디너가 있어. 같이 가자고.” 지유는 휴대전화를 고쳐 쥐고는 말을 골랐다. “이따 6시 반에 데리러 갈게.” 태준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드레스 코드 있어요?” “있지. 너무 예쁘게 오지 말 것.” 지유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장난하지 마세요.” “진짜야. 내가 곤란해지니까.” “그럼 안 갈래요.” “미안. 농담.” 태준이 웃었다. “블랙타이까지는 아니고, 격식 있는 디너 정도야. 편하게 입고 와.” “알겠어요. 제가 갈거니까, 장소 보내주세요.” “알았어.”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지난번 차 안에서 그 셰프의 레스토랑에 가보지 못해 아쉬웠다는 이야기를 흘리듯 꺼낸 적이 있었다. —- 그걸 기억했었네. ——- 청담동의 한 프라이빗 다이닝 공간이었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드레스의 허리께를 가볍게 매만졌다. 옅은 샴페인빛 실크 드레스였다. 가느다란 어깨끈 아래로 쇄골이 드러났고, 몸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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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디너가 끝난 것은 밤 열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차 안에서도 지유는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아까 그 세 번째 요리 있잖아요.” “응.” “가리비요. 저 처음에는 그냥 버터 소스인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먹을수록 뭔가 다른 향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셰프한테 물어봤더니 세상에, 제가 생각지도 못한 재료를 썼더라고요.” “뭐였는데?” “발효시킨 레몬이요. 근데 그걸 그냥 넣은 게 아니라 껍질만 아주 조금 갈아 넣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향은 남는데 신맛이 튀지 않았던 거고요.” 지유는 설명하다 말고 두 손을 마주쳤다. “아, 진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태준이 웃었다. “많이 감동했나 보네.” “감동 정도가 아니죠. 저 그거 먹고 잠깐 말도 못 했잖아요.” “봤어.” “보셨어요? 어땠는데요?” “한참 동안 접시만 보고 있던데.” “내가 그랬나?” “응. 누가 접시라도 뺏어 갈까 봐.” “아, 정말.” 지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의 지유는 조금 달랐다. 말을 붙이면 곧잘 받아치면서도 어딘가 한 발 물러나 있는 여자였다. 농담을 해도 쉽게 넘어오지 않았고, 가끔은 자신보다 더 능청스럽게 굴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신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신경 쓰지 않았다. 눈이 반짝였고, 말이 빨라졌으며, 이야기를 하다가도 중간중간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걷다 갈까? 아직 할 얘기가 많아 보이는데.” “좋아요.” 두 사람은 처음 만났던 날 들렀던 한강변에 차를 세웠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산책로에는 여전히 사람들이 드문드문 오가고 있었다. 강 건너편의 불빛이 수면 위에서 길게 일렁였다. 밤공기가 제법 서늘했다. 지유는 드러난 어깨를 손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추워?” “조금요.” 태준은 재킷을 벗어 그녀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괜찮은데.” “입고 있어.” 지유는 재킷의 깃을 손끝으로 잡았다.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다시 웃었다. “그리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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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형, 생일 축하해!” 휴대전화 화면 가득 민재의 얼굴이 나타났다. 태오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괴고 앉아 웃었다. “고맙다. 밥은 먹었어?” “아직. 여긴 아침이야. 저녁 먹으러 온거야?” “응” 태오가 휴대전화를 조금 멀리 들자 화면 안으로 레스토랑의 풍경이 들어왔다. 세월의 흔적이 남은 짙은 원목 벽과 고풍스러운 벽등, 높은 천장에 매달린 작은 샹들리에가 차례로 비쳤다. 커다란 격자창 너머로는 은은한 조명을 받은 정원과 오래된 소나무가 보였다. “와, 또 거기야?” 민재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옆에서 혜진이 고개를 내밀었다. “민재야, 잘 지내?” 민재의 얼굴이 환해졌다. “엄마, 나 어제 시험 봤어.” “잘 봤어?” “응. 생각보다 쉬웠어.” “아침은 먹었고?” “이제 먹으려고.” “맨날 이제 먹는대.” 혜진이 웃자 민재도 따라 웃었다. 곧 정우가 화면에 얼굴을 비췄다. “학교생활은 어때? 불편한 건 없고?” “없어, 아빠. 나 잘 지내.” “필요한 거 있으면 바로 얘기하고.” “알았어.” 민재는 다시 태오를 불렀다. “형! 내 선물 받았어?” “응. 아까 택배 왔더라.” “열어 봤어?” “아직.” “아, 진짜. 빨리 열어 봐. 내가 엄청 고민해서 골랐단 말이야.” 태오가 웃었다. “알았어. 집에 가서 열어 볼게.” “꼭 사진 보내.” “응.” “그리고 형, 생일 축하해. 진짜로.” 장난스럽던 목소리가 조금 진지해졌다. “고맙다, 민재야.” 통화를 마치고 나서도 혜진은 한동안 꺼진 화면을 들여다봤다. “방학하면 오잖아.” 정우가 물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응.” 혜진은 잠시 태오를 바라보고는 이내 창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남산 자락의 오래된 저택을 개조한 레스토랑이었다. 정우의 가족은 해마다 민재의 생일이면 이곳을 찾았다.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가장 안쪽의 독립된 룸. 민재가 어렸을 때부터 늘 같은 방을 예약했고, 이제는 지배인도 가족의 얼굴을 알아봤다. 그리고 이제는 태오의 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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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혼자 밥을 지어 먹을 수 있고, 학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정우는 더 이상 보육원에 맡겨지지 않았다. 그래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그 곳에 들르곤 했다. 오랜 습관처럼. 그리고 그곳에는 언제나 그 여자애가 있었다. 고등학생이 되어 입시 준비로 하루가 빠듯해지면서, 보육원을 더이상 가지 않게 되었다. 기억 속에서 그 장소도, 그 여자애도 차츰 잊혀져 갔다. 그러다 대학생이 되어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던 어느 날이었다. 일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정우의 눈에 교복을 입은 여학생 하나가 들어왔다.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떠들며 지나가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혼자 걷고 있었다. 어깨에 멘 가방이 걸음에 맞춰 조금씩 흔들렸다. 특별히 눈에 띄는 모습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그 뒷모습이 쓸쓸해 보였다. 여학생은 정류장에 이르러 걸음을 멈췄다. 정우가 무심코 그쪽을 바라본 순간,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리며 옆얼굴이 드러났다. 낯이 익었다. 처음에는 어디서 봤는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런데 여학생이 귀 뒤로 머리칼을 넘기는 순간, 오래전 기억 속의 어린 얼굴이 겹쳐졌다. “…어?” 여학생이 고개를 돌렸다. 잠깐의 침묵 끝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정우 오빠?” “맞네. 너였구나.” 그녀도 웃었다. 예전보다 키가 훌쩍 자랐고 얼굴선도 달라졌지만, 웃을 때 한쪽 눈이 조금 더 가늘어지는 버릇은 그대로였다. “와, 진짜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못 알아볼 뻔했어.” 정우는 새삼 그녀의 교복을 내려다봤다. “벌써 고등학생이야?” “그럼요, 오빠는요? 대학생?” “응. 지금은 아르바이트하고 오는 길.” 그녀는 정우의 손등에 난 작은 상처를 힐끗 보았다. “저녁 먹었어요?” “응? 아직, 넌?” “나도,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요. 가요.” 그제야 정우는 조금 전 느꼈던 쓸쓸함이 자신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눈앞의 여학생은 제법 당돌했고, 오래간만에 만난 그를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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