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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지우지 않은 이름

Author: YuIm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9-30 09:01:50

태혁은 인쇄가 끝난 종이를 한참 뒤에야 집어 들었다. 윤하람. 화면으로 볼 때는 떨려서 읽지 못했던 이름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아이는 조금 전에도 분명 윤하람이라고 말했다.

서진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거짓말은 태혁 자신이 하고 있었다. 성이 다르니 아닐 수도 있다고, 닮은 것뿐일 수도 있다고. 인정하고 나면 지난 5년을 어디서부터 감당해야 할지 몰라서였다.

처음 혼인신고를 하던 날에도 서진의 성을 적은 종이가 있었다.

"아이가 생기면 내 성을 쓰게 하고 싶어요."

결혼식 날짜를 또 미뤄달라는 집안의 요구를 전한 직후였다. 서진은 식을 서두르자고 하지 않았다. 대신 혼인신고서와 자녀의 성을 정하는 협의서를 나란히 놓았다.

"나중에 어른들이 싫어하시면……."

태혁이 말을 흐리자 서진이 펜을 내려놓았다.

"지금 당신한테 물었어요. 어른들 말고."

그는 서진의 이름 옆에 제 이름을 적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작은 반지를 맞췄고, 서진은 종이봉투를 무릎에 올려두고 자꾸 들여다봤다. 그날만큼은 둘이 무엇이든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였을까. 어머니가 식사 자리에서 서진을 깎아내리면 태혁은 집에 돌아와서야 미안하다고 했다. 회사 일정에 밀린 약속은 다음 주로 옮겼다. 서진이 다음 주도 기다렸으므로,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레스토랑에서 생각할 시간을 갖자고 말했을 때도 그랬다. 먼저 미안하다고 해주기를 바랐다. 태혁이 바라던 사과를 서진이 왜 해야 하는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 뒤로 서진은 두 번, 이혼에 관해 이야기하자고 했다. 첫 번째에는 회의가 있다는 답을 보냈고, 두 번째에는 그렇게까지 할 일이냐고 되물었다. 결국 서류를 마주했을 때도 서진이 마음을 돌릴 거라고 믿었다. 절차가 끝날 때까지 태혁이 먼저 붙잡은 적은 없었다.

이혼이 끝난 뒤에는 연락이 끊겼다. 친구들에게 제 사정을 말할 때조차 아내가 떠났다는 말 대신, 서진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했다. 그 편이 자신이 덜 비겁해 보였다.

태혁은 서류를 접으려다 멈췄다. 종이가 아이 이름 한가운데에서 구겨질 참이었다. 손바닥으로 주름을 펴서 봉투에 넣었다.

비서실장에게서 문자가 와 있었다. 내일 일정 조정 여부를 묻는 말이었다. 태혁은 서진과 아이를 찾았다는 소식을 본가에는 전하지 말라고 썼다. 보내기 직전, 문장 하나를 더 붙였다.

‘아이 사진이나 생활 정보도 더 모으지 마세요. 필요한 이야기는 제가 직접 듣겠습니다.’

그 정도로 무엇이 달라지겠느냐고 스스로 묻다가 휴대폰을 내려놨다. 지금 당장 달라지지 않는 일도 해야 했다. 용서받을 수 있는 일만 골라 하고 싶었던 것이 지난날의 자신이었다.

***

서진은 잠든 하람이의 머리맡에서 물컵을 치웠다. 아이는 양말을 벗다가 그대로 잠들어 한쪽 발만 맨발이었다. 남은 양말을 벗겨주는데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엄마…… 모래 아저씨 또 와?"

"지금은 아니야. 자자."

아이의 눈이 다시 감겼다. 서진은 이불 끝을 펴고 한동안 침대 곁에 앉아 있었다.

이혼을 마친 뒤에도 몸이 자꾸 처졌다. 일을 너무 몰아 했다고 생각하다가 병원에 갔고, 그곳에서 임신을 알았다. 돌아와 혼자 날짜를 세어봤던 밤을 서진은 아직 기억했다. 태혁에게 알리려고 전화기를 들었다 놓은 밤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은 이유를 하나로 말하기는 어려웠다. 아이를 알면 달라질지 모른다는 기대가 싫었고, 달라지지 않을 때 받을 상처는 더 무서웠다. 태혁의 집안에 다시 들어가 사정해야 할 것 같아서 겁이 났다.

그래도 하람이의 출생신고는 미루지 않았다. 필요한 기록을 확인하고, 아이 이름을 적고, 보호자 연락처에는 자신의 번호를 썼다. 그 뒤로는 그 번호로 전화가 올 때마다 자신이 받았다.

태혁이 하람이를 몰랐다는 사실도, 서류에 아버지로 남아 있다는 사실도 그 시간을 바꿔주지는 않았다.

서진은 침대 옆 스탠드를 껐다. 그렇다고 앞으로 하람이에게 무엇을 말할지까지 혼자 피할 수는 없었다. 오늘 만난 아저씨가 누구냐고, 아이는 다시 물을 것이다.

그 대답을 하기 전에 확인해야 했다. 차태혁이 아이의 이름을 알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 그 이름에 걸린 일을 하려는 사람인지.

거실로 나온 서진은 내일 인쇄소에 가져갈 시안을 다시 열었다. 화면 한쪽에 하람이의 하원 시간이 떠 있었다. 눈앞의 일은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먼저 납품 파일을 저장한 뒤, 아이가 깰 때 들릴 수 있도록 방문을 조금 열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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