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남편이 나를 팔았고, 그 남자가 나를 샀다: Chapter 41 - Chapter 50

114 Chapters

41화

간만에 찾아온 휴무일이었다.늦잠이라도 자고 싶었지만 아침 여덟 시도 되기 전에 인터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찍힌 얼굴을 확인하자 한숨이 흘러나왔다.시어머니 최명숙이었다.문을 열자 시어머니는 인사도 받기 전에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아직까지 이러고 자빠졌니?”“오늘 휴무라서요.”“쉬는 날이면 집안일도 같이 쉬어? 하여간 게을러 터져서는.”시어머니는 나를 밀치듯 지나쳐 거실로 들어갔다. 양손에는 백화점 쇼핑백과 과일 상자가 들려 있었다.“현우는?”“아직 자요.”“남편이 피곤할 텐데 마누라가 돼서 아침상도 안 차리고 뭐 한 거냐! 당장 깨워서 밥 차려라. 나도 아침 안 먹고 왔다.”소파에 앉은 시어머니가 유리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훑었다.“청소는 하고 사는 거냐? 먼지 쌓인 꼴 좀 봐라.”회사에서는 수십억 원대 프로젝트를 다루는 과장이었지만, 이 집에서는 밥 늦게 차리고 먼지 하나 제대로 못 닦는 며느리였다.나는 입을 다문 채 주방으로 향했다.“그리고 죽 좀 쑤어라.”걸음이 멈췄다.“……죽이요?”“서라 갖다주게.”시어머니는 과일을 꺼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임신 초기에 잘 먹어야 한단다. 어제 현우한테 들으니까 입덧 때문에 제대로 못 먹는다더구나.”내 남편의 아이를 밴 내연녀의 죽을 나더러 쑤라는 소리였다.“어머니가 민서라 씨를 왜 그렇게 챙기세요?”“왜긴 왜야! 현우 아이를 가졌는데! 태어나면 엄연한 우리 백씨 집안 핏줄이야.”시어머니는 최고급 한우 세트까지 꺼냈다.“이것도 같이 보내라. 임산부는 고기를 먹어야지.”어제 내 아버지 치료비를 두고 친정이 사위 돈을 받아먹는다고 하던 사람이었다.“제 아버지는 이번 주에 입원하셔야 해요.”“그래서?”“치료비가 더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그건 현우하고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제 월급으로 내겠다고 했더니 어머니가 못 하게 하셨잖아요.”시어머니의 인상이 사납게 구겨졌다.“너 또 그 지겨운 소리니?”“제가 번 돈인데 제 아버지 치료비로는 못 쓰면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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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화

보온 용기에 전복죽을 담는 손끝에 뜨거운 김이 스쳤다. 시어머니는 그 모습조차 마땅찮은지 혀를 찼다.“속까지 적당히 식혀. 서라 탈나면 네가 책임질 거니? 배 속의 애가 우리 집 기둥이야.”나는 말없이 죽과 시어머니가 사 온 특상급 한우, 과일을 쇼핑백에 넣었다. 준비를 마치자 시어머니는 기다렸다는 듯 쇼핑백을 내 가슴에 밀어붙였다.“갔다 와.”“제가요?”“그럼 현우를 보내? 임신 초기라 힘든 애한테 여자끼리 가서 수발도 들고 챙겨줘야지.”여자끼리.남편의 내연녀와 본처를 한 울타리에 묶어 부르는 말이었다.소파에 기대 있던 현우가 한술 더 떴다.“간 김에 청소기 돌리고 냉장고도 정리해. 어제 보니까 바닥에 머리카락 굴러다니더라.”기가 막혀 현우를 바라보자 시어머니가 내 팔뚝을 매섭게 집어틀었다.“어디서 남편 말에 표정이 그래! 네가 자식 못 낳아서 집안 복덩이 고생시키는 건 생각 안 해? 군소리 말고 다녀와!”손톱 자국이 팬 팔뚝을 감싸며 쇼핑백을 들었다.“알겠습니다.”민서라가 사는 오피스텔은 차로 이십 분 거리였다.초인종을 누르자 헐렁한 실크 원피스를 입은 서라가 문을 열었다. 나를 확인한 그녀의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과장님?”“어머니가 보내셨어요.”쇼핑백을 내밀자 서라가 안을 들여다봤다.“어머나, 어머님이 또 챙겨주셨구나. 역시 우리 어머님은 나밖에 없어.”“한우까지 보내셨네. 어머님이 우리 장손 먹여야 한다고 자꾸 보내시네요.”서라는 아직 티도 나지 않는 배를 쓰다듬으며 피식 웃었다.“죄송해서 어떡해요. 죽 시중까지 들게 만들어서. 그래도 현우 씨 핏줄이 먹는 거니까 감사히 잘 먹을게요.”그녀는 집 안쪽을 힐끗 돌아봤다.“요즘 속이 안 좋아서 집안일을 하나도 못 했어요. 현우 씨가 사람이라도 불러준다고 했는데 아직이라…….”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뻔했다. 알아서 치우고 가라는 뜻이었다.“아, 현우 씨도 금방 온대요. 딸기 먹고 싶다고 했더니 바로 사 온다고 하더라고요.”시어머니를 모셔다드린다던 남자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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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다음 날 오후, 아버지 병실 문을 열자 뜻밖의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백현우였다.“지아야, 왔어?”나를 돌아보며 문을 열어주는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아버님, 오늘은 좀 어떠세요? 가슴 답답하신 건 괜찮아지셨어요?”현우는 침대 곁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이불깃을 매만졌다. 때마침 들어온 담당 간호사에게 검사 경과와 치료 일정도 꼼꼼히 물었다.“추가 검사는 언제 진행하나요?”“내일 오전으로 잡혀 있습니다.”“비용은 상관없으니 필요한 검사는 전부 진행해 주세요.”엄마가 감격한 얼굴로 현우의 손을 꼭 쥐었다.“현우야, 참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이 큰 비용을 어떻게 감당했을지…….”“어머니, 제가 사위인데 당연히 아버님을 모셔야죠.”나는 병실 문가에 서서 그 모습을 바라봤다.어제는 내연녀의 집에 가져갈 전복죽을 챙기게 하더니, 오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내 부모 앞에서 다정한 사위 노릇을 하고 있었다.엄마가 나를 돌아봤다.“지아야, 너 현우한테 정말 잘해야 한다. 요즘 세상에 장인 병원비까지 이렇게 대주는 사위가 어디 있니.”현우가 다가와 내 어깨를 감쌌다.“지아도 고생이 많은데요, 뭘. 제가 더 잘해야죠.”잠시 후 현우는 원무과에서 입원 보증금과 추가 검사비까지 결제했다.병원을 나설 때까지 그는 헌신적인 사위였다.지하주차장에서 차 문이 닫히기 전까지는.“진 대표한테 연락했어?”방금 전까지 다정했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나는 안전벨트를 매며 대답했다.“했어요.”“뭐래?”“아직 제대로 얘기 못 했어요.”현우가 시동을 걸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한지아, 지금 한가하게 굴 때야?”“무슨 말이에요?”“백억 투자 말이야. 진 대표가 당신 말은 듣잖아.”나는 가방 안으로 손을 넣어 휴대전화의 녹음 버튼을 누른 뒤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그래서요?”“다음 미팅도 당신이 맡아. 필요한 자료 다 준비하고, 진 대표가 요구하는 것도 최대한 맞춰줘.”“대표님 상대하는 게 제 일이니까요?”“그것도 있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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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화

원무과에서 다시 연락이 온 건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어서였다.나는 깊이 잠든 아버지의 이불을 가슴께까지 끌어올려 드리고 조용히 병실을 빠져나왔다.복도로 나오자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모습도 엉망이었다. 아침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어 입술은 말라 있었고, 대충 묶은 머리카락도 흐트러져 있었다.1층 원무과 로비는 병실과 달리 사람들로 붐볐다. 번호표를 뽑아 빈 의자에 앉은 뒤 휴대전화를 켰다.진이건에게서 온 답장은 없었다.[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반차 냈습니다.]내가 보낸 한 줄만 화면에 남아 있었다.괜히 허전해 휴대전화를 내려놓는데 호출 번호에 불이 들어왔다.“한지아 님.”창구로 다가가자 직원이 서류 몇 장을 건넸다.“내일 추가 정밀 검사 들어가시면 오늘 결제하신 금액 외에 비용이 더 발생할 수 있습니다.”“……얼마나 더 나올까요?”직원이 모니터를 확인한 뒤 금액을 알려주었다.생각했던 것보다 컸다. 나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검사 결과 확인한 뒤에 결제해도 괜찮을까요?”“네. 내일 정확한 내역 확인하시고 처리하셔도 됩니다.”서류를 받아 돌아서던 순간, 지나가던 누군가와 부딪힐 뻔했다.“죄송…….”고개를 들자 말이 멎었다.진이건이었다.이곳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사람이 정장 차림으로 내 앞에 서 있었다.“대표님……?”이건도 걸음을 멈췄다.“한지아 씨.”“여기는…… 웬일이세요?”그가 잠시 나를 바라봤다.“볼일이 있어서 왔습니다.”“병원에요?”“병원에 병원 볼일 말고 다른 게 있겠습니까.”태연한 얼굴이었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다운 대답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그러네요.”이건의 시선이 내 얼굴에 오래 머물렀다.괜히 신경 쓰여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왜…… 그렇게 보세요?”“얼굴이 엉망이라서요.”웃음이 금세 사라졌다.“사람 얼굴 보고 참 직설적이시네요.”“밥 안 먹었죠.”묻는다기보다 이미 알고 있는 말투였다.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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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창가 소파에는 엄마가 옷도 제대로 갈아입지 못한 채 잠들어 있었다.아버지 역시 얕은 숨을 내쉬며 눈을 감고 계셨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 곁으로 다가가 보조 의자를 끌어당겨 앉았다.조용히 앉아 있으니 자꾸만 조금 전 복도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우연히 만난 걸로 합시다.’진이건의 낮고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었다.정말 우연이었을까. 아니면 나를 보려고 일부러 찾아온 걸까.그 생각을 하자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 머리카락을 스쳤던 그의 손끝까지 떠올랐다. 괜히 심장이 빨리 뛰어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다 손을 내렸다.“……뭐 하는 거야, 진짜.”나지막이 혼잣말을 하며 휴대전화를 꺼냈다.가장 먼저 뱅킹 앱을 열어 통장 잔액부터 확인했다. 이번 달부터 시어머니 계좌로 다달이 빠져나가던 사백만 원은 더 이상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버지의 정밀 검사와 치료가 얼마나 길어질지는 알 수 없었다.예금과 적금을 하나씩 더해보고, 앞으로 들어올 월급과 퇴직금까지 꼼꼼히 계산했다.당분간은 내 힘으로 버틸 수 있었다.문제는 그다음이었다.지잉―.화면 위로 메시지 알림이 떴다.백현우였다.[저녁 늦어. 먼저 자.]짧고 건조한 문장을 바라보니 헛웃음이 나왔다.아내의 아버지가 입원한 날이었다. 병원에서는 세상에 둘도 없는 헌신적인 사위처럼 굴더니,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자기 할 일은 끝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나는 답장하지 않은 채 창을 닫았다.대신 조금 전 원무과에서 받아온 정산 서류를 다시 펼쳤다.검사비, 입원비, 예상 치료비.그리고 오늘 현우가 결제하고 간 금액.한참 숫자를 들여다보다 휴대전화 메모장을 열었다.[백현우 병원비 지급 내역]오늘 날짜와 함께 그가 낸 금액을 정확히 적었다.현우가 아버지에게 쓴 돈은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내 힘으로 전부 돌려줄 생각이었다.그래야 다시는 그 돈으로 내 목을 조르거나 나를 다른 남자에게 파는 거래 도구로 삼지 못할 테니까.그때 메시지 알림이 하나 더 울렸다.발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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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화

내가 단 하루 자리를 비운 사이, 회사는 보기 좋게 흔들리고 있었다.어젯밤 병원 앞에서 진이건과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이런 아침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차 옆에 기대선 채 내 손에 작은 죽 봉투를 쥐여주던 남자.‘부담 가지라는 뜻으로 산 거 아닙니다. 올라가서 먹어요.’손끝이 스쳤을 때 전해지던 온기가 아직도 생생했다.무엇보다 자꾸 생각나는 건 마지막 말이었다.‘다음에는 병원 말고 다른 데서 봅시다. 밥도 같이 먹고.’다음.그 짧은 말 하나가 밤새 머릿속을 맴돌았다.그런데 다음 날 아침 아홉 시, 회사에 발을 들이는 순간 그 여운은 흔적도 없이 날아갔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전화벨 소리가 사방에서 터졌다. 서류를 든 물류팀 직원들이 복도를 뛰다시피 오갔고, 전략기획팀도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었다.“그 수량으로는 안 된다니까요! 내일 오전부터 행사예요!”가방을 내려놓을 틈도 없었다.“무슨 일이에요?”나를 발견한 직원이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과장님, 큰일 났어요. 내일 기획전 물량이 모자라요. 어제 변경된 발주 수량이 반영이 안 됐대요.”직원이 내민 출력물을 받아 들었다.이미 광고까지 대대적으로 나간 행사였다.그런데 핵심 상품 세 품목의 수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중 하나는 행사 첫날 전면에 깔릴 주력 상품이었다.“이게 최종 수량이에요?”“네. 아침에 물류센터에서 다시 확인했어요.”노트북부터 켰다.하루 동안 쌓인 메일이 수십 통이었다. 병원에서 급한 것만 확인하는 사이 거래처에서 수량 변경 요청이 들어왔고, 그게 최종 발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누락돼 있었다.“변경안 보낸 다음 최종 확인은 누가 했어요?”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직원들끼리 시선만 주고받았다.그때 회의실 문이 벌컥 열렸다.현우가 물류팀장과 함께 걸어 나왔다.“오늘 안으로 무조건 물량 맞춰. 돈 더 주고 외부에서 사오면 될 거 아니야.”물류팀장이 난감한 표정으로 뒤따랐다.“대표님, 지금 급하게 매입하면 단가가 너무 올라갑니다. 필요한 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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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화

“그런데 과장님, 이걸 언제 다 가져와요?”직원의 한마디에 잠깐 들떴던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다.물건은 찾았다. 문제는 시간이었다.각 매장의 재고를 물류센터로 회수한 뒤 다시 행사장으로 보내려면 아무리 서둘러도 이틀은 걸렸다.나는 지역별 재고표를 빠르게 훑었다.“센터를 안 거치면 돼요.”“네?”“매장에서 행사장으로 바로 보내는 거예요. 가까운 점포끼리 묶어서 차량을 잡고, 매장에 남길 물량만 빼두면 돼요. 이동 가능한 수량은 이미 계산해뒀고요.”물류팀장이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이렇게 하면 가능하겠습니다.”그때 현우가 끼어들었다.“괜히 복잡하게 만들지 말고 외부에서 사오라니까.”“우리 매장에 있는 물건을 놔두고 비싼 돈 주고 다시 살 이유는 없어요.”“그러다 문제 생기면 네가 책임질 거야?”현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익숙한 말투였다. 화를 참을 때면 늘 저런 목소리를 냈다.손끝이 굳었지만 피하지 않았다.“네. 제가 끝까지 확인할게요.”현우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사무실 입구가 술렁였다.고개를 돌리자 진이건이 들어오고 있었다.어젯밤 병원 앞에서 헤어진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를 보는 순간 괜히 심장이 먼저 뛰었다.“현장 운영 점검이 있어서 왔습니다.”현우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꿨다.“진 대표님, 오셨습니까. 물류 쪽에 작은 문제가 생겼는데 곧 정리될 겁니다.”이건의 시선이 내 모니터로 향했다.“한 과장이 정리하고 있는 겁니까?”“직원들이 다 같이 처리 중입니다.”“그런 것치고는 다들 한 과장 지시를 기다리는 것 같은데요.”현우의 입가가 굳었다.이건은 재고표를 훑어본 뒤 나를 바라봤다.“할 수 있겠습니까?”조금 전 현우가 했던 말과는 묘하게 달랐다.한 사람은 문제가 생기면 누가 책임질지부터 물었고, 다른 사람은 내가 해낼 수 있는지를 물었다.“할 수 있습니다.”이건이 짧게 웃었다.“그럼 해요.”나는 곧바로 직원들에게 매장별 수량을 다시 확인하고 직송 차량을 잡아달라고 지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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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화

밤이 깊어질수록 사무실은 더 분주해졌다.수원에서 출발한 차량이 행사장에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고, 뒤이어 동탄과 분당에서도 출고 확인이 들어왔다. 대전으로 가던 차량 한 대가 갑자기 빠졌지만, 세종 매장 물량까지 묶어 보내면서 빈자리를 메웠다.“부산 출발했습니다!”직원의 외침에 여기저기서 안도의 한숨이 터졌다.나는 모니터에 뜬 출고표를 다시 훑었다.“아직 끝난 거 아니에요. 행사장에 도착하면 바로 수량 확인하고, 매장별 최소 재고도 다시 체크해주세요. 내일 아침 영업에 문제 생기면 안 돼요.”“네, 과장님.”어느 순간부터 문제가 생길 때마다 직원들은 나부터 찾고 있었다.저녁 여덟 시가 가까워져서야 마지막 차량이 출발했다.그제야 의자에 등을 기대자 책상 한쪽에 놓인 커피가 눈에 들어왔다.진이건이 준 커피였다.이미 차갑게 식어 있었다.‘끝나고 나랑 밥 먹을 시간은 남겨두고.’그 말이 떠오르자 기다렸다는 듯 휴대폰이 울렸다.[끝났습니까?]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거의요.]답장을 보내자마자 다시 메시지가 왔다.[내려오면 연락해요.]나는 잠시 화면을 내려다봤다.투자 때문도 아니고, 회사 일 때문도 아니었다.오늘은 그냥 가고 싶었다.컴퓨터를 끄고 가방을 챙기는데 뒤에서 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어디 가?”“밥 먹으러요.”“진이건이랑?”돌아보니 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네.”그의 얼굴이 굳었다.“내가 아까 사람들 앞이라 참은 거 몰라?”목소리가 낮아지는 순간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집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목소리였다.저렇게 목소리를 낮춘 다음에는 손목을 잡힐지, 물건이 날아올지 몰랐다. 어느 순간부터 저 목소리만 들으면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현우가 한 걸음 다가오자 나도 모르게 발이 뒤로 밀렸다.그의 시선이 내 발끝에 머물렀다가 천천히 올라왔다.그제야 깨달았다.현우도 알고 있었다.내가 아직 자신을 무서워한다는 걸.“투자 때문에 만나라고 했지, 퇴근하고 둘이 밥까지 먹으라고 한 적 없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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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화

회의는 예상보다 길어졌다.“그러니까 이 수량이 왜 안 맞는 겁니까?”서류를 탁 내려놓자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거래처 담당자가 급히 노트북 화면을 넘기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전산 반영 과정에서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약간?”다시 서류를 집어 들었다.“내일 오전 납품 물량이 이 숫자로 잡혀 있는데요.”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맞은편 직원의 얼굴은 이미 흙빛으로 굳어 있었다.오후 네 시에 시작한 회의가 일곱 시를 넘겼다. 전산에 잡힌 발주 수량과 실제 출고 예정 수량이 터무니없이 어긋나 있었다. 이대로라면 내일 오전 대형 납품 건에 차질이 생길 상황이었다.문제는 눈앞에 있는데 책임지는 사람은 없었다.“물류팀에서 마지막으로 확인했어야죠.”“저희가 받은 자료 자체가 달랐습니다.”“그 자료는 영업 쪽에서 수정한 거 아닙니까?”한심한 책임 공방을 들으며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회의실 맨 끝에 앉은 여자에게 시선이 멈췄다.처음 보는 얼굴이었다.긴 머리를 낮게 묶은 여자는 화장기 옅은 얼굴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흰 블라우스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채 빠르게 펜을 움직이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과 달리 변명에도 남 탓에도 끼어들지 않았다.특별히 화려하게 꾸민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눈길이 갔다.고개를 숙일 때마다 머리카락 몇 가닥이 뺨 옆으로 흘러내렸고, 그때마다 귀찮다는 듯 손등으로 밀어냈다.별것 아닌 손짓인데 묘하게 눈에 남았다.잠시 후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시선이 마주쳤다.크고 맑은 눈이었다.당황하거나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나를 한 번 바라본 뒤 아무렇지 않게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나도 시선을 거뒀다.그런데 방금 마주친 눈이 이상하게 머릿속에 남았다.한참 동안 책임을 미루던 사람들이 하나둘 회의실을 빠져나갔다.손목시계를 확인했다.“내일 아침까지 정리해서 보내십시오.”회의실을 나오자 비서가 뒤따라왔다.“대표님, 차량 준비되어 있습니다.”“가죠.”복도를 걷던 발걸음이 문득 멈췄다.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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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화

사무실 구석에 켜진 모니터 불빛이 여자의 옆얼굴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내 기척을 느꼈는지 여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잠시 후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당황하는 기색도, 대표인 내 눈치를 살피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냐는 듯 바라보는 눈이 맑고 차분했다.돌아서려던 발이 그대로 굳었다.“혼자는 아니에요. 물류팀 직원들도 아직 남아 있습니다.”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본인 담당 업무가 아니라고 들었습니다.”“네. 저는 전략기획팀이에요.”“그런데 왜 아직 여기 있죠?”여자가 조금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내일 아침에 납품이 나가야 하니까요.”“그건 물류팀 일 아닙니까?”“원래는 그렇죠. 그런데 지금 물류팀 일이라고 두고 가면 내일 아침에는 회사 일이 되잖아요.”손목시계를 확인하려던 손이 허공에서 멎었다.몇 시간째 회의실에서 들은 건 하나같이 자기 책임이 아니라는 말뿐이었다. 서로 책임을 미루느라 목소리만 높이던 사람들과 달리, 정작 담당도 아닌 여자는 회사 일이라는 이유 하나로 밤늦게까지 남아 있었다.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향했다.여자는 어느새 의자에 앉아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리고 있었다.“죄송합니다. 이것만 마저 확인해야 해서요.”말은 정중했지만 뜻은 분명했다.이제 그만 가달라는 거였다.대표가 눈앞에 서 있는데도 자기 공을 설명할 생각도, 조금이라도 더 말을 붙일 생각도 없어 보였다. 내가 아직 자리를 뜨지도 않았는데 시선은 벌써 모니터로 돌아가 있었다.헛웃음이 나왔다.“아까 오류 난 파일 찾아낸 것도 본인입니까?”여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네.”“어떻게 찾았습니까?”“수정 시간이 안 맞아서요. 누가 숫자를 잘못 입력했다면 같은 파일 안에 수정 기록이 남아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파일이 따로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여자가 모니터를 내 쪽으로 돌리자 자연스럽게 책상 가까이 다가섰다.“여기요. 이 파일이 먼저 넘어갔고, 이쪽이 나중에 수정된 최종본이에요.”화면에는 두 파일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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