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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재수 없는 젊은 면접관

작가: 미미안
last update 게시일: 2026-11-04 14:27:24

오전 아홉 시 십 분.

사내 메일 알림이 떴다.

[인사발령 안내_금일부]

여울은 별생각 없이 첨부파일을 열었다가 마우스를 멈췄다.

전략기획실 대리 하여울

전무 직속 비서팀 전보

한 번 읽었다.

다시 읽어도 이름은 하여울이었다.

“하 대리.”

고개를 들자 팀장이 회의실 쪽을 가리켰다.

“잠깐 들어와.”

회의실 문이 닫히자 팀장은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메일 봤지?”

“네.”

“나도 오늘 아침에 통보받았어. 전무실 요청이래.”

여울의 미간이 좁아졌다.

다음 달이면 과장 승진 심사였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도 세 개나 있었고, 어제까지만 해도 승진 이후 업무를 어떻게 나눌지 이야기했다.

“승진 심사는요?”

“예정대로 간대. 문제는 네가 들고 있는 일인데—”

똑똑.

회의실 문이 열렸다.

“팀장님, 전무 비서팀에서 연락 왔는데요. 하 대리님 바로 올라오시랍니다.”

팀장이 시계를 봤다.

“지금?”

“네. 바로요.”

인수인계할 겨를도 없었다.

여울은 자리로 돌아와 머그컵과 충전기, 서랍 안에 있던 개인 물건을 박스에 대충 쓸어 담았다. 진행 중인 파일은 옆자리 직원에게 급한 것만 짚어 넘겼다.

“하 대리님, 진짜 오늘부터 올라가요?”

“그런가 봐요.”

“전무실에서 이렇게 갑자기 사람 빼가기도 해요?”

그건 여울도 묻고 싶었다.

박스를 들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12층.

13층.

14층.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수록 어젯밤 옥상에서 들었던 마지막 말이 스쳤다.

'그럼 또 봅시다.'

띵.

15층.

문이 열렸다.

전략기획실과는 분위기부터 달랐다. 전화벨도 잡담도 거의 들리지 않았고, 비서석 몇 개 너머 가장 안쪽에 전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여울이 박스를 안고 서 있자 한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여울 대리님이시죠? 김현실 주임입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전무님이 오시면 바로 들어오시라고 하셨어요. 짐은 여기 두세요.”

여울은 박스를 내려놓고 곧장 전무실 앞으로 갔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었다.

강건은 책상 뒤에 앉아 있었다.

어젯밤 옥상에서 벽을 짚고 간신히 숨을 고르던 사람과 같은 남자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말끔했다.

그의 손에는 얇은 인사기록 카드가 들려 있었다.

[하여울. 14기 공채.

전략기획실 대리.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사용 가능 언어: 영어, 중국어, 스페인어.]

강건의 시선은 마지막 줄에 머물러 있었다.

스페인어.

그리고 14기 공채.

옥상에서부터 묘하게 낯익었던 얼굴이 그제야 오래된 기억과 맞물렸다.

다섯 해 전 최종 면접장.

몸에 맞지 않는 정장을 입고도 고개만은 꼿꼿하게 들고 있던 지원자.

스스로를 보석이라고 부르던 여자.

강건의 입가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앉아요.”

여울이 맞은편에 앉았다.

책상 위 자신의 인사기록을 한번 본 뒤 바로 물었다.

“전무님.”

“말해요.”

“이렇게 긴급발령을 내신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강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여울을 바라보며 느닷없이 물었다.

“¿Habla español?”(스페인어 할 줄 압니까?)

여울의 눈이 멎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여울은 잠시 강건을 바라보다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Sí, un poco.”(네, 조금 합니다.)

강건의 눈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곧이어 두 번째 질문이 날아왔다.

“¿Cree que aprobará esta entrevista?”(오늘 면접, 합격할 것 같습니까?)

이번에는 여울의 표정이 완전히 멎었다.

길게 늘어선 면접관들.

손에 땀이 밸 만큼 긴장했던 스물넷의 자신.

그리고 가장 구석에 노타이 차림으로 앉아 펜을 굴리며 사람 약 올리듯 질문을 던졌던 젊은 남자.

여울의 시선이 천천히 강건의 얼굴에 고정됐다.

설마.

강건은 아무 말 없이 기다렸다.

여울은 다섯 해 전처럼 턱을 조금 들었다.

“Si los evaluadores de Taegang tienen buen ojo, no dejarán escapar una joya como yo.”

(태강의 심사위원들에게 안목이 있다면, 저 같은 보석을 놓치지는 않으시겠죠.)

말이 끝나자 강건이 활짝 웃었다.

여울은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잘 지냈습니까?”

기억의 마지막 조각이 맞아 들어갔다.

그때 그 재수 없는 젊은 면접관.

“……기억하고 계셨어요?”

강건이 책상 위 인사기록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 아침부터.”

여울은 여전히 조금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다시 정신을 차렸다.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그럼 다시 여쭤볼게요.”

표정이 진지해졌다.

“제가 비서실로 발령 난 이유가 궁금합니다.”

강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방금 전까지 오래된 기억을 꺼내던 남자는 없었다. 다시 차갑고 반듯한 상사의 얼굴이었다.

강건이 책상 옆에 놓여 있던 서류철 세 개를 여울 앞으로 밀었다.

“첫 업무입니다.”

여울이 맨 위의 파일을 내려다봤다.

“이게 뭡니까?”

강건이 짧게 말했다.

“하 대리가 여기 온 이유.”

여울의 시선이 서류로 내려갔다.

이미 결재가 끝난 해외사업 관련 자문계약과 용역비 지급 자료였다.

“검토해요.”

“어떤 부분을요?”

“전부.”

강건이 시계를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에 봅시다.”

여울이 서류철 세 개를 차례로 봤다.

“세 건을요?”

“부족합니까?”

“아뇨.”

여울은 파일을 품에 안았다.

“해보겠습니다.”

강건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울이 전무실을 나섰다.

*

철컥.

문이 닫히자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던 비서실에서 타자 소리가 갑자기 커졌다.

타닥타닥.

타다닥.

모니터를 향한 손들이 하나같이 바빠졌다. 여울이 지나갈 때마다 시선이 짧게 따라붙었다가 떨어졌고, 열려 있던 사내 메신저 창 몇 개가 빠르게 올라갔다 사라졌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아침에 갑자기 전무 직속으로 발령 난 전략기획실 대리.

올라오자마자 전무실로 불려 들어갔다 서류를 안고 나온 여자.

오늘 하루쯤은 자신이 꽤 괜찮은 가십거리일 터였다.

여울은 모르는 척 자리로 걸어갔다.

김현실주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먼저 조심스럽게 눈인사를 했다.

여울도 작게 고개를 숙였다.

서류철 세 개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후우.

첫 번째 파일을 펼쳤다.

그 순간부터 주변 소리가 멀어졌다.

여울의 시선이 계약일과 지급일, 법인등록일을 빠르게 훑었다. 첫 번째를 끝내기도 전에 두 번째 파일을 끌어당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세 번째까지 나란히 펼쳐졌다.

빨간 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사업, 서로 다른 업체.

그런데 돈이 움직이는 방식은 이상할 만큼 비슷했다.

계약 직전에 만들어진 신생 법인. 확인되지 않는 수행 실적. 수십억짜리 용역에 비해 터무니없이 빈약한 결과물.

세 번째 파일을 펼쳤을 때는 이미 여울의 머릿속에 공통점이 표처럼 정리되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나 비서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로 돌아오는 것도 몰랐다. 현실이 한 번 식사를 권했지만, 여울은 파일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조금 있다가요”라고 답했다. 

결국 점심은 그대로 건너뛰었다.

그러다 손이 멈췄다.

4,800,000,000원.

여울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시 봤다.

48억.

평범하게 결재가 끝난 자문료였다.

숫자는 틀린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너무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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