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내 남편이 나를 팔았고, 그 남자가 나를 샀다: Chapter 51 - Chapter 60

114 Chapters

51화

“그래서 먹었다고 한 겁니까?”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되물었다.“대표님은 부모님한테 그런 거짓말 안 하세요?”뜻밖의 질문에 이번에는 내가 말문이 막혔다.잠시 생각해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안 하는 것 같군요.”“그럼 좋은 아들이신가 봐요.”눈썹이 슬쩍 올라갔다.나를 두고 좋은 아들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지만 여자는 내 반응에는 별 관심도 없는지 삼각김밥 포장을 뜯었다.“이제 먹습니다.”마치 이제 됐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또 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입술 안쪽을 한번 눌렀다.“알겠습니다. 그럼 계속하세요.”이번에는 순순히 돌아섰다.사무실을 나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는데, 문이 닫히기 직전 고개가 사무실 쪽으로 돌아갔다.여자는 벌써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다시 일에 빠져 있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 옆에 있던 비서가 슬쩍 나를 바라봤다.“아시는 직원이십니까?”“아니. 오늘 처음 봤어.”“그런데 꽤 오래 계시길래요.”손목시계를 확인했다.정말 오래 있었다.굳이 돌아갈 필요도 없었고 왜 남아 있는지 물어볼 이유도 없었다. 삼각김밥을 먹든 말든 내가 신경 쓸 일은 더더욱 아니었다.그런데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에도 방금 전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물류팀 일이라고 두고 가면 내일은 회사 일이 된다는 말.주머니에 손을 넣고 벽에 등을 기댔다.대체 왜 저렇게까지 하는 거지.다음 날 오전 아홉 시가 조금 넘어 최종 납품 완료 보고서가 올라왔다.예정된 납품처에는 수량 이상 없이 모두 출고가 완료됐고, 전날 발생한 오류와 조치 과정도 시간대별로 정리돼 있었다.오후 7시 26분, 이중 파일 확인.오후 8시 03분, 최종 수량 재검증.마지막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멎었다.그 아래에는 조치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물류팀 직원 둘과 영업팀 직원 하나가 전부였다.명단을 한번 훑었다가 처음부터 다시 확인했다.역시 없었다.펜 끝으로 종이를 가볍게 두드리며 비서를 불렀다.“이게 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Read more

52화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다시 물었다.“함께 확인한 건 알겠고,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는데도 회의실이 금세 조용해졌다. 몇 사람의 시선이 오간 끝에 물류팀장이 대신 입을 열었다.“전략기획팀 한지아 과장이 찾았습니다.”그 이름이 나오자 책상을 두드리던 손가락이 멎었다.“그 직원은 오늘 회의에 없습니까?”“한 과장이요?”전략기획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이번 납품 건 담당자가 아니라서요.”또 같은 말이었다.담당자가 아니라면서 사고가 터졌을 때는 남아 문제를 해결했고, 보고서에는 이름조차 없었다. 정작 일이 끝난 뒤 열린 회의에도 들어오지 않았다.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잠시 팀장을 바라보다가 다시 펜을 집어 들었다.“알겠습니다. 계속하시죠.”회의가 끝난 뒤 복도를 지나는데 열린 사무실 안쪽으로 익숙한 옆얼굴이 보였다.걸음이 느려졌다.한지아였다.어제와 달리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채 옆자리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한 과장님, 어제 진짜 고마웠어요. 한 과장님 아니었으면 우리 다 죽었어.”물류팀 직원이 캔커피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자 지아가 웃으며 도로 밀어냈다.“됐어요. 나중에 우리 팀 야근할 때나 좀 살려줘요.”처음 보는 웃는 얼굴이었다.시선이 오래 머물렀다.“그래도 보고서에 이름은 넣지 그랬어요.”“내 일도 아닌데 뭘 넣어요.”“파일 찾은 건 한 과장님이잖아요.”“찾은 사람이 뭐가 중요해요. 납품 제대로 나갔으면 됐지.”지아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봤다.그 모습을 보고 있자 어젯밤 내가 던졌던 질문이 떠올랐다.왜 혼자 남아 있습니까.그 여자에게는 설명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다. 문제가 있었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으니 남았을 뿐이었다.“대표님?”앞서 가던 비서가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그제야 내가 완전히 걸음을 멈추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갑시다.”다시 걸음을 옮겼다.몇 걸음쯤 갔을 때 뒤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3
Read more

53화

현장 점검 날, 한지아는 나타나지 않았다.명단을 확인했을 때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런데도 백림유통 물류센터에 들어선 순간, 이건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사람들 사이를 훑었다.전략기획팀에서는 김 대리와 박 선임만 나와 있었다.한지아는 없었다.그제야 이건은 자신이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고작 며칠 사이 몇 번 마주친 직원이었다.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굳이 찾을 이유가 없었다.이건은 별 의미 없는 생각이라는 듯 시선을 거뒀다.“대표님, 이쪽입니다.”백림유통 전략기획팀장이 앞장섰고, 이건은 말없이 그 뒤를 따라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지난번 납품 오류 이후 백림유통은 수정 파일 관리 절차를 손봤다. 오늘은 바뀐 방식이 실제 현장에서도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자리였다.담당자들은 준비해 온 자료를 넘기며 달라진 절차를 차례로 설명했다. 설명만 들으면 특별한 문제는 없어 보였다.오히려 너무 매끄러웠다.이건은 이런 보고를 수도 없이 받아봤다. 사고가 터진 뒤 만들어지는 대책은 언제나 완벽했다. 서류만 보면 같은 문제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하지만 결국 문제는 사람이었다.절차가 아무리 잘 갖춰져 있어도 지키지 않으면 소용없었고, 사고가 생겼을 때 누가 판단하고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졌다.그 예상은 회의실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맞아떨어졌다.테이블 위에 놓인 자료를 넘기던 물류팀장의 손이 한 페이지에서 멈췄다.“이거 지난번 기준 아닙니까?”전략기획팀장이 서류를 끌어당겼다.“아닙니다. 최종 수정본입니다.”“그런데 안전재고 수량은 왜 그대로예요?”맞은편에 앉은 실무자들의 표정이 하나둘 굳었다.이건은 문제의 자료를 끌어와 직접 확인했다. 지난번 오류가 발생했던 세 품목 가운데 하나의 안전재고 수량이 이전 기준 그대로 남아 있었다.“문제 있습니까?”이건의 낮은 목소리에 전략기획팀장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큰 문제는 아닙니다, 대표님. 아직 시스템에 최종 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Read more

54화

회의실 안의 변명이 뚝 끊겼다.잠시 눈치를 보던 물류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일단 기존 기준으로 발주를 넣고 나중에 수정하는 방법이 있습니다.”“그러면 일을 두 번 해야 하지 않습니까?”“그렇긴 합니다만, 지금 시스템을 수정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해서…….”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건의 시선이 먼저 움직였다.한지아였다.노트북 가방과 서류철을 든 채 문 앞에 서 있었다.오늘 참석자 명단에는 없던 사람이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없어도 아무 상관없는 직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얼굴을 보자 시선이 잠시 멈췄다.며칠 전 기억 속에 떠올랐던 얼굴보다 지금 눈앞에 있는 모습이 훨씬 선명했다.이건은 자신도 모르게 길어진 시선을 먼저 거뒀다.“한 과장, 여긴 왜 왔어?”전략기획팀장이 물었다.“박 선임님이 연락하셨어요. 안전재고 수량이 이상하다고 해서요.”지아는 빈자리를 찾는 대신 곧바로 노트북부터 열었다.“어디까지 확인하셨어요?”박 선임이 문제의 페이지를 내밀었다.지아는 화면과 자료를 번갈아 살폈다. 옆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상황을 설명했지만 중간에 끊지 않고 끝까지 들었다. 필요한 내용을 모두 확인한 뒤에야 물류팀장을 바라봤다.“오늘 발주 마감 몇 시예요?”“세 시.”벽시계는 한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그럼 시간 있어요. 전체를 기존 기준으로 넣지 말고 오류 난 세 품목만 먼저 빼주세요. 나머지는 계획대로 발주하고요.”전략기획팀장이 물었다.“시스템 수정이 두 시간 안에 돼?”“전체를 지금 바꾸면 안 되죠. 안전재고 기준값만 잘못 들어간 거니까 세 품목만 임시 승인으로 수정하면 돼요. 오늘 발주가 끝나면 전체 기준은 다시 확인하고요.”“승인은?”“물류본부장님 결재 받아야죠. 수정 근거는 제가 정리할 테니까 승인부터 바로 받아주세요.”그 말이 떨어지자 회의실 분위기가 달라졌다.조금 전까지 서로 책임을 설명하던 사람들이 일제히 노트북과 휴대전화를 집어 들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Read more

55화

팀장의 표정이 굳었다.“왜? 한 과장이 한번 봐주면 되잖아.”지아는 서류를 밀어놓고 차분하게 말했다.“보는 건 괜찮아요. 그런데 제가 최종 확인자로 들어가면 안 된다는 말이에요. 이 자료는 제가 만든 것도 아니고, 앞에서 어떤 기준으로 정리했는지도 모르잖아요.”“수치만 맞는지 보면 되지.”“그 수치가 왜 나왔는지까지 알아야 제대로 확인할 수 있죠.”지아는 서류 첫 장에 적힌 작성 부서를 손끝으로 짚었다.“작성한 팀에서 먼저 확인해 주세요. 그다음 필요한 부분이 있으면 제가 볼게요.”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물러서는 기색은 없었다.팀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봤다.“지난번에는 네가 다 봤잖아.”“그래서 이번에는 더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요.”지아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덧붙였다.“지난번 납품 건도 제가 수정한 파일에 제 이름이 남았어요. 제가 도와드린 부분은 제가 책임지면 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확인하지 않은 자료까지 제 이름으로 넘기면 나중에는 누가 어디까지 확인했는지 알 수 없잖아요.”회의실 문 앞에 서 있던 이건은 그 말을 조용히 들었다.조금 전부터 궁금했던 답을 뜻밖의 순간에 들은 기분이었다.한지아는 남의 일을 무조건 떠안는 사람이 아니었다.필요하면 자기 일이 아니어도 나섰지만, 그렇다고 남의 책임까지 대신 짊어지지는 않았다.도울 일과 책임질 일을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았다.그 차이가 이건에게는 꽤 인상적이었다.책임감이 강한 사람은 많았다. 하지만 책임감과 희생을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생각보다 드물었다.“알았어. 그럼 이것만 먼저 봐줘.”팀장이 결국 서류 한 부를 도로 가져갔다.“네. 확인할 부분 표시해서 보내주세요.”지아는 더 말하지 않았다.괜히 분위기를 풀려고 웃지도 않았고, 자신의 판단이 옳다고 구구절절 설명하지도 않았다. 해야 할 말을 했으면 그걸로 끝이라는 듯 다시 노트북으로 시선을 돌렸다.이건은 그런 지아를 잠시 바라봤다.자기 기준이 분명한 사람이었다.그는 원래 그런 사람과 일하는 걸 좋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4
Read more

56화

다음 날 오후, 도원 본사 회의실에 들어선 이건은 자신도 모르게 가장 먼저 한지아를 찾았다.일부러 찾으려고 한 건 아니었다. 적어도 회의실 문을 열기 전까지는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백림유통 전략기획팀장이 인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그 옆으로 낯익은 얼굴들이 차례로 보였다. 그러다 맨 끝자리에 앉아 있던 지아와 눈이 마주쳤다.지아도 그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안녕하세요, 대표님.”특별할 것 없는 인사였는데도 이건은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눈에 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앉으시죠.”자리에 앉은 뒤에도 시선이 한 번 더 그쪽으로 향했지만, 지아는 이미 노트북을 열어 자료를 확인하고 있었다. 이건은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 자신의 앞에 놓인 서류를 펼쳤다.회의는 예정대로 시작됐다.지난 물류 오류 이후 수정된 발주 기준과 재고 관리 절차를 점검하고, 다음 달부터 적용할 온라인 판매 확대안까지 검토하는 자리였다. 백림유통 전략기획팀장이 준비한 자료를 설명하는 동안 이건은 필요한 부분만 짚어 물었다.“온라인 물량을 이만큼 늘리면 물류센터 처리량은 감당됩니까?”“현재 기준으로는 가능합니다.”“현재 기준 말고 프로모션 기간까지 포함해서 말씀해 주십시오.”팀장이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멈칫하자 자료를 넘기던 지아가 고개를 들었다.“프로모션 기간까지 포함하면 조금 빡빡합니다. 평균 물량으로 계산하면 가능한데, 첫 주에는 주문이 몰릴 가능성이 높아요. 작년 비슷한 행사 때도 첫 사흘 물량이 평소보다 두 배 넘게 들어왔고요.”이건의 시선이 지아에게 향했다.“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물량을 줄이든가, 사람을 늘리든가 둘 중 하나죠.”너무 명쾌한 대답에 회의실이 잠시 조용해졌고, 전략기획팀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지아를 돌아봤다.“한 과장, 대표님이 그걸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니잖아.”“아, 죄송합니다. 너무 당연하게 대답했네요.”뒤늦게 사과하면서도 지아의 얼굴에는 당황한 기색보다 정말 너무 당연한 말을 했나 싶은 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57화

회의가 끝났을 때는 오후 다섯 시가 넘어 있었다.백림유통 직원들이 하나둘 짐을 챙기기 시작했고, 지아도 노트북을 가방에 넣고 있었다.그때 비서가 이건에게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대표님,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백림유통에서 가져온 샘플 일부가 지하 물류장에서 잘못 분류됐답니다. 회수 차량은 이미 출발했고요.”이야기를 들은 지아도 가방을 챙기다 말고 손을 멈췄다.전략기획팀장이 난감한 얼굴로 물었다.“어느 정도입니까?”“박스 네 개라고 합니다.”“그럼 퀵으로 보내죠.”지아가 곧바로 휴대전화를 꺼냈지만 화면을 확인하던 미간이 이내 좁아졌다.“오늘 집회 때문에 이쪽 도로가 막혔대요. 기사님이 들어오려면 한 시간 넘게 걸린다는데요.”팀장이 내일 보내면 안 되겠느냐고 묻자 지아가 고개를 저었다.“내일 오전에 MD 미팅 있잖아요. 그때 샘플 필요한 거 아니에요?”“그렇지.”두 사람의 대화를 듣던 이건이 비서를 돌아봤다.“차는 준비됐습니까?”“네. 지하에 대기 중입니다.”“그럼 가는 길에 백림유통 본사에 들르죠.”지아가 뜻밖이라는 듯 그를 올려다봤다.“대표님이 직접 가시게요?”“제 차는 길이 안 막힙니까?”“막히죠.”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비서가 입술을 물며 웃음을 참았고, 이건도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누르며 물었다.“그럼 다른 방법이 있습니까?”“지하 물류장에서 박스만 받아서 지하철로 가져가는 게 제일 빠를 것 같은데요. 제가 가져갈게요.”팀장이 황당한 얼굴로 끼어들었다.“한 과장 혼자 네 박스를 어떻게 가져가?”“카트 있지 않을까요?”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지아를 보며 이건은 피식 웃고 재킷 단추를 풀었다.“갑시다.”“어디를요?”“지하 물류장으로요.”지아가 눈을 깜빡였다.“설마 대표님도 같이 들고 가시려고요?”“박스가 네 개라면서요. 제가 들면 안 됩니까?”이건이 먼저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뒤따라오던 지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들 수는 있죠. 좀 비싸 보이는 사람이 박스 들고 다니는 게 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58화

그러다 박스 옆에 쪼그려 앉아 있던 지아가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셔츠 소매가 손목 위로 살짝 밀려 올라가면서 희미하게 남은 멍이 드러났다.거의 가라앉아 자세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 정도였지만 이건은 놓치지 않았고, 그의 눈빛이 순간 가라앉았다.지아도 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알아차렸는지 서둘러 소매를 끌어내렸다.며칠 전 병원에서 봤던 모습이 떠올랐지만 이건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지아가 감추고 싶어 하는 걸 굳이 들춰내고 싶지 않았다.대신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지아가 그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는 동안에도 이건은 재촉하지 않고 그대로 기다렸다.잠시 후 지아가 조심스럽게 그의 손을 잡자 이건은 손에 힘을 주어 몸을 일으킬 수 있도록 받쳐주었다.맞닿았던 손은 금세 떨어졌지만, 박스를 다시 들려던 이건의 손이 순간 멈췄다.손바닥에 남은 미약한 감촉이 생각보다 선명했다.이건은 자신의 손을 한번 내려다봤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박스를 고쳐 들었다.“감사합니다.”지아가 웃으며 소매 끝을 다시 한번 끌어내리자 이건의 눈매가 미세하게 굳었다.“무거운 건 두세요.”“저 이 정도는 들어요.”“압니다.”이건은 지아가 들려고 하던 나머지 박스까지 가져왔다.“그래도 제가 들겠습니다.”지아가 의외라는 듯 그를 쳐다보다 입꼬리를 올렸다.“대표님, 생각보다 친절하시네요.”“생각보다?”“처음에는 좀 무서웠거든요.”이건의 굳었던 눈매가 그제야 느슨하게 풀렸다.“지금은 안 무섭습니까?”지아가 고민하는 척 고개를 갸웃했다.“박스 들어주는 동안은요.”결국 이건이 다시 웃었다.이 여자와 이야기하다 보면 대화가 늘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흘렀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었다.다행히 집회 구간을 피해 돌아갈 수 있는 길이 확인되면서 도원 차량에 샘플을 실어 백림유통까지 보내기로 했다.차량이 출발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지아가 벽에 살짝 기대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다행이다.”이건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지하철 못 타서 아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5
Read more

59화

지아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뜻밖의 제안을 받은 사람처럼 이건을 바라보다가 괜히 어색한지 손목시계를 한번 만졌다.“저랑요?”이건이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넓은 물류장에는 어느새 두 사람만 남다시피 했다.“여기 다른 사람이 있습니까?”그제야 지아도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대표님하고 저하고 둘이 밥을 먹는다는 말씀이세요?”이건은 대답 대신 지아의 표정을 살폈다.“불편합니까?”싫다면 그걸로 끝이었고, 굳이 이유까지 물어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도 없었다. 그런데 지아가 입을 열기까지 이어진 짧은 침묵이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잠시 고민하던 지아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그냥 조금 의외라서요. 대표님은 직원이랑 따로 밥 안 드실 것 같아서요.”“한 과장님은 제 직원이 아닙니다.”그 말을 들은 지아가 그러네요, 하듯 고개를 끄덕이다가 슬쩍 웃었다.“그럼 다행이네요. 대표님 직원이었으면 밥 얻어먹기 더 어려웠을 것 같거든요.”또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이건의 입가에도 자연스럽게 웃음이 번졌다. 그는 더 묻지 않고 엘리베이터 쪽으로 몸을 돌렸다.“먹고 싶은 거 있습니까?”뒤따라오던 지아가 제법 진지한 얼굴로 고민했다.“제가 골라도 돼요?”이건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며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지아가 잠시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그럼 국밥이요.”막 열린 엘리베이터에 들어서려던 이건의 걸음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그 반응을 놓치지 않은 지아가 먼저 웃었다.“왜요, 싫으세요?”“아닙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국밥은 예상하지 못해서요.”“오늘 박스까지 직접 옮기셨는데 이 정도면 대표님 체험 제대로 하시는 거죠.”지아가 먼저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닫힘 버튼을 누르며 웃는 얼굴을 바라보던 이건도 결국 낮게 웃었다.생각해보니 오늘 하루 유난히 많이 웃고 있었다.지아가 고른 곳은 도원 본사에서 차로 십 분쯤 떨어진 골목 안쪽의 작은 국밥집이었다.비서가 주소를 확인하며 백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Read more

60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아가 만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른 먹어보라는 눈빛으로 숟가락을 가리켰다.“한 과장님은 원래 남의 밥 먹는 것까지 관리합니까?”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건은 국물을 한 숟갈 떠먹었다.생각보다 괜찮았다.그의 표정을 살피던 지아의 눈이 금세 반짝였다.“맛있죠?”이건은 바로 대답하지 않고 국물을 한 번 더 떠먹었다.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답이 된 모양이었다.“거봐요. 제가 맛있다고 했잖아요.”마치 자신이 만든 음식이라도 되는 것처럼 지아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그 순간 이건의 시선이 멈췄다.물류장에서 보았던 웃음과는 또 달랐다. 일할 때보다 훨씬 편안한 얼굴이었고, 별것 아닌 일에도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웃을 때 살짝 휘어지는 눈매가 유난히 선명하게 들어왔다.이건은 자신도 모르게 조금 더 바라보다가 숟가락을 내려놓았다.“한 과장님은 원래 잘 웃습니까?”입으로 가져가던 지아의 숟가락이 허공에서 잠시 멈췄다.지아가 자신을 가리키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제가요?”“오늘은 많이 웃는 것 같아서요.”지아가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오히려 이건을 빤히 바라봤다.“대표님도 오늘 많이 웃으셨는데요. 원래는 잘 안 웃으시죠?”생각해보니 그랬다.이건은 대답 대신 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지아는 그 반응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들었는지 입꼬리를 올렸다.“역시.”“뭐가 말입니까?”“그냥요. 평소에는 별로 재미없게 사실 것 같아서요.”이건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다.자신에게 재미없게 산다고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는데도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오히려 다음에는 무슨 말을 할지가 궁금해졌다.“한 과장님은 재미있게 삽니까?”물컵을 들던 지아의 손이 아주 잠깐 멈췄다.방금 전까지 얼굴에 남아 있던 웃음도 조금 옅어졌다.“저도 별로예요.”가볍게 넘기려는 말투였다.이건은 더 묻지 않았다.마침 지아가 물컵을 입으로 가져가면서 옷소매가 조금 밀려 올라갔고, 물류장에서 보았던 멍 자국이 다시 드러났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6
Read more
PREV
1
...
45678
...
12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