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동의서에 적힌 번호가 제 번호입니다.”
강무겸의 말을 듣는 순간 걸음이 멈췄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3년 전에도 사용하던 번호입니다.”
“그때는 태광이를 몰랐다면서요.”
“몰랐습니다.”
“그런데 왜 제 동의서에 당신 번호가 있어요?”
무겸은 잠시 침묵했다.
“당시 서원미술관의 작품 목록을 검토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담당자에게 연락처를 남겼습니다.”
“그럼 미술관과 관련이 있었던 거네요?”
“네. 하지만 이태광 씨와는 별개입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네요. 당신은 계속 사건과 관련된 곳에 있었는데 정작 아무것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의심하셔도 됩니다.”
“당연히 의심하죠.”
“대신 직접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뭘요?”
“사라진 그림이 경매에 나왔습니다.”
◇
오후 4시.
나는 무겸과 함께 서울의 한 미술품 경매장을 찾았다.
전시장은 생각보다 화려했다. 유리문 너머로 수십 점의 그림이 걸려 있었고,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작품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에요.”
“불편하시면 말씀하십시오.”
“불편한 건 아니에요. 그림 하나 사려고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게 신기해서요.”
무겸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림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고, 돈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습니다.”
“강무겸 씨는요?”
“저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보러 옵니다.”
“직업병이네요.”
“그런 편입니다.”
처음이었다.
이 남자와 이렇게 평범한 대화를 나눈 것은.
나는 괜히 어색해져 앞쪽으로 걸었다.
“그림은 어디 있어요?”
“안쪽 전시실입니다.”
무겸은 내 걸음에 맞춰 천천히 따라왔다.
전시실 끝에 도착했을 때 나는 숨을 멈췄다.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
거울 앞에 서 있는 모습.
분명 사진에서 봤던 그림이었다.
“저거예요.”
나는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작품명은 '붉은 방'.
기존에 확인했던 '거울 앞의 여자'와 달랐다.
“제목이 바뀌었네요?”
“경매에 출품하면서 바꿨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 것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요?”
“소유자가 변경한 제목으로 등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다만 작품 이력은 확인해야 합니다.”
나는 작품 설명을 읽었다.
제작 연도와 크기만 적혀 있었다.
작가 이름은 비공개.
예상 낙찰가는 8억 원.
“8억이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무겸이 작게 웃었다.
“놀라셨습니까?”
“당연하죠. 제 얼굴이 그려진 그림인데 8억이라니.”
“실제로 채설주 씨를 모델로 제작한 작품이라면 초상권 문제도 검토해야 합니다.”
나는 다시 그림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상해요.”
“어떤 점이요?”
“제 얼굴인데 제 얼굴 같지 않아요.”
무겸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어디가 다릅니까?”
“눈이요.”
나는 거울에 비친 여자의 눈을 가리켰다.
“저는 웃을 때 오른쪽 눈이 조금 더 작아져요. 그런데 그림은 반대예요.”
무겸은 그림과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상하게 심장이 빨라졌다.
“왜 그렇게 봐요?”
“확인하고 있었습니다.”
“뭘요?”
“말씀하신 차이를요.”
나는 괜히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렇게 빤히 볼 필요는 없잖아요.”
“죄송합니다.”
그가 한 걸음 물러났다.
그 모습에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사과할 정도는 아니고요.”
무겸의 입가에도 옅은 미소가 번졌다.
◇
우리는 경매장 직원에게 작품의 출처를 문의했다.
직원은 소장 이력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해당 작품은 개인 소장자가 위탁한 작품입니다.”
“누가 위탁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내 질문에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위탁자 정보는 공개하기 어렵습니다.”
무겸이 명함을 내밀었다.
“강무겸입니다. 이 작품과 관련된 형사 사건이 있습니다. 담당 부서에 전달 부탁드립니다.”
직원의 표정이 달라졌다.
“형사 사건이요?”
“도난 가능성이 있는 작품입니다. 경찰에 관련 자료도 제출할 예정입니다.”
직원은 확인 후 연락하겠다며 명함을 받아 갔다.
전시장을 나오면서 내가 물었다.
“정말 경매를 막을 수 있을까요?”
“도난품으로 확인되면 거래를 중단할 근거가 생깁니다. 지금은 확인이 먼저입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무겸이 내게 종이컵 하나를 건넸다.
“이건 뭐예요?”
“따뜻한 차입니다.”
“언제 샀어요?”
“직원과 이야기하시는 동안요.”
나는 컵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요.”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직요.”
“저도 못 했습니다.”
나는 그를 올려다봤다.
“그럼 밥 먹으러 갈래요?”
무겸이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저와요?”
“오늘 같이 돌아다녔잖아요. 밥까지 먹는 게 이상해요?”
“아닙니다.”
“그리고 물어볼 것도 많아요.”
그가 웃었다.
“역시 그냥 식사는 아니군요.”
“당연하죠.”
그렇게 말했지만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이태광이 죽은 이후 처음으로 누군가와 저녁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경매장 근처 작은 식당에 들어갔다.
우리는 마주 앉아 식사를 주문했다.
“강무겸 씨는 왜 미술품 감정 일을 시작했어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직접 그리기도 해요?”
“가끔요.”
“잘 그려요?”
“남에게 보여줄 실력은 아닙니다.”
“궁금한데요.”
그가 물잔을 내려놓았다.
“언젠가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멈칫했다.
언젠가.
그 말에는 앞으로도 우리가 만날 거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나는 일부러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아까 그림 말이에요.”
“네.”
“진짜로 8억이나 할 가치가 있어요?”
무겸이 잠시 생각했다.
“작가와 출처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가격을 정당화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 누군가 일부러 가격을 올렸을 수도 있겠네요.”
“가능합니다.”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태광이가 죽은 이유도 그림의 가치 때문일까요?”
“그것도 조사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때 무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경매장 직원이었다.
그는 잠시 통화하다 표정이 굳어졌다.
“무슨 일이에요?”
통화를 끝낸 무겸이 나를 바라봤다.
“경매장 측에서 작품을 임시 보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뭔데요?”
무겸이 낮게 대답했다.
“작품을 위탁한 사람이 오늘 직접 찾아왔다고 합니다.”
나는 그를 바라봤다.
“누군데요?”
“경매장에서는 신원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위탁자가 작품의 원래 소유자를 안다고 주장했답니다.”
“이태광이요?”
“아닙니다.”
그가 잠시 말을 멈췄다.
“이태광 씨에게 그림을 팔았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나는 천천히 물잔을 내려놓았다.
지금까지 태광이 그림을 의뢰했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에게 그림을 구입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그 사람을 만나야겠어요.”
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휴대전화를 꺼냈다.
“경매장에 다시 연락해 봐요. 그 사람한테 직접 물어보고 싶어요.”
“무엇을요?”
나는 무겸을 똑바로 바라봤다.
“도대체 누가 제 얼굴을 그리라고 시켰는지요.”
“설주 씨, 어제 일은 후회하지 않습니까?”강무겸의 질문에 나는 커피잔을 내려놓았다.그의 작업실에서 마주 앉은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얼굴이 뜨거워졌다.“어제 일이라면…….”“입맞춤 말입니다.”“그렇게 대놓고 말해야 해요?”무겸이 희미하게 웃었다.“다른 뜻으로 알아들으실까 봐요.”“후회 안 해요.”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그런데 우리 관계가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아서 조금 무서워요.”“저도 조심스럽습니다.”“무겸 씨도요?”“좋아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으니까요.”그 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나는 괜히 책상 위 서류를 집어 들었다.“그럼 오늘은 그림부터 확인해요.”“또 도망가시는군요.”“도망 아니거든요.”무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우리는 이태광의 수첩과 '밤의 창' 감정 기록을 나란히 펼쳤다.“태광이가 원본은 팔지 않았다고 적었잖아요.”“네. 실제 작품이 어디로 이동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무겸은 과거 자신이 촬영했던 사진을 보여주었다.어두운 방 안에 창문 하나가 그려져 있었다.창밖에는 희미한 달빛이 비쳤다.“생각보다 예쁘네요.”“제가 처음 감정했을 때도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그런데 왜 가짜를 만들었을까요?”“진품을 따로 보관한 채 복제품을 거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나는 사진을 확대했다.“잠깐만요. 여기 창문 아래에 작은 흠집이 있어요.”무겸이 고개를 끄덕였다.“기존 상태 보고서에 기록된 손상입니다.”“그럼 이 흔적이 있으면 진짜인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되겠네요.”“맞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지만요.”그때 무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담당 형사였다.운송업체 보관 창고에 남아 있던 작품 상자 3점을 확보했다는 연락이었다.무겸은 전화를 끊고 나를 바라봤다.“작품 확인을 요청받았습니다.”나는 바로 가방을 챙겼다.“그럼 가요.”“설주 씨도요?”“당연하죠. 태광이가 남긴 단서잖아요.”◇오후 2시.경찰의 입회 아래 보관 창고에서 작품 확인
“그날 이태광이 왜 거래를 취소하려 했는지 알고 싶어요.”내 질문에 오정민의 표정이 굳어졌다.우리는 서원미술관 재단 상담실에서 다시 마주 앉아 있었다.“이미 경찰에 전부 설명했습니다.”“그럼 저한테도 설명해 주세요.”“채설주 씨, 이 사건에 너무 깊이 관여하시는 것 아닙니까?”나는 가방에서 계약서 사본을 꺼냈다.“제 이름으로 동의서를 위조한 사람들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오정민은 입을 다물었다.“태광이가 거래를 취소하려고 했던 이유, 정확히 뭐예요?”한참 뒤 그가 대답했다.“처음에는 이태광 씨도 동의했습니다. 작품 등록번호를 통합하는 작업이라고 설명했으니까요.”“그런데요?”“실제 작품과 서류에 적힌 작품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그걸 누가 바꿨는데요?”“그건 저도 모릅니다.”“또 모른다고요?”목소리가 높아졌다.오정민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채설주 씨는 이태광 씨가 피해자라고만 생각하시겠죠.”“무슨 뜻이에요?”“그 사람도 처음에는 수수료를 받으려고 했습니다.”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알아요. 계약서 봤어요.”“그럼 왜 계속 저만 추궁합니까?”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태광이가 잘못했다면 그것도 밝혀야죠. 하지만 그렇다고 죽어도 되는 건 아니잖아요.”오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그리고 그 사람이 죽은 다음 날, 이의신청을 철회한 사람은 당신이잖아요.”그의 손이 멈췄다.“왜 그랬어요?”긴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제가 처리했습니다.”나는 숨을 삼켰다.“태광이 이름으로요?”“재단이 문을 닫기 전에 거래를 정리해야 했습니다.”“사람이 죽었는데 서류부터 정리했다고요?”“그 일이 살인 사건으로 번질 줄은 몰랐습니다.”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적어도 당신이 뭘 숨겼는지는 알겠네요.”◇상담실을 나온 나는 강무겸에게 전화를 걸었다.“오정민 만났어요.”“어떻게 됐습니까?”“이의신청을 자기가 철회했다고 인정했어요.”“중요한 진술이군요.”
‘설주 이름은 빼.’나는 계약서 뒷면에 남은 글씨를 한참 바라봤다.이태광의 필체였다.3년 동안 함께하면서 수없이 봤던 글씨. 마지막 획을 길게 빼는 버릇까지 똑같았다.“태광이는 저를 지키려고 했던 걸까요?”강무겸이 내 옆에 앉았다.“적어도 설주 씨 이름이 거래에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그런데 왜 처음부터 말하지 않았을까요?”“그건 아직 모르겠습니다.”나는 계약서를 접었다.“정말 이상해요. 태광이를 미워해야 할지, 그리워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무겸은 잠시 내 얼굴을 바라봤다.“둘 다 하셔도 됩니다.”“그렇게 간단해요?”“사람 마음이 꼭 하나일 필요는 없으니까요.”그의 말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나는 고개를 돌렸다.“무겸 씨는 너무 침착해서 가끔 얄미워요.”“그럼 앞으로 조금 덜 침착해 보겠습니다.”“그게 마음대로 돼요?”“설주 씨 앞에서는 이미 잘 안 됩니다.”나는 그를 돌아봤다.무겸이 웃고 있었다.그 미소를 보는 순간, 조금 전까지 무겁던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우리는 계약서에 적힌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태광이 남긴 메모 바로 위에는 초상화의 모델 동의에 관한 항목이 있었다.나는 손가락으로 문장을 짚었다.“여기요. 작품 판매에 모델이 동의했다는 부분.”“네.”“그럼 제 동의가 없으면 거래에 문제가 생기는 거죠?”“초상권 사용 범위와 계약 내용에 따라 다르지만, 서명이 위조됐다면 분명히 다툴 수 있습니다.”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럼 경매장에 정식으로 이의를 제기할래요.”무겸도 일어났다.“제가 준비를 도와드리겠습니다.”“아니요. 이번에는 제가 직접 할게요.”그가 나를 바라봤다.“무겸 씨는 옆에서 확인만 해줘요. 내 이름으로 벌어진 일이니까.”잠시 후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좋습니다.”◇경매장에 도착한 나는 담당 직원에게 관련 서류를 제출했다.“제 동의 없이 제작되고 거래에 이용된 초상화입니다. 서명 위조 정황도 경찰에 신고했어요.”직원은 자료를 확인했다
“오정민 씨를 직접 만나려고요.”내 말을 들은 강무겸은 잠시 침묵했다.“약속은 잡으셨습니까?”“네. 오늘 오후 2시요.”“혼자 가실 생각이었습니까?”“처음에는요.”무겸의 표정이 굳어졌다.“왜 저한테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어제 무겸 씨한테 화냈잖아요. 또 같이 가자고 하기가 좀 그랬어요.”“설주 씨.”“네?”“서운한 일과 사건 조사는 구분했으면 좋겠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무겸 씨도 화났었어요?”“화보다는 속상했습니다.”솔직한 대답에 마음이 찔렸다.“미안해요.”“사과받으려고 한 말은 아닙니다.”그가 내 앞에 섰다.“함께 가도 되겠습니까?”나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대신 오늘 질문은 제가 할게요.”무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렇게 하십시오.”◇오후 2시.오정민은 약속 장소인 재단 상담실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그는 우리를 보자 표정부터 굳혔다.“강 감정사님까지 오셨군요.”나는 맞은편에 앉았다.“제가 부탁했어요.”“무슨 일로 만나자고 하셨습니까?”나는 가방에서 서류를 꺼냈다.“이태광이 작성했다는 최초 확인서 때문이에요.”오정민의 시선이 서류에 머물렀다.“이미 경찰에 제출한 자료입니다.”“알아요. 그래서 직접 설명을 듣고 싶어요.”“무엇을 말입니까?”“태광이가 왜 작품 등록 정보 변경에 동의했는지요.”오정민은 의자에 등을 기댔다.“이태광 씨도 거래 당사자였습니다. 처음부터 내용을 알고 있었어요.”“어떤 내용이요?”“작품 3점을 묶어서 관리번호를 정리하는 일이었습니다.”“그럼 작품을 바꿔치기하는 것도 알고 있었나요?”그의 얼굴이 굳었다.“말을 조심하셔야겠습니다.”나는 물러서지 않았다.“가짜 감정서가 발견됐어요. 제 이름으로 작성된 동의서도 있었고요. 그게 정상적인 거래예요?”오정민은 대답하지 못했다.“태광이는 사망하기 하루 전에 이의를 제기했어요.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죠?”한참 뒤 그가 입을 열었다.“처음에는 단순한 등록 정리라고 생각했겠죠.”“그런데요
“오늘은 사건 이야기 안 하기로 했잖아요.”강무겸의 말에 나는 젓가락을 내려놓았다.“딱 하나만 물어볼게요.”“벌써 세 번째입니다.”“그렇게 많았어요?”“네. 첫 번째는 감정서, 두 번째는 거래대금, 이번에는 뭡니까?”나는 멋쩍게 웃었다.“이태광이 처음부터 거래에 가담했을 가능성이요.”무겸이 나를 조용히 바라봤다.“설주 씨.”“네.”“지금 식사하는 남자가 누군지는 알고 계십니까?”“강무겸 씨잖아요.”“그런데 계속 다른 남자 이야기만 하시네요.”순간 젓가락을 쥔 손이 멈췄다.“질투해요?”그가 물잔을 내려놓았다.“조금은요.”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죽은 사람한테도 질투해요?”“그 사람이 설주 씨에게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압니다. 그래도 지금 마주 앉아 있는 저도 조금은 봐주셨으면 좋겠습니다.”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차갑고 무서운 남자라고 생각했다.그런데 지금은 그가 웃는 모습 하나에도 마음이 흔들렸다.“무겸 씨.”“네.”“나 아직 준비 안 됐어요.”그의 미소가 옅어졌다.“알고 있습니다.”“태광이가 죽은 지 1년밖에 안 됐어요. 그런데 내가 다른 사람한테 설레는 게…….”나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무겸은 재촉하지 않았다.“죄책감이 들어요.”“저 때문에요?”“무겸 씨 잘못은 아니에요.”나는 손가락으로 컵 가장자리를 문질렀다.“태광이를 사랑했던 마음이 진짜였는데, 무겸 씨한테 끌리는 마음도 거짓말은 아닌 것 같아서요.”그의 시선이 깊어졌다.잠시 후 무겸이 말했다.“저는 태광 씨를 대신할 생각이 없습니다.”“…….”“설주 씨가 그 사람을 사랑했던 시간까지 지우고 싶지도 않고요.”가슴이 먹먹해졌다.“그럼 뭘 원하는데요?”“앞으로 설주 씨가 저와 함께하고 싶어지는 순간이 오면 좋겠습니다.”나는 고개를 숙였다.이 남자는 왜 이렇게 사람 마음을 흔드는 걸까.◇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우리는 차를 세워 둔 곳까지 천천히 걸었다.“무겸
“그 사람들이 왜 이태광 씨의 입을 막으려 했는지 알 수 있는 대화입니다.”강무겸의 말을 듣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나는 맞은편에 앉은 박연호를 바라봤다.그는 여전히 태연한 표정이었다.“박연호 씨. 회의 영상 전체를 보여주세요.”“이미 보셨잖습니까.”“일부만 봤죠. 앞뒤 내용까지 확인하겠다는 거예요.”박연호의 미소가 사라졌다.“강무겸 씨한테 물어보시면 되겠네요.”“그럴 생각이에요. 하지만 이 영상도 경찰에 제출해 주세요.”나는 담당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설명했다.박연호가 의자를 밀며 일어났다.“채설주 씨, 지금 저를 범인 취급하는 겁니까?”“아니요. 증거를 확인하자는 거예요.”“그 남자가 뭐라고 하든 믿겠다는 겁니까?”나는 가방을 집어 들었다.“믿을지 말지는 제가 결정해요.”그 말을 남기고 사무실을 나왔다.◇건물 밖에는 강무겸이 기다리고 있었다.나를 발견한 그가 다가왔다.“괜찮습니까?”“아니요.”나는 걸음을 멈췄다.“무겸 씨, 나한테 또 숨긴 게 있었잖아요.”그의 표정이 굳었다.“맞습니다.”“어제 분명히 말했죠. 중요한 건 전부 알려 달라고.”“제가 잘못했습니다.”“왜 그랬어요?”“그 회의에서 오정민 씨와 박연호 씨가 제게 부당한 감정을 요구했습니다. 그 사실은 말씀드렸지만 직접 만났던 일까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나는 그를 바라봤다.“그런데 왜 나한테는 그렇게 잘해줬어요?”무겸이 잠시 말을 멈췄다.“그건 별개의 문제입니다.”“나한텐 별개가 아니에요.”목소리가 떨렸다.“태광이도 나한테 중요한 걸 숨겼어요. 난 그 사람을 믿었고요. 그런데 무겸 씨까지 그러니까…….”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무겸이 한 걸음 다가왔다가 멈췄다.“설주 씨를 속이려던 건 아닙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신뢰를 깨뜨린 건 제 책임입니다.”나는 고개를 숙였다.화를 내고 싶은데 그의 사과가 마음을 흔들었다.“녹음 들려줘요.”“여기서요?”“네. 지금 확인하고 싶어요.”◇무겸의 차 안에서 녹음 파일을 재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