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금지된 이름으로 너를 부른다: Chapter 21 - Chapter 30

68 Chapters

21화

“어딘데요?”어느새 눈발이 제법 굵어져 있었다. 지유의 코트 어깨에 내려앉은 눈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희게 빛났다. 몇 걸음 앞서가던 지유가 돌아섰다. 조금 전까지 굳어 있던 입가가 풀리더니, 이내 눈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 생각도 없는지, 지유는 그저 웃고 있었다.“나만 따라와요.”태오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뭐야. 예쁘네.지유가 다시 걸음을 옮기고 나서야 태오도 발을 뗐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골목을 두어 번 꺾어 들어가자 오래된 선술집 하나가 나타났다.빛바랜 나무 간판에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창문. 낡았지만 깨끗하게 닦인 유리문에는 손으로 쓴 영업시간이 붙어 있었다. 문을 열자 따뜻한 공기와 함께 음식 냄새가 훅 밀려왔다. 벽에는 메뉴를 적은 나무패들이 빼곡하게 걸려 있었다. 계란말이, 닭껍질 교자, 소 힘줄 조림, 명란구이. 오래된 메뉴 사이로 새로 끼워 넣은 나무패 몇 개가 유난히 밝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데도 좌석은 절반쯤 차 있었다. 손님들은 저마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그 소리들이 한데 모이자 가게 안은 제법 떠들썩했다.“여기 자주 와요?”“네. 혼자서도 와요.”“혼자 술 마시는 거 좋아해요?”“사람이랑 마시는 것도 좋아하고요.”지유가 태오를 돌아봤다.“오늘은 사람이 생겼네요.”태오는 대답 대신 웃었다.두 사람은 가게 안쪽 구석에 마주 앉았다. 지유가 코트를 벗어 옆자리에 걸자 태오도 맞은편 의자에 몸을 앉혔다.“내 맘대로 시켜도 되죠?”“네. 저 웬만하면 다 먹어요.”“그럼 잘됐네.”지유는 익숙하게 메뉴판을 훑더니 직원에게 맥주 두 잔과 안주 세 가지를 주문했다.“처음부터 이렇게 많이 시켜요?”“태오 씨 많이 먹는다면서요. 못 먹으면 제가 먹죠.“지유는 가방에서 머리끈 하나를 꺼냈다. 손목에 끼운 뒤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더니 높이 질끈 묶었다. 그녀가 고개를 젖히자 목선이 훤히 드러났다. 태오는 무심코 그쪽을 바라봤다. 목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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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선술집을 나왔을 때는 새벽 한 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눈은 어느새 그쳐 있었다. 대신 골목마다 하얗게 쌓인 눈이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야, 한태오.”“왜.”“너 술 진짜 잘 마신다.”“너도 만만치 않거든.”지유가 웃음을 터뜨렸다.둘은 나란히 걸었다. 조금 전까지 그렇게 떠들어댔는데, 막상 밖으로 나오니 할 말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어색하지도 않았다. 지유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태오를 힐끗거렸다. 키가 커서 그런지 걸음이 빨랐다. 태오는 몇 걸음 앞서가다가 지유가 뒤처지면 자연스럽게 속도를 늦췄다. 지유가 눈길에 미끄러져 살짝 휘청거리자 태오가 오른팔을 내밀었다.“팔짱 껴.”“그럼, 실례.”지유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팔짱을 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는 사람치고는 꽤 바짝 붙어왔다. 코트 너머로 지유의 가슴이 팔뚝에 닿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해지는 온기와 가까운 거리에서 풍기는 은은한 향수 냄새에 괜히 팔에 힘이 들어갔다. 지유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맞닿은 팔을 타고 그 두근거림이 제 심장에까지 전해지는 듯했다. 태오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내려다봤다. 지유가 그의 팔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어느새 오피스텔 앞이었다. 자동문이 열리자 따뜻한 공기가 밀려왔다. 두 사람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지유는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어 섰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제법 붉었다. 머리는 높이 묶은 그대로였고, 코트 어깨에는 녹다 만 눈 자국이 남아 있었다.그 옆에 선 태오는 멀쩡했다.— 술을 얼마나 잘 마시는 거야.지유는 거울 너머로 그를 바라봤다. 곧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조용하고 어두운 복도였다. 두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센서등이 하나씩 켜졌다. “들어가.”태오가 말을 건네고 지유의 집을 지나치려 할 때 였다. 지유가 태오의 옷길을 잡았다.“나, 그림 보여줘.”“지금 새벽 한 시 반인데.”“졸려?”지유가 눈매를 흘리며 태오를 바라봤다.“…그건 아닌데.”“싫으면 말고.”그녀가 돌아서서 도어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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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지유가 들어선 곳은 개별 룸을 갖춘 고급 한정식집이었다. 아빠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 게다가 오랜 친구가 운영하는 곳이기도 했다. 회사에서 경영 수업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로 아빠의 심기가 영 좋지 않았다. 그 와중에 양식을 배우고, 기어이 그걸 업으로 삼겠다는 딸이 얼마나 못마땅할지는 안 봐도 뻔했다. 오늘만큼은 최대한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아빠의 화를 더 돋울 필요는 없으니까. 직원의 안내를 받아 복도를 지나던 참이었다. 맞은편 룸으로 들어가려는 여자와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그대로 지나치려는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아. 그날 아침. 태오의 집에서 나왔던 여자였다.단정하고 우아한 몸짓은 여전했다. 다만 엘리베이터에서 스쳤던 그날의 풀잎 향기는 나지 않았다.— 날 기억하나?지유가 슬쩍 뒤를 돌아봤다. 마침 여자도 고개를 돌리고 다시 짧게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는 먼저 고개를 돌려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진짜.지유는 찜찜한 기분을 밀어내고 직원이 열어준 문 안으로 들어섰다.“아빠!”“지유 왔어? 어유, 왜 이렇게 말랐어.”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엄마가 지유를 꼭 끌어안았다.“맨날 밖에서 일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거 아니야?”“얼굴 좋기만 한데. 앉아라.”근엄한 목소리와 달리 아빠의 입가에는 반가운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맞은편 자리를 턱짓했다.“얼마나 고생 중인데요.”지유는 괜히 툴툴거리며 자리에 앉았다.“그러게 회사 들어오라니까 왜 그렇게 고집이야.”“치. 오빠 있잖아. 난 요리가 좋다고요.”“네가 더 소질 있다니까. 네 오빠는 너무 물러서 안 돼.”“차차 나아지겠죠. 걱정 마.”지유는 따뜻한 보리차를 한 모금 마셨다.오늘도 결국 이 얘기였다.“배고플 텐데 얼른 먹자. 오늘은 갈비찜이 메인이래.”엄마가 분위기를 바꾸듯 말했다.“너무 좋아!”지유는 기다렸다는 듯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적어도 밥 먹는 동안만큼은 경영 수업 얘기가 나오지 않기를 바라면서.——-“혜진아, 어서 앉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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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식사가 한창이었다. “근데 똑같은 한식인데 어떻게 이렇게 맛이 다르지?” 민영이 잡채를 젓가락으로 한 움큼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러니까. 나 이거 레시피 배우고 싶다니까.” 미애도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혜진이가 부럽다니까. 아들이 이런 것도 해주고.” 수진이 말간 눈으로 혜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진은 국물을 뜨던 숟가락을 멈췄다. “어머, 민재가 요리도 그렇게 잘해?” 미애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혜진은 숟가락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 어떻게 알지? 정우와 사업적으로 접점이 있다는 사실은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사적인 이야기까지 나눌 정도로 가까웠던가. “민재 말고, 태오.” “태오?” “응. 우리 얼마 전에 양자 들였어.” “뭐?” 미애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민영도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아니, 언제? 그런 얘기를 왜 이제 해?” “말할 기회가 없었지.” 언젠가는 해야 할 이야기였다. 혜진은 태오가 어떻게 정우와 인연을 맺었는지, 성인이 된 뒤에도 정우가 계속 그를 도와왔다는 사실과 입양을 결정하기까지의 과정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친구들의 눈이 점점 커졌다. “세상에. 정우 씨 진짜 대단하다.” “너도 그렇고. 쉬운 결정 아니었을 텐데.” “뭐, 그렇게 됐어.” 혜진은 웃었다. 수진은 말없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근데 수진이 넌 어떻게 알았어?” 혜진이 무심한 척 물었다. “응?” “태오가 요리 잘하는 거.” “아, 정우 씨가 전에 얘기했어.” 수진은 별일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사이 직원이 식기를 치우고 디저트를 내왔다. “아, 맞다.” 수진이 휴대폰을 꺼냈다. “나 다음 주에 로마 출장 가는데, 필요한 거 있으면 단톡방에 보내둬.” “또 출장?” 민영이 웃으며 물었다. “넌 대체 한 달에 몇 번을 나가는 거야?” “일이 그렇지, 뭐.” 수진은 태연하게 웃었다. 혜진은 디저트 접시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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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너무 지겨웠다. 클럽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벌써 누군가 전화번호를 물었고, 누구는 술을 사주겠다고 했다. 방금 전에는 이름도 모르는 남자가 귓가에 대고 어디 사느냐고 물었다. 수진은 대답 대신 잔에 남은 술을 비웠다.“재미없어.”옆에 앉아 있던 친구가 음악 때문에 못 들었다는 듯 귀를 가까이 댔다.“뭐라고?”“재미없다고.”“온 지 얼마나 됐다고.”“그러니까. 벌써 재미없잖아.”수진은 턱을 괸 채 사람들을 구경했다. 번쩍이는 조명 아래에서 남자들은 이상하리만큼 비슷해 보였다. 비싼 시계, 몸에 붙는 셔츠, 잔을 들어 보이며 웃는 얼굴. 눈이 마주치면 십중팔구 다가왔다.의미없이 플로어 옆 테이블들을 훑어 보는데 익숙한 얼굴 하나가 시야를 스쳤다. 수진의 눈썹이 올라갔다.— 쟤가 왜 여기 있어?아는 얼굴이었다. 몇 번 어울린 적이 있는 남자였고, 평판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여자 문제도 복잡했고 입도 가벼웠다. 수진이 속으로 부르던 이름은 간단했다.— 저 쓰레기.그런데 처음 보는 남자가 옆에 있었다. 수진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옮겨갔다. 검은 셔츠에 별다른 장식도 없었다.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지도 않았고, 지나가는 여자들을 훑어보지도 않았다. 오히려 이런 장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테이블 끝에 앉아 잔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둘이 왜 같이 있지?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저 쓰레기와도, 이 클럽 공간이랑도. 마침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지만, 수진도 남자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몇 초쯤 그렇게 바라보다가 수진이 먼저 입꼬리를 올렸다.그러자 남자가 시선을 거뒀다. 그게 조금 의외였다. 대부분은 여기서 웃거나, 잔을 들어 보이거나, 곧장 다가왔다. 그런데 저 남자는 끝이었다.“야, 너 뭐해.”친구가 수진의 팔을 툭 건드렸다.“저기 쟤 있잖아.”“누구?”“저쪽. 흰 티 입은 애.”친구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바로 알아봤다.“아, 걔?”“쟤 옆에 있는 사람이랑 자려고.”“뭐? 방금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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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마감한 지 한참 뒤였다. 직원도, 아르바이트생도 모두 돌아가고 카페에는 혜진 혼자 남아 있었다.미등만 켜놓은 실내는 어둑했다. 통창에는 비가 세차게 들이쳤다. 빗물이 유리를 타고 흘러내릴 때마다 바깥 풍경이 일그러졌다.—로마도 비가 오던데, 서울도 오네.로마에서 서울까지 거대한 비구름 하나가 길게 걸쳐 있어, 정우와 자신이 같은 비를 맞고 있는 건 아닐까.
혜진은 문득 그런 엉뚱한 상상을 했다. 지구 반대편이나 다름없는 곳인데도, 같은 구름 아래 있는 것처럼. 혜진은 스툴에 앉아 턱을 괸 채 한참 빗소리를 듣고 있었다.딸랑.문 위의 종이 울렸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은 존재감이 공간 안으로 들어왔다. 혜진은 잠시 그대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태오가 서 있었다. 젖은 머리칼이 이마에 조금 내려붙어 있었고, 어깨도 축축했다. 한 손에는 작은 종이 상자가 들려 있었다.“뭐야?”태오는 대답 대신 성큼성큼 걸어왔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젖은 신발 밑창에서 작은 물자국이 남았다. 혜진이 그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우산은?”“있어요.”“근데 왜 젖었어?”“비가 옆으로 오잖아.”태오는 카운터 앞에 멈춰 서더니 손에 든 상자를 그 위에 올려놓았다.툭.혜진의 시선이 상자로 떨어졌다. 리본도 없는 흰 종이 상자였다. 한쪽 귀퉁이가 비에 젖어 조금 물러 있었다.“뭔데?”“폭탄.”“가져가.”“마카롱.”그제야 혜진이 상자를 끌어당겼다. 뚜껑을 열자 마카롱 여섯 개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모양이 조금씩 달랐다. 하나는 꼬끄 가장자리가 살짝 깨져 있기도 했다. 혜진이 하나를 집었다.“네가 만들었어?”“응, 오늘 배웠어.”“프렌치 레스토랑에서?”“디저트 파트에서 남는 재료로 연습해보라고 해서.”혜진은 연한 갈색 마카롱을 반으로 갈랐다. 안쪽에 짙은 크림이 보였다. 한입 베어 물었다. 태오가 카운터에 팔을 기대며 그녀를 바라봤다.“어때요?”혜진은 천천히 씹었다.“음, 얼그레이네.““좋아하잖아.”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대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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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뭘 그렇게 봐?”맞은편 남자가 태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아무것도.”“아무것도 아닌 얼굴이 아닌데?”태준은 대꾸하지 않고 와인을 마셨다. 여자가 다시 움직였다.옆 테이블의 빈 잔을 치우고, 떨어진 냅킨을 주워 새것으로 바꿔놓고, 나이 든 손님이 의자에서 일어나자 한발 먼저 다가가 의자를 빼줬다.태준은 저도 모르게 다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일하는 직원에게 눈길이 가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예쁜 여자는 질리도록 많이 봐왔으니까. 그런데 저 여자는 어딘가 달랐다. 서비스를 하는 사람 특유의 지나친 공손함이 없었다. 친절한데 비굴하지 않았고, 웃는데 애교를 부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마치 이곳에 고용되어 있다는 사실과 별개로 제 몸에 밴 태도가 따로 있는 사람 같았다.- 집에서 곱게 자랐나.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때 여자가 바 쪽에서 와인병을 받아 들더니 이쪽으로 걸어왔다.태준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실례하겠습니다.”가까이에서 들으니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다.여자가 테이블 옆에 섰다. 태준은 잔보다 그녀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봤다. 가까이서 보니 더 어렸다.스물둘? 셋?여자가 와인병을 기울였다.“…….”“손님?”지유가 고개를 들었다.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잔 좀 들어주시겠어요?”“아.”태준이 뒤늦게 잔을 내밀었다. 지유의 눈에 아주 잠깐 웃음기가 스쳤다. 태준이 물었다.“왜 웃어요?”“안 웃었는데요.”“웃었는데.”“착각하신 것 같은데요.”지유는 아무렇지 않게 다음 잔으로 옮겨갔다. 태준이 피식 웃었다.- 성격도 있네.마지막 잔을 채우려던 순간, 뒤로 지나가던 직원과 지유의 어깨가 부딪쳤다.“앗.”병이 기울었다.붉은 와인이 태준의 흰 셔츠 위로 그대로 쏟아졌다. 순간 지유의 얼굴이 새하얘졌다.“……죄송합니다!”태준은 흰 셔츠에 번진 붉은 얼룩을 내려다봤다. 제법 처참했다.그러고는 천천히 다시 지유를 올려다봤다.조금 전부터 말을 걸어보고 싶었던 여자였다. 그런데 이렇게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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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정비소에 맡긴 차 때문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갑작스러운 충동에 두 정거장 먼저 내려, 태오가 일하는 레스토랑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뿐이었다.통유리 너머로 저녁 영업이 한창이었다. 테이블마다 촛불이 켜져 있었고, 검은 옷을 입은 직원들이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주방 쪽은 홀보다 훨씬 밝았다. 혜진은 유리창 너머를 무심히 훑었다.태오는 금방 눈에 띄었다. 키가 큰 탓이었다. 조리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주방 입구에 서서 누군가에게 디저트 접시를 건네고 있었다.여자였다. 혜진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검은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걸 보니 이곳의 홀 직원인 모양이었다. 여자가 무어라 말을 건네자 태오의 눈매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모양으로 휘었다. 잠깐이었지만 그 웃음은 분명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여자가 디저트 접시를 받아 들다 말고 태오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무슨 말을 덧붙이는 듯했다. 태오는 굳이 그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별것 아닌 장면이었다.그런데 혜진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이윽고 여자가 접시를 들고 돌아섰다. 홀의 조명이 얼굴 위로 환하게 쏟아졌다. 그제야 기억났다.태오와 같은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여자애. 태오와 비슷한 또래인데도 어딘가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던 옷차림. 그리고 자신을 꽤 흥미롭고 의아하게 바라보던 눈빛까지.— 같은 층에 사는 데다, 같은 곳에서 일한다고?혜진의 시선이 다시 태오에게 향했다. 지유가 멀어지는 모습을 태오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방 안으로 몸을 돌렸다.혜진은 공연히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둘이 친한 모양이었다.어느 정도로?— 같이 퇴근하기도 하나. 같은 층이니 집에도 함께 돌아가겠지.
술이라도 마신 날에는…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혜진은 흠칫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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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을 때는 저녁 여덟 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정비소에 맡긴 차 때문에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던 참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갑작스러운 충동에 두 정거장 먼저 내려, 태오가 일하는 레스토랑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뿐이었다.통유리 너머로 저녁 영업이 한창이었다. 테이블마다 촛불이 켜져 있었고, 검은 옷을 입은 직원들이 그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주방 쪽은 홀보다 훨씬 밝았다.혜진은 유리창 너머를 무심히 훑었다. 태오는 금방 눈에 띄었다. 키가 큰 탓이었다. 조리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주방 입구에 서서 누군가에게 디저트 접시를 건네고 있었다.여자였다. 혜진은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췄다.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긴 머리를 하나로 묶고 검은 셔츠에 앞치마를 두른 걸 보니 이곳의 홀 직원인 모양이었다. 여자가 무어라 말을 건네자 태오의 눈매가 특유의 장난스러운 모양으로 휘었다. 잠깐이었지만 그 웃음은 분명 여자에게 향해 있었다. 여자가 디저트 접시를 받아 들다 말고 태오의 팔을 가볍게 잡았다. 무슨 말을 덧붙이는 듯했다. 태오는 굳이 그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그저 그대로 몇 마디를 더 주고받았다. 별것 아닌 장면이었다.그런데 혜진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이윽고 여자가 접시를 들고 돌아섰다. 홀의 조명이 얼굴 위로 환하게 쏟아졌다. 그제야 기억났다.태오와 같은 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여자애. 태오와 비슷한 또래인데도 어딘가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던 옷차림. 그리고 자신을 꽤 흥미롭고 의아하게 바라보던 눈빛까지.— 같은 층에 사는 데다, 같은 곳에서 일한다고?혜진의 시선이 다시 태오에게 향했다. 지유가 멀어지는 모습을 태오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주방 안으로 몸을 돌렸다. 혜진은 공연히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둘이 친한 모양이었다.어느 정도로?— 같이 퇴근하기도 하나. 같은 층이니 집에도 함께 돌아가겠지.
술이라도 마신 날에는…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혜진은 흠칫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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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충동이었다. 가끔 혜진은 그날의 충동이 자신의 삶을 이렇게까지 바꿔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 새삼 놀라곤 했다. 연애 한 번 해본 적 없는 자신이 처음 본 남자에게 그렇게 쉽게 끌려, 첫 경험까지 망설임 없이 해버리다니. 하지만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는 있었다. 오감이 전부 만족스러웠다.날렵하게 떨어지는 턱선. 낮은 목소리.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섞인 남자의 체취. 원룸 문을 열다 휘청한 자신의 팔을 붙잡았던, 부드러우면서도 어딘가 거친 손가락. 그래서 맛보고 싶었다. 저 입술을 깨물면 무슨 맛이 날까.그리고 그날, 혜진은 처음 경험하는 종류의 감각을 알았다. 분명 아팠다. 그런데 아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았다. 음식으로는 도저히 재현할 수 없는 맛이 사람의 몸에도 있다는 것을 스무 살의 혜진은 그날 처음 알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 번 알아버린 감각을 자꾸만 되풀이하고 싶었다. 둘은 걷잡을 수 없이 서로를 탐했고, 연애다운 연애의 감정이 제대로 싹트기도 전에 아이부터 생겨버렸다. 정우는 책임감이 강한 남자였다. 무엇보다 제 핏줄에 대한 애착이 강했다.“연애는 결혼부터 하고 하자.”우스운 말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됐다. 제대로 된 연애관이 생기기도 전에 결혼부터 했고, 아이부터 낳았다. 그 뒤로 혜진은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어, 놀라울 만큼 조용히 사회의 관습에 충실한 삶을 살아왔다.그런데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충동이 다시 돌아왔다. 이번에는 자신을 관습 안으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니라, 그 관습과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모조리 흔드는 방향으로.태오와의 일탈이 길어지면서, 정우를 품지 않은 지도 꽤 오래였다. 태오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정우와는 일주일에 몇 번씩 관계를 가질 만큼 잘 맞았다. 오랜 부부에게 으레 찾아온다는 권태도 두 사람의 잠자리만큼은 좀처럼 비껴갔다. 그러고 보면 정우 역시 그동안 자신을 찾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실은 그 순간 혜진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기만 했다. 오늘은 그저 그 익숙함이 필요했다.혜진은 천천히 정우에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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