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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다시 돌아온 그 이름.

작가: 미미안
last update 게시일: 2026-11-04 14:25:48

같은 시각.

태강가 저택 안쪽 서재.

강태환의 책상 위에는 얇은 서류철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하여울.

그 아래로 가족관계와 주소, 학력, 경력, 태강홀딩스 입사 이후 인사평가가 몇 장 되지 않게 정리되어 있었다.

강태환은 별다른 표정 없이 종이를 넘겼다.

전략기획실 대리. 다음 달 과장 승진 유력. 눈에 띄는 집안도, 특별한 배경도 없었다.

손가락이 가족관계란에서 멈췄다.

부. 하상만.

“문기야.”

책상 위 스피커폰에서 서문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예, 회장님.

“우리 며느리 있제.”

― 예.

“내 집에 들어왔는데 시아배가 선물 하나 안 주면 섭섭하지 안켔나.”

― 뭘 준비할까요.

강태환이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조금 전 식탁에서 보았던 아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가 선택한 사람입니다.

아비에게 말 한마디 없이 혼인신고부터 해놓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던 얼굴.

강건은 어릴 때부터 그랬다. 하지 말라면 더 했고, 막으면 기어이 다른 길을 뚫었다. 제가 이겼다고 생각할 때면 표정은 더 무심해졌다.

강태환의 입가에 느린 웃음이 번졌다.

그렇다고 굳이 지금부터 목줄을 당길 이유는 없었다.

뛰고 싶다는데 조금 뛰게 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디까지 가는지 봐야, 나중에 잡아당길 때도 확실히 아는 법이었다.

“우선 사돈부터 한번 만나봐야겠다.”

― 하상만 씨 말씀이십니까?

“그래. 내일 오시라 캐라.”

― 알겠습니다.

“좋게 모셔라.”

강태환의 손끝이 하상만이라는 이름을 가볍게 두드렸다.

“우리 며느리 키워주신 귀한 양반 아이가.”

― 그렇게 하겠습니다.

통화가 끊겼다.

강태환은 다시 여울의 사진을 내려다봤다.

아들이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었다.

이번에도 굳이 서둘러 꺾을 필요는 없었다.

어디까지 가는지는 한번 볼 생각이었다.

서류철이 천천히 덮였다.

*

결혼 열흘 전.

오전 열 시를 조금 넘긴 시각.

전략기획실 사내 메신저에 인사 공지가 올라왔다.

[재무전략본부장 상무 변석진 부임]

마우스를 움직이던 여울의 손이 멎었다.

다섯 해가 지났는데도 알아보는 데는 한순간이면 충분했다.

변석진.

심장이 먼저 이름을 알아봤다.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뛰기 시작했다.

여울은 메신저 창을 닫았다.

“와, 벌써 상무?”

옆자리 직원이 인사 공지를 들여다보며 혀를 찼다.

“요즘 아들보다 사위가 더 실세라더니. 완전 현대판 남데렐라네.”

“그쵸, 하 대리님?”

여울은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맞은편에서 누군가 끼어들었다.

“나도 저런 인간 로또 어디 없나.”

“그럼 강 전무님은?”

“뭐가?”

“강 전무님 아직 미혼이시라던데.”

“꿈 깨.”

바로 웃음이 터졌다.

“황태자가 총 맞았어?”

여울도 입꼬리를 올렸다.

웃는 시늉쯤은 어렵지 않았다.

그때 과장이 두툼한 보고서를 들고 다가왔다.

“하 대리.”

“네.”

탁.

보고서가 여울의 책상 위에 놓였다.

“이거 팀장님 올리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봐줘. 수치랑 합계까지.”

“알겠습니다.”

여울이 보고서를 끌어당기자 뒤에서 기다렸다는 듯 말이 붙었다.

“역시 우리 팀 에이스.”

“하 대리는 다음 달 과장 달 거잖아. 이러다 변 상무 라인까지 타는 거 아냐?”

“그러게. 우리 버리면 안 된다~”

여울이 어색하게 웃으며 첫 장을 펼쳤다.

“제가 무슨 그런 능력이 있어요. 우리 월급이라도 잘 챙기려면 이거 얼른 마무리해요.”

“넵, 하 과장님.”

“아직 아니라니까요.”

작은 웃음과 함께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사무실은 금세 키보드 소리와 전화벨로 채워졌다.

여울도 보고서를 펼쳤다.

평소라면 오래 걸릴 일이 아니었다. 숫자는 사람보다 단순했고, 적어도 이유 없이 사라졌다가 돌아오지는 않았다. 틀린 합계도, 잘못 들어간 금액도 찾아내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몇 줄을 읽고도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방금 확인한 수치를 다시 찾고, 같은 문장을 두 번 읽고도 뜻이 들어오지 않았다.

여울은 펜을 쥔 손에 힘을 줬다.

집중해.

일하면 돼. 원래 그랬잖아.

그런데 숫자 사이로 자꾸 다른 글자가 끼어들었다.

변석진.

지웠다. 다시 읽었다.

변석진.

또 지웠다.

모니터의 숫자들이 잠깐 흐려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여울은 눈을 세게 감았다 뜨고 보고서 모서리를 반듯하게 맞췄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걸 보고 있으면 자신까지 같이 무너질 것 같았다.

다섯 해 동안 잘 살았다.

아니, 잘 살아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름 석 자가 회사 인사 공지 한 줄에 올라온 것뿐인데, 애써 묻어둔 시간들이 안쪽에서부터 들썩였다.

여울은 결국 펜 끝을 종이에 세게 눌렀다.

일해야 했다.

지금 자신이 붙잡을 수 있는 건 그것뿐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밤 열 시가 넘어 있었다.

몇 시간째 거의 미동도 없이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보고서는 생각보다 몇 장 넘어가지도 못했다.

여울은 한동안 화면을 바라보다 펜을 내려놓았다.

더는 안 됐다.

가방도 챙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비상계단 쪽으로 걸었다. 지금 필요한 건 퇴근도, 집도 아니었다.

머리부터 식혀야 했다.

옥상으로 올라가는 동안 발소리만 텅 빈 계단에 울렸다.

*

철컥.

문을 밀자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훑었다.

여울은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오자 그제야 머릿속에 엉겨 붙어 있던 것들이 조금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몇 걸음 안으로 들어가던 여울이 멈췄다.

사람이 있었다.

어두운 정장을 입은 남자가 벽을 한 손으로 짚은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전화를 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숨이 거칠었다. 어깨가 불규칙하게 들썩였고, 벽을 짚은 손가락에는 핏기가 없을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여울은 잠시 망설였다.

그냥 지나쳐도 됐다.

그런데 몇 걸음을 옮기고도 결국 시선이 다시 남자에게 돌아갔다.

“저기요.”

반응이 없었다.

여울이 조금 가까이 다가갔다.

“괜찮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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