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정우는 약속 시간보다 십 분 늦게 도착했다. 평소와 달리 넥타이를 매지 않았고, 셔츠 소매는 팔꿈치까지 걷혀 있었다. “미안. 회의가 길어졌어.” “괜찮아.” 수진은 그가 앉자마자 서류를 내밀었다. “지금 자금 얼마나 부족해?” “우리 회사가 위험하다고 생각해?” “응.” 수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정우는 목이 탄다는 듯이 물을 벌컥 들이켰다. “이 상태로는 계약을 진행하기 어려워.” “그 얘기 하려고 부른 거야?” “아니.” 수진은 준비해 온 서류 봉투를 그의 앞으로 밀었다. “계약을 진행할 방법이 있어서.” 정우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수진이 직접 작성한 사업 검토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장기 공급계약을 전제로 한 선급금 지급 방안과 단계별 납품 조건, 위험을 줄이기 위한 보증 방안까지 정리되어 있었다. 정우는 몇 장을 넘기다가 고개를 들었다. “이걸 네가 만들었어?” “응.” “회사에서 승인한 거야?” “아직.” 수진은 다리를 고쳐 꼬았다. “네가 먼저 검토해 봐.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정우는 다시 서류로 시선을 내렸다. 한동안 종이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정우의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그가 얼마나 오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혜진이는 알아?” 정우의 손이 멈췄다. “뭘?” “회사 사정.” “아니.” “왜?” “얘기해 봐야 걱정만 하지.” 수진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아내잖아.” “알아.” 정우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근데 혜진이는 이런 얘기 별로 안 좋아해.” “왜?” “관심이 없는 건 아닌데.”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내가 힘들다고 하면 그냥 좀 쉬라고 해.” 수진은 가만히 들었다. “일이 너무 많으면 줄이고, 회사가 그렇게 힘들면 사람을 더 쓰라고 하고, 아니면 회사 정리하라고 하고. 자기가 벌면 된다고.” 정우는 웃었다.
수진은 그녀가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봤다. 테이블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벽에 걸린 텔레비전에서는 야구 중계가 나오고 있었고, 옆 테이블에서는 누군가 맥주잔을 부딪쳤다. 정우는 치킨 뼈를 접시 한쪽으로 밀어놓고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잘 지냈어?” 그가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수진은 어이가 없어서 웃었다. “기억은 나나 봐? 난 완전히 잊은 줄 알았네.” “어떻게 잊어.” 정우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사람처럼 굴어?” “혜진이 앞이잖아.” “그래서?” “뭐라고 해야 하는데.” 수진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글쎄. 오랜만이라고 반가운 척이라도 하든가.” “그랬다가 혜진이가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으면?” “아는 사이라고 하면 되지.” “어떻게 아는데?” 정우가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그 웃음이 얄미웠다. 수진은 팔짱을 꼈다. “원래 이렇게 계산적이었나?” “계산적인 게 아니라 조심하는 거지.” “뭘 그렇게 조심해? 우리 무슨 사이였다고.” 정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수진은 일부러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잖아. 하룻밤 잔 게 전부인데.” 정우가 맥주잔을 내려놓았다. “목소리 좀 낮춰.” 수진은 웃었다. “왜? 들킬까 봐?” “혜진이한테 굳이 알릴 일은 아니잖아.” “굳이.” 수진은 그 말을 작게 되뇌었다. 차가운 맥주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수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그의 손을 바라봤다. 손가락이 길고 손등의 뼈가 도드라진 손이었다. “혜진이한테 잘해.” 정우가 고개를 들었다. “그럴 거야.” “울리지 말고.” “응.” 수진은 그를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때 혜진이 돌아왔다. “무슨 얘기 해?” 수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남자친구한테 너 울리지 말라고 협박했어.” “진짜?” 혜진이 웃으며 정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뭐래?” “안 울리겠다고 했
충동이었다. 수진은 출발하기 전 정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마지막 기회라도 주려는 것처럼. 아니, 어쩌면 폭주하려는 자신을 막아달라는 심정이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지없이 몇 차례 신호음이 울린 뒤 기계적인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수진은 한동안 휴대전화를 내려다보다가 서랍을 열었다. 안쪽에 넣어둔 짙은 녹색의 보석함을 꺼냈다. 뚜껑을 열자 가느다란 금빛 체인에 매달린 작은 펜던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탈리아의 오래된 보석 세공 브랜드에서 나온 목걸이였다. 아끼고 아끼면서 착용하리라 다짐했었다. 수진은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정우가 혜진을 주려고 산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갈망했었다. 거울 앞에 선 수진은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펜던트가 쇄골 아래로 가볍게 떨어졌다. 목걸이를 돋보이게 하려고 미리 갈아입은 브이넥 니트와 제법 잘 어울렸다. 수진은 거울을 향해 고개를 조금 돌렸다. 예뻤다. 정우가 자신만을 위해 골라준 것이었다면 더 좋았을텐데. 그녀는 보석함을 닫았다. 차를 몰고 가는 동안에도 수진은 휴대전화를 의식했다. 역시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오전 내내 회의가 있다고 했던가. 요즘 정우는 늘 바빴다. 회의가 길어졌고, 갑작스러운 일정이 생겼으며, 저녁에는 가족과 약속이 있었다. 수진은 그 모든 사정을 이해했다. 적어도 이해하는 척은 했다. — 예전에는 이러지 않았는데. 한밤중에도 전화를 받았고, 바쁘다면서도 잠깐 얼굴을 보러 왔다. 만나지 못하는 날이면 별 내용이 없어도 메세지들을 남겼다. 점심은 뭐 먹었는지, 비가 오니 운전을 조심하라거나. 그런 말들이 언제부터 사라졌는지 수진은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신호가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수진은 브레이크를 밟고 횡단보도 앞에 차를 세웠다. 가을 햇빛이 앞유리에 비스듬히 내려앉았다. 보행자 신호가 켜지자 사람들이 하나둘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젊은 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여자가 남자의 팔을 잡아당기며 무언가를 말했다. 남자는 고개를 숙여 듣다가 웃었다
오피스텔 맞은편 편의점 창가에서 지유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고 길가에 정차한 차를 무심코 바라봤다. 운전석 쪽을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이 분명하게 보였다. —태오? 지유는 반가운 마음에 눈이 커졌다. 차 안에 앉은 여자가 태오를 바라보다가 정면을 보면서 웃었다. —엄마랑 있네. 아침부터 어디 다녀온건가? 여자가 손을 뻗어 태오의 머리를 만졌다. — 사이 진짜 좋네. 그 순간 여자의 손이 태오의 뺨으로 내려가더니,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보았다. 거리감이 헷갈릴 정도로 먼 거리도 아니었다. 분명히 여자가 태오에게 입을 맞추었다. 지유는 들고 있던 커피를 천천히 내렸다. 태오는 웃고 있었다. 놀라지도, 피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익숙해 보였다. 얼마 뒤 차가 출발했다. 태오는 한참을 그 차 뒷모습을 보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지유는 그제야 긴숨을 토해냈다. 이른 아침 태오의 집에서 그 여자가 나오는 것을 보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는 자신이 오해했다고 생각했다. 그날 여자의 얼굴에 어려 있던 묘한 홍조까지. “……뭐야.” 손에 들린 커피가 속절없이 식어가고 있었다. —- 지유는 파스타를 포크로 돌돌 말다가 다시 접시 위에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앉은 친구는 벌써 접시를 절반이나 비운 참이었다. “야, 너 오늘 왜 이렇게 안 먹어?” “먹고 있거든.” “아까부터 면만 감고 있잖아.” “생각 좀 하느라.” “무슨 생각?” 지유는 물잔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너희 집은 가족끼리 스킨십 많이 해?” 친구가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그냥 궁금해서.” “많이 하는 편이지. 왜?” “다 컸는데도?” 친구는 포크를 내려놓았다. “우리 아빠는 아직도 나 애 취급하는데.” “어떻게?” “손잡고 다니고, 팔짱 끼고. 가끔 볼에 뽀뽀도 하고.” 지유가 눈을 들었다. “볼에 뽀뽀도 해?” “응. 왜?” “아니. 그냥.” “우리 아빠 외국에서 오래 살았잖아.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온몸이 노곤했다. 하지만 어깨와 허벅지에 기분 좋은 피로가 남아 있었다. 시동을 걸면서 젖은 머리를 매만지던 태오를 돌아본다. 샤워를 마치고 머리까지 말린 뒤 로비로 나오자 태오가 벤치에 앉아 있었다.그는 혜진을 보자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래 기다렸어?”“아니요. 저도 방금 나왔어요.”“어땠어?”“물을 좀 먹었어요.”“얼마나?”“배부를 만큼.”혜진이 웃음을 터뜨렸다. 태오가 혜진의 가방을 받아 들었다.“잘 하던데요?”“봤어?”혜진은 그의 팔을 가볍게 쳤다.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윤혜진 회원님.”“네, 선생님,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모레 뵐게요.”눈을 반달처럼 휘어 웃으며 태오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지나갔다.혜진은 태오를 올려다봤다.“표정이 왜 그래?”“어떤데요?”“꼭 뭐가 마음에 안 드는 사람처럼.”태오는 잠시 혜진을 바라보다가 웃었다.“선생님이 참 친절하시네요.”“웃겨.”주차장에 도착해서 혜진이 차 키를 꺼내며 물었다.“아침 먹으러 갈래?”“잠깐만요.”태오가 가방을 열었다.“뭐야?”“아침 가져왔어요.”그가 꺼낸 것은 작은 보냉 가방이었다. 혜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설마 도시락? 네가 쌌어?”“그럼 누가 싸요.”태오는 웃으며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샌드위치 두 개와 작은 과일 통, 보온병이 들어 있었다. 혜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너 이거 언제 만들었어?”“아침에요.”“몇 시에 일어났는데?”“네 시 반쯤?”“수영하러 온다고 네 시 반에 일어나서 도시락까지 싸?”“배고플 것 같아서요.”혜진은 샌드위치를 내려다봤다. 통밀빵 사이로 달걀과 토마토, 양상추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한쪽에는 얇게 구운 닭고기까지 보였다.“완전 제대로 만들었네.”“먹어봐요.”혜진은 운전석에 앉았고, 태오는 조수석에 올랐다. 차 안에는 아직 새벽의 서늘함이 남아 있었다. 태오는 보온병을 열어 작은 컵에 따뜻한 차를 따라주었다.“이것도 마셔요.”“뭔데?”“보리차요.”“너 정말
—— 탈의실 거울 앞에서 혜진은 수영복을 펼쳐 들었다. 검은색 원피스 수영복이었다. 군더더기 없는 디자인에 등 부분이 깊게 파여 있었다. - 오랜만이네 대학 시절에는 물속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았다. 바다에 들어갈 때면 두꺼운 잠수복을 입었지만, 실내 수영장에서는 늘 이런 단순한 수영복을 즐겨 입었다. 혜진은 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검은 천이 몸의 굴곡을 따라 매끄럽게 붙었다. 어깨에서 허리로 내려오는 선은 여전히 곧았고, 허벅지에는 오랫동안 걷고 서서 일한 사람 특유의 단단함이 남아 있었다. 혜진은 거울 속 자신을 잠시 바라봤다. 오히려 예전보다 지금의 몸이 마음에 드는 부분도 있었다. 무턱대고 마르기만 했던 시절과 달리, 지금은 제 몸이 가진 무게와 균형을 알았다. 그녀는 수모를 쓰고 머리칼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휴. 춥겠다.” 혼잣말을 하고는 샤워실로 향했다. 수영장 안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였다. 물 위로 희뿌연 수증기가 떠올랐고, 천장에 매달린 조명이 잔잔한 물결을 따라 일렁였다. 일정한 간격으로 물을 가르는 소리와 강사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혜진은 샤워실에서 나와 풀장 쪽으로 걸었다. 그리고 태오를 발견했다. 그는 레인 끝에 서서 수모를 고쳐 쓰고 있었다. 짙은 남색 수영복이 허벅지 중간까지 내려왔다. 평소 헐렁한 티셔츠나 작업복에 가려져 있던 몸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혜진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태오의 어깨는 흡사 접영 선수처럼 넓었다.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선이 시원하게 뻗어 있었고, 팔을 들어 올릴 때마다 등과 옆구리의 근육이 유연하게 움직였다. 팔뚝에는 잔근육이 선명했고, 허리는 군살 없이 좁았다. 반면 허벅지는 단단했다. 무작정 운동으로 부풀린 몸이 아니라, 일상에서 수없이 움직이며 만들어진 몸, 그래서 혜진이 좋아하는 거였다. 그가 몸을 돌리자 혜진과 눈이 마주쳤다. 태오가 웃었다. “왜 그렇게 봐요?” “뭘.” “나 보고 있었잖아요.” 태오가 웃으며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