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Chapter 51 - Chapter 60

68 Chapters

51화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연락이 닿지 않았다. 정우의 메시지는 며칠 간 읽지 않은 채였다. 시험 기간인가, 아니면 이제 연애를 시작했나. 자꾸만 신경이 쓰였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과외를 맡게 되면서 그 여자애와 함께 하던 저녁 시간도 바쁘게 되면서 물리적으로도 만날 기회는 적어진 때였다. 과외를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다. 원룸 건물 앞의 낮은 계단에 누군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그 여자애였다. “무슨 일이야?” 정우의 목소리에 여자애가 고개를 들었다. “오빠?” 가까이서 보니 얼굴이 많이 야위어 있었다. 눈 밑이 거뭇했고, 입술도 텄다. “왜그래, 어디 아파?” “나 오늘 좀 재워주세요.” 여자애는 무릎을 감싸 안았던 팔을 풀었다. 일어나려다 잠시 비틀거리자 정우가 반사적으로 팔을 붙잡았다. 눈가가 붉었다. 울었던 것 같기도 했고, 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사람 같기도 했다. “일단 올라가자.” 좁은 계단을 오르는 동안 여자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섯 평 남짓한 원룸은 두 사람이 들어서자, 꽉 찬 느낌이었다. “앉아. 물 줄게.” 정우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꺼내 건넸다. 여자애는 두 손으로 병을 받아 들었지만 마시지는 않았다. 침대 밑에 누운 정우는, 여자애가 자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지만 뭘 해줘야할지 알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이불이 작게 움직였고, 훌쩍 거리는 소리가 낮게 들려왔다. “나 좀 안아줘요.” 정우는 잠시 움직이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여자애의 손이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손끝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놓으면 어디론가 떨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왜 그래.” 정우가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냥…….” 여자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잠깐만요. 조금만.” 정우는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여자애가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키자 그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자 여자애가 기다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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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화

지유는 한참 동안 이불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 왜 그랬지? 그 날따라 유독 기분이 좋았던 것 사실이었다. 오랫동안 동경하던 셰프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의 음식을 맛보았다. 무엇보다 그 모든 자리를 자신을 위해 마련해 준 태준에게 고마웠다. 조금은 감동하기까지 했다. — 그렇다고 키스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 지유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돌이켜보면 누군가를 짝사랑해 본 적도 없었다. 연애는 늘 쉬운 편이었다. 자신이 상대에게 약간의 호감을 느낄 즈음이면 남자는 이미 그보다 훨씬 깊이 빠져 있었다. 지유가 먼저 다가갈 필요도,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려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저 다가오는 남자들 가운데 마음에 드는 사람을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태오는…… 그가 자신에게 아무런 호감도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정도 눈치도 없이 무작정 들이댈 만큼 지유는 연애에 서툴지 않았다. 태오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가끔씩 무심코 드러내는 다정함에는 분명 어떤 여지가 있었다. 문제는 그 여지가 좀처럼 넓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까워졌다고 생각하면 어느새 거리를 두었고, 마음을 조금 내보이면 더는 다가오지 못하도록 벽을 세웠다. 태오의 벽은 생각보다 견고했다. — 그 와중에 변칙같은 플러팅이 제대로 먹힌거지. 지유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게다가 태준의 치고 빠지는 스킬이 정말 고수였다. 어느 새 지유의 마음 속에 스며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것이 태오를 향한 마음과 같은 종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그날은 그저 모든 것이 지나치게 좋았던 탓인지도 몰랐다. 음식도, 분위기도, 자신을 바라보던 태준의 눈빛도. 그 순간에는 키스하고 싶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태준은 그 입맞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지유는 자신이 먼저 시작한 일을 뒤늦게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다. 상대에게 기대를 품게 해 놓고 이제 와서 실수였다고 말하는 것도 무책임한 일이었다. 아, 진짜. 이불 속에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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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화

“정지유, 내 말 듣고 있는거야?”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컵을 입에 대다 말고 물었다. 지유는 휴대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으응.” “근데 왜 대답이 없어?” 지유는 휴대전화를 엎어 놓았다. 태준에게서 연락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에게도 일이 있을 테고, 자신에게도 일상이 있었다. 무엇보다 먼저 입을 맞춘 쪽은 자신이었으니, 그가 조금 당황했을 수도 있었다. 오히려 지유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당장 그날의 키스에 관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으니까. “무슨 얘기했지?” “너, 남자 생겼지?” “아니거든.” “그럼 생겼다가 없어졌나?” 지유는 친구를 쳐다봤다. “너 진짜 짜증 나.” “맞네.” 친구가 웃으며 아이스라테를 한 모금 마셨다. “누군데?” 지유는 빨대로 얼음을 휘저었다. ”그냥 아는 사람. 근데, 남자들은 여자가 다가가면 부담스럽나?” “오, 게다가 너가 먼저 들이댔다?” 친구가 잔을 내려놓았다. “잤어?” “야!” 친구는 잠시 지유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키스는 했어.” 친구가 잔을 내려놓았다. “누가 먼저?” “내가.” “네가? 천하의 정지유가?” 친구가 턱을 괴고 잠시 생각하는 눈치였다. “야, 너 진짜 마음에 들었나 보다.”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닌데 네가 먼저 키스를 해?” “그날 좀 기분이 좋았어.” 지유는 입술을 삐죽였다. 메세지를 남겨도 읽음 표시만 있을 뿐 답은 오지 않는 게 지유의 마음을 흩뜨렸다. — 자신을 피하고 있는 건가. — 그렇다면 왜? —설마 그 날 키스가 별로였나? 그 생각이 들자 지유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 그럴 리가. “뭐야. 혼자 왜 웃어?” “아니, 그냥.” “키스가 그렇게 좋았어?” “아, 진짜!” 친구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서? 그다음엔 어떻게 됐는데?” “아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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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화

“어, 태준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먼저였다. 지유는 걸음을 멈췄다. 태준이 지유에서 아버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왔어?” “야, 네가 직접 나와 있을 줄은 몰랐네.” “오늘은 좀 일찍 나왔지.” 두 사람은 익숙하게 악수를 나눴다. 지유는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봤다. “여보, 인사해. 내 대학 동기야.”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태준을 소개했다. “아, 오랜만이에요. ” “네. 반갑습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태준이 정중하게 인사했다. 아버지는 이번에는 지유를 돌아봤다. “지유야, 너도 인사해.” “…….” “아빠 친구야. 너 어릴 때도 몇 번 봤을 텐데.” 지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우리 딸 정지유. 기억나?” 태준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기억나.” 아버지가 웃었다. “많이 컸지? 어릴 때는 네가 안아 주기도 했는데.” 지유는 숨을 멈췄다. 태준은 고요하게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게.” 그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많이 컸네.” 지유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열흘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침묵의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했다. 그는 자신을 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의 딸이라는 이유로. “안녕하세요.” 지유가 겨우 입을 열었다. 태준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반가워요.” 지유는 입술 안쪽을 세게 깨물었다. 반가워요. 그토록 기다렸던 재회의 첫마디가 고작 그것이었다. “야, 태준아. 바쁘지 않으면 같이 저녁이나 먹자.” 아버지의 제안에 태준이 잠시 지유를 바라봤다. “실례가 안된다면?” “당신도 참. 바쁜 사람을 붙잡고.” 어머니가 말렸지만 아버지는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 얘랑은 이런 자리 아니면 얼굴 보기도 힘들어.” 태준은 잠시 망설이다가 직원에게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럼 잠깐만 앉을게.” 네 사람은 안뜰이 내려다보이는 별실로 들어갔다. 태준은 아버지의 옆자리에 앉았다. 지유와는 대각선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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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화

“얘가 오늘 왜 이래?” “왜. 물어볼 수도 있지.” “얼마나 어린 여자?” 아버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지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준 역시 아무 말이 없었다. “한 열 살쯤?” 아버지가 웃으며 덧붙였다. “요즘은 그 정도 차이 나는 부부도 많더라.” “스무 살은요?” 지유가 물었다. 순간 태준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아버지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야, 스무 살이면 너랑 동갑이잖아.” “그러니까.” 지유는 태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정도 나이 차이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태준은 천천히 물잔을 내려놓았다. “많이 차이 나죠.” “그게 다예요?” “지유야.” 이번에는 어머니의 목소리가 조금 단호했다. “괜찮습니다.” 태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지유를 바라보는 눈은 꽤 날카로웠다. “나이 차이가 전부는 아니겠지만.” 잠시 말을 골랐다. “살아온 시간이 다르면 생각해야 할 것도 많아지겠죠.” 지유는 입술을 다물었다. “서로 좋아해도요?” 그녀의 질문에 태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아버지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좋아하면 뭐든 다 되냐? 세상일이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아.” “왜 안 되는데?” “뭐?” “서로 좋아하는데 왜 안 돼?” 지유는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딸의 갑작스러운 반문에 잠시 당황한 듯했다. “그야 사람마다 사정이라는 게 있는 거지.” “무슨 사정?” “얘가 오늘따라 아주 토론을 하자고 드네.” 아버지가 웃으며 태준에게 술을 권했다. “신경 쓰지 마. 얘가 원래 궁금한 건 못 참아.” 태준은 잔을 받았다. “알아.” 짧은 대답이었다. — 알아. 그가 자신에 대해 무엇을 얼마나 안다는 것일까. 태준은 술잔을 내려놓고 지유를 바라봤다. “그런데 지유 씨.” “네.”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일도 있어요.”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지유는 순간 목구멍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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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화

“미안해.” 지유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참 쉽네요.” “지유야.” “미안하다고 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런 뜻 아니야.” “그럼 무슨 뜻인데요?” 태준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지유는 그 침묵이 싫었다. 식당에서부터 몇 번이나 보았던, 말을 고르고 감정을 가라앉히는 그의 태도가 싫었다. “친구 딸이라서 그래요?” 태준의 시선이 잠시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응.” “언제 알았어요?” “며칠 전에.” “며칠 전이 언제인데요?” “너랑 만난 다음 날.” 지유는 입술을 다물었다. “그럼 그날까지는 몰랐던 거네요.” “그래.” “그런데 알고 나니까 갑자기 제가 달라졌어요?” “그런 게 아니야.” “뭐가 아닌데요?” 지유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저는 똑같은 사람인데요. 그날 태준 씨랑 같이 밥 먹고, 얘기하고, 키스했던 사람이랑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사람이 똑같은 정지유인데.” 태준의 눈은 정면만을 응시한다. “알아.” “그런데 왜 갑자기 모르는 사람처럼 굴어요?”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유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앞차들의 후미등이 희미하게 번지고 있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것만큼은 싫어서 몇 번이고 눈을 깜빡였다. “마음에 안 든다든지, 그냥 키스해보니까 별로였다든지. 친구 딸이라 너무 애같아서 식었다든지. 그런 말 듣는다고 죽는 거 아니니까.” 그녀는 숨을 골랐다. “그런데 아무 말도 안 하는 건 너무 비겁하잖아요.” “맞아, 근데 난 승산없는 게임은 안해.” “이게 승부가 나는 그런 종류의 거에요?” 지유가 눈물이 차오르는 거 같아서 고개를 휙 돌린다. “…곧 네 마음도 정리될 거야.” “왜 제 마음을 그쪽이 정리해요?” 그 말에 태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제 마음은 제 거잖아요.” 지유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 “먼저 시작해 놓고, 끝내는 것까지 혼자 결정하지 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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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화

“학생이 담배 피워?” “제가 피운다고 안 했는데요.” “그럼?” 여자애가 손에 쥔 작은 케이크 상자를 들어 보였다. “초에 불 붙이려고요.” 태준은 케이크를 내려다봤다. 손바닥만 한 케이크였다. 투명한 뚜껑 안쪽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고, 상자 옆면에는 작은 초 하나가 테이프에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누구 생일인데?” “제 생일이요.” “그런데 왜 혼자 있어?” 여자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태준을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라이터 없어요?” 태준은 잠시 망설이다 재킷 안주머니를 뒤졌다. 손끝에 걸린 라이터를 꺼내 여자애에게 내밀었다. “그냥 가져.” 차창을 올리려는 순간, 여자애가 뜻밖의 말을 했다. “아저씨도 케이크 먹을래요?” 태준은 웃었다. “내가 왜?” “불 붙여 주잖아요.” “그게 케이크까지 얻어먹을 일이야?” “생일에는 원래 같이 먹는 거예요.” — 당돌하네. 그 때 세찬 바람에 플라타너스의 가지마다 이파리마다 맺혀 있던 빗방울들이 후드득 떨어져 여자애의 머리 위로 소나기를 쏟아부었다. 여자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여자애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젖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두 눈이 여전히 태준을 향해 있었다. 태준은 문득 웃음이 났다. 오래간만에 흥미가 동했다. -------- 여자애의 사정을 알고 난 뒤에도 태준은 연민이나 동정 따위의 감정을 품지 않았다. 자신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것이 순전히 운이었듯, 여자애도 그저 운이 나빴을 뿐이다. 거기에 무슨 대단한 의미가 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을 근거로 타인의 불행을 가엾게 여기는 일, 그 은근한 우월감과 선민의식은 태준이 질색하는 감정의 부류에 속했다. 그저 여자애와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흑백영화처럼 단조롭고 무성영화처럼 적막하던 그의 청춘이 여자애와 있을 때만큼은 요란한 색채와 소리로 가득 찼다. 예측할 수 없는 말들이 튀어나왔고, 별것 아닌 일에도 웃음이 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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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레스토랑으로 향하던 차를 돌려 태준의 오피스텔로 향할 때, 당돌하던 여자애는 지하주차장에 이르자 완전히 입을 닫아버렸다. “지금이라도 말해, 다시 밥 먹으러 가게.” “아니요, 하고 싶어요.” 단호했다. 만난 횟수가 무색하게 손 한 번 제대로 잡은 적이 없었다. 그만큼 문을 열자마자 여자애의 몸을 안았을 때 그동안 이렇게까지 가득했던가 놀랄만큼 댐이 터지듯 욕정이 태준을 덮쳤다. 첫 키스인게 분명한 여자애의 입술을 벌리게 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드디어 말랑한 혀를 가득 물었을 때, 그 순간 희미하게 터져 나오는 여자애의 신음이 태준을 더 미치게 했다. 청바지 너머로 부풀어오르는 태준의 아래가 여자애의 뺨을 붉게 물들었다. 호기롭게 여자애의 벗은 몸을 대면했을 때 태준은 주춤했다. 
미국 고등학교 유학시절, 태준의 첫경험이었던 라틴계 그녀와 같은 나이이인데도 상반된 몸이었다. 육감적이고 구릿빛에 적극적이었던 그녀와는 너무나 달랐다. 새하얀 피부에 가녀린 허리, 그리고 한 손에 알맞게 잡히는 가슴 너머에서는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제걸 넣는 순간 바스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마저 들게 했다.
이미 속옷 밖으로 튕겨 나온 태준의 성기 끝에서는 쉴새없이 쿠퍼액이 흐르고 있었고 여자애의 덤불 위에 길게 늘어져 있었다. 
“아프면 말해.”
감은 눈가에 살짝 눈물이 맺혔지만, 여자애는 한번도 멈추라고 하지 않았다. 뻘인 듯, 빼면 뺄수록 더 깊이 태준의 것을 빨아들였다. 얼마나, 정신이 없었던지, 4번째가 끝나고 정액과 애액이 비져나오는 거품들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콘돔도 없이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알코올이 순식간에 휘발되며 불길이 꺼져 버리듯, 태준의 마음도 느닷없이 식어 버렸다. 동아리방에서 회비와 장비값을 듣고 쭈뼛거리며 놀란 기색을 애써 감추던 여자 신입생을 본 순간이었다. 그 낯선 얼굴에 새로운 호기심이 일자, 그토록 요란하게 타올랐던 여자애를 향한 마음은 거짓말처럼 휘발되어 버렸다. 여자애처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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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화

“태오! 와인 상자는 총 세 개야.” “알아요.” “라벨 꼭 확인하고.” “걱정 마세요.” 태오는 와인 직수입업체에 도착하자마자 납품 명세서와 상자에 부착된 라벨을 대조했다. 수량과 품종은 물론 빈티지까지 꼼꼼히 확인했다. 새로 계약한 거래처인 만큼 처음 몇 번은 직접 가서 확인하는 편이 좋겠다는 태오의 말에, 레스토랑 사장은 유난히 기특해했다. 정작 태오에게는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남의 손을 거쳤다가 문제가 생기느니 처음부터 제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 속 편했으니까. 건물 지하주차장에는 와인 상자 세 개가 가지런히 실린 운송용 카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태오는 직원과 함께 상자를 차량에 옮겨 실었다. 마지막 상자를 내려놓고는 직원과 인사를 나눴다. 이제 가게에 들렀다가 바로 퇴근하면 긴 하루도 끝이 난다. 트렁크를 닫고 운전석으로 향하려는데, 맞은편에서 짧은 전자음과 함께 자동차의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가 났다. 낯익은 검은색 세단이었다. 태오는 별생각 없이 지나치려다 번호판을 보고 걸음을 늦췄다. 정우의 차였다. — 혹시 혜진과 저녁을 하러 온건가?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여자의 웃음과 교태가 섞인 목소리가 기둥 너머에서 들려왔다. 태오는 자기도 모르게 차 뒤로 몸을 숨겼다. 여자는 남자의 팔짱을 끼고 있었다. 두 사람은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오다가 차 앞에서 멈춰 섰다. “이거 또 이렇게 입었네.” 여자가 남자의 셔츠 깃에 손을 뻗었다. “뭐가.” “가만있어 봐.” 그녀가 옷깃을 바로잡았다. 남자는 익숙하다는 듯 고개를 조금 숙일 뿐이었다. 주차장 조명 아래 두 사람의 얼굴이 환히 드러났다. 정우와 수진. 수진이 연신 종알대자 정우가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입을 맞췄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엔진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에도 태오는 움직이지 못했다. 레스토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태오는 좀처럼 운전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신호가 바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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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화

태오가 집에 들어섰을 때, 식탁 쪽에서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지금 왔어? 그라탱 좀 가져왔어.” 혜진이 말간 얼굴로 서 있었다. 식탁에는 아직 김이 오르는 그릇과 나란히 놓인 수저가 보였다. 태오는 아무 말 없이 그녀에게 다가갔다. “태오야?” 그대로 품에 끌어안았다. 여렸다. 한 품에 푹 들어오는 몸은 조금만 힘을 주어도 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가냘팠다. 혜진은 잠시 굳어 있다가 그의 등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왜 그래?” — 왜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는 거야. 그녀를 향한 원망인지, 자신을 향한 질문인지. 결국 가정이라는 것도, 가족이라는 것도 허울 좋은 울타리에 지나지 않는 걸까. 조금만 방심하면 누구든 넘어 들어올 수 있는 정원에서, 사람들은 제 삶이 안전하다고 믿으며 살아간다. 더구나 가장 가까운 사람이 품속에 감춘 칼은 그만큼 예리하고 잔인했다. 태오는 혜진의 어깨 너머로 식탁을 바라봤다. 자신을 위해 음식을 가져오고, 수저를 놓고, 늦은 저녁을 준비해준 여자. 그런 그녀를 끌어안고 있는 자신도 정우에게는 칼을 쥔 사람이나 다름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 그녀를 놓는다? 물론 정우와 수진의 관계가 자신들의 관계를 정당화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복수도, 응징도 아니었다. 그들이 서로를 배신하기 전부터 태오와 혜진은 이미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와 있었다. —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정우와 수진의 관계를 혜진이 알게 된다면. 태오는 그녀를 안은 팔에 조금 힘을 주었다. 혜진에게는 정우와 처음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보낸 시간들이 있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그녀의 젊은 날이 있었고, 그 시절의 혜진이 진심으로 믿었던 행복이 있었다. — 그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거짓이 된다면. 태오는 눈을 감았다. 혜진이 무너지는 모습만큼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태오야.” 그녀가 그의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무슨 일 있었어?” 태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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