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떠보니 재벌가 안주인이 되어 있었다의 모든 챕터: 챕터 11 - 챕터 20

35 챕터

11화. 남편 면접

“그거 당장 쓰시려면 면접부터 보세요. 남편이라고 주장하는 분의 신원 확인이 아직 안 끝났거든요.”이서는 ‘첫 데이트 재현권’이라고 적힌 봉투를 등 뒤로 감췄다. 현관 조명 아래 선 도진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두 한 짝은 벗었고 다른 짝은 여전히 신은 채였다. 이서가 눈으로 그의 발을 가리키자, 그는 급히 나머지 구두를 벗어 가지런히 맞췄다.“면접? 나 지금 여보 남편 자리 지원한 거야?”“네. 경력은 인정 못 해요. 면접관이 그 1년을 기억 못 하니까.”“그럼 신입으로 들어갈게. 첫 월급은 뽀뽀로 받고 싶습니다.”“무급 인턴으로 시작하세요.”도진이 가슴을 짚고 비틀거리자 이서는 결국 웃었다. 문밖에는 아직 그의 퇴근을 기다리던 차의 엔진 소리가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하루 종일 회의실에 앉아 있었을 남자가 현관에서 신입 남편 행세를 하는 모습이 우스웠다. 그렇지만 이서의 손에 들린 봉투는 가벼운 장난만은 아니었다. 사진첩 속 자신은 먼저 사랑했고 먼저 다가갔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그 남자를 천천히 알아갈 시간이 필요했다.식당으로 들어가자 복례가 저녁 그릇을 정리하고 있었다. 이서가 의자 두 개를 마주 놓아 달라고 하자 복례는 사정을 묻지 않고 작은 테이블을 창가로 옮겼다. 따뜻한 조명 아래 놓인 물잔 두 개와 꽃병 때문에 면접장이라기보다 소개팅 장소처럼 보였다. 도진도 그걸 눈치챘는지 정장을 고쳐 입고 똑바로 앉았다.그는 평소 어느 자리에 앉았을까. 이서가 시선을 내리자 오른쪽 의자 다리에는 오래된 긁힌 자국이 있었다. 누군가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았다 일어서며 남긴 흔적처럼 보였다. 도진은 그녀가 꽃병을 옆으로 밀자 말없이 그 자리에 수첩을 놓아 주었다. 손길이 익숙해서 더 묘했다. 자신이 무얼 하려는지 알아차리는 남자 앞에서, 정작 그녀는 그가 커피에 설탕을 넣는지도 몰랐다.“지원자 강도진 씨. 특기는요?”“아내 예뻐하기. 부전공은 아내한테 혼나고도 또 웃기.”“객관식으로 대답해 주세요. 너무 위험한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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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들킨 마중

“여보, 이건 심사위원이 먼저 나한테 반해야 합격하는 시험이잖아. 너무 어려운 거 아니야?”도진은 봉투에서 꺼낸 종이를 양손으로 쥔 채 이서를 바라봤다. ‘한이서가 먼저 다음 데이트를 신청하게 만들 것.’ 글자를 다시 읽더니, 회사의 계약서를 검토할 때보다 훨씬 진지한 얼굴이 됐다. 창가에 놓인 찻잔에서는 아직 김이 올랐고, 식당 천장 조명이 그의 어깨 위로 부드럽게 떨어졌다.“자신 없으세요? 세계적인 그룹 대표님이?”“회사 계약은 조건이 보이는데 우리 여보 마음은 볼 때마다 예뻐서 자꾸 까먹어.”“그럼 탈락이에요. 말로만 점수 따려고 하니까.”“알겠습니다, 면접관님. 행동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단, 아내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실수하면 재시험 기회 한 번만.”이서는 웃음을 참느라 찻잔을 들었다. 도진은 종이를 정성스레 접어 재킷 안주머니에 넣었다. 그곳에 무엇을 더 넣어 두는지 이서는 몰랐지만, 구겨지지 않게 손바닥으로 천을 누르는 모습이 오래 눈에 남았다.다음 날 오전 도진은 출근 전 식탁에서 아내의 취향을 묻지도, 데이트 장소를 재촉하지도 않았다. 대신 이서가 좋아하는 딸기잼 뚜껑을 열어 주고, 신문을 넘기다가도 그녀의 접시가 비면 빵 한 조각을 더 놓았다. 현관에서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잠시 머뭇거렸다.“오늘 저녁에 봐, 이서 씨.”“어? 애기니 공주님이니 오늘은 안 해요?”“어제 면접에서 배웠잖아. 이름으로 부르면 당신이 더 편하다면서.”도진은 현관에서 한 번 돌아보더니 손가락으로 자기 볼을 가리켰다. 이서가 멀뚱히 쳐다보자 그는 얼른 손을 내렸다.“아, 이건 아직 심사 항목에 없지. 신청서부터 내겠습니다.”그러고는 정말 작은 메모지에 ‘퇴근 인사 예쁘게 받기’라고 적어 신발장 위에 올려놓았다. 그가 웃으며 나간 뒤 이서는 식탁에서 한동안 잼 병만 만지작거렸다. 듣기 싫다고 해 놓고 정작 조용하니 허전했다. 자신이 얼마나 유치해졌는지 깨닫자 괜히 토스트 끝을 세게 베어 물었다.오전 내내 이서는 저택을 둘러봤다. 햇빛이 내리꽂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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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라면 밀수단

“회사에서 춤추시면 비서실장님부터 말릴걸요.”이서가 꽃다발을 안고 대답하자 도진은 코트를 벗던 손을 멈췄다. 연분홍 꽃송이 사이에 끼워진 카드에는 ‘내일은 내가 당신을 기다릴게’라는 글씨가 남아 있었다. 도진은 그 문장을 읽는 이서의 얼굴을 살피더니 꽃잎 하나가 그녀의 니트에 걸린 것을 떼어 주었다.“그럼 회사에서는 참고, 집에서만 출게. 당신이 데이트하자고 하는 날에는 구두도 벗고.”“발 밟으면 데이트 취소예요.”“우리 여보 발은 국보인데. 내가 밟으면 내 발부터 벌 세워야지.”이서는 웃다가 꽃다발로 입가를 가렸다. 자기가 먼저 신청해야 한다는 조건을 그가 기억하고 있다는 게 묘하게 기뻤다. 도진은 더 조르지 않고 식당 쪽으로 걸음을 돌렸다. 뒤따라가던 이서는 그의 구두 뒤축에 붙은 낙엽 하나를 발견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퇴근하는 길에 꽃을 고르고 자신을 생각했을 남자의 하루가 그 작은 잎에 묻어 있는 듯했다.그날 밤 열한 시가 조금 넘었을 때, 이서는 배에서 난 소리에 잠을 깼다. 저녁도 충분히 먹었는데 머릿속에는 어쩐지 국물에 푹 젖은 면발만 떠올랐다. 휴대전화 화면을 켜자 도진에게서 보낸 메시지가 하나 남아 있었다. ‘잘 자, 이서 씨. 내일도 나 놀려 줘.’ 따로 쓰는 침실의 문은 조용했고 복도에는 발밑을 비추는 등만 켜져 있었다.이서는 토끼 슬리퍼를 신고 계단을 내려갔다. 낮에 꽃 냄새로 가득하던 현관은 어둠 속에서 넓고 고요했다. 주방으로 향하는 문을 밀자 차가운 타일이 슬리퍼 밑창을 통해 느껴졌고, 대리석 조리대 위에는 깨끗이 엎어 놓은 컵들이 줄지어 있었다. 전등을 하나만 켜도 주방 전체가 환해질까 봐 이서는 조리대 밑의 작은 조명부터 눌렀다.“라면 하나 끓여 먹는 게 무슨 첩보 작전도 아니고.”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리며 주방 끝 장롱을 열었다. 예전에 찾아낸 ‘공동 야식 금고’ 안에는 라면 봉지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작은 냄비와 젓가락 두 벌, 그리고 서만복이 남긴 쪽지가 있었다. ‘국물 넘치면 왼쪽 행주를 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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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뽀뽀 경매

“마지막 만두 하나, 시작가가 뽀뽀라니 너무 비싸잖아요!”이서가 젓가락으로 냄비를 가리켰다. 도진은 만두를 공중에 든 채 마치 경매장의 진행자라도 된 사람처럼 허리를 폈다. 밤 열두 시가 가까운 주방에는 라면 국물 냄새가 남아 있었고, 창문에는 두 사람이 뿜어낸 입김과 냄비의 김이 엷게 서려 있었다.“한이서 고객님, 현재 경쟁자는 저 한 명뿐입니다. 낙찰 가능성이 아주 높아요.”“경매 물품도 당신이 들고 있으면서 무슨 경쟁이에요. 그리고 뽀뽀는 화폐로 안 쳐요.”“아, 그렇구나. 그럼 내가 가진 전 재산을 내놓을게. 계좌 말고 내 마음.”“만두가 상할 때까지 그러실 거예요?”도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이서는 그 웃음에 또 속아 넘어갈까 봐 냄비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반달 모양 만두 하나가 국물을 머금어 통통하게 불어 있었다. 저것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바쁘다는 남자가 잠옷 차림으로 사랑을 흥정하고 있었다.어이없으면서도 그가 자기 앞에서 이렇게 마음껏 우스워지는 게 조금 좋았다. 사진 속에서만 보던 다정함이 이제는 제 눈앞에서 매일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아무리 돈이 많은 사람이라도 밤중에 만두 하나를 아내에게 양보하려고 저런 표정을 짓는다면, 그건 아무래도 사랑 때문일 것이다.이서는 손가락으로 식탁을 두 번 두드렸다. 회사에서 행사 예산을 조정하던 시절처럼 진지한 표정을 지으니 도진도 맞은편에서 허리를 세웠다. 하지만 그의 발에는 양말이 한 짝만 신겨져 있었다. 이서는 그걸 발견하고 웃음이 새어 나오는 바람에 입술을 깨물었다.“규칙 바꿔요. 음식은 음식으로만 겨루기. 뽀뽀니 포옹이니 그런 거 걸기 없기.”“그럼 난 불리한데. 가진 게 당신 사랑밖에 없어서.”“그 사랑으로 설거지나 해요.”“예, 사모님. 당장 그릇부터 모시겠습니다.”도진은 앉은 자리에서 그릇을 챙기려다가 이서가 아직 국물을 떠먹는 것을 보고 다시 내려놓았다. 행동 하나하나가 과장됐지만, 그녀의 속도를 재촉하지 않는 점만큼은 한결같았다.이서는 숟가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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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출근 도장

“옆자리 사람만 볼 거면 영화표 말고 제 얼굴 이용권을 끊으시죠.”이서가 영화 시간표를 접자 계단 아래에 선 도진이 손바닥을 내밀었다. 아직 잠옷 차림인 남자는 진지하게 무언가를 계산하는 얼굴이었다.“평생권으로 할게. 할부 안 돼? 내 월급 전부 내도 모자랄 것 같아서.”“하주그룹 대표 월급으로도 못 사요. 일단 내일 영화부터 보러 가요.”“합격하면 다음 데이트도 내가 신청해도 돼?”“그건 제가 먼저 하기로 했잖아요.”도진은 입술을 꾹 누르며 웃었다. 복도 벽등 아래로 그의 머리카락이 헝클어져 있었다. 이서는 별안간 그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 싶어져 손을 들었다가, 잠옷 주머니로 슬쩍 밀어 넣었다. 손을 잡는 일도 겨우 익숙해졌는데 이런 마음이 생기는 속도는 도무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먼저 다가오면 호들갑을 떨면서도, 혼자 있을 때면 방금 봤던 얼굴을 떠올리는 자신이 더 이해되지 않았다.다음 날 아침, 이서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창문 밖에서는 정원사가 호스로 길을 씻고 있었고, 문틈으로 갓 내린 커피 향이 스며들었다. 어젯밤 받아 둔 영화 시간표가 침대 옆에 있었다. 로맨스 영화 제목에 동그라미를 그려 놓은 건 분명 자기 손이었다. 도진이 보면 또 얼마나 놀려 댈까 싶어 종이를 뒤집었다.아래층에 내려가자 도진이 거실 거울 앞에서 넥타이를 매고 있었다. 흰 셔츠의 목깃을 세운 채 매듭을 만지는 모습이 익숙하고 능숙했다. 그런데 이서를 발견하더니 멀쩡하던 매듭을 풀어 버렸다.“아이고, 내 사랑 기상했어요? 남편 출근시키러 온 우리 아기, 오늘도 너무 예쁘다.”“지금 멀쩡한 넥타이는 왜 풀어요?”“아내 손이 오늘따라 너무 보고 싶어서.”“그런 이유로 회사를 다녀도 되는 사람이에요?”이서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도진이 내민 넥타이는 짙은 남색에 가는 은색 줄이 들어간 것이었다. 그는 그녀에게 선뜻 다가오지 않고 기다렸다. 이서는 잠시 망설이다 천을 받아 들었다.“가만있어요. 오늘은 제가 출근시켜 드릴게요.”도진의 얼굴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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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볼 편애 금지

“오늘 내내 이쪽 볼만 웃으면 어떡해. 내일은 반대쪽 볼도 출근시켜 줄 거지?”이서는 넥타이를 놓고 손바닥으로 도진의 가슴을 밀었다. 밀었다기보다 벌어진 거리를 겨우 한 뼘 되찾은 셈이었다. 조금 전 입술이 닿았던 그의 오른쪽 뺨에는 아무 흔적도 없었는데, 도진은 세상에서 가장 값비싼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그쪽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고 있었다.“볼이 무슨 직원이에요? 출근을 하게.”“우리 집에서는 특별대우 대상이지. 특히 방금 승진한 오른쪽 볼.”“그럼 왼쪽은 징계받았어요?”“아니. 억울해서 노동청에 신고할 준비 중.”이서가 웃음을 터뜨리자 도진은 기어이 반대쪽 뺨까지 내밀었다. 아침 햇살이 현관 유리를 뚫고 그의 콧날에 내려앉았다. 단정한 넥타이와 말끔한 재킷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두 눈만큼은 이서의 반응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오늘 할당량 끝났어요. 늦겠어요.”“알았어. 대신 내일은 좌우 균형을 진지하게 검토해 줘.”현관문을 나선 도진은 차에 오르기 전에도 한 번 돌아봤다. 이서가 손을 흔들어 주자 그는 오른쪽 뺨을 가리키고는 소리 없이 웃었다. 문이 닫히고 엔진 소리가 멀어지자, 이서는 뜨거워진 손등으로 입술을 가렸다. 충동적으로 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후회보다 먼저 떠오른 건 입술에 닿았던 그의 피부와 잠깐 멈췄던 숨소리였다.점심 무렵 휴대전화에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업무용 책상 앞의 도진이었다. 늘 무표정하게 찍히던 기사 사진과 달리 입가가 한껏 올라가 있었다. 메시지에는 ‘오늘 오른쪽 얼굴 근무 태도 우수. 왼쪽은 대기 발령’이라고 적혀 있었다.이서는 웃으며 휴대전화를 엎었다. 잠시 후 다시 집어 들고 ‘대표님, 회의 자료에 본인 얼굴 평가표 넣지 마세요’라고 답장했다. 답은 곧바로 왔다.‘아내가 먼저 칭찬해 준 부분이라 자신감이 좀 생겼습니다.’별말도 아닌데 가슴이 간질거렸다. 이서는 답장 대신 작은 웃음 표시 하나만 보내고 창가에 앉았다. 기억하지 못하는 결혼생활이 가끔 서러웠지만, 적어도 오늘 아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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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연애 허가서

“첫 남자친구 자리요? 이미 남편인 사람이 직급을 낮춰 달라고 조르는 건 처음 보네요.”이서가 넥타이를 놓자 도진은 그대로 허리를 숙인 채 웃었다. 조금 전 입맞춤을 받은 왼쪽 뺨이 정원등 아래서 희미하게 붉었다. 연못 가장자리를 스치는 밤바람에 이서의 머리카락이 흩어지자, 그는 손을 뻗으려다 멈추고 대신 자신의 재킷을 벗었다.“남자친구는 데이트도 신청할 수 있잖아. 남편으로만 살았더니 당신한테 고백하는 재미를 잊어버릴까 봐.”“그럼 결혼은 해 놓고 데이트 허가는 따로 받아야 해요?”“우리 집은 그래. 심사위원이 예뻐서 절차가 까다롭거든.”이서는 재킷을 받아 어깨에 걸쳤다. 안쪽에 남은 체온이 목덜미로 번졌다. 그의 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아침과 달리 이번에는 옷 전체를 빌려 입은 셈이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긴 소매가 손등을 덮었다. 도진은 제 옷이 그녀에게 얼마나 큰지 살펴보더니 만족한 듯 입가를 누르다가, 그녀가 눈을 흘기자 얌전히 앞을 봤다.저택으로 돌아오는 길에 이서는 지난 며칠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혼인관계증명서를 확인해야 안심할 수 있었다. 이제는 그가 퇴근하는 소리를 기다리고, 엉망인 달걀 프라이를 먹고, 스스로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기억 속에 없는 남편과 여기까지 온 것은 모두 자신이 선택한 일이었다. 현관 바닥에 드리운 두 사람의 그림자가 계단을 따라 길어졌다. 이서는 먼저 들어가지 않고 그의 걸음을 기다렸다. 그가 신발을 벗는 동안 재킷을 돌려주려 했지만, 아직 따뜻해서인지 손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결국 도진이 옷을 받아 들 때까지 어깨 위에 걸친 채 서 있었다. 둘 다 그 짧은 머뭇거림을 모른 체했다.“좋아요. 대신 처음부터 다시 연애해요. 제가 편한 속도로.”도진이 발을 멈췄다. 정원 길 끝, 켜진 현관등 아래서 그의 얼굴이 느리게 환해졌다.“그 말 녹음해도 돼? 잠금 화면 알림음으로 쓰고 싶은데.”“그럼 방금 허가 취소.”“안 돼. 나 이제 겨우 첫사랑 입학했단 말이야.”그가 어깨를 축 늘어뜨려 보이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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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남편 옷장 대란

“현석 실장님이 대표님 대신 회의하는 동안, 저는 누구랑 데이트해요?”이서가 손을 빼지 않은 채 묻자 도진이 식탁을 사이에 두고 몸을 기울였다. 맞잡은 손 아래로 데이트 계획서가 구겨지고 있었다. 그는 종이가 접히는 것도 모른 채 이서의 손등만 바라봤다.“토요일엔 내가 직접 가야지. 당신 앞에서 잘 보이려고 사는 사람인데.”“그럼 오늘은 출근하세요. 남자친구 첫 과제예요.”“알겠습니다. 우리 예쁜 감독님이 출근하라시면 가야지.”도진이 손을 놓자 이서는 손끝에 남은 온기를 슬그머니 치마에 문질렀다. 아침 식탁의 식빵은 이미 식었고 창문 너머에서는 정원수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에게 그저 하루의 출근일 뿐인 시간까지 붙잡아 두고 싶어진 자신이 조금 우스웠다.토요일 오전, 이서는 약속 시간보다 일찍 2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침실 문틈으로 옷걸이 부딪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문을 두드리자 안쪽에서 도진이 허둥대는 기척이 났다.“여보, 잠깐! 아직 포장 안 끝났어!”“사람이 무슨 선물이에요?”문이 열리자 이서는 말을 잃었다. 침대에는 검은 재킷 여섯 벌이 펼쳐져 있었고, 바닥에는 회색 넥타이들이 뱀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도진은 흰 셔츠를 입은 채 양손에 거의 똑같아 보이는 검은 상의를 들고 있었다. 발에는 양말을 서로 다른 색으로 신었다.평소에는 셔츠 깃에 주름 하나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침대 끝에는 가격표가 그대로 붙은 운동화까지 놓여 있었고, 탁자에는 ‘너무 꾸민 티 내지 말기’라고 적힌 쪽지가 구겨져 있었다.“첫 데이트인데 당신 옷이 제 옷보다 더 많아요?”“하나만 골라 줘. 왼쪽은 조금 편한 거고 오른쪽은 아주 편한 거야.”이서는 양쪽 옷을 비교했다. 재단부터 단추까지 똑같았다. 오른쪽 소매에만 자그마한 윤기가 돌았다.“편한 게 아니라 둘 다 회장님들 회식 복장 같은데요.”“나 회장님 아니야. 오늘은 남자친구 지원자.”옷장 한편에는 청바지와 얇은 니트가 걸려 있었다. 이서가 연한 베이지색 니트를 꺼내자 도진은 눈을 동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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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또 첫눈에

“여보. 당신도 나한테 이 말을 쓰려고 했어?”도진이 펼쳐 든 책의 첫 장에는 이서가 방금 적은 문장이 있었다. ‘당신이 나를 다시 좋아하게 만들어 주는 동안, 나도 당신을 새로 좋아해 볼게요.’ 이서는 그의 손에 들린 책과 제 앞에 놓인 책을 번갈아 봤다. 두 권 모두 표지에 작은 푸른 창문이 그려진 같은 소설이었다. 서점 계산대 뒤로 종이봉투가 쌓여 있었고, 바리스타가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가까이서 들렸다. 이서는 방금 전 소설의 첫 문장을 읽고 책을 골랐다. 낯선 도시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이 같은 길을 서로 다른 이유로 걸어가는 이야기였다. 도진도 그런 이유로 골랐을까 싶어 표지를 쓸어 보았다. 종이 끝에 묻은 잉크가 아직 손가락에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따라 쓴 거 아니에요. 저는 당신 책에 뭐 적었는지도 못 봤는데.”“알아. 그래서 지금 남편 심장이 서점 바닥에 굴러다니는 중이야.”“주우세요. 직원분들 바쁘신데.”도진은 책을 가슴에 꼭 붙이고 몸을 숙였다. 정말로 바닥에서 무언가를 주워 올리는 시늉이었다. 이서가 웃자 그는 손바닥에 없는 심장을 얹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옆 계산대 직원이 웃음을 참으며 포장지를 접었다. 이서는 서둘러 도진의 손을 밀어 내고 두 권의 책을 챙겼다. 그런데 봉투가 두 장이나 놓여 있는데도 도진은 한 장에 책 두 권을 넣으려 했다.“그렇게 넣으면 누구 선물인지 모르잖아요.”“당신 것도 내 것처럼 가까이 두면 좋겠어서.”이서는 종이봉투 하나를 그의 손에 쥐여 줬다. 나눠 들고도 그는 책등이 닿도록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그가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게 민망하면서도 조금 부러웠다. 그가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뻔뻔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동안, 이서는 겨우 얼굴이 붉어지는 일밖에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도진은 그녀가 웃기만 하면 그걸 무슨 대단한 답장처럼 받아 주었다.밖으로 나서려던 이서는 도진이 건넨 책의 속표지를 펼쳤다. 거기에는 짧은 글이 쓰여 있었다.‘또 처음부터 당신에게 반하고 싶다. 오늘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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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방문 앞 베개

“내가 먼저 꼬시러 갈 테니까.”이서가 그렇게 말하자 도진은 맞잡은 손을 놓지도 못하고 차창을 바라봤다. 저녁길에 늘어선 신호등이 그의 옆얼굴을 붉게 비췄다. 조금 전까지 재잘거리던 사람이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이서는 괜히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왜 말이 없어요? 싫어요?”“아니. 지금 속으로 축포 열두 번 터뜨렸어. 열세 번째는 당신 놀랄까 봐 참고 있고.”“그런 건 조용히 하세요. 기사님 놀라시겠어요.”운전석의 기사가 앞만 보며 어깨를 작게 움직였다. 도진은 자세를 바로잡더니 마치 중요한 약속을 받은 사람처럼 이서의 손등을 엄지로 한 번 쓸었다. 집에 도착해서는 그녀가 산 책을 먼저 들고 현관까지 따라왔다. 봉투를 침실 앞에 놓아 주고도 돌아서지 못하던 그는, 이서가 방문 손잡이를 잡자 비로소 제 방 쪽으로 발을 옮겼다.“여보, 나 꼬시는 건 천천히 해도 돼. 난 이미 넘어왔으니까.”“그럼 다시 세워 놓을까요?”“안 돼. 여기서 넘어져 살래.”이서는 문을 닫고 나서야 웃음을 터뜨렸다. 침대 위에는 서점에서 골라 온 책이 놓였고, 창밖 성북동 지붕 위로 검은 구름이 모여들고 있었다. 책의 첫 장을 펴자 도진이 써 준 글씨가 다시 나타났다. ‘또 처음부터 당신에게 반하고 싶다.’ 이서는 그 문장을 읽고 책갈피를 끼웠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수첩에 다음 데이트에 가고 싶은 장소를 적었다. 그를 곤란하게 만들 장난도 한 줄 덧붙였다. 스스로 적어 놓고도 부끄러워 수첩을 뒤집었다.밤이 깊어지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창틀을 두드리던 빗방울이었는데, 자정을 넘길 무렵에는 정원 나무가 흔들릴 만큼 굵어졌다. 이서는 책을 가슴에 얹은 채 누워 있다가 갑작스러운 천둥에 어깨를 움츠렸다. 침대 머리맡 조명이 한 번 깜빡였고, 멀리서 가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릴 적부터 천둥을 유난히 싫어했던 것은 기억났다. 하지만 이 낯선 저택의 복도가 얼마나 길고, 아래층까지 내려가려면 문을 몇 개 지나야 하는지는 여전히 익숙하지 않았다.물 한 모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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