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아기를 품고 도망친 그녀: Chapter 11 - Chapter 19

19 Chapters

#11. [당신 누구세요? 애 아빠 아세요?]

[······너무 가혹해······.][······힘들어······.][······그래도······, 포기가 안 돼.]아득한 가위눌림 같은 꿈이었다. 깨어나면 봄눈처럼 녹아내릴 흔적이라 괜찮다고 자조했다. 아무리 슬프고 가슴이 아려도, 결국엔 스쳐 지나갈 꿈일 뿐이니까.손을 뻗어 잡으려 해도 희미한 안갯속으로 아득히 흩어지는 음성이 그래도 거슬렸다.그것이 제 비명이었는지, 혹은 누군가의 애절한 절규였는지조차 분간되지 않는 잔향을 뒤로한 채, 경신은 그저 조용히 눈이 떠지기를 기다렸다. 어차피 이 눈물겨운 감정조차 깨어나면 모조리 휘발될 테니까.***Rrrr Rrrr Rrrr.3월 중순.이주일의 고된 새 학기를 시작하고 맞이한 나른한 금요일 오후. 경신은 사범대 근처에서 사당을 향해 가는 버스에 올라탄 뒤 바로 기절한 듯 잠들었다.전생에 고질병처럼 달고 살던 수면 장애는 회귀 후 기적처럼 사라진 듯했다. 방금 전에도 기묘하도록 아련한 꿈을 꾼 것 같았지만, 눈을 뜨자마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려 별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Rrrr Rrrr Rrrr.“학생, 전화 왔어.”누군가 경신의 어깨를 다정하게 톡톡 두드려주지 않았다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는 눈꺼풀을 결코 들어 올리지 못했을 터였다.“······아, 죄송합니다.”화들짝 놀라 통화 버튼을 누른 경신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수화기에 입술을 바짝 대었다.“여보세요.”-보살님! 또 잤죠?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보나 마나 화야였다.“어머, 어떻게 알았지?-알게 되는 수가 있죠.“안 하던 공부를 하려니까 뇌가 아예 파업을 선언하네.”-어련하시겠어요.경신은 기억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3월 초 개강 이후 꽤 무탈하게 대학 생활에 적응 중이었다. 4학년이라 취업 준비를 배려한 교수님들 덕분에 과제도 적고 강의도 듬성듬성했지만, 몸은 늘 젖은 솜처럼 천근만근이었다. 이 모든 게 배 속에서 예쁜 아가들을 키우느라 온 에너지를 나눠 쓰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검색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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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 남자가 설마]

혹시 대단한 사람과 불장난 같은 사랑을 나누고 그는 떠나 버린 것이라면. 아이들의 존재를 알면 오히려 위협적으로 굴면 어쩌지.지금까지 학교에서 특별하게 가깝게 지낸 사람도 없었고, 학과 친구들에게 물어봐도 3년 내내 조용했고 남자친구는 없어 보였다고 했다.행정복지센터에 가서 주소를 확인해 봐도 동거자는 없었고 현재는 학교 주소로 된 상태였다. 가족관계증명서에서도 혹시나 결혼했나 했지만 역시 깨끗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지금껏 몇 주 동안 경신 자신을 찾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는 점이었다.‘이 몸도 참 외로운 인생이었구나······.’어차피 누군가 자신과 엮여봤자 서로 좋은 꼴은 못 볼 테니 경신 근처의 남자들도 미리 멀리멀리 두는 게 정답이었다. 경신은 불끈 두 주먹을 한번 말아 쥐고는 오늘의 목적 달성을 위해 의지를 불살랐다.온갖 잡생각을 마친 경신은 목적지에 도착하게 되어 버스 정류장에서 내렸다. 버스에서 내려보니 더욱 느낌이 이상했다. 왜 이리 긴장이 되는지. 뭔가 불길한 예감으로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마음을 다잡아 먹고 경신은 핸드폰 좌표대로 걷고 또 걸었지만, 계속 뭔가 불길해서 손바닥에서는 땀도 나고 있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데 기억까지 잃어서 제대로 과외나 해낼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아니다 싶으면 죄송하다고 바로 사과하고 그만둬야지. 과외비는 그래도 선불로 받아야지 등 온갖 생각을 하다 경신은 가야 할 장소 앞까지 도달했다.그런데, 이럴 수가.하늘의 신은 경신에게 설마 4회차 인생도 비슷한 수순으로 가도록 빅엿을 보낼 대기를 하고 있는지 큰 거 한 방이 기다리고 있었다.“아! 이런. 최종 목적지가 MH 엔터테인먼트?”바로 연예 기획사였다. 연예계는 ‘연’ 자도 듣기 싫은데 무슨!지금은 국어교육과 학생이기에 절대로 그쪽하고 엮이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설마, 아니겠지.이 소속사 출신 연예인으로는 듣도 보도 못한 전생에 없던 에스트렐라(Estrella: 스페인어로 별)라는 보이 그룹 1개밖에 없었다.기획사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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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지독하게 아름다워서 위험한 그대]

약속된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가면 사람은 필연적으로 오기가 생기는 법이다. 마호라는 작자는 아예 연락 두절이었고, 입구의 까칠한 관계자는 오늘 지하 소강당에서 오디션 심사 중이니 만나고 싶으면 줄을 서라는 말만 기계적으로 반복했다. 그 덕분에 경신은 꼼짝없이 2시간째 복도에 줄만 서 있었다.‘이 사람이 정말······!’경신은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나다 못해 폭발 직전이었다. 여전히 건물 안은 오디션을 보러 온 여학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고, 줄이 줄어드는 속도는 속 터지게 더뎠다. 그나마 1층 로비를 지나 지옥 같은 지하 소강당 근처에 이르자, 덩어리 같던 줄이 드디어 한 줄로 정리되었다.그래도 나름 연예 기획사라고 복도 곳곳에 작은 작업실들이 군데군데 눈에 띄자, 경신의 감회가 새로웠다. 전생의 인생 대부분은 성인이 된 후 이런 삭막한 작업실에 갇혀 곡 작업만 하느라 보냈었으니까.잠시 동종업계의 향수에 젖어 있던 것도 찰나, 어느 작업실 앞을 지나던 경신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방음문 사이로 4마디 정도의 멜로디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그건 경신이 뼛속까지 알고 있는 가락이었다.‘이 음악이······ 왜?’회귀한 이 세계에서, 그것도 생판 처음 보는 신생 기획사에서 이 선율이 흐르다니. 뭐 이런 기괴한 우연이 다 있을까.당장이라도 작업실 문을 박차고 들어가 이 곡의 출처를 따지고 싶었지만, 경신은 간신히 이성을 붙잡았다. 줄은 이미 소강당 입구까지 다다랐고, 어서 마호를 만나 이 사태를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드디어. 시곗바늘이 7시를 훌쩍 넘겨서야 경신의 차례가 왔다.“저기, 학생? 어······ 여기 등록된 이름도, 부여받은 번호도 없네요. 나가세요.”입구 스태프가 경신의 행색을 훑어보며 으름장을 놓았다.“오디션 보러 온 거 아닙니다. 여기 사장 마호 씨와 6시에 약속하고 온 사람이에요.” “그런 사람 많거든요? 돌아가세요.” “여기 문자 보여드릴게요. 6시에 오라는 그분 말씀 직접 듣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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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새장에 가두고 싶은 카나리아]

태하는 사실 새벽 일찍 눈을 뜬 이후로 뭔가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아 이상했다.최근 그는 강남이 아닌 혜화동에 머무는 일이 잦았다. 마음이 심란할 때는 거실 창가로 가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마음을 정리하는데, 오늘은 특히 더 오래 주변만 보게 되었다.혜화역 골목 안에는 5층 이상 건물이 별로 없어서 그는 이 동네가 좋았다. 건물이 그나마 7층이라 거실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재미가 소속사만큼이나 쏠쏠했기 때문이었다.오늘 아침 그는 1층 카페로 발걸음을 옮겼다.이번 주 내내 모 드라마 시즌 2 OST 작업도 꽉 막혀 있었고, JJ엔터 쪽에서 하도 연락을 해대는 통에 정신도 없었다.제일 큰 원인은 그게 아니었다. 태하 자신이 지금 심란한 이유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이제는 무의식 한편으로 밀어 넣어야 하는 이름 하나가 계속 떠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얼마 전부터 눈치 없는 사장 마호는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경신을 불러들여 과외를 하도록 자신이 추진할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태하는 그게 더 걱정되었다.그런데 오늘 아침에 온 문자 하나가 태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태하야, 사실은 경신 양이 내 문자에 바로 답신을 줬었는데, 네가 신경 쓸까 봐 말 못 했어. 어쨌든 오늘 오겠대. 하하! 어때, 나 잘했지?]보고 또 보고. 읽고 또 읽고.그의 커피는 이미 식어버려 잔을 들기조차 귀찮아, 그저 펼쳐 놓은 노트북만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글자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그때 카페에서 한규련도 만나게 되었다.태하는 경신의 몸 상태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규련은 의대생이었고, 그의 고모가 있는 병원이 마침 태하가 후원하고 거액을 기부한 대한종합병원이라 호기심이 돋았다.경신에 대해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물론 이 역시 우연이 아니라 태하가 만들어 낸 호의이기는 했었다. 2월 28일, 경신의 생일에 정말 기숙사로 돌아오는지 확인하러 S대에 갔다가 연건 캠퍼스 근처에서 방을 구하려 하는 한규련에게 제 집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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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숨 막히는 재회, 엇갈린 신호]

평소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릴 만큼 서늘한 위압감을 풍기던 MH 엔터테인먼트의 젊은 수장.그런 그가 웬 여자를 보자마자 무엇에 홀린 듯 다가서더니,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여 품 안에 가둬 버리는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소강당을 채우던 팽팽한 오디션장 공기는 경신의 난입과 태하의 돌발 행동으로 인해 일순간 정지 화면처럼 굳어버렸다.매사 시큰둥한 표정으로 감정도,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아 ‘인간의 탈을 쓴 AI’라 불리던 태하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눈동자는 차갑게 식어 있기는커녕, 눈앞의 여대생 하나를 씹어 삼킬 듯 탐욕스럽고 뜨겁게 벼려져 있었다.이 희귀하고도 야릇한 긴장감을 숨죽인 채 지켜보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MH엔터가 배출한 초특급 데뷔 2년 차 괴물 신인 그룹, ‘에스트렐라’의 멤버들이었다.“형들, 저 사람 혹시 태하 님 생일 파티 때 왔던 그 냉미녀 맞아? 분위기가 너무 다른데?”팀의 막내 시온이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호들갑을 떨자, 운동선수급 피지컬을 자랑하는 도국이 팔짱을 낀 채 낮게 혀를 찼다.“어쨌든 청춘 드라마치고는 수위가 너무 아슬아슬한데.”“태하 님 한국어 과외 선생님, 맞는 거 같은데. 호랑아, 안 그래?”날카로운 인상의 조각 미남 세용이 안경을 올려 쓰며 턱짓으로 무대 쪽을 가리키자, 그룹의 리더이자 비주얼 센터인 압도적인 외모를 자랑하는 예명 '호랑'을 쓰고 있는 정기범이 인상을 사납게 찌푸렸다.“아, 몰라. 오늘 진짜 피곤하네.”저돌적이고 야성적인 체구, 날이 바짝 선 짐승의 눈빛을 한 기범은 지금 태하의 손안에 갇혀 있는 경신에게서 시선을 단 한 치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눈동자엔 일렁이는 불쾌감과 서슬 푸른 분노가 노골적으로 얽혀 들었다. “호랑 형, 참! 오늘도 서정민이 케이크 보냈다며? 팬클럽 자격으로 보냈다는데, 봤어? 일단 도국이 형하고 먹으려다가 참았어.”옆에서 시온이 눈치 없이 어깨를 톡톡 두드렸지만, 가슴속에서 짐승 같은 적의를 들이켜던 기범은 낮게 으르렁거렸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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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예쁜 쓰레기 옆에 예쁜 빌런 추가요]

꼬여도 한참 꼬인 하루였다.그러고 보니 전생에서도 어렴풋이 기억나는 파편들 때문에 뭘 조심해 보려 애를 썼건만, 결국은 새드 엔딩이었다.이번 생은 사랑 따위에 목매지 않고 무소의 뿔처럼 당당하게 혼자 가리라 다짐하며 미신 따위 믿지 않으려 했건만······. 현재의 위험인물과 전생의 인연을 세트로 마주한 지금, 경신은 눈을 질끈 감을 수밖에 없었다.경신은 가슴이 들썩이도록 크게 심호흡하며, 태하의 넓은 어깨 너머로 슬쩍 도윤을 바라보았다.과거의 도윤은 잘난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와 능글맞은 사회성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던 사내였다. 지금의 그 역시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하늘이 내린 스타이자, 경신이 홀로 가슴에 품었던 남자.두 손을 배에 얹고 몸을 웅크린 채 아가들의 눈을 가려주고 싶은 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저 사람이 바로······ 엄마가 첫 번째 인생에서 짝사랑했다가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주고, 평생을 그리워했던 남자야.’예쁜 쓰레기, 황도윤. 그것이 경신의 첫사랑에 대한 정의였다.태하의 눈치를 살피니 기색이 영 좋지 못했다. 할 말은 많으나 억지로 삼키는 듯한 기색이었다. 두 남자가 대화를 시작하자 태하는 그저 물끄러미 경신을 지켜보았다.“어휴, 태하 님. 우리 사이에 왜 이러실까.”“무슨 사이?”“하하, 앞으로 곡 받고 노래 부를 사이죠.”“설마.”도윤이 성큼 태하의 옆을 지나 움츠려 있는 경신에게 순식간에 다가왔다.“저번에 보니 태하 님이 예쁜이한테 좀 신경 쓰는 것 같았는데, 오늘은 이미지가 다르네?”하지만 태하는 도윤의 농담에 아랑곳하지 않고 권태로운 눈빛으로 서늘한 말을 흘렸다.“입 다무는 게 신상에 좋을 거야.”“아이고, 살벌해라. 몸도 얼굴도 예쁜 귀염이에게 말 좀 걸었다고, 질투하시는 건가?”경신은 이 죄 많은 몸뚱이를 어찌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하지만 전생의 기억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경신은 이제 더는 도윤식 농담에 흔들리지 않았다. 뱃속 아가들과의 무지갯빛 미래를 생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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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과거에게 보내는 상냥한 이별]

태하는 지금 눈앞이 캄캄했다.기억조차 온전치 못하다는 경신이 제 품 안에서 종이 인형처럼 힘없이 꺾여 쓰러지다니. 대기실로 안고 들어가 소파에 그녀를 뉘어두고 119를 부르려던 찰나, 다행히 경신이 가늘게 떨리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평소에도 이렇게 위태롭게 살았던 건지, 제 가슴 한구석이 홧홧하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정신이 들어?”이 와중에 마호와 도윤, 그리고 현수까지 줄줄 사탕처럼 뒤를 쫓아오는 바람에 대기실은 이미 포화 상태라 더 정신 없을 것 같았다.“아······ 네. 괜찮아요. 하하.”사람들과 시선을 맞추는 것조차 버거워 보일 정도로 기력이 쇠한 건지, 경신은 그저 해사하게 웃으며 눈만 깜뻑거렸다.“예쁜이가 몸이 약하네. 현수 씨, 아까 너무 긁어댄 거 아니야?” “도윤 씨! 그냥 저 여자애가 혼자 쓰러진 거라니까!”그때, 쿵ㅡ!경신의 안색을 살피던 태하가 싸늘한 눈빛으로 소파 테이블을 거칠게 걷어찼다. 둔중한 타격음이 정적을 깨부수었다.“쉿, 환자 앞이야.”단 한 마디였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서릿발보다 날카로웠다. 태하의 폭발 직전인 감정을 읽어낸 듯, 시끄럽게 떠들던 이들이 일순간 숨을 죽였다. 태하는 서늘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어 보다 경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오히려 다행이라는 듯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원래 빈혈이 좀 있어서 그래요. 바쁘실 텐데 폐를 끼쳤네요.”경신의 사과가 떨어지기 무섭게 도윤이 다시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태하와 경신 사이의 좁은 공간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민 그가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그나저나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더니. 저번엔 연예인 뺨치게 화려한 스타일이더니, 오늘은 청초한 모범생 버전이네?” “연예인 뺨을 쳐요? 제가요?”자신에 대한 기억이 전무한 상태에서 말을 섞을수록 의아한지 경신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옆에서 안절부절못하던 마호가 냉장고에서 생수 한 병을 꺼내 뚜껑을 따더니 경신에게 건넸다.“우리 경신 양은 실제로도 과 수석을 하는 모범생이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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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이런저런 남자들! 이제 제발 안녕!]

경신이 너무 진지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바람에 대기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하지만 도윤은 그 정적을 비웃듯 다시 경신에게 다가와, 만개한 노란 국화꽃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이런······ 예쁜아, 우와. 감동인데? 나 방금 눈물 날 뻔했잖아. 그래, 고마워.”오늘 경신은 도윤의 낯선 민낯을 보긴 했지만, 그나마 남아있던 좋았던 기억조차 얼룩질까 두려워 더는 과거를 들추지 않기로 했다. 그를 폄하하는 것도 멈추기로 했다. 온 힘을 다해 그를 사랑했던 과거의 자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였으니까.그때, 눈치 없는 현수가 다시 다가와 경신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독설을 내뱉었다.“너, 볼일 끝났으면 어서 꺼져. 시시한 너 따위를 상대할 정도로 여기 사람들 한가하지 않거든? 설마 관심 끌어보려고 아픈 척 연기한 건 아니지?”아, 저 어여쁜 입술에 칼날이라도 달린 걸까. 사람 심장을 콕콕 쑤셔대는 말을 어쩜 저리도 찰지게 할까. 아마 태하나 도윤이 경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못견디게 거슬렸던 모양이다. 경신은 아가들에게 ‘똥이 무서워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 피한다!’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현수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현수 씨, 내가 시시하다면서 왜 그렇게 신경을 써요? 원래 세상은 내 맘 같지 않은 거에요. 자꾸 그렇게 심술부리면 얼굴 더 못생겨져요.”여자들만의 서늘한 기 싸움 끝에 승자는 역시나 경신이었다.“야! 너 뭐라고?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현수가 다시 발끈하며 달려들려던 찰나, 쾅ㅡ! 태하가 과격하게 일어서며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굉음을 냈다.“아, 시끄럽게.”의자 하나로 상황을 평정한 태하는 나른하면서도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좌중을 훑었다. 그 시선이 어찌나 서늘한지 경신의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그가 다정할지도 모른다는 착각이 순식간에 증발해버린 순간이었다.“아, 놀라라. 태하 씨, 젊어서 그런가 힘이 넘치시네?”“자자! 나도 피곤하고 지쳤다. 오디션 마무리해야 하니까 다들 돌아가!”얼른 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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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나쁜 남자와 얽힐 준비]

태하는 들뜬 마음을 갈무리하고 VIP 관계자석으로 돌아왔다. 사람 좋은 마호와 MH 엔터테인먼트의 유일한 아티스트인 에스트렐라 멤버들은, 평소 AI처럼 무미건조하던 태하의 희귀한 반응을 두고 수군거리기 바빴다.“태하 님, 그 여학생 몸은 괜찮은 겁니까?” “어.” “진짜 성격 화통하던데, 생일 파티 때 초대하신 그 과외 선생님 맞죠?” “그래.”시온과 도국의 질문까지는 건성으로 대답했는데, 정기범은 날이 서 있었다.“그 여자랑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여학생, 선생님, 그리고 '그 여자'. 모든 화살표가 한 인물을 가리키고 있었다. 태하는 팔짱을 낀 채, 조금 전까지 경신이 서 있던 빈자리를 묵묵히 응시했다.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절대 다가오지 말라고 했는데, 기억을 잃고 먼저 나타난 그녀였다.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당부. 요즘은 나쁜 남자가 대세라는 엉뚱한 궤변.이어 그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매혹적인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그녀를 공략해야 할지 선명한 이정표가 보였다. 하늘이 준 기회를 놓칠 만큼 어리석은 남자가 아니었으니까.“잘해 보려고.”그렇게 팔짱을 끼고 선전포고를 하듯 정기범에게로 시선을 보냈다. 예전부터 거슬렸는데. 여전히 정기범은 수컷의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우와, 상남자.” “남자는 직진이죠.” “태하 님, 순정파군요. 하하!”휙, 태하가 고개를 돌려 수다 삼매경에 빠진 멤버들에게 따가운 눈빛을 보냈다. 자신과 경신에 대해 가볍게 떠드는 꼴을 단 한마디도 들어줄 요량이 없었다.“다들, 조용히 해.”서늘한 경고 한마디면 충분했다. 소강당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고, 오디션은 무거운 긴장감 속에 이어졌다.태하는 다시 곱씹어 보았다. 경신이 한 말을 말이다.“Hombre malo(나쁜 남자)······. 그거 해줘야겠네.”경신의 목소리를 되새기던 태하의 입술 사이로 낮은 혼잣말이 슬그머니 새어 나왔다. *** 경신은 회사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도망치듯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의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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