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남편이 나를 팔았고, 그 남자가 나를 샀다: Chapter 31 - Chapter 40

114 Chapters

31화

“대표님도 어제 그 컴퓨터 쓰셨어요.”대리의 말에 나는 대표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유리문 너머에서 백현우가 울먹이는 서라를 달래고 있었다. 눈가를 손끝으로 닦아주더니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고, 손끝이 뺨을 타고 내려오자 서라가 그의 손목을 살며시 잡았다. 현우는 손을 빼기는커녕 엄지로 그녀의 입가를 쓸어내렸다.서라도 익숙한 듯 그의 손바닥에 뺨을 기댔다.나는 시선을 거두었다.조금 전까지 내 앞에서 억울하다며 눈물을 글썽이던 여자였는데, 지금은 남편의 손길을 받으며 그의 품에 기대 있었다.모니터에는 여전히 파일 수정 기록이 떠 있었다.오후 7시 42분.서라가 주로 사용하는 공용 PC였지만 현우까지 그 컴퓨터를 사용했다는 말이 더해지면서, 누가 자료에 손을 댔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남편까지 의심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현우를 의심하는 일이 낯설지 않아져 있었다.그때 내선전화가 울렸다.도원투자파트너스였다.“한지아 과장입니다.”상대는 어제 전달한 자료의 공급가와 예상 마진율이 이전 협의 내용과 달라, 오늘 오전 실무회의에 그대로 올리기 어렵다고 했다.“확인해서 바로 수정본 보내드리겠습니다.”전화를 끊자 이쪽을 살피던 직원들이 다시 모니터로 고개를 돌렸다.나는 원본을 열어 바뀐 공급가를 되돌리고 마진율을 다시 계산했다. 이전 자료와 수치를 대조한 뒤 수정본을 도원 담당자에게 전송했다.급한 문제는 막았지만 여기서 끝낼 생각은 없었다.전산팀에 공용 PC 접속 기록과 파일 수정 이력을 요청하고 원본과 수정된 파일도 따로 보관했다.예전 같았으면 회사에 피해가 없다는 이유로 넘어갔을 것이다. 현우가 적당히 덮으라고 했다면 굳이 일을 키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이번에는 기록을 전부 남겼다.잠시 후 대표실 문이 열리면서 서라가 먼저 나왔다. 눈가에는 아직 눈물기가 남아 있었고, 뒤따라 나온 현우는 그녀의 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내 책상 옆을 지나치던 그가 걸음을 멈췄다.“도원 건은?”“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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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서라가 먼저 현우의 팔을 놓았다.한 걸음 물러선 그녀는 출력물에 찍힌 자신의 이름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떨었다.“저…… 로그인한 건 맞아요. 어제 대표님이 시키신 자료 찾느라 공용 폴더에 들어간 게 전부예요. 과장님 파일은 정말 안 건드렸어요.”나는 대꾸하지 않았다.로그인은 7시 39분, 파일 수정은 7시 42분이었다. 더 추궁해 봐야 같은 변명만 반복될 게 뻔했다.현우도 주변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출력물을 반으로 접었다.“일단 들어가 있어.”서라가 불안한 얼굴로 올려다보자 현우는 그녀의 등을 밀었다. 대표실로 향하던 서라가 배 위에 손을 얹는 순간 현우의 표정이 달라졌고, 결국 직접 따라가 문을 열어주고 소파에 앉는 것까지 확인한 뒤에야 돌아왔다.현우는 내 책상 위에 출력물을 내려놓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내 팔을 잡아 회의실로 데려갔다.유리문이 닫히자 사무실 소음이 멀어졌다.“이쯤에서 덮자.”나는 출력물을 다시 펼쳤다.[민서라]“서라 씨가 한 거 알고 계시잖아요.”현우는 대답하지 않은 채 블라인드 사이로 대표실을 바라봤다. 서라는 소파에 앉아 배를 쓸고 있었고, 그쪽을 향한 현우의 시선만으로도 충분했다.“경위서 하나 써.”현우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네가 최종 검수하면서 이전 파일을 잘못 보냈고, 바로 정상본으로 수정했다고 정리하면 끝나.”나는 한동안 그를 바라봤다.진실을 몰라서 이러는 게 아니었다. 서라가 한 짓이라는 걸 알면서도 내가 대신 책임지기를 바라고 있었다.회의실 밖에서는 내선전화가 울리고 직원들이 자료를 들고 오가며 오전 업무를 이어가고 있었다.그때 대표실 문이 열리더니 서라가 우리 쪽을 바라봤다. 나와 눈이 마주친 그녀가 천천히 배 위에 손을 얹자 현우의 시선이 곧바로 그쪽으로 향했다.“서라는 아직 인턴이야. 괜히 일 키워서 이제 시작하는 애 매장시킬 필요 없잖아.”현우가 출력물을 내 쪽으로 밀었다.“네가 책임지고 넘어가면 아무 문제 안 생겨.”이상하게 화가 나기보다 머릿속이 차분해졌다.“경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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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알겠습니다.]진이건에게서 온 답장을 확인하고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 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짧은 대답이었다.고개를 들자 통유리 너머에서 현우가 통화하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입가에 걸려 있던 웃음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현우는 나를 쏘아보며 낮게 몇 마디를 더 주고받더니 전화를 끊었다.소파에 앉아 있던 서라가 다가가자 현우가 무언가 짧게 말했고, 그 말을 들은 서라의 얼굴이 굳었다.잠시 뒤 대표실 문이 열렸다.먼저 나온 건 서라였다. 나를 지나치며 힐끗 쳐다본 그녀가 자기 자리로 돌아가자 문 앞에 선 현우가 손가락을 까딱했다.“들어와.”사무실 여기저기에서 시선이 느껴졌다.나는 휴대전화를 쥔 채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실로 들어갔다. 뒤따라 들어온 현우가 문을 닫았다.철컥.잠금장치가 걸리는 소리에 나도 모르게 돌아봤다.“진이건한테 뭐라고 했어?”“물어본 것에 답했을 뿐이에요.”현우가 천천히 다가왔다.“내가 묻잖아. 뭐라고 했냐고.”“……제 실수가 아니라고 했어요.”현우의 입가가 비틀렸다.“내가 아까 분명히 경고했을 텐데. 입 다물고 네가 책임지라고.”“제가 한 일이 아니니까요.”말이 끝나기도 전에 현우가 내 팔을 움켜쥐었다.“악!”거칠게 끌려간 몸이 책상에 부딪치면서 모서리가 옆구리를 세게 찍었다. 통증에 허리가 꺾였지만 현우는 팔을 놓기는커녕 나를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내 말을 무시해?”이를 악문 현우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었다.“진이건한테 문자 몇 번 받았다고 이제 내가 우스워?”“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놔!”팔을 빼내려고 몸을 틀었지만, 그럴수록 손가락이 더 깊게 파고들었다.유리벽 너머로 직원들이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몇몇은 이쪽을 봤다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고, 복합기 앞에 선 직원은 출력물을 챙기는 척 고개를 숙였다.현우가 다른 손을 내밀었다.“휴대폰 내놔.”나는 휴대전화를 등 뒤로 숨겼다.“왜 이러는데!”“진이건한테 다시 보내. 네가 착각했다고, 전부 네 실수였다고.”“못 해요.”순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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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먼저 표정을 바꾼 건 백현우였다.“진 대표님, 벌써 오셨습니까?”불과 몇 분 전 대표실에서 나를 몰아붙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였다.현우가 먼저 다가가자 도원 직원들도 차례로 인사를 건넸고, 대리는 급히 회의실 문을 열었다. 복합기에서는 미처 준비하지 못한 자료가 연달아 출력되고 있었다.이건은 현우에게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나를 바라봤다.그의 시선이 어디에 머무는지 알아차린 나는 붉게 부어오른 손목을 감추듯 소매를 끌어내렸다.“자료 준비하겠습니다.”곧장 회의실로 들어가 노트북을 연결했다. 도원 측 실무진들이 맞은편 자리를 채우고 백림 직원들이 자료를 나눠놓는 사이, 이건도 안으로 들어왔다.내 옆을 지나던 그의 걸음이 잠깐 느려졌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화면을 띄우려고 마우스를 잡는 순간 손목이 욱신거렸다. 소매를 살짝 걷어보니 붉은 자국 위로 멍이 올라오기 시작했다.급히 소매를 내리는데 바로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웠다.이건이었다.“회의, 진행할 수 있겠습니까?”“네. 문제없습니다.”그는 내 손목을 한번 바라봤지만 더 묻지 않고 자기 자리로 향했다.회의가 시작되자 나는 수정된 공급가와 예상 마진율을 설명했다. 도원 측에서 몇 차례 질문이 나왔고, 준비한 근거 자료를 넘기며 답했다.그런데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소매가 조금씩 올라갔고, 맞은편에 앉은 이건의 시선이 손목에 머무는 게 느껴졌다.현우도 그걸 눈치챈 모양이었다.“진 대표님.”서류를 내려놓은 현우가 웃으며 물었다.“한 과장 브리핑에 추가로 확인하실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계속 그쪽을 보고 계시는 것 같아서요.”이건이 천천히 시선을 거뒀다.“없습니다.”짧은 대답이었다.현우는 다시 서류를 들었지만 종이 모서리를 누른 손가락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회의가 끝나자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나도 노트북과 자료를 챙기다가 순간 손목에 힘이 풀렸다. 몇 장의 서류가 미끄러지자 이건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냈다.“제가 들겠습니다.”“괜찮습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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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낮게 떨어진 한마디에 현우의 얼굴이 굳었다.하지만 내 손목을 움켜쥔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진 대표님.”현우는 턱에 힘을 준 채 입꼬리만 끌어올렸다.“이건 어디까지나 저희 부부 일입니다.”부부라는 말에 속이 서늘해졌다.불과 몇 분 전 대표실 문을 잠그고 나를 책상에 밀어붙여 팔을 비틀던 사람이 이제 와서 그 단어를 방패처럼 꺼내 들고 있었다.이건은 현우가 아니라 나를 바라봤다.“한지아 과장.”“……네.”“저 손, 털어내고 싶습니까.”현우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진 대표, 지금 남의 아내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본인에게 묻고 있습니다.”이건은 현우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백 대표에게 묻지 않았습니다.”엘리베이터 앞을 지나던 직원들이 이쪽을 힐끗 봤다가 발걸음을 재촉했다. 멀리 복합기 앞에 서 있던 대리도 출력물을 챙기는 척 고개만 돌려 이쪽을 살폈다.현우의 손가락이 부어오른 내 손목을 더 세게 조였다.“한지아.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당장 들어가.”들어가.가만히 있어.내 말 들어.결혼하고 수없이 들었던 말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손목은 아팠고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놔요.”현우의 눈썹이 꿈틀했다.나는 손목을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려다봤다.“내 손목 놓으라고요.”현우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내 입에서 거부하는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얼굴이었다.조금 전 대표실 문이 닫히던 소리만 떠올려도 손끝이 떨렸다. 그래도 이번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아파요. 놓으세요.”현우의 손가락이 움찔하더니 마침내 힘이 풀렸다.나는 곧바로 한 걸음 물러났다.손목에는 그의 손가락 자국이 붉게 남아 있었다.이건의 시선이 그 자국을 천천히 훑었다.턱선이 굳었고, 몸 옆으로 내려뜨린 손은 어느새 주먹을 쥐고 있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선명하게 도드라졌다.그런데도 그는 내 손목에 손을 대지 않았다.대신 내 앞쪽으로 반걸음 옮겨 섰다.현우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조금 전까지 억지로 걸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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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운전석에는 이건의 수행기사가 앉아 있었고, 나는 이건과 함께 뒷좌석에 자리했다.손목은 시간이 지날수록 검붉게 부어올랐다. 가슴께에 조심스럽게 붙이고 있는데도 차가 조금만 흔들리면 뼈마디를 파고드는 통증이 밀려왔다.옆에 앉은 이건의 시선이 다시 내 손목에 머물렀다.그는 이유를 캐묻는 대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최 실장.”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곧바로 돌아봤다.“네, 대표님.”“병원에 연락해요. 도착하는 대로 바로 진료받을 수 있게.”“알겠습니다.”짧게 지시한 이건이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많이 아픕니까?”“견딜 만해요.”“그 말은 믿기 어렵군요.”그의 시선이 퉁퉁 부은 손목에 잠시 머물렀다.“이 정도가 될 때까지 참은 사람이 하는 말이라서.”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고 있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화면에 뜬 이름은 백현우였다.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날 선 목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어디야.“병원이요.”― 진이건이랑?“네.”현우가 비틀린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손목 좀 잡힌 걸로 병원까지 기어가? 그 새끼 아주 기회 잡았다고 신났네.내 손목을 이렇게 만들어놓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엑스레이 찍어봐야 한대요.”― 한지아.현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의사가 왜 다쳤냐고 물으면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부끼리 좀 다투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 그걸 밖에 떠들어서 너한테 뭐가 좋아? 내가 무슨 마누라 패는 미친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만들 생각이야?손목을 비틀던 현우의 얼굴이 떠올랐다.놓으라고 했고, 아프다고도 몇 번이나 말했다. 그런데도 그는 내 말을 들을수록 오히려 손에 힘을 더 줬다.― 듣고 있어?“네.”― 적당히 둘러대. 넘어지면서 손을 짚었다든가. 그리고 진이건한테도 입조심해. 우리 집안일에 그 새끼가—“백 대표.”바로 옆에서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전화기 너머가 뚝 조용해졌다.잠시 후 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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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병원 주차장에 차가 멈춰 서자 최 실장이 빠르게 내려 뒷문을 열었다.차에서 내리려던 나를 바라보던 이건이 손을 내밀었다.“잡아요.”“손목만 다친 거예요.”“압니다.”그런데도 손을 거두지 않았다.잠시 망설이다 다치지 않은 손을 그의 손바닥 위에 올리자, 이건은 손목에 무리가 갈까 조심스럽게 나를 받쳐 일으켜주었다. 단단한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병원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연락을 받은 직원이 우리를 곧장 진료실로 안내했다.엑스레이 촬영을 마치고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건은 내 옆을 떠나지 않았다.“회사로 돌아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바쁘실 텐데.”“가야죠.”“그런데 왜…….”“한지아 씨 진료 끝나는 거 보고 갈 겁니다.”당연하다는 듯한 대답에 가슴 한쪽이 묘하게 따뜻해졌다.자기 시간을 빼앗는다며 짜증부터 내던 현우와는 달랐다. 이건은 내가 아픈 걸 귀찮아하지 않았다.잠시 후 의사는 엑스레이 영상을 확인한 뒤 부어오른 손목을 조심스럽게 움직여봤다. 조금만 각도가 틀어져도 통증이 밀려와 나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골절은 아닙니다. 다만 인대 손상이 의심되네요. 당분간 보호대를 착용하시고 손목을 최대한 쓰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차트에 내용을 입력하던 의사가 물었다.“그런데 어쩌다 다치셨습니까?”순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넘어졌어요.예전 같았으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거짓말했을 것이다.현우가 화를 내며 물건을 던졌을 때도, 내 팔을 거칠게 잡아 멍이 들었을 때도 늘 비슷한 핑계를 만들었다. 남편에게 이런 취급을 받으며 산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게 되는 게 창피했으니까.하지만 오늘은 달랐다.차 안에서 이건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태도를 바꾸던 현우가 떠올랐다. 나에게는 입조심하라며 윽박지르던 남자가 이건 앞에서는 변명하기 바빴다.그런 인간의 체면을 내가 왜 지켜줘야 하지?나는 고개를 들었다.“남편이 그랬어요.”키보드를 두드리던 의사의 손이 멈췄다.“남편분이요?”“네. 제가 아프다고, 놓으라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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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회사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세 시를 넘어서고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전략기획팀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 오른손목으로 향했다. 흰색 보호대가 셔츠 소매 아래까지 감겨 있어 모른 척하기도 어려웠다.“과장님, 손목은 왜 그러세요?”가장 먼저 다가온 대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작업하다 좀 삐었어요.”가방을 내려놓으려는데 몇 자리 건너편에 있던 민서라가 일어났다.“과장님.”서라의 시선이 내 손목에 닿았다가 곧바로 얼굴로 올라왔다.“많이 다치셨어요? 아까 백 대표님이랑 따로 이야기하시다가…… 그렇게 되신 거예요?”소란스럽던 사무실이 순간 조용해졌다.걱정하는 척하면서 직원들이 가장 궁금해할 말을 정확히 골라 던진 셈이었다.나는 의자에 앉다 말고 서라를 바라봤다.“민서라 씨.”“네?”“내가 대표님이랑 따로 있었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서라의 표정이 굳었다.“그게…… 아까 두 분이 대표실 근처에서 같이 나가시는 걸 봐서…….”“나는 오늘 대표님하고 같이 나간 적 없는데.”주변에서 작은 기척이 일었고 서라의 입술이 굳었다.“……제가 잘못 봤나 봐요.”더는 추궁하지 않았다.확인해야 할 게 따로 있었으니까.자리에 앉아 컴퓨터를 켜자 현우가 서명을 강요했던 경위서 파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도원 투자자료 사전 검토 과정에서 담당자인 한지아 과장의 확인 소홀로 오류가 발생했으며…….]끝까지 읽을 필요도 없었다.곧바로 창을 닫고 새 문서를 열었다.현우는 내가 화를 내고 겁을 주면 언제나 그랬듯 입을 다문 채 자기 대신 책임을 떠안을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하지만 틀렸다.[도원 투자자료 무단 변경 및 허위 경위서 작성 지시 관련 경위 보고]이번에는 내가 직접 확인한 사실만 적었다.원본 파일과 도원 측에 전달된 수정 파일을 나란히 띄워 수치가 달라진 항목을 표시한 뒤 공용 PC 접속기록과 파일 수정 이력을 확인했다.오전 6시 51분 : BHW_CEO 계정 접속오전 7시 42분 : 도원_투자자료_최종.xlsx 수정백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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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메일을 보낸 지 채 십 분도 지나지 않아 팀장의 전화가 울렸다.통화를 받는 동안 팀장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전화를 끊자마자 내가 보낸 보고서를 출력했다. 곧이어 재무담당 상무까지 전략기획팀으로 내려오면서 사무실 분위기가 빠르게 가라앉았다.“한지아 과장, 보고서에 첨부한 접속기록과 수정 이력은 원본 확인이 가능합니까?”“네. 사내 시스템에 그대로 남아 있고, 감사 담당자에게 원본 로그 보존도 요청해뒀습니다.”상무는 보고서를 넘겨보다 민서라의 이름에서 손을 멈췄다.“민서라 씨도 잠깐 확인할 게 있습니다.”서라가 불안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 대표실 문이 벌컥 열렸다.“한지아!”현우가 빠른 걸음으로 내 자리까지 다가왔다.“너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마주 봤다.회사에서는 누구도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을 모른다. 집에서라면 내 팔부터 잡아챘을 사람이 직원들이 지켜보는 앞에서는 함부로 손을 뻗지 못했다.“대표님, 직원들 앞입니다. 말씀 조심하세요.”“내가 경위서를 어떻게 쓰라고 했지?”“제가 잘못한 것으로 작성하라고 하셨죠.”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현우가 이를 악물었다.“말 똑바로 해.”“틀린 말 했습니까? 제가 자료를 잘못 검토한 것으로 작성해서 서명하라고 하셨잖아요.”“그건 회사 손실을 막으려고 정리하자는 뜻이었어.”“그런데 확인해보니 제가 책임질 일이 아니더라고요.”나는 팀장이 들고 있는 보고서를 가리켰다.“오전 6시 51분, 대표님 계정으로 공용 PC에 접속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7시 42분에는 제가 최종 확인했던 투자자료가 수정됐고요.”상무가 현우를 바라보자 그가 곧바로 받아쳤다.“내 계정을 누가 사용했는지 어떻게 알아?”“그래서 조사해달라고 보고한 겁니다. 누가 대표님 계정을 사용했고, 자료가 왜 바뀌었는지 확인해달라고 했을 뿐입니다.”현우가 입을 다물자 이번에는 서라를 바라봤다.“그리고 7시 48분에는 민서라 씨 계정으로 같은 PC에 접속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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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아버지 병원에서 전화가 온 건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이었다.“보호자님, 검사 결과가 예상보다 좋지 않아 다음 치료를 조금 당겨야 할 것 같습니다.”나는 황급히 빈 회의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얼마나 빨리요?”“이번 주 안으로 입원하셔야 합니다. 추가 검사와 비급여 치료까지 병행하면 비용도 안내해 드린 금액보다 많이 늘어날 수 있습니다.”간호사가 조심스럽게 제시한 액수를 듣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하지만 망설일 여유는 없었다.“진행해 주세요. 돈은 어떻게든 준비하겠습니다.”전화를 끊자마자 은행 앱을 켰다. 화면에 뜬 숫자를 확인하는 순간 손가락이 굳었다.1,870,000원.며칠 전 월급이 들어왔지만, 내 계좌에는 아버지 검사비조차 치르기 빠듯한 돈만 남아 있었다.그 아래에는 이유가 선명했다.최명숙 4,000,000원.이번 달도 어김없이 빠져나간 시어머니 몫이었다.결혼 초기에는 삼백만 원이었다. 승진으로 연봉이 오르자 시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금액을 올렸다.‘현우가 집이며 차며 생활비까지 책임지는데, 네 월급까지 네가 들고 있으면 그게 어디 정상적인 집안이니?’처음에는 모아두는 돈이라고 했다. 나중에 아파트 평수를 넓힐 때 보태주겠다고 했고, 현우 사업에 급전이 필요하면 잠시 쓰고 다시 채워놓겠다는 말도 덧붙였다.나는 그 말을 믿었다.월급날마다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돈을 보냈다. 내가 번 돈인데도 비싼 화장품 하나를 집어 들면 죄짓는 기분에 다시 내려놓곤 했다.친정엄마 환갑 때 현금 삼십만 원을 드렸다가 시어머니에게 들켜 난리가 난 적도 있었다.‘친정에 그렇게 퍼다 나를 거면 시집은 왜 왔니? 사위 돈 빼돌려 친정 살림 보태니?’내가 번 돈이었다.그런데도 그날 나는 엄마에게 보낸 삼십만 원까지 해명해야 했다.그리고 이제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몇 년을 쉬지 않고 일했건만, 정작 내 아버지 치료비조차 내 손으로 낼 수 없는 처지였다.휴대전화가 울렸다.시어머니.나는 화면에 뜬 이름을 바라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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