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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l Chapters of 전무님과 미친결혼: Chapter 1 - Chapter 10

20 Chapters

1화. 미친결혼

타닥, 타닥타닥.사무실은 조용했다.오전 내내 복도를 기어 다니던 웅성거림은 여울이 자리에 앉자 거짓말처럼 끊겼다. 남은 건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뿐이었다. 누군가 일부러 더 세게 치는 것처럼 또렷했다.여울이 자리에서 일어날 때마다 시선이 따라붙었다. 따갑기보다 끈적했다. 눈이 마주치기 직전 황급히 떨어져 나갈 뿐이었다.모르는 척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모니터 옆에 종이 한 장이 놓여 있었다.[태강 후계자 노린 H대리, 초고속 발탁 뒤엔 심야 밀회?]굵은 제목 아래 강건의 차에서 나오는 자신의 사진이 박혀 있었다.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지만 소용없었다.전략기획실에서 하루아침에 전무 직속으로 옮겨 간 여자. 밤늦게 전무가 집까지 데려다 준 여자.하여울.누가 출력해 두고 갔는지는 알 필요 없었다. 누구든 될 수 있었으니까.전략기획실에서 버틴 5년이 사진 몇 장 아래 한 줄로 정리돼 있었다. 실적도, 야근도, 다음 달로 예정된 과장 승진도 아무 의미가 없었다.전무에게 붙어 올라간 여자.그날 석진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지금 거기 계속 있으면 네 5년이 물거품 될 수도 있어. 결국 기사 한 장이 그 말을 현실로 만들어 놓았다.지이잉-.휴대전화가 울렸다.변석진.부재중 통화 7건.[여울아. 전화 받아.] [내가 말했잖아. 강건 옆에 있으면 안 된다고.] [지금이라도 내가 원래 자리로 돌려놓을게.] [끝까지 안 받으면 내가 찾아간다.]여울은 화면을 내려다보다 휴대전화를 뒤집었다.탁.손끝이 떨렸다. 무릎 아래로 손을 숨기고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자 떨림이 조금 잦아들었다.사흘째 제대로 자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기사보다 그 이름이 먼저 따라 들어왔다.“하 대리님.”옆자리 김현실 주임이 조심스럽게 불렀다.“……응?”“괜찮으세요?”괜찮냐는 말은 어느새 안부보다 구경값에 가까웠다.여울은 입꼬리만 올렸다.“괜찮아.”견디는 건 할 수 있었다. 그건 오래전부터 잘했다. 다만 이번에는 더 견디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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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형수님이 된 첫사랑

구청 민원실은 이상하리만큼 평범했다. 옆 창구에서는 아이를 안은 부부가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아이가 칭얼거리자 남자가 익숙하게 품을 바꿔 안았고, 여자는 웃으며 서류를 마저 채웠다. 그 평범한 풍경 한가운데서 여울과 강건은 나란히 혼인신고서를 내밀었다.“두 분 배우자 맞으시죠?”강건이 먼저 답했다.“네.”여울은 아주 잠깐 그를 바라봤다. 연애하지 않았다. 좋아한다는 말도 없었다. 손 한 번 제대로 잡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오늘부터 부부였다.“……맞아요.”탁. 도장이 찍혔다.“처리되었습니다. 축하드립니다.”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직원의 미소가 어색하게 굳었다. 밖으로 나온 여울은 접수증을 내려다봤다.배우자 강건. 종이 한 장으로 가족이 생겼다. 한때는 십 년을 함께 살고도 끝내 가족이 되지 못했는데. 오늘은 몇 시간 만에 남편이 생겼다. 지독한 농담 같았다.“진짜 해버렸네요.”“후회합니까?”“후회할 거였으면 서명 안 했어요.”“다행이군요.”강건이 그녀를 내려다봤다.“첫날부터 이혼당할 뻔했으니까.”여울의 입꼬리가 비틀렸다.“감정은 계약에 없잖아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강건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그건 조금 아쉽군요.”여울이 고개를 돌렸다. 뭐가 아쉽다는 건지 묻기도 전에 강건은 이미 앞서 걷고 있었다.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차가 출발하자 강건이 태블릿을 넘기며 말했다.“오늘 가족 모임이 있습니다.”여울의 고개가 돌아갔다.“……오늘이요?”“네.”“혼인신고한 지 한 시간도 안 됐어요.”“그래서 더 늦출 이유가 없죠.”여울은 어이가 없어 창밖을 봤다. 도시는 평소와 똑같았다. 신호가 바뀌고, 사람들이 횡단보도를 건너고, 버스가 정류장에 멈췄다. 자기 인생만 오늘 하루에 너무 많이 바뀌었다. 한참 뒤 여울이 물었다.“……변석진 상무도 와요?”태블릿을 넘기던 강건의 손이 멈췄다. 아주 잠깐이었다.“가족이니 오겠죠.”여울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손끝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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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호랑이굴

“그럼 이제…… 형수님이라고 불러야 하나?”귓가가 웅 울렸다.석진은 웃고 있었다. 눈에는 온기가 없었다.여울도 웃었다.“절 안 부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상무님.”석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잠깐.”강솔이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둘이 원래 알아?”석진은 여울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오래전에 알던 사이야.”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덧붙였다.“그렇지, 여울아?”하여울.혼자만 아직 5년 전에 서 있는 것처럼 부르는 이름이었다.여울의 입술이 바짝 말랐다.그때였다.안쪽 문이 열리기도 전에 직원들이 먼저 움직였다. 비어 있던 상석의 의자가 반듯하게 당겨지고, 흐트러진 냅킨이 펴졌다.“회장님 오십니다.”강솔이 말을 멈췄다.석진은 걷어 올렸던 셔츠 소매를 내렸다.강건까지 자리에서 일어섰다.여울도 따라 일어났다.아무도 일어나라고 하지 않았다.그런데 모두가 일어났다.안쪽 문이 열렸다.태강의 주인 , 강태환 회장이 들어섰다.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었다. 그런데 그가 몇 걸음 옮기는 동안 방금 전까지 사람 넷이 앉아 있던 다이닝룸이 순식간에 한 사람의 공간이 됐다.직원들은 눈을 내렸다.강솔은 입을 다물었고.석진의 표정에서는 조금 전의 웃음이 사라졌다.강건만 움직이지 않았다.강태환의 시선이 딸을 지나 석진에게 닿고, 아들에게서 멈췄다.마지막이 여울이었다.낯선 사람을 보는 눈이 아니었다.이미 읽어본 서류를 실물과 대조하는 눈.여울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먼저 허리를 숙였다.“처음 뵙겠습니다, 회장님.”대답은 없었다.강태환은 여울을 그대로 세워둔 채 아들에게 물었다.“니 옆에 있는 처자는 누고.”강건이 한 치도 망설이지 않았다.“제 아내입니다.”강태환의 시선이 다시 여울에게 닿았다.“뭐라꼬?”“오늘 혼인신고 했습니다.”잠깐.정적이 식탁 전체를 눌렀다.“애비한테 말도 없이?”“미리 말씀드렸으면 달라졌습니까.”강태환의 입꼬리 한쪽이 느릿하게 올라갔다.“니가 장가가는 데 내 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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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헤어진 적 없잖아

묵직한 문이 닫혔다.강태환이 사라졌는데도 다이닝룸의 공기는 쉽게 풀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그가 앉아 있던 상석만 텅 비어 있었고, 접시 위에는 반쯤 남은 고기와 붉은 와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사람은 나갔는데 흔적은 남았다. 여울은 그게 이 집과 닮았다고 생각했다.“오빠.”강솔의 목소리가 정적을 갈랐다. 강건이 물잔을 들었다.“왜.”“왜가 아니잖아. 결혼을 했으면 최소한 가족한테는 말했어야 하는 거 아니야?”강솔은 아직 어이가 풀리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다 여울에게 시선을 돌렸다.“오늘 처음 보는 사람 데리고 와서 갑자기 아내라고 하면 내가 뭘 어떻게 받아들여?”노골적인 적의라기보다 낯섦과 당혹감에 가까웠다. 당연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로 존재조차 모르던 사이였다. 강건이 물잔을 내려놓았다.“처음 보는 사람 아니야.”“뭐?”“내 아내는 하여울씨”강솔의 시선이 여울에게 향했다. “하여울 씨?”강솔의 눈썹이 올라갔다. 강건은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였다.“그러니까 지금부터는 새언니라고 불러.”여울마저 그를 돌아봤다. 강솔이 기가 막힌 듯 웃었다.“오늘 혼인신고했다고 갑자기 새언니가 돼?”“법적으로는 아까부터.”“오빠 진짜 미쳤구나.”“오늘 많이 듣네.”여울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참 강건다운 대답이었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맞은편에 앉은 석진이 계속 자신을 보고 있었다. 강솔도 결국 그 시선을 알아챘다.“근데 여보.”석진이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돌렸다.“응?”“아까 오래전에 알던 사이라고 했지?”“응.”“어떻게?”석진은 잠깐 여울을 바라보다 대답했다.“어릴 때부터.”여울이 바로 끼어들었다.“아주 오래전 일이에요.”강솔의 시선이 넘어왔다. 여울은 부드럽게 웃었다.“지금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정도로요.”그 정도면 충분히 선을 그었다고 생각했다. 석진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여울이 물을 마시거나 포크를 들 때, 심지어 강건의 말을 듣고 있을 때조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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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오늘부터 1일

“내가 너한테 헤어지자고 했던 적이 있던가?”여울은 한동안 석진을 바라봤다.처음에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농담도, 비꼬는 기색도 없었다. 정말로 자신이 틀린 말을 한 적 없다고 믿는 사람의 얼굴이었다.그 사실이 서늘하게 닿았다.“……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내가 헤어지자고 한 적 없잖아.”석진은 오히려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기다렸어야지.”여울의 표정이 굳었다.“뭐라고요?”“우리가 계획했던 미래 있잖아. 집 사고, 결혼하고, 돈 때문에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사는 거.”석진이 한 걸음 가까워졌다. “그게 이제 코앞이야. 거의 다 됐어.” 여울은 기가 막혀 웃었다. 석진은 그런 여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바라봤다. “너는 늘 날 기다렸잖아.”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번에도 그냥 기다리면 돼, 여울아.”잠깐의 침묵. “달라진 건 없어. 그리고 강건 전무 옆에서 당장 나와.” 여울은 석진을 바라봤다. 다섯 해가 지났는데도 저 남자에게 자신은 여전히,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는 여자였다. 달라진 건 있었다.여울이었다. “왜요?”여울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위험해지니까.” 석진이 목소리를 낮췄다.“안 그러면 너까지 다쳐.”그 말에 여울은 결국 웃었다.허탈한 숨에 가까운 웃음이었다.“미친 소리 그만해.”처음으로 존댓말이 떨어져 나갔다.석진의 얼굴이 굳었다.“네가 청첩장 하나 던져놓고 태강으로 들어간 날, 우리는 이미 끝났어.”“난 그런 뜻으로—”“네 뜻이 뭐였는지 이제 관심 없어.”여울이 말을 잘랐다.“기다렸어야 한다느니, 우리가 계획한 미래라느니 그런 개소리도 그만하고.”석진의 눈빛이 서늘해졌다.여울은 피하지 않았다.“욕도 아까우니까 앞으로 아는 척하지 마.”“여울아.”“그리고 네가 나한테 한 짓.”여울은 그를 똑바로 바라봤다.다섯 해 동안 입안에서 수없이 씹고 삼킨 말이었다.“꼭 되갚아줄 거야.”석진의 턱끝이 단단하게 굳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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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다시 돌아온 그 이름.

같은 시각.태강가 저택 안쪽 서재.강태환의 책상 위에는 얇은 서류철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하여울.그 아래로 가족관계와 주소, 학력, 경력, 태강홀딩스 입사 이후 인사평가가 몇 장 되지 않게 정리되어 있었다.강태환은 별다른 표정 없이 종이를 넘겼다.전략기획실 대리. 다음 달 과장 승진 유력. 눈에 띄는 집안도, 특별한 배경도 없었다.손가락이 가족관계란에서 멈췄다.부. 하상만.“문기야.”책상 위 스피커폰에서 서문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 회장님.“우리 며느리 있제.”― 예.“내 집에 들어왔는데 시아배가 선물 하나 안 주면 섭섭하지 안켔나.”― 뭘 준비할까요.강태환이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조금 전 식탁에서 보았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제가 선택한 사람입니다.아비에게 말 한마디 없이 혼인신고부터 해놓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얼굴.강건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하지 말라면 더 했고, 막으면 기어이 다른 길을 뚫었다. 제가 이겼다고 생각할 때면 표정은 더 무심해졌다.강태환의 입가에 느린 웃음이 번졌다.그렇다고 굳이 지금부터 목줄을 당길 이유는 없었다.뛰고 싶다는데 조금 뛰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디까지 가는지 봐야, 나중에 잡아당길 때도 확실히 아는 법이었다.“우선 사돈부터 한번 만나봐야겠다.”― 하상만 씨 말씀이십니까?“그래. 내일 오시라 캐라.”― 알겠습니다.“좋게 모셔라.”강태환의 손끝이 하상만이라는 이름을 가볍게 두드렸다.“우리 며느리 키워주신 귀한 양반 아이가.”― 그렇게 하겠습니다.통화가 끊겼다.강태환은 다시 여울의 사진을 내려다봤다.아들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이번에도 굳이 서둘러 꺾을 필요는 없었다.어디까지 가는지는 한번 볼 생각이었다.서류철이 천천히 덮였다.*결혼 열흘 전.오전 열 시를 조금 넘긴 시각.전략기획실 사내 메신저에 인사 공지가 올라왔다.[재무전략본부장 상무 변석진 부임]마우스를 움직이던 여울의 손이 멎었다.다섯 해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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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남편인 줄 모르고

“괜찮으세요?”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강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만큼 호흡이 남아 있지 않았다.가슴 한가운데를 누군가 안에서 움켜쥔 것처럼 조여왔다. 숨을 깊이 들이마실수록 공기는 더 얕게 끊겼고, 벽을 짚은 손끝부터 감각이 흐려졌다.또 시작이었다.강건에게 이맘때는 늘 좋지 않았다.외조부의 기일이 있는 달. 몇 달씩 아무렇지 않다가도 이 시기만 되면 잠이 자주 끊겼다. 회의 중 손끝이 저리기도 했고, 멀쩡히 걷다가 갑자기 숨이 막혀 한동안 움직이지 못할 때도 있었다.언제 시작되는지는 강건 자신도 알 수 없었다.몸은 날짜를 기억했다.일곱 살이었다.방문이 조금 열려 있었다.그 틈으로 침대에 누운 외할아버지가 보였다. 얼굴 위에는 하얀 베개가 덮여 있었고, 강태환의 두 손이 그 위를 단단히 누르고 있었다.어린 강건은 문틈을 움켜쥔 채 움직이지 못했다. 비명을 질러야 하는데 목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강태환이 고개를 들었다.눈이 마주쳤다.아버지는 놀라지 않았다. 손을 떼지도 않았다.그저 문밖에 선 일곱 살 아들을 바라봤다.사람을 죽이고도 아무 일 없다는 얼굴.그 얼굴이 가장 오래 남았다.강건은 눈을 세게 감았다.지금은 옥상이었다.일곱 살도 아니었고, 눈앞에 아버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알고 있었다.조금 있으면 괜찮아진다.매번 그랬다.“저기요.”문제는 오늘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조심스러운 발소리가 가까워졌다.“많이 안 좋으세요?”강건이 겨우 입을 열었다.“……가세요.”“네?”“조금 있으면 괜찮아집니다.”숨 하나가 짧게 끊겼다가 이어졌다.“매번 이러니까.”여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그래도 발소리는 멀어지지 않았다.강건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흐릿한 시야 안으로 여자의 얼굴이 들어왔고, 그 아래 목에 걸린 사원증이 흔들렸다.[전략기획실 하여울 대리]강건의 시선이 잠깐 멎었다.하여울.이름은 알고 있었다.며칠 전 자신의 책상 위에 올라온 해외 프로젝트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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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재수 없는 젊은 면접관

오전 아홉 시 십 분.사내 메일 알림이 떴다.[인사발령 안내_금일부]여울은 별생각 없이 첨부파일을 열었다가 마우스를 멈췄다.전략기획실 대리 하여울전무 직속 비서팀 전보한 번 읽었다.다시 읽어도 이름은 하여울이었다.“하 대리.”고개를 들자 팀장이 회의실 쪽을 가리켰다.“잠깐 들어와.”회의실 문이 닫히자 팀장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메일 봤지?”“네.”“나도 오늘 아침에 통보받았어. 전무실 요청이래.”여울의 미간이 좁아졌다.다음 달이면 과장 승진 심사였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세 개나 있었고, 어제까지만 해도 승진 이후 업무를 어떻게 나눌지 이야기했다.“승진 심사는요?”“예정대로 간대. 문제는 네가 들고 있는 일인데—”똑똑.회의실 문이 열렸다.“팀장님, 전무 비서팀에서 연락 왔는데요. 하 대리님 바로 올라오시랍니다.”팀장이 시계를 봤다.“지금?”“네. 바로요.”인수인계할 겨를도 없었다.여울은 자리로 돌아와 머그컵과 충전기, 서랍 안에 있던 개인 물건을 박스에 대충 쓸어 담았다. 진행 중인 파일은 옆자리 직원에게 급한 것만 짚어 넘겼다.“하 대리님, 진짜 오늘부터 올라가요?”“그런가 봐요.”“전무실에서 이렇게 갑자기 사람 빼가기도 해요?”그건 여울도 묻고 싶었다.박스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12층.13층.14층.숫자가 하나씩 올라갈수록 어젯밤 옥상에서 들었던 마지막 말이 스쳤다.'그럼 또 봅시다.'띵.15층.문이 열렸다.전략기획실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전화벨도 잡담도 거의 들리지 않았고, 비서석 몇 개 너머 가장 안쪽에 전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여울이 박스를 안고 서 있자 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하여울 대리님이시죠? 김현실 주임입니다.”“네. 잘 부탁드립니다.”“전무님이 오시면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어요. 짐은 여기 두세요.”여울은 박스를 내려놓고 곧장 전무실 앞으로 갔다.똑똑.“들어오세요.”문을 열었다.강건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어젯밤 옥상에서 벽을 짚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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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선택지는 하나

회사 정보를 다시 확인했다.사무실도, 직원도, 이전 실적도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그런데 돈만은 완벽했다.계약부터 결재, 세금계산서, 송금까지 어디 하나 어긋난 곳이 없었다.그래서 더 이상했다.*오후 네 시 오십칠 분.여울은 정리한 메모 한 장을 세 개의 파일 위에 올렸다.다섯 시 정각.똑똑.전무실 문을 열었다.강건이 시계를 한번 봤다.“정확하군요.”여울은 맞은편에 앉아 첫 번째 파일을 펼쳤다.“세 건 전부 봤습니다.”“그래서요.”“돈은 안 사라졌습니다.”강건의 시선이 올라왔다.“정상적으로 계약했고, 정상적으로 결재됐고, 실제 송금까지 끝났어요.”여울의 손끝이 48억 지급 내역을 짚었다.“문제는 받은 쪽입니다.”“계속해요.”“이 회사, 실체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계약 석 달 전에 만들어졌는데 사무실도, 직원도, 이전 수행실적도 제대로 없어요. 그런데 설립 직후 태강에서 48억짜리 자문계약을 따냈습니다.”두 번째와 세 번째 파일이 옆으로 펼쳐졌다.“나머지도 구조가 거의 같습니다.”“우연일 가능성은?”“낮습니다.”여울은 자료를 내려다봤다가 고개를 들었다.“돈은 안 사라졌어요. 멀쩡하게 지급됐습니다.”잠깐의 정적.“존재하지 않는 회사에.”강건은 말없이 여울을 바라봤다.그제야 여울도 알았다.왜 다음 달 승진을 앞둔 자신을 하루아침에 15층으로 끌어올렸는지.강건에게 필요한 건 비서가 아니었다.이 숫자들 사이에 숨은 것을 찾아낼 사람이었다.강건이 물었다.“결재라인도 봤습니까?”“네.”여울의 손끝이 마지막 결재자에서 멈췄다.재무전략본부장 변석진.이름을 보는 것만으로도 속이 서늘해졌다.“변석진 상무까지 확인했습니다.”“그게 이번에 변 상무가 태강홀딩스로 온 이유입니다.”여울이 고개를 들었다.“……무슨 뜻입니까?”“48억 하나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강건이 세 개의 파일을 차례로 짚었다.“내가 찾는 건 이 돈 하나가 어디로 갔느냐가 아닙니다. 이런 식으로 빠져나간 돈이 얼마나 더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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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전무님의 첫경험

여울이 고른 곳은 회사에서 두 블록 떨어진 좁은 골목 안쪽이었다.간판 글자 몇 개가 반쯤 나간 오래된 곱창집.신입사원 시절, 동기들과 지독한 업무 스트레스를 쏟아내던 곳이었다. 야근에 치이고 상사에게 깨진 날이면 여기서 소주 한잔을 털어 넣고 다시 출근했다.여울에게는 꽤 오래된 피난처였다.유리문을 열자 뜨거운 기름 냄새와 소주 냄새가 밀려왔다.강건의 수트는 낡은 곱창집 안에서 지나치게 반듯했다.마치 다른 세계에서 잘못 걸어 들어온 사람 같았다.강건이 입구의 상호를 올려다봤다.[변강쇠곱창]“가게 이름이 참.”여울은 괜히 어깨를 폈다.“맛은 있습니다.”그때 사장이 반갑게 다가왔다.“어이, 하 대리! 오랜만이네. 오늘도 혼자…….”목소리가 강건에게 닿는 순간 뚝 끊겼다.“가 아니라, 오늘은 두 분이네.”“네, 사장님.”두 사람은 안쪽 자리에 앉았다.강건은 별다른 기색 없이 재킷을 벗어 등받이에 걸고 셔츠 소매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여울이 그 모습을 슬쩍 봤다.“전무님, 이런 데 정말 괜찮으세요? 옷에 냄새 다 밸 텐데요.”강건이 물컵을 들었다.“냄새보다 하 대리 배에서 나는 소리가 더 시급해 보이던데.”“전무님.”여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그거는 좀 잊어주시면 안 될까요?”“검토해 보죠.”때마침 사장이 메뉴판을 내려놓았다.“하 대리는 늘 먹던 거?”“네. 모둠 2인분이랑 소주 하나 주세요.”강건은 메뉴판을 내려다봤다.곱창, 대창, 막창, 염통, 특양.설명 하나 없는 메뉴판을 한참 보는 모습에 여울이 눈치를 챘다.“혹시 못 드시는 부위 있으세요?”“없습니다.”“곱창집은…… 처음이세요?”강건이 메뉴판을 내려놓았다.“비슷한 곳은 와봤습니다.”애매한 대답이었다.여울은 더 묻지 않았다.잠시 뒤 둥근 불판 위로 곱창이 올라왔다.치이익.여울이 익숙하게 집게를 들었다. 곱창을 하나씩 뒤집고, 염통은 너무 익기 전에 가장자리로 빼냈다.강건은 그 모습을 말없이 보고 있었다.“이제 드셔도 돼요.”여울이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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