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지금 당장 치워.”혜란이 가리킨 것은 차서윤이 식탁 위에 펼쳐놓은 자리 배치도였다. 어젯밤 ‘이번에는 제가 앉을 자리부터 정하고 싶어요’라는 문자를 보내더니, 오늘은 아예 이름표까지 만들어 들고 온 것이다. 종이 한쪽에는 ‘차서윤’, 다른 쪽에는 ‘한세령’이 적혀 있었다. 아직 오겠다는 대답도 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이었다.“어머님, 그냥 미리 준비한 거예요. 가족끼리 먹는 밥인데 자리 하나 정하는 게 뭐가 어때서요?”“세령이 이름은 네가 올릴 게 아니야.”혜란은 이름표를 뒤집었다. 예전에는 세령의 마음을 묻지 않은 채 편지를 숨겼고, 그게 장남을 지키는 길이라고 여겼다. 그 일을 바로잡는 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울었는지 이제는 안다. 그런데 유건의 새 연인이 또 세령의 의자를 정하고 있었다.“어머님도 세령 씨가 와야 마음이 편하시잖아요. 저를 미워하는 사람 앞에서도 당당히 소개해주시면 되죠.”“소개는 해줄 수 있어. 하지만 세령이가 증인처럼 앉아 있어야 네 자리가 생기는 건 아니야.”서윤의 웃음이 얇아졌다. 혜란은 이름표 한 장이 얼마나 잔인한지 뒤늦게 배웠다. 세령은 예전 이 식탁에서 유건 옆에 앉아 반찬을 건네고, 어른들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먼저 일어나지도 못했다. 누군가 대신 골라준 그 자리를 이제 와 새 여자에게 넘겨주겠다니, 식탁이 무슨 주인 바뀌는 집 문패라도 된단 말인가. 혜란은 저녁 식사 초대를 허락했을 뿐, 좌석표를 만들라고 시킨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난번 전시장에서 서윤이 보낸 ‘감시당한다’는 문자를 받은 뒤로는, 이 여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유건에게 사실을 듣고 나서도 서윤은 오해였다는 말만 되풀이했다.같은 시각 세령은 전시장 바닥에 앉아 조명 아래 천의 색을 비교하고 있었다. 향수 때문에 관람을 막았던 구역은 다시 열렸지만, 일정표에는 미뤄진 설명 시간들이 빼곡했다. 미래가 재단선을 긋는 동안 혜란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휴대전화 진동에 세령은 칼날을 먼저 덮었다. 이 일이 끝나면 근처 카
Last Updated : 2026-10-25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