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재훈은 피곤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다시 생각할 필요 없어요. 시은이는 반드시 출국해야 해요. 혜라 씨도 대부분 시간은 해외에 계시잖아요. 시은이가 안타까워 그러는 거라면 옆에서 잘 좀 챙겨주세요.”전혜라가 에둘러 말했다. “제가 비록 시은이를 자주 만나긴 했지만 그래도 시은이에게 가족은 재훈 씨잖아요. 시은이가 아빠라고 부르는 사람도 재훈 씨고요. 제가 그 자리를 대체할 수는 없죠.”“시은이는 재훈 씨가 기르셨으니, 그 아이가 제멋대로에 자존심이 강한 성격이라는 건 재훈 씨가 제일 잘 알잖아요. 자기가 친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재훈 씨와의 관계에 이상한 집념이 생겨서 그런 일까지 벌인 거예요.”전혜라가 말했다. “아니면 차라리 국내에 계속 있게 하는 건 어때요? 고은서 씨와 잘 지내게 될 거예요. 두 딸이 함께 재훈 씨 곁을 지킬 수 있다면 더 좋은 거 아니겠어요?”여재훈은 더는 전혜라와 대화를 이어갈 기운이 없었다. “혜라 씨가 시은이를 가족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건 이미 제가 결정한 일이니 더는 다른 말씀 마세요.”“...”전혜라는 그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었다. 여시은을 가족처럼 생각한다며 여시은과 함께 출국하고,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내린 결정에 왈가왈부할 자격이 없다는 얘기였다. 전혜라는 오늘 처음으로 여재훈에게서 벽을 느꼈다. 비록 그동안 여재훈이 줄곧 그녀와 거리를 유지하긴 했지만 그래도 늘 전혜라를 매너 있게 대했었다. 매번 전혜라가 귀국할 때면 여재훈은 항상 시간을 내 식사를 함께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고은서의 존재를 알았다는 이유만으로 수년을 친딸처럼 기른 여시은을 해외에 보내려고 했고 심지어 전혜라도 냉담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전혜라는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여전히 차분한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럼 제가 시은이를 잘 설득해 볼게요. 재훈 씨도 일찍 쉬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전혜라가 몸을 일으켜 병실을 나섰다. 또 다른 병실. 여시은은 아까부터 목을 길게 빼 들고 전혜라를 기다리고
여재훈이 대답하기도 전에 전혜라가 곧바로 변명하듯 말했다. “재훈 씨, 오해하지 마요. 전 가연이를 의심하는 게 아니라 그냥 어떻게 고은서 씨가 친딸이라고 확신하셨는지 궁금해서요.”전혜라의 말에 여재훈의 눈빛이 아프게 빛났다. “유전자 검사는 필요 없어요. 은서가 바로 내 딸이에요.”그 말에 전혜라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녀의 목소리엔 슬픈 감정이 담겨 있었다. “시은에게 고은서 씨의 어머님은 오랜전에 병으로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만약 고은서 씨가 재훈 씨 딸이면 그럼 가연이는...”말을 이을수록 전혜라의 목소리엔 울먹임이 더해졌다. “저한테 다신 연락하지 말라고 하더니, 그때가 마지막일 줄이야...”“혜라 씨는 가연이와 제일 친한 친구였잖아요. 정말 가연이가 왜 저와 헤어지려고 한 건지 몰라요?”전혜라가 꺼내는 옛이야기를 듣는 여재훈의 마음은 더욱 서글퍼졌다. 그는 결국 참지 못하고 꾹 참던 질문을 던졌다. “가연이에겐 만나는 사람이 없었어요. 오랜 시간 동안 줄곧 혼자였어요. 은서도 가연이와 고씨 가문 분들이 함께 길러주셨고요.”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여재훈을 보며 전혜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알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긴 한데, 재훈 씨와 직접 관련이 있는 일인지 모르겠어요.”“재훈 씨가 강성으로 돌아갔던 그때, 재훈 씨의 약혼녀라는 분이 가연이를 찾아왔었어요. 가연이는 재훈 씨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며, 가연이는 그저 재훈 씨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만나는 파트너에 불과하다고 했었죠.”전혜라가 말을 이었다. “가연이는 그땐 그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상대방 쫓아냈어요. 하지만 전 가연이가 상처를 받았다는 걸 알았죠. 나중에 그러더라고요. 자기는 자유를 갈구하는 성격이라 대가족이 함께 사는 생활은 힘들다고요.”“만약 정말 재훈 씨와 결혼하게 된다면 나중엔 자기를 난처하게 하는 일이 더욱 많아질 텐데, 그렇게 누군가를 위해 나를 잃을 수는 없다고 했었어요.”“가연이가 이별을 얘기하
휴대폰을 내린 여재훈이 감정을 추스르고 간병인에게 문을 열어주라고 손짓했다. 병실로 찾아온 사람은 전혜라였다. “쉬는데 제가 방해한 건 아니죠?”전혜라가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여재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혜라 씨가 무슨 일로 오셨어요?”전혜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시은이가 재훈 씨 병실에 다녀온 후로 계속 울어서요. 재훈 씨에게 이젠 자기가 필요 없는 사람이라서 해외로 보내는 거 아니냐면서 말이에요.”여재훈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시은이는 너무 제멋대로에 충동적인 경향까지 있어요. 해외에서 몇 년 공부하면서 일을 하거나 가정을 꾸리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닐 거예요.”전혜라는 그 말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며 오히려 여재훈을 떠보듯 물었다. “시은이 말로는 재훈 씨가 시은이를 출국시키려고 하는 이유가 친딸을 찾아서라고 하던데, 사실이에요?”여재훈이 전혜라를 쳐다보며 반문했다. “은서가 제 딸인 거, 혜라 씨는 정말 몰랐어요?”전혜라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시은이가 요즘 몸이 안 좋았어요. 그래서인지 우울해하기도 했고요. 저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으려고 해서 만약 오늘 시은이가 펑펑 우는 모습을 보고 그 원인을 캐묻지 않았다면 전 정말 몰랐을 거예요.”여재훈은 쓸데없는 말을 할 정력 따위는 없는 듯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우아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본 전혜라의 관리를 잘한 얼굴에 난간함과 미안함을 내비쳤다. “재훈 씨, 미안해요. 제가 재훈 씨에게 숨긴 사실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전부 가연이가 부탁한 일이었어요.”전혜라가 흠잡을 데 없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때 가연이는 재훈 씨가 계속 매달릴까 봐 저에게 가연이가 죽은 것처럼 연기를 해달라고 했어요. 그래야만 재훈 씨가 포기하고 더는 자기를 찾아오지 않을 것 같다면서 말이에요.”“물론 가연이가 임신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가연이는 저에게 당시 만나던 남자 친구의 아이라고 했어요. 재훈 씨 아이가 아니라고 했었죠.
고은서가 기억하는 맹가연은 늘 자신감 넘치고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 상황에 아무리 화가 많이 났어도 그녀는 나중에라도 여재훈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물을 성격이었다. 그러니 그건 절대 맹가연이 이별을 결심한 주요 원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맹가연은 여재훈과 헤어지기 위해 헤어진 옛 연인까지 만들어냈다. 그만큼 맹가연에겐 여재훈과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고, 그래서 그런 거짓말까지 한 것이 분명했다. 그 원인은 아마 전혜라가 제일 잘 알고 있을 테였다. 여재훈은 고은서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전혜라를 찾아가 따질 생각이었다고 했다. 하지만 곽승재가 전혜라는 믿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며 설사 이유를 알려준다고 해도 거짓말일 수도 있다고 여재훈을 설득했다. 곽승재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만약 전혜라가 진실을 말할 생각이 있었다면 고은서가 여재훈의 딸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밝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곽승재는 일단 조용히 전혜라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자고 제안한 것이었다. 전혜라는 비서와 함께 여재훈의 병문안을 온 것은 제외하면 나머지 시간은 전부 여시은을 보살피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마치 고은서와 여재훈의 부녀 관계를 모르고 있는 사람처럼.그러니 맹가연이 당시 왜 여재훈과 헤어지려고 했었는지, 그 이유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유가 뭐든, 분명 전혜라와 관련된 일일 거라 고은서는 생각했다. 비록 전혜라를 몇 번 만난 적은 없지만 여자의 직감이 고은서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전혜라는 여재훈에게 이성적인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맹가연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여재훈과 가깝게 지냈을 리가 없었다. ‘전혜라가 엄마와 여 대표님 사이를 갈라놓은 건가?’‘사랑하는 사이인데, 왜 서로를 믿지 못해서 몇 마디 말에 관계가 흔들린 거지?’그토록 서로를 사랑했던 맹가연과 여재훈이 이렇게 오랜 세월을 떨어져 있었다는 것만 떠올리면 고은서는 심장이 찌릿찌릿 아팠다. “은서야,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해.
말을 마친 곽승재가 고은서의 손을 잡고 의자에 앉았다. 여재훈은 고은서가 다시 한번 아빠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싶었지만 광승재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고은서에게 너무 큰 부담을 줄 수는 없었다. 이미 그를 아빠로 받아들였고 아빠라고 부르기도 했다. 고은서가 여재훈의 딸인 것은 변하지 않을 사실이었다. 그러니 당장 조급해할 필요는 없었다. 생각을 정리한 여재훈의 마음이 또다시 따뜻해졌다. “은서야. 아빠는 너무 기뻐. 오늘은 아빠라고 부르지 않아도 괜찮아. 부르고 싶어질 때, 그게 언제든 다시 불러줘.”“그리고 곽 대표. 은서가 이젠 나와의 관계를 알게 되었으니 나도 더는 기다릴 생각이 없어. 강성, 해성의 모든 영향력 있는 언론사를 불러 대외적으로도 은서가 내 딸이라는 사실을 공개할 거야.”여재훈이 곽승재에게 말했다. 그 말에 곽승재는 여전히 주저하며 대답했다. “여 대표님,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강성 쪽에서는 지금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어요. 여씨 가문의 실권을 되찾기 위해 뒤에서 몰래 적지 않은 세력을 집결했을 거예요.”“만약 이런 타이밍에 은서가 여 대표님 딸이라는 사실을 공개한다면 그쪽에선 반드시 더 맹렬한 공격을 퍼부으려고 하겠죠. 그럼 은서가 위험해져요.”“은서를 공개하기엔 지금이 제일 좋은 타이밍은 아닌 것 같아요.”곽승재는 또 다른 불안 요소를 고은서 앞에서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지금 기회를 엿보고 있는 것은 여씨 가문의 방지와 송민준뿐만이 아니었다. 그들 뒤에는 이 상황을 지시하고 있는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 같았다. 이번 납치 사건은 그저 경고에 불과했다. 단순히 여시은 혼자만의 능력으로는 이렇게까지 큰 일을 꾸밀 수가 없었다. 그러나 송민준의 반응을 봤을 때, 그는 이 일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듯 했다. 곽승재는 고은서의 신분이 노출되어 그녀가 더욱 많은 사람의 관심 대상이 될까, 그게 걱정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더는 고은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유전자 검사 결과에는 반전이 없었다. 여시은과 여재훈 사이에는 역시나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었다. 그 후로 여재훈은 그 일은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살았다. 대외적으로는 여시은을 친딸로 소개했고, 정말로 친딸처럼 키워왔다. “엄마의 거짓말을 믿으셨고, 여시은이 대표님의 아이가 아니라는 걸 아셨는데도 왜 엄마를 대신해 여시은을 기르셨어요? 지금까지 결혼도 하지 않으시고.”고은서의 눈은 이미 빨갛게 부어있었다. 그녀가 울먹이며 여재훈에게 물었다. “남들 눈엔 대표님을 갖고 논 여자잖아요. 그런 여자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으셨잖아요.”여재훈은 고은서를 향해 떨리는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내칠 수 없었던 고은서는 침대 옆에 반쯤 쭈그리고 앉아 그에게로 손을 올렸다. 여재훈이 고은서의 손을 소중하게 잡았다. “은서야, 난 그런 건 생각도 한 적 없어. 난 그냥, 더는 다른 사람은 사랑할 수 없다고 느꼈을 뿐이야.”“사람을 사랑할 마음을 잃었으니 외부의 압력이나 그 어떤 이유 때문에든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칠 수는 없었어. 그건 모두에게 불공평한 거야.”“하지만 난 그래도 하늘에 감사해. 이렇게 너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해줘서.”눈시울을 붉히는 고은서를 보며 여재훈이 그녀의 손등을 토닥였다. 고은서를 향한 여재훈의 말투엔 짙은 애절함과 사랑이 묻어있었다. “은서야, 난 정말 꿈에도 몰랐어. 나와 피가 이어진 내 딸이 있을 거라고는...”감격에 겨워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하는 여재훈의 모습에 고은서의 마음은 점점 더 아려왔다. 그녀 역시 친아빠를 만나게 될 줄은 죽어도 상상하지 못했었다. “은서야. 이제서야 널 찾은 날 용서해 줄 수 있겠니?”여재훈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고은서 역시 잠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건 대표님 잘못이 아녜요.”“그럼 날 아빠로 인정해 줄 수 있어?”여재훈의 낮은 목소리에는 긴장감과 희망이 가득 담겨있었다. 그 말에 고은서는 코끝이 시큰거리고 눈앞은 흐릿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