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남편이 나를 팔았고, 그 남자가 나를 샀다: Chapter 11 - Chapter 20

114 Chapters

11화

휴대전화가 손에서 미끄러졌다.바닥에 떨어지기 직전, 이건이 먼저 잡았다. 그는 화면을 보지 않고 그대로 뒤집어 내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현우의 문자가 아직 화면에 떠 있었다.몇 번 자주는 게 뭐가 그렇게 대단해?네가 평생 벌어도 100억은 못 벌어.그 정도는 해야 100억 값어치 하지.손끝이 차갑게 식었다.“100억.”겨우 입을 열었다.“그게 제 몸값이에요?”이건의 시선이 천천히 내 얼굴로 올라왔다.“아니.”“그럼요?”“백현우가 당신을 어디까지 버릴 수 있는지 확인한 가격이야.”숨이 막혔다.그는 마치 기업 하나의 가치를 평가하듯 담담했다.“돈이 얼마면 자기 아내를 포기하는지 궁금했어.”“그래서 시험했어요?”“그래.”망설임도 없었다.현우는 돈 때문에 나를 팔았다. 하지만 이 남자는 100억을 던져놓고 사람의 욕망이 어디까지 추해질 수 있는지 지켜봤다.이건 역시 무서운 남자였다.나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갈게요.”이건은 막지 않았다. 문 쪽으로 두 걸음쯤 갔을 때 낮은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어디로?”나도 모르게 발이 멈췄다.“백현우한테 돌아갈 거야?”대답할 수 없었다.돌아가면 현우가 있고, 그 집에는 민서라가 있다. 내 남편의 아이를 가진 여자가 이미 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이건이 테이블 위에 카드키 하나를 내려놓았다.“같은 층 끝방이야.”나는 카드키를 바라봤다.“나하고 자자는 뜻 아니야.”잠시 침묵하던 그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덧붙였다.“아직은.”나도 모르게 고개가 들렸다. 이건은 웃지 않았다. 농담을 던진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농담 아닌데.”심장이 세게 내려앉았다.그가 나를 원한다는 사실을 이제는 숨길 생각조차 없는 것 같았다.“당신이 싫다고 하는 동안은 안 건드려. 하지만 내가 당신을 원하는 것까지 숨길 생각은 없어.”한동안 카드키를 집지 못했다.이건이 무서웠지만 지금 현우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건 더 싫었다. 적어도 이 남자는 내가 싫다고 하면 멈췄다.결국 카드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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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밤새 몇 번이나 잠에서 깼다.눈을 뜰 때마다 낯선 천장과 방 안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라벤더에 베르가못을 섞은 아로마 오일.불면증이 심한 밤이면 침대 머리맡에 몇 방울 떨어뜨리곤 하는 향이었다. 흔한 라벤더 향도 아니었다. 여러 가지를 써보다가 겨우 찾아낸 조합이었다.대체 진이건은 언제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걸까.아침 일곱 시가 조금 넘어 침대에서 일어났다. 밤새 여러 번 잠을 설쳤는데도 머리는 이상할 만큼 맑았다. 익숙한 향 때문인지도 몰랐다.휴대전화를 켜자 백림유통 전략기획팀 단체방에 오전 회의 자료가 수두룩하게 올라와 있었다. 평소처럼 출근하려면 서둘러야 했다.침대에서 내려오다 어젯밤 벗어둔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저걸 다시 입고 회사에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집에 들렀다 가면 회의 시간에 늦는다.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주변을 둘러보다 옷장 문을 열었다.손이 그대로 멎었다.크림색 실크 블라우스와 짙은 네이비 재킷, 무릎 아래로 정갈하게 떨어지는 스커트가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서랍에는 포장도 뜯지 않은 새 스타킹과 속옷이 들어 있었고, 아래쪽에는 검은색 펌프스까지 갖춰져 있었다.재킷 안쪽의 라벨을 확인하고 구두를 들어 밑창을 보았다.내 사이즈였다.어젯밤 욕실에 놓여 있던 화장품과 샴푸, 불면증이 있을 때만 쓰는 아로마 오일에 이어 옷과 구두까지.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정확했다.수화기를 들어 호텔 프런트로 전화를 걸었다.“방에 마련된 옷과 구두, 이것도 진이건 대표님이 준비한 건가요?”“네, 고객님.”“제 사이즈는 어떻게 안 거죠?”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대표님께서 직접 전달해주신 사항이라 저희도 자세한 경위는 알지 못합니다.”전화를 끊고 옷장을 다시 바라봤다.현우는 몇 년을 함께 살면서도 내 구두 사이즈 하나 제대로 외우지 못했다. 그런데 어제 처음 만난 남자는 옷부터 구두까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찜찜했지만 당장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옷을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서자 기분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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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오전 여덟 시 사십 분.백림유통 전략기획팀 사무실에 들어서자 몇 걸음 떨어진 책상에 민서라가 앉아 있었다.어젯밤 실크 잠옷을 입고 내 남편의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오늘은 단정한 블라우스에 사원증을 걸고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과장님, 좋은 아침이에요.”어젯밤 현우를 ‘오빠’라고 부르던 간드러진 목소리는 흔적도 없었다. 서라가 서류를 내밀었다.“어제 말씀하신 자료 수정했어요.”첫 장부터 예상 매출 산출식이 잘못돼 있었다.“민서라 씨. 전년 대비 증가율 다시 계산하세요. 이 숫자로 들어가면 뒤에 손익까지 전부 틀어져요.”“네, 과장님.”얌전히 돌아가는 모습은 지난 몇 달 동안 내가 가르쳐 온 인턴 그대로였다. 보고서 작성법을 알려주고 야근할 때면 밥까지 챙겨 먹였던 아이.그 아이가 지금 내 남편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옆자리 직원이 서라에게 커피를 건넸다.“서라 씨, 커피 마실래요?”“감사합니다.”아무도 모른다.저 아이가 대표의 아이를 가졌다는 것도, 어젯밤 내 집에서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것도.“과장님, 오늘 옷 예쁘네요. 어제랑 완전히 다른데요?”팀 막내의 말에 재킷을 정리하던 손이 멈칫했다.“아침에 일이 좀 있었어요.”모니터를 켜는데 파티션 너머 서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의 시선이 내 재킷에서 블라우스, 구두까지 훑고 내려갔다.그리고 웃었다.오전 아홉 시.전략회의가 시작됐다.현우가 들어오자 잡담이 끊겼다. 그의 시선이 가장 먼저 내 낯선 재킷과 블라우스를 훑었다가 서라에게 향했다.“한 과장, 시작해.”화면에 분기 실적표를 띄웠다.“현재 매출은 목표 대비 92퍼센트입니다. 오프라인 세 개 지점의 손실폭이 예상보다 큽니다. 온라인 부문으로 예산을 재배치하는 편이 효율적입니다.”영업본부장이 이의를 제기했지만 준비한 수치를 보여주자 입을 다물었다.그때 서라가 갑자기 입을 막았다.“읍…….”얼굴이 하얗게 질렸다.현우가 먼저 몸을 기울였다.“괜찮아?”회의실이 조용해졌다.대표가 인턴에게 하기에는 지나치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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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복도의 말소리가 잦아들었다.나는 민서라를 바라봤다. 사람들이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서라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민서라 씨. 지금 업무 시간입니다. 직장 상사의 사생활을 복도에서 떠드는 것도 업무인가요?”서라의 미소가 굳었다.“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냥 옷이 어제랑 달라서…….”“그럼 오전에 수정하라고 한 자료부터 마무리하세요.”“……네, 과장님.”돌아서자 낮은 속삭임이 따라붙었다.“그분이 누구야?”“한 과장님 대표님이랑 결혼한 거 아니었어?”자리로 돌아오자 팀 막내가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과장님, 아까 서라 씨가 한 말 신경 쓰지 마세요. 다들 그냥 말실수라고 생각할 거예요.”그 말이 오히려 확실하게 알려줬다.이미 소문은 시작되고 있었다.잠시 뒤 서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서라 씨, 어디 가요?”“대표님 비서실에서 잠깐 오래요.”십여 분 뒤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따뜻한 차와 약 봉투가 들려 있었다.“아까 속이 안 좋다고 했더니 챙겨주셨어요.”누가 챙겼는지는 말하지 않았다.말하지 않아도 알았다.현우였다.그 순간 휴대전화가 진동했다.[대표실로 올라와.]대표실 문을 열자 현우는 책상 앞에 서 있었다.“문 닫아.”문이 닫히자 그의 시선이 내 옷을 훑었다.“그 옷 뭐야. 어제 입고 나간 옷 아니잖아.”“계약대로 한 거예요.”현우가 성큼 다가왔다.“그래서 호텔에서 잤어? 그 새끼랑?”기가 막혔다.어젯밤에는 몇 번 자주는 게 뭐가 대단하냐고 했다. 100억 값어치를 하라고 했다. 그런 남자가 지금은 내가 다른 남자와 잤을까 봐 얼굴을 굳히고 있었다.“제가 진이건 씨와 어디에서 지내든, 무슨 관계가 되든 문제 삼지 않겠다고 직접 서명했잖아요.”“한지아.”“왜요? 원하던 대로 해드린 건데.”현우의 목소리가 거칠어졌다.“내가 몇 번 자주라고 했다고 진짜 좋아서 붙어먹으라는 뜻인 줄 알아?”순간 말문이 막혔다.“필요하면 비위 맞춰주라는 거였어. 그래도 넌 내 아내야.”“그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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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대표실 문이 열렸다.“진 대표님.”조금 전까지 나를 조롱하듯 몰아붙이던 현우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낮아졌다. 굳어 있던 표정을 풀며 먼저 손을 내밀었지만, 살짝 굽힌 허리와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시선이 그의 비굴함을 드러냈다.“미리 연락이라도 주셨으면 제가 직접 내려가 맞이했을 텐데요.”진이건은 내밀어진 손을 무심하게 한번 내려다본 뒤 짧게 맞잡았다.“그럴 필요까지는 없어서.”검은 정장이 넓은 어깨를 따라 반듯하게 떨어졌다. 뒤로는 서류 가방을 든 수행원이 따라 들어왔다.100억.그 돈이 오만하던 현우의 허리까지 숙이게 만들고 있었다.“앉으시죠. 차는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됐습니다.”이건의 시선이 현우를 지나 내게 닿았다. 그러다 내 재킷 깃에 머물렀다.아침에 그가 준비해둔 옷이었다.“잘 어울리네.”현우의 입가가 굳었지만 이건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한지아 씨도 있었고.”“한 과장과 업무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습니다.”조금 전까지 내 옷깃을 건드리며 누구와 밤을 보냈느냐고 따지던 남자가 순식간에 대표의 얼굴을 되찾고 있었다.이건이 소파에 앉았다.“잘됐네요. 어차피 한지아 과장 자료도 보러 왔으니까.”“한 과장 자료요?”“투자 검토하면서 백림유통 실적 자료를 다시 봤습니다. 손실 지점 정리안, 한지아 과장이 올린 거던데.”“아직 내부 검토 단계입니다.”“그래서 직접 들으러 왔습니다.”이건이 나를 바라봤다.“설명해줘.”마치 내가 자기 회사 직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당연한 어조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불쾌하지 않았다. 내가 당연히 해낼 거라는 확신이 깔린 말투였다.현우의 시선이 날아왔지만 나는 노트북을 열었다.“이번 분기 손실 지점 세 곳의 정리안과 온라인 부문 예산 재배치안입니다.”화면을 돌려 손실률과 온라인 전환율, 물류비와 판촉비 절감 예상치를 설명했다.“온라인으로 전환했을 때 회수 기간은?”“보수적으로 잡아도 6개월입니다. 기존 판촉비까지 조정하면 더 줄일 수 있습니다.”“근거는?”관련 데이터와 비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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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진이건이 돌아간 뒤에도 사무실은 한동안 조용했다.대표실 유리문이 완전히 닫히고 나서야 여기저기서 참았던 숨이 터져 나왔다.“와, 나 진짜 숨도 제대로 못 쉬었네.”박 대리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댔다. 맞은편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최 사원도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끼어들었다.“영화에서나 보던 사람이 눈앞에 나타난 줄 알았어요. 비주얼이 거의 연예인이던데요?”“연예인이 백억 들고 찾아오냐?”“그러니까 더 멋있죠.”사무실에 웃음이 번졌다. 조금 전까지 대표실 쪽을 힐끔거리며 숨소리까지 죽이던 사람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한마디씩 보탰고, 다른 팀 직원까지 고개를 내밀어 정말 백억 투자가 확정된 거냐고 물었다.나는 그 틈에서 조용히 노트북을 닫았다.진이건.그 이름을 떠올리자 조금 전 대표실의 공기가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백현우와 마주 앉아 있으면서도 한 번도 시선을 피하지 않던 남자였다. 현우의 표정이 굳으면 나는 먼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생각했고, 목소리가 조금만 낮아져도 다음에 무슨 말이 날아올지 긴장하는 게 습관이 됐다.그런데 진이건은 달랐다.현우가 불편한 기색을 보일수록 오히려 더 느긋해 보였다.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서였을까. 돌아서기 직전까지 내게 머물렀던 그의 시선도 자꾸 마음에 걸렸다.“한 과장, 오늘 저녁 별일 없죠?”팀장의 부름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네. 따로 약속은 없습니다.”“그럼 잘됐네. 오늘 다 같이 저녁 먹읍시다. 백억 투자까지 확정됐는데 그냥 넘어갈 수는 없잖아요. 대표님이 좋은 데 잡으랍니다.”“오!”박 대리가 제일 먼저 몸을 일으켰다.“그럼 오늘 한우 갑니까?”“맨날 삼겹살 먹던 사람이 법인카드라고 갑자기 한우야?”“백억인데 삼겹살은 투자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웃음이 터졌다.최 사원이 휴대전화를 꺼내자 막내 직원까지 의자를 끌고 다가왔다.“여기 룸 있어요.”막내가 화면을 내밀자 박 대리가 고개부터 저었다.“너무 멀어. 이왕이면 걸어갈 수 있는 데로 찾아봐.”“그럼 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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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저녁 일곱 시.회사 근처 한우 전문점의 넓은 룸은 직원들의 목소리로 가득했다.불판 위에서 고기가 익고 술잔이 두어 번 돌자 낮 동안 진이건 앞에서 잔뜩 굳어 있던 사람들도 금세 평소 모습으로 돌아왔다.“한 과장님, 이것 좀 드세요.”옆자리 최 사원이 잘 익은 등심을 내 접시에 올려주었다.“아까부터 버섯만 드시잖아요.”“고마워요. 이제 제가 구울게요.”집게를 들려는데 박 대리가 얼른 가져갔다.“오늘 한 과장님은 손대지 마세요. 백억 투자 유치 일등 공신한테 고기까지 굽게 하면 우리가 너무 양심 없잖아요.”“제가 혼자 한 것도 아닌데요.”웃음이 터졌다.나도 따라 웃었다.오랜만에 마음이 편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늦어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오늘만큼은 싫지 않았다.그때 룸 문이 열렸다.“대표님 오셨습니다.”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켰다.백현우였다.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현우의 뒤를 따라 민서라가 들어왔다.연한 크림색 원피스 위에 사원증을 걸고, 한 손에는 현우의 서류 가방을 들고 있었다.웃고 있던 내 입가가 굳었다.서라도 나를 발견했다.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아무렇지 않게 시선을 거두고 현우의 뒤를 따랐다.집에서는 사모님이라고 부르는 여자가, 회사에서는 나를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다들 앉아요.”현우가 손을 들었다.“민서라 씨도 오늘 늦게까지 남아 있었으니 같이 먹읍시다.”“안녕하세요. 인턴 민서라입니다.”서라가 얌전히 허리를 숙였다.“갑자기 따라오게 돼서 죄송해요.”“죄송하긴요. 같이 드세요.”팀장이 웃으며 자리를 권했다.현우가 상석에 앉자 서라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그 옆에 앉았다.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대표와 인턴 비서.직원들 눈에는 그뿐이었다.나만 알고 있었다.어젯밤 저 여자가 누구의 품에서 잠들었는지.그리고 내 집에서 누구의 아이를 가진 채 살고 있는지.“대표님, 축하 잔 받으시죠.”팀장이 술병을 들었다.현우는 직접 병을 받아 직원들의 잔을 채웠다. 농담도 하고, 수고했다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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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진이건이 룸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백현우였다.“오실 줄 몰랐습니다, 진 대표님.”현우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조금 전 서라와 나란히 앉아 고기를 먹던 남자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흐트러진 곳 하나 없는, 백림유통 대표의 얼굴.“시간이 좀 생겼습니다.”이건은 현우의 손을 짧게 잡았다 놓았다.악수가 끝나자 현우의 곁에 앉아 있던 서라도 자리에서 일어났다.“안녕하세요, 대표님. 민서라라고 합니다. 대표님 비서 업무를 돕고 있어요.”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서라가 수줍게 웃었다.이건의 시선이 잠깐 그녀를 스쳤다.“그렇습니까.”그게 전부였다.서라의 입가가 아주 잠깐 굳었다.팀장이 상석 옆의 빈자리를 가리켰다.“진 대표님, 이쪽으로 앉으시죠.”하지만 이건은 움직이지 않았다.그의 시선이 테이블을 천천히 훑었다. 현우 옆에도 자리가 있었고, 서라 옆에도 하나 비어 있었다.그러다 내게 닿은 시선이 멈췄다.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이건이 그대로 내 쪽으로 걸어왔다.구두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괜히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마침내 내 옆에서 걸음이 멈췄다.긴 손가락이 빈 의자의 등받이를 잡았다.스르륵.의자가 뒤로 밀려났다.“여기 앉아도 됩니까?”“그럼요, 진 대표님. 편하신 데 앉으시면 됩니다.”팀장이 대신 대답했지만 이건은 앉지 않았다.그는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마치 허락해야 할 사람이 처음부터 나 하나였다는 것처럼.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 이쪽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네.”내 대답이 떨어지고 나서야 이건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내 바로 옆이었다.재킷을 벗어 의자 뒤에 거는 순간 넓은 어깨가 시야를 스쳤다. 검은 셔츠 소매 아래 드러난 손목까지 괜히 눈에 들어왔다.생각보다 가까웠다.나는 이유도 없이 허리를 바로 세웠다.“진 대표님.”맞은편에서 서라가 먼저 입을 열었다.“낮에는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어요. 이번 투자 건도 궁금한 게 많고요.”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웃는 얼굴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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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나는 한 과장이 나 때문에 긴장하는 줄 알았는데.”이건의 낮은 목소리에 심장이 세게 뛰었다.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건은 더 묻지 않고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내 접시에 놓았다.“그럼 먹어요.”젓가락을 들며 맞은편을 보니 현우의 입가에는 어느새 부드러운 미소가 돌아와 있었다.“진 대표님이 우리 한 과장을 꽤 좋게 보시나 봅니다.”조금 전 술잔을 움켜쥐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여유로운 얼굴로 직접 이건의 잔까지 채웠다.“이번 기획안에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써주십시오.”직원을 두고 하는 흔한 말인데도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나를 또 누군가에게 내어주는 말을 듣는 기분이었다.이건은 현우가 따라준 술을 내려다보며 말했다.“능력 있는 분이더군요.”“그러다 한 과장님 스카우트되는 거 아닙니까?”팀장의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백억 투자받고 에이스까지 뺏기면 큰일인데.”나는 손사래를 쳤다.“그럴 일 없어요.”그런데 이건은 웃지 않았다.“조건이 맞으면 모르는 일이죠.”이번에는 직원들이 환호했다.현우도 웃고 있었지만 테이블 아래에서는 주먹이 천천히 쥐어지고 있었다.“한 과장.”그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내일 오전 회의 자료는 정리됐습니까?”“네. 퇴근 전에 최종본 올렸습니다.”“내가 본 건 수정 전 파일이던데.”심장이 철렁했다.내가 잘못 올렸나?파일명과 저장 시간을 빠르게 되짚었다. 분명 최종본을 올렸는데 현우가 아니라고 하자 확실했던 기억까지 흔들렸다.“제가 다시 확인해보겠습니다. 죄송—”“최종본 맞습니다.”이건이 내 말을 잘랐다.휴대전화 화면을 확인한 그가 현우를 바라봤다.“오후 네 시 십 분에 저도 받았습니다. 수정할 필요 없습니다.”현우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가 금세 풀렸다.“아, 그렇습니까? 제가 다른 파일을 봤나 보군요.”내게는 사과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건의 빈 잔에 다시 술을 따르며 웃었다.“제가 요즘 정신이 없습니다. 큰 투자까지 해주셨는데 더 꼼꼼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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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이건은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더 다가오지 않았다.복도 끝 창문 너머로 밤거리가 내려다보였고, 룸 문틈으로 직원들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나는 차가운 유리창에서 손을 떼며 그와 나 사이의 거리를 바라봤다.현우는 한 번도 이런 걸 물어본 적이 없었다. 내 손목을 잡을 때도, 앞을 막아설 때도 언제나 자기 마음대로였다.“왜 그런 걸 물어봐요?”“싫으면 싫다고 할 수 있어야 하니까.”무덤덤하게 나온 말인데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내가 몸을 돌리자 이건은 그제야 다가왔지만 팔이 닿지 않을 만큼의 거리는 남겨두었다.“아까 보고서는 제대로 올렸습니다. 다시 확인할 필요 없어요.”“알아요. 이제는.”“그런데도 사과부터 하더군요.”잘못한 게 없는데도 현우의 목소리가 낮아지면 먼저 내 실수부터 찾는 버릇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그때 룸 문이 열렸다.현우였다.나와 이건을 발견한 그의 시선이 둘 사이를 훑었다. 턱이 굳었지만 이건에게 다가오는 사이 입가에는 다시 사람 좋은 미소가 걸렸다.“진 대표님, 여기 계셨군요. 한잔 더 권해드리려고 찾았습니다.”“한 과장이 답답해 보여서 잠깐 나왔습니다.”현우의 눈빛이 내게 꽂혔다.“우리 한 과장이 원래 좀 예민합니다. 별일 아닌 것도 혼자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편이라 제가 늘 신경을 쓰죠.”자기가 날 몰아세운 사실은 사라지고 어느새 내가 예민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이건이 현우를 천천히 훑어봤다.“내가 보기에는 반대던데. 웬만한 건 너무 많이 참는 사람 같더군요.”현우의 입가가 굳었지만 룸 안에서 팀장이 얼굴을 내밀자 곧 표정을 풀었다.“대표님, 계산 다 끝났습니다.”현우가 몸을 돌리며 내 팔꿈치 위를 움켜쥐었다.“한 과장도 들어와. 회사 사람들 기다리게 만들지 말고.”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자 몸이 먼저 굳었다. 집에 돌아간 뒤 현우가 나를 몰아붙일 모습이 떠올라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이건이 가까워지자 현우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놓았다.회식이 끝나고 직원들이 식당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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