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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형수는 내게만 허락돼: Chapter 151 - Chapter 160

195 Chapters

제151화. 첫 데이트의 함정

“그거 지금 당장 치워.”세령이 가리킨 것은 태겸의 외투 안쪽에서 삐져나온 낡은 편지 봉투였다. 방금 저택을 나서며 돌려준, 7년 동안 자신에게 도착하지 못했던 편지. 태겸은 그녀의 손을 가볍게 맞잡은 채 걸음을 멈췄다. 대문이 멀어지고 두 사람의 그림자가 가로등 아래 나란히 길어져 있었다.“버리라는 말이야?”“아뇨. 가슴에 훈장처럼 꽂고 다니지 말라고요. 이제 옛날 얘기는 거기 넣어두세요.”태겸은 봉투를 외투 깊숙이 밀어 넣었다. 편지를 돌려준 세령이 먼저 손을 잡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자 세령은 조금 웃음이 났다. 이제 손을 잡았으니 과거보다 오늘이 중요했다.“그럼 새 연애 첫날인데 뭘 할까?”“우선 각자 집에 가요. 내일 아침 일찍 전시장 가야 해요.”“벌써 차였네.”“퇴근하면 정식으로 데이트해요. 날짜하고 장소는 둘이 정하고. 문가 행사표 말고요.”태겸은 휴대전화를 꺼내 다음 주 일정을 확인했다. 세령도 가방에서 수첩을 찾아 설치업체와 만날 시간을 훑었다. 서로 바쁜 날을 피하다가 금요일 저녁으로 뜻이 모였다. 누군가의 허락도, 눈치를 볼 어른도 없었다. 세령은 그 단순한 과정이 좋아 태겸의 손을 한 번 더 잡았다가 놓았다. 첫사랑을 다시 만난다는 사실보다, 금요일 저녁을 스스로 비웠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설렜다. 결혼생활 동안 그녀의 약속은 남편의 회식이나 집안 행사에 따라 뒤로 밀리는 일이 많았다. 태겸은 금요일에 무슨 일이 생기면 미리 말하겠다고 했고, 세령도 전시 일정이 바뀌면 숨기지 않고 알려주겠다고 했다. 서로가 서로를 온종일 차지하지 않아도 만날 수 있다는 게 새로웠다.며칠 뒤 금요일, 세령은 작업실에서 묻은 먼지를 털고 검은 원피스 위에 짧은 재킷을 걸쳤다. 미래가 물었다.“첫 공식 데이트라며? 재벌 장남이 식당 통째로 빌려놨대?”“그랬으면 입구에서 돌려보낼 거야. 밥 한 끼 먹는데 왜 직원들 저녁을 뺏어.”미래가 웃으며 옷깃을 펴주었다. 세령은 립스틱을 다시 바르지 않았다. 예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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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2화. 우연을 예약한 여자

전남편과 낯선 여자의 이름이 적힌 예약석은 하필 세령의 바로 맞은편이었다.‘문유건 · 차서윤.’세령은 카드를 내려다보다 메뉴판을 덮었다. 두 사람의 첫 정식 데이트를 위해 골랐던 식당이었다. 조금 전에는 예약 정보에 아직도 자신이 유건의 배우자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바로잡았는데, 이제는 그 당사자의 이름이 맞은편에 등장했다. 꽃 한 송이를 올린 테이블이 장난처럼 느껴졌다.세령은 처음 그 식당을 골랐을 때의 기분을 떠올렸다. 저택에서 누구와 누구의 아내로 앉아야 하는지 따지지 않고, 태겸과 메뉴를 고르는 저녁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창가 자리도 스스로 골랐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날의 식탁에까지 옛 결혼을 끌어들일 생각인 모양이었다. 예약 카드는 평범한 종이였지만 그 위에 쓰인 이름 둘이 오늘의 일을 바꾸려 들고 있었다.태겸도 카드를 봤다. 그는 당장 직원에게 따지지 않고 세령 쪽으로 몸을 돌렸다.“자리를 옮길까? 아니면 여기서 먹을래?”“제가 잘못 온 것도 아닌데요. 일단 누가 오는지 보죠.”문이 열리고 유건이 들어섰다. 그 옆의 여자는 짙은 색 재킷 안에 밝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세령이 오늘 입은 옷과 색깔까지 비슷했다. 그녀는 유건보다 먼저 두 사람을 발견했고, 놀란 듯 손끝으로 입술을 가렸다. 다만 그 손동작이 끝나기도 전에 시선은 세령의 머리부터 구두까지 빠르게 훑었다.“어머, 세령 씨? 이렇게 뵐 줄은 몰랐네요.”세령은 그녀가 자기 이름을 안다는 사실을 먼저 짚고 싶었지만, 유건의 얼굴이 굳는 걸 보고 잠시 기다렸다. 그는 태겸과 세령을 번갈아 보더니 곧 동행한 여자를 돌아봤다.“서윤아. 여긴 네가 골랐다며.”“맞아요. 그런데 세상 참 좁죠? 근처 지인이 분위기 좋다고 해서 왔는데.”차서윤은 환하게 웃었다. 밝은 원피스 밑단이 의자 모서리에 걸리자 자연스럽게 들어 올리는 동작마저 세령이 낯설게 느꼈다. 그녀는 유건의 팔을 놓지 않은 채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익숙한 사람에게 인사하듯 이름을 부르면서도 처음 보는 사람인 양 고개를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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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3화. 훔쳐본 기념일

“내 앞에서 다시 말해봐요. 이게 우연이라고요?”세령은 ‘방문 목적: 기념일 확인’이라는 글자를 본 순간 메뉴판을 내려놓았다. 서윤이 손바닥으로 예약 확인서를 가렸지만 이미 늦었다. 접힌 종이 아래로 날짜를 적는 빈칸까지 보였다. 무엇을 확인하려고 남의 첫 데이트 맞은편 자리를 골랐다는 걸까. 세령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식당에 퍼진 버터 냄새와 주방에서 접시를 놓는 소리가 방금 전과 똑같아서 오히려 우스웠다. 첫 데이트에서 듣고 싶었던 건 태겸의 하루였지, 처음 보는 여자의 변명이 아니었다. 세령은 입 안쪽을 한번 깨물고 컵을 내려놓았다. 자리를 지키는 건 싸움을 즐겨서가 아니라 자기 저녁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서였다.“지나가다 우연히 들어왔다고 하셨죠?”서윤은 유건의 팔을 한번 만졌다가 손을 뗐다. “예약은 했지만 꼭 올 생각은 아니었어요. 이런 우연이 생길 줄은 몰랐죠.”“그런데 방문 목적까지 적어놓으셨네요. 무슨 기념일인데요?”“아, 그거요? 개인적인 일이라…….”유건이 그녀를 돌아봤다. “나한텐 그냥 저녁 먹자고 했잖아.”“그러니까요. 별뜻 없어요.”세령은 태겸을 바라봤다. 그가 묻는 듯 눈을 맞추자 고개를 저었다. 설명은 자신이 들을 생각이었다. 태겸은 접시 옆에 놓인 물잔을 옮겨줄 뿐 끼어들지 않았다. 불편하다고 자리를 피하면 오늘의 저녁도 남이 정한 연극의 결말이 될 것 같았다.마침 매장 책임자가 예약 확인서를 회수하러 왔다. 서윤이 황급히 종이를 건네자 직원은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세령은 그를 향해 몸을 돌렸다.“저분이 오늘 이쪽 자리를 지정해서 예약한 게 맞나요?”“고객님 개인정보라 자세한 사항은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그럼 방금 그분이 저희와 우연히 마주쳤다는 설명은 본인이 해명하시겠죠.”책임자는 세령의 테이블에 전달됐던 잘못된 예약 카드를 회수하려고 손을 내밀었다. 그 사이 서윤이 먼저 말했다.“아까 직원분한테 창가를 부탁드렸을 뿐이에요. 세령 씨가 계신 줄 어떻게 알겠어요?”“오후에 직접 오셔서 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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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4화. 남의 자리

“그걸 네 마음대로 결정해?”유건이 입을 다문 순간, 세령은 알아차렸다. 저 남자는 아직도 누군가를 지킨다는 핑계로 자신의 과거를 함부로 다루고 있었다.맞은편 예약석의 촛불이 흔들렸다. 서윤은 구겨진 예약 확인서를 손바닥 밑에 밀어 넣었고, 유건은 그 종이를 바라보다 물잔을 집었다. 세령이 묻는 건 어려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의 결혼기념일을 새로운 연인에게 누가 알려줬는지, 그 날짜가 어떻게 오늘의 예약 사유가 됐는지. 그런데 그는 한 모금 마시지도 못한 물잔만 만지작거렸다. 세령은 몇 달 전 저택 응접실에서 유건이 제 잘못을 고백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날 그는 다시는 자기 변명을 세령에게 떠넘기지 않겠다고 했다. 그 말을 믿고 연락할 이유가 없는 두 사람으로 돌아왔다. 지금 세령이 원하는 건 재회도, 질투할 권리도 아니었다. 과거에 속했던 정보가 어느 입을 거쳐 낯선 여자의 무기가 됐는지 확인하는 일뿐이었다.“유건아. 네가 말했어, 안 했어?”“세령,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나한테는 중요해. 넌 끝난 결혼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지만, 내가 겪은 일까지 새 여자친구한테 구경거리로 줄 자격은 없어.”유건의 턱이 굳었다. 서윤이 기다렸다는 듯 끼어들었다.“제가 잘못했어요. 그래도 이렇게 남들 다 듣는 데서 몰아붙이실 필요는 없잖아요. 이혼한 사이라면서 유건 씨한테 아직도 그렇게 따지시면,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해요?”끝에 붙은 울음기 때문에 건너편 손님들이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의자를 조금 뒤로 빼며 유건의 소매를 붙들었다. 세령은 그 움직임을 보면서도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다. 잘못한 사람이 부끄럽지 않도록 피해자가 조용히 해야 한다는 규칙을, 이 집안에서 이미 너무 오래 배웠다. 서윤은 세령이 유건을 아직 놓지 못해서 따지고 있다는 표정을 만들고 싶어 했다. 유건의 소매를 붙든 손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그 손길을 보고도 세령에게 질투는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저 손을 붙잡고 위로할 사람과 자기 이름을 지킬 사람을 한 식탁에 세우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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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5화. 네 자리는 없어

“좋아, 모두 있는 데서 끝내자.”세령이 메뉴판을 덮자 서윤의 입꼬리가 굳었다. 조금 전까지 남의 첫 데이트를 훼방 놓고도 피해자인 척하던 여자가, 이번에는 태겸에게 세령의 식성을 아느냐고 묻고 있었다. 하필 두 사람이 옮겨 앉은 테이블까지 따라와서였다. 책임자가 몇 걸음 뒤에서 상황을 살피고 있었고, 맞은편 유건은 서윤의 이름을 부르려다 멈췄다. 서윤이 지켜본 건 세령의 반응보다 태겸의 얼굴이었다. 전처의 취향을 들추면 장남도 흔들릴 거라 믿는 듯했다. 세령은 그 계산을 알아차리자 오히려 침착해졌다. 싸움의 상대를 태겸으로 바꿔 자신을 구경거리로 만들게 둘 생각은 없었다.“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태겸 씨보다 잘 안다고 자랑하러 왔어요?”“자랑이라뇨. 가까운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해서요.”서윤은 메뉴판의 생선 요리를 짚었다. “세령 씨, 원래 이런 거 안 드시잖아요. 담백한 국물 좋아하시고, 후추도 싫어하시고. 유건 씨랑 결혼했을 때부터 그랬다면서요.”세령은 손끝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낯선 여자가 아는 체한 것은 음식이 아니라, 자신이 4년 동안 살았던 식탁이었다. 아침마다 바쁜 유건에게 맞춰 먹던 메뉴, 혜란이 손님상에 올리면 별말 없이 삼켰던 음식들. 좋아서 먹은 날도 있었지만, 싫다고 말하기 귀찮아 먹은 날도 많았다. 그 구별은 정작 세령 자신만 할 수 있었다.“그걸 누가 알려줬는데요?”“그게 중요해요? 태겸 씨는 세령 씨가 뭘 좋아하는지 아시냐고요.”서윤은 태겸을 향해 몸을 돌렸다. “7년이나 사랑했다면서 음식 하나 모르시면 좀 곤란하잖아요. 저는 만난 지 얼마 안 돼도 이렇게 아는데.”태겸은 잠시 세령을 살폈다. 화가 났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시선은 서윤에게 되돌아가지 않았다. 예전의 그는 세령을 대신해 괜찮다고 말하거나, 자신이 알던 세령의 취향을 정답처럼 내놓았을 것이다. 지금은 두 사람이 카페에서 정한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내가 안다고 해서 세령이가 오늘도 그걸 먹어야 하나요?”“그럼 아무것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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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6화. 전처까지 초대해?

“그 자리에 한세령 씨도 부르세요.”서윤의 말이 맞은편 테이블까지 들리자 세령은 포크에 감긴 파스타를 내려놓았다. 전남편의 새 여자친구가 시어머니가 될 사람에게 인사하는 자리에 전처를 앉히겠다니. 식당에서 한 차례 망신을 당하고도 저 여자는 아직 자기 몫의 저녁을 빼앗을 궁리를 하고 있었다.“그거 지금 당장 치워.”유건이 서윤의 휴대전화를 가리켰다. 화면에는 ‘어머니께 인사드릴 날’이라는 일정과 초대할 사람을 적는 칸이 떠 있었다. 서윤은 빈칸에 세령의 이름을 입력하던 손을 멈췄다.“왜요? 다 아는 사이인데 피하면 더 이상하잖아요. 어머님도 편하시고, 세령 씨도 저를 직접 보시면 오해가 풀릴 거예요.”“오해는 네가 만들었지. 오늘 저 사람 데이트에 끼어든 것도 너고.”“와, 유건 씨. 전처 앞에서 새 여자친구 혼내니까 기분 좋아요?”그 말에 유건의 입가가 일그러졌다. 세령은 그 표정까지 읽으려다 그만두었다. 어느 쪽이 더 상처받았는지 재판할 마음은 없었다. 다만 자신의 이름이 저 휴대전화에 입력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서윤 씨.”서윤이 고개를 돌리자 세령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 말했다.“누가 누구 만나러 가는 자리인데 나를 불러요? 그걸 왜 제게 묻지도 않고 정해요? 본인이 한 행동부터 설명해봐요. 오늘 내 자리까지 알아보고 찾아온 이유도 아직 못 들었거든요.”“전 그냥 잘 지내고 싶어서요. 전처랑 사이좋은 여자친구, 보기 좋잖아요.”“친해지고 싶은 사람한테 허락도 없이 초대장부터 보내요? 사이좋은 척할 배역은 다른 데서 구하세요.”서윤은 자신의 입술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불과 1시간 전에는 우연히 들어온 식당이라고 하더니, 이제는 세령이 가족 행사에 나타나야 서로 오해를 풀 수 있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세령은 서윤이 가져온 논리의 빈칸을 보았다. 전처가 와서 웃어주면 새 여자친구의 자리가 정당해진다는 계산이었다. 그 계산에 세령의 의사가 들어갈 곳은 없었다.태겸이 냅킨을 접어 세령 옆에 놓았다. 그녀가 손을 올리자 자연스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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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7화. 남의 인생 견학

꽃 상자의 리본도 풀기 전에, 보낸 사람이 작업실 문 앞에 나타났다.“끝까지 우연이라고 우길 거야?”세령은 카드에 적힌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었다. ‘제가 세령 씨 계신 곳으로 직접 갈게요.’ 바로 그때 유리문 너머에서 차서윤이 손을 흔들었다. 초인종을 누른 것도 아니었다. 배송 기사가 돌아선 지 채 5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서윤은 기다렸다는 듯 웃고 있었다. 미래가 가벽 견본을 내려놓으며 세령의 얼굴을 살폈다.“아는 사람이야?”“알게 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지겨운 사람.”미래는 꽃 상자를 들었다가 카드와 서윤을 번갈아 봤다. 조금 전까지 세령과 함께 조명 위치를 정하던 작업대에는 재단 칼과 견본 천이 널려 있었다. 외부인이 함부로 만졌다가는 설치 일정 전체가 밀릴 수 있는 물건들이었다. 세령은 친구에게 시안부터 치우라고 눈짓하지 않았다. 숨길 이유가 있는 쪽은 자신이 아니었다.세령은 문을 열되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복도까지 퍼진 페인트 냄새 사이로 서윤의 향수가 섞였다. 서윤은 전날 식당에서 입었던 것과 비슷한 재킷을 걸치고 있었다.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고, 문틈으로 보이는 작업대를 눈으로 훑었다.“어머, 정말 여기 계셨네요.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들렀어요.”“꽃 보내면서 찾아오겠다고 적었잖아요. 근처에 올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여기 오려고 나온 거겠죠.”“말이 그렇다는 거죠. 사과드리고 싶어서요. 어제 제가 좀 예민했잖아요.”“좀?”미래가 뒤에서 기침을 삼켰다. 서윤은 커피를 내밀다가 세령이 받지 않자 문 옆 선반에 놓으려 했다. 세령이 그 자리를 손으로 막았다. 선반 위에는 갓 도착한 전시 견본이 놓여 있었다.“음료는 밖에서 드세요. 작업물에 쏟으면 다시 만들 사람이 저예요.”서윤은 커피를 도로 끌어안았다. 얼굴에는 억울함을 억지로 누르는 표정이 떠올랐다. 세령은 그 모습이 익숙했다. 상대가 자신을 거절한 게 아니라 괴롭힌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표정이었다. 어제 식당에서도 서윤은 자리를 지정해놓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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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8화. 똑같이 찍어줘

“내 앞에서 다시 말해봐요. 그 사진, 왜 갖고 있어요?”세령의 질문에 서윤은 휴대전화를 뒤집었다. 화면이 꺼지기 전까지 보였던 것은 오래전 결혼식 대기실 사진만이 아니었다. 세령과 유건이 서 있던 자리에는 가느다란 선이 그어져 있었고, 어깨 높이와 카메라 위치에는 작은 숫자까지 적혀 있었다. 추억을 우연히 저장한 사람은 그런 표시를 남기지 않는다.사진 속 세령은 하얀 드레스의 긴 자락을 한 손으로 잡고 있었다. 유건이 옆에서 웃던 순간, 그녀는 결혼하면 마침내 자기 편이 생기는 줄 알았다. 그때 찍힌 표정이 이렇게 다른 여자의 촬영 견본이 될 줄은 몰랐다. 사진을 보는 것과 사진 속 인생을 빼앗아 입으려는 것은 달랐다.작업실 문은 반쯤 열린 상태였다. 복도로 새어 나간 페인트 냄새가 서윤의 향수와 섞였고, 미래가 안쪽에서 천 견본을 접다가 고개를 들었다. 서윤은 휴대전화를 가방 속으로 넣으려 했다.“유건 씨 사진 정리하다가 본 거예요. 옛날 사진 하나 가지고 왜 그러세요?”“사진이 어디서 났느냐고 물었는데, 왜 자꾸 제가 화내는 이유부터 정해요?”“그냥 예뻐 보여서 참고하려고요. 제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하거든요.”세령은 서윤의 옷자락을 살폈다. 식당에서 마주쳤던 원피스와 오늘 재킷의 색, 자신이 입은 옷과 묘하게 비슷한 길이까지. 몇 번은 우연이라고 넘길 수 있었다. 하지만 자기 결혼식 사진에 촬영 위치를 표시해놓은 여자를 앞에 두고도 우연을 믿어줄 이유는 없었다.“그럼 그 선들은 누가 그었어요? 손님 자리에서 카메라 놓을 곳까지 재는 게 취미예요?”서윤의 손가락이 가방 지퍼 위에서 멈췄다.“요즘은 사진 구도 참고 많이 해요. 세령 씨만 그런 사진 찍을 권리가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미래가 작업대 앞으로 걸어왔다.“사진이 문제가 아니라 그걸 어디에 쓰려고 가져왔는지가 문제죠. 여긴 지금 전시 설치 준비 중이에요. 할 말 없으면 나가주세요.”“아, 친구분이시구나.”서윤은 금세 웃었다.“제가 세령 씨랑 오해를 풀러 왔는데 이렇게 몰아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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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화. 전처의 얼굴값

“유건 씨가 허락했는데, 왜 세령 씨한테 허락받아야 하죠?”서윤은 휴대전화를 세령의 코앞까지 밀어 올렸다. 화면에는 유건과 주고받은 대화가 떠 있었고, 그 아래에 4년 전 결혼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세령의 드레스 자락과 유건의 손, 두 사람이 나란히 웃던 얼굴까지 한 화면에 담겨 있었다. 서윤은 자신이 결정적인 증거를 내놓았다는 듯 미소를 지었다.“누가 제 얼굴까지 당신 마음대로 정하래요?”세령은 휴대전화를 빼앗지 않았다. 대신 화면의 문장을 읽었다. ‘앨범에 남은 사진은 봐도 돼.’ 유건이 보냈다는 말은 거기까지였다. 촬영업체에 넘겨도 된다는 허락은 없었고, 사진 속 세령의 의견을 물었다는 흔적도 없었다.“읽어보니까 더 우습네요. 유건이가 보라고 한 걸, 당신은 따라 찍어도 된다고 해석했어요?”“같은 사진에 있는 사람이 허락했다잖아요. 두 분이 이미 이혼했는데 무슨 권리가 더 필요해요?”“이혼했다고 내 얼굴도 유건이한테 두고 나온 줄 알았어요? 남편은 반납했지만 얼굴까지 양도한 적 없는데.”작업대 옆에서 미래가 웃음을 삼키다가 이내 입술을 다물었다. 서윤은 얼굴이 벌게진 채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으려 했다. 세령은 문턱을 가리켰다. 열어둔 문 너머 복도에는 전시용 판넬 두 장이 벽에 기대어 있었고, 안쪽 바닥에는 설치 위치를 표시한 테이프가 붙어 있었다. 서윤이 구두 굽으로 그 선을 밟으며 들어오자 세령이 앞을 막았다.“거기까지요. 여기는 내 작업실이에요. 허락 없이 들어오거나 시안 찍으면 바로 내보낼 겁니다.”“아니, 지금 제가 무슨 도둑질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시네요?”“남의 결혼사진에 선 긋고 촬영업체로 보냈으면, 최소한 내 앞에서 그게 예의라고 우기진 말아요.”서윤은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눈시울을 문질렀다.“전 유건 씨랑 예쁜 사진 한 번 남기고 싶었을 뿐이에요. 세령 씨가 그렇게 행복해 보였으니까요. 그걸 부러워한 게 잘못이에요?”그 말에 세령은 오래된 사진 속 자신의 웃음을 떠올렸다. 그날의 행복은 진짜였지만, 사진 밖에서 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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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0화. 네 여자부터 막아

“내가 네 사진을 넘겨도 된다고 했냐고?”유건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굳었다. 세령은 작업실 문을 다시 열었다. 복도에서 발을 떼지 못한 서윤의 얼굴이 보였다. 미래는 문턱에 선 채 물기에 젖은 꽃 상자를 발끝으로 밀어놓았다. 사진 속 결혼식은 4년 전 끝났는데, 그 사진 때문에 오늘의 전시 도면이 몇 시간째 방치돼 있었다. 복도에는 꽃 상자의 단 향과 작업실 접착제 냄새가 뒤섞였다. 화사한 꽃과 냉정한 설계도 사이에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좋아. 모두 있는 데서 끝내자.”세령은 통화를 스피커로 전환해 서윤에게도 들리게 했다.“유건아, 서윤 씨가 네가 허락했다며 내 결혼사진을 촬영업체에 보냈어. 내가 있던 위치까지 표시해서 똑같이 찍어달라고 했고. 사실이야?”잠깐의 침묵 뒤 유건이 말했다.“서윤이가 내 휴대전화에서 사진을 봤어. 그거 가져도 되냐고 물어서, 나한테도 있는 사진이니까 알아서 하라고 했지. 그런데 촬영업체에 보낸 줄은 몰랐어.”“그럼 그 말이 허락이 아니라고 우길 거야?”“아니. 내가 경솔했어.”세령은 대답이 빠르다는 사실에 오히려 화가 났다. 유건은 이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법을 알았다. 그렇지만 인정은 일이 벌어진 다음에 하는 것이고, 그 사이에 남의 사진이 누구 손으로 건너갔는지는 되돌릴 수 없었다. 결혼식 날 웃던 자신이 낯선 여자의 촬영 지시서에 붙어 있었다. 세령은 그날 행복하지 않았다고 거짓말할 생각이 없었다. 유건이 베일을 들어 올려줄 때 분명 설렜고, 끝까지 잘 살아보려 애썼다. 그렇다고 서윤이 그 표정을 가져다가 자신의 연애가 더 진짜라고 증명할 권리는 없었다.서윤이 휴대전화를 쥔 손을 들어 올렸다.“보셨죠? 허락하셨잖아요. 세령 씨만 왜 이렇게 예민하세요?”“아니, 지금 그게 변명이라고 나오는 소리야?”유건이 끼어들었다.“내가 사진을 쓰라고 했어도 세령한테 물어봤어야지. 너 어제 식당도 그렇고 왜 자꾸 이 사람한테 가?”“이 사람이요?”서윤의 웃음이 사라졌다.“전처는 이름으로 부르고, 여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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